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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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
李丙燾

출생 1896년 9월 20일
조선 조선 경기도 용인군
사망 1989년 8월 14일 (92세)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별칭 아호는 두계(斗溪, 杜溪)
학력 서울대학교 대학원 인문과학 박사
직업 역사학자, 국사학자, 대학 교수
소속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종교 불교
배우자 조남숙
자녀 이미경(장녀)
이기령(장남)
이춘녕(차남)
이순경(차녀)
이태령(3남)
이동녕(4남)
이계희(3녀)
이운경(4녀)
이본녕(5남)
부모 이봉구(부)
나주 김씨 부인(모)
친척 조성근(장인)
조백현(처남)
윤치영(매제)
이병묵(형)
이병영(누이동생)
장욱진(첫째사위)
민헌기(둘째사위)
민복기(조카사위)
이재령(조카)
윤계경(조카며느리)
이병림(6촌 형)
이을남(6촌 여동생)
이어령(7촌 조카)
강인숙(7촌 조카며느리)
이웅무(손자)
이장무(손자)
이건무(손자)
이경무(손자)
이윤용(족척)
이완용(족척)
이항구(족숙)
이명구(족숙)
이병길(족제)
이병주(족제)

이병도(李丙燾, 1896년 9월 20일(음력 8월 14일) ~ 1989년 8월 14일)는 대한민국역사학자, 교육인, 대학교수로, 본관은 우봉(牛峰)이고, 호는 두계(斗溪, 杜溪)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사 편수회에서 수사관보와 촉탁으로 참여하였다. 이때의 경력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1]. 이병도가 조선사 편수회에 있을 때 한국사를 왜곡하고 식민사관을 정립하는데 기여했다는 주장이 있다.[2] 1934년, 일본인을 배제한 민간학술단체인 진단학회를 창설하여 한국사를 연구했다. 경성제국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학술원 회장, 진단학회 이사장,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 국방부 전사편찬위원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문교부 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국사대관(1948년)》을 비롯하여 한국의 역사와 사상, 문화에 관한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내무부장관 윤치영의 처남이며, 서울대학교 총장 이장무과 문화재청장 이건무는 그의 손자이다. 실증적·객관적 방법을 중시하는 실증사학(實證史學)을 추구하여 한국근대사학이 성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된다.[3]

생애[편집]

출생과 성장[편집]

원적지는 경기도 용인이며 조선 말기인 1896년 9월 20일(음력 8월 14일)에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천리(泉里)에서 충청도 수군절도사 이봉구와 부인 나주 김씨 사이의 오남으로 출생하였다. 12세가 되던 1907년 7월에 가족이 모두 한성부로 이주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부친이 작고하였다. 1907년 이종일 선생이 교장으로 있던 보광학교에 입학하여 이 학교가 재정난으로 폐교하는 1909년까지 수학하였다. 15세였던 1910년에 육군 참장 조성근의 장녀 조남숙과 결혼하였다. 같은 해 3월에 사립 중동학교를 졸업하였다. 1912년 3월 보성전문학교(현재 수송동 조계사 자리) 법과에 입학하여 1915년 3월에 졸업했다. 1916년 4월에 와세다 대학 사학급 사회학과(史學及 社會學科)에 입학하여 1919년 7월에 졸업하였다.

일제강점기 활동[편집]

일제 강점기 초반[편집]

1919년 10월부터 7년간 중앙고등학교 전신인 중앙학교에서 지리와 역사, 영어 담당 전임교원으로 근무했다. 야간에는 영어강습소에 출강하는 한편, 중앙학교의 전임교원이자 중동학교(야학) 교장인 최규동의 요청을 받고 1920년 4월 부터 1년간 이 학교에서 영어를 강의하였다. 1920년 7월에 김억, 남궁벽, 김혁로, 김영환, 나혜석, 민태원, 김찬영, 염상섭, 오상순, 황석우, 김원주 등 12인(후에 변영로 참가하여 13인)과 함께 동인지 폐허(廢墟)를 창간하였다. 폐허는 2호까지 출판되었다. 1921년 4월 부터 1년간 경신학교에서도 지리와 역사를 강의하였다. 1922년부터는 주로 한국사상사와 지리도참 등 사상사 연구에 전념하였다. 1925년 8월부터 1927년까지 조선총독부 산하의 조선사편수회에서 수사관보(修史官補)로 일하였는데 촉탁(囑託)으로 있는 금서룡(今西龍, 이마니시 류)을 도와 수사관보로 일했고[4], 이후 조선사편수회에서 퇴사하고, 임시직인 촉탁으로 해방까지 일하였다. 그러나 실제 조선사편수회 임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이병도의 조선사편수회 활동, 특히 촉탁으로의 활동은 사실상 이름만 올라 있었을 뿐, 실질적인 업무는 맡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5] 1933년 4월부터 1943년까지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로서 "조선유학사" 강의를 담당하였다.[6]

일제 강점기 후반[편집]

1934년 5월 7일에는 한국과 근린의 문화 연구를 목적으로 하여 이상백, 조윤제, 김상기, 이병기, 손진태, 송석하, 이희승, 김태준 등과 함께 진단학회를 창립했다. 황국사관에 젖어 있던 일본 사학자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한민족 고유의 국명인 ‘진(震)’과 단군의 ‘단(檀)’을 합해 ‘진단학회’로 하였다[6]는 진단학회 발기식겸 창립총회는 경성부 長谷川町(현 소공동 50번지) "푸라디아느" 다방에서 개최하였다. 같은해 11월 28일에 진단학보 창간호를 간행하면서 "삼한문제의 신고찰(1):진한급삼한고"라는 논문을 투고하고 그자신은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동하였다. 진단학회의 주소를 "경성부 계동 98번지" 자신의 집 주소지로 하였다. 또한 위의 진단학보 창간호에 "하멜표류기"를 번역하여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1935년 4월 17일 진단학보 제2호를 발간했다. 1941년 4월부터 3년간 이화여자전문학교 사학강좌 담당 강사로 출강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1943년 9월 진단학보 제14호의 발행을 끝으로 진단학회가 해산되었다. 그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1945년 광복으로 진단학회가 자진해산한 뒤에도 조선사편수회를 지켰다는 주장이 있다.[7]

