서대문형무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
(서울 舊 西大門刑務所)
대한민국 대한민국사적

서대문 형무소 전경
종목 사적 제324호
(1988년 2월 27일 지정)
면적 3,346.9㎡
시대 대한제국
소유 국유, 공유
주소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정보 문화재청 문화유산 정보

서대문 형무소(西大門刑務所), 서대문 감옥(西大門監獄)은 1907년(융희 원년) 대한제국을 점령한 한국통감부가 서울에 세운 형무소이다. 1908년 의병탄압을 위해 만들어졌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세워졌던 경성감옥을 시초로 하고 있으며, 1923년 서대문 형무소로 개칭되었다. 이후 해방 뒤에도 교도소, 구치소로 활용되다가 1987년 교도소 시설은 경기도 의왕시로 옮기고, 박물관, 문화재 형식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 그 건물에 독립 공원의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설치되어 있다. 대한제국 말기에 지어져 일제강점기 때의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광복 이후 정치적 격변과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의 고난과 아픔을 간직한 역사의 현장이다. 다른 이름은 서대문 구치소였다. 경성감옥으로 불리기도 한다.

역사[편집]

일제강점기[편집]

1938년 서대문 형무소 외곽
일제 강점기 당시 내부

한국통감부는 본격적 침략의 일환으로 미구에 있을 조선인 범죄자 및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조선인 애국지사들을 투옥하기 위하여 융희(隆熙) 원년(1907년) 감옥을 건축하였다. 일본인에게 설계를 맡겨 500여명의 기결수(旣決囚)를 수용할 수 있는 560여평의 목조건물을 지었다. 이때 전국의 감옥 총면적이 1,000제곱미터였는데, 새로 지은 감옥의 규모는 전체 감옥면적의 두 배가 넘었다.

1908년 10월 21일, 500년간 사용된 종로(鐘路)의 전옥서(典獄署)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기결수를 옮겨와 경성감옥(京城監獄)이라 하였다.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을 많이 투옥하면서 수용할 공간이 부족하자 1912년에 현재의 서울 마포구 공덕동 자리에 다른 감옥을 짓고 경성감옥이라고 이름을 붙이면서 9월 3일 구(舊) 경성감옥을 서대문감옥으로 개칭하였다. 1918년부터 서대문감옥은 형무관(刑務官)을 양성하는 곳도 겸하게 되었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 김좌진은 1911년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2년 6개월 형을 받아 수감. 1919년 삼일운동이 발생하였을 때 수감자의 수가 폭증했는데, 손병희유관순을 포함한 3,000명의 조선인이 한꺼번에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

1923년 5월 5일에는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로 개칭하였다. 서대문형무소는 1935년에 미결수(未決囚)를 구금하는 구치감(拘置監) 시설도 갖추었는데, 광복 직전인 1944년에는 2,890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일제 때 이 곳은 여느 감옥과는 달리 18세 미만의 한국 소녀수(少女囚)를 모두 수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3․1운동 때 유관순 열사도 구금되어 악형(惡刑)에 시달린 끝에 순국하였고, 전국의 10년 이상이나 무기형(無期刑)을 언도 받은 기결수가 수감되어 있었던 점도 특색이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을 비롯하여 수많은 애국시민과 학생들이 이곳에 투옥되었다.

광복 이후[편집]

광복 이후 9월초까지 대규모의 불령선인, 불순분자가 석방되었다. 그 뒤 미군정 치하에서도 구치소, 교도소로 이용되다가 1948년 8월 대한민국이 주권을 가지게 되면서 형무소를 대한민국 정부가 쓰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름이 1945년 11월 21일 서울형무소로 바뀌었는데, 이 시기에는 반민족행위자(反民族行爲者)와 친일세력들이 대거 수용되었다. 또한 좌익계열의 인사들도 체포되어 수감되었는데, 김원봉, 김성숙도 수감된 적이 있으며, 여운형도 수감된 적이 있었다. 1950년대에는 수감자의 70퍼센트가 좌익인사들이었다.

1961년 12월 23일서울교도소로 개칭되었다가 1967년 7월 7일서울구치소로 바뀌는 기간 동안에는 4․19혁명5․16군사정변 등과 같은 정치적 변동에 따라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기도 했다. 김두한1946년, 1947년, 1954년, 1958년, 1965년, 1966년, 1967년에 수감되었고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봉암과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도 이곳에서 사형을 당하였으며, 1975년 인혁당사건으로 사법살인을 당한 도예종 등 8명과,[1] 1982년 사진작가 죽음 연출 사건의 가해자인 이동식도 이곳에서 사형당하였다. 1987년에 서울구치소가 의왕으로 옮겨질 때까지 형무소의 역할을 계속했다.

이전 이후[편집]

도시가 발달함에 따라 서울구치소가 도심에 있는 것이 부적합하다고 하여, 1986년에 이전 계획을 수립하고 1987년 11월 15일에 경기도 의왕시(義王市)로 옮겼다. 당시 옥사(獄舍)는 모두 15개동이 있었으나 역사성과 보존 가치를 고려하여 제9ㆍ10ㆍ11ㆍ12ㆍ13옥사와 중앙사, 나병사(癩病舍)를 보존하였다. 1988년 2월 20일, 그 중에서 김구(金九), 강우규(姜宇奎), 유관순 등이 옥고를 치른 제10ㆍ11ㆍ12사의 감옥건물과 사형장이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1988년부터 공원조성공사를 시작하여 1992년 8월 15일 제47주년 광복절을 맞아 ‘서대문독립공원’으로 개원하였다. 1995년에는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으로 망루와 시구문 등을 원형대로 복원하고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의 공사를 진행하는 등, 서대문독립공원 사적지에 대한 성역화사업에 착수했다. 1998년 11월 5일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개관했다.

사진[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이승만 집권 때도 독립운동가 수감했다” 서울신문 2012-07-04 22면

참고 자료[편집]

바깥 고리[편집]

좌표: 북위 37° 34′ 28″ 동경 126° 57′ 24″ / 북위 37.57442° 동경 126.95663° / 37.57442; 126.956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