광복 후[편집]

광복 직후[편집]

1945년 8월 해방과 동시에 진단학회를 재건하고, 임시교원양성소를 구성하여 국어와 국사 중등교원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친일 어용 역사학회인 조선사 편수회를 계속 존속시켜 나갔다. "국사교본"을 편찬하여 중등교과용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같은해 12월 동지들과 서지학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서지를 발간하였다. 같은 해, 일본인 교원이 전부 빠져나가고, 조선인만으로 운영되던 경성제국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1946년 9월 국대안의 제정으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의 교수로 임명되어 사학과의 창설에 기여하였다.

1947년 5월에 진단학보 제15호를 간행하였다. 그해 10월에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에 임명되어 1952년까지 그 일을 맡았다. 1952년 8월에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고려시대의 연구: 특히 도참사상의 발전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인문과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53년 9월 서울대학교 부속 박물관장에 임명되어 1954년까지 맡았다. 1953년 10월에 진단학회를 사단법인으로 재편성하여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교육자의 삶[편집]

1945년 경성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경성대학과 다른 관공사립전문학교들이 통합된 후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54년 5월에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이 되었다. 이후 1962년까지 서울대학교 문리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1950년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국방부 전사편찬위원장에 임명되어 4년간 복무하였다. 1954년에는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 되었고, 1959년에는 종신회원이 되었다. 1955년부터 1982년까지는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또한 1956년김창룡의 묘비명을 썼다.[8]

1957년 5월 동아문화연구위원회(Research Council of Havard Yenching Institute)의 이사가 되었다. 고려대학교 교우회 회장이 되었다. 1959년 3월에 학술원 종신회원이 되었다. 동아문화연구위원회 회장이 되었다. 1960년 4월 허정 과도내각의 문교부 장관에 취임하였다.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학생단체를 자율화시키는 한편, 대학 총학장의 교수직선제를 채택했다. 그해 8월에 사임하고 9월에 서울대학교대학원장 겸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같은 해 7월에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에 취임하였다.

1961년 4월에 국민대학 학장에 취임하였다. 196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1963년 6월 동아문화연구위원회 회장에 재선되었다. 7월에 율곡기념사업회 이사장에 피선되었다. 10월에 3.1문화상 심사위원장이 되었다. 미국 학술원창립100주년 기념식에 초청받았다. 하바드 엔칭 연구소의 초청으로 특강하였다. 12월에 미국역사학회 명예회원이 되었다. 1964년 4월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피선되었고 7월에 학술원 회장에 3선, 11월에 고려대학교 교우회장을 4선으로 맡았다. 1965년 4월에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였다. 9월에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원장이 되었다.

1967년 6월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68년 학술원 회장을 5선으로 맡았다. 조선왕조실록과 유학자들의 문집 등과 같은 고전의 국역 사업을 위해 현재 한국고전번역원의 전신인 민족문화추진위원회를 이희승, 김두종 등과 함께 발족하면서, 1965년 11월 6일 서울대학교 강당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회장에는 박종화가 추대되었고 최현배와 함께 부회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1970년 2월에 민족문화추진회를 재단법인으로 개편 발족하면서 이사가 되었다. 1970년 4월에는 '삼국유사영역소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이 되어 박준선, 성낙훈, 이팔범, 정인섭, 진인숙 등 위원과 함께 삼국유사 영역사업을 시작했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는 회보 '민족문화'를 1966년부터 간행했는데, 그 창간호에 '고전국역의 현황과 전망'이란 글을 게재하였다. 제4호에는 '율곡집', '사변론',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대한 해제를 게재하였다. 이후 1977년 5월 11일 고전국역의 종합심의기구인 교열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발행한 고전 번역서 중에는 '연려실기술1'에 대한 번역을 맡았다. 1982년 2월 22일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에 취임하여 1988년 4월 1일까지 재임하면서 고전국역자 양성과 고전국역 사업을 전개하였다. 고전국역후원회 결성하였고 민족문화추진회 사업의 장기발전을 위한 재정적 기반 마련하기 위해 정부에 재정지원을 촉구하여 1986년 7월 민족문화추진회 회관을 종로구 구기동에 마련하였다. '우리고전읽기운동'의 추진, 국역연수원에 일반인 대상의 한문강좌 개설, 고전국역상 제정, 한국문집총간 편찬의 업적을 남겼다. 1976년에 학술원 회장 8선이 되었고 이후 1980년까지 회장을 맡았다. 1981년에 학술원 원로회원으로 추대되었다. 1975년 10월 성균관대학교 이사에 취임하였다. 1984년에는 다산선생기념사업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말년[편집]

1980년에는 두계학술상이 제정되었다. 1981년 국정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85년 11월에 민족문화추진회 창립 20주년 및 "두계이병도 이사장구순기념 특집호"(민족문화 제11집) 간행되었다. '두계 이병도 이사장 연보 및 논저목록'에서 연보, 상훈, 저술, 논문 목록, 訟壽의 글을 실었다. 특집호 '권두언'에 '고전의 현대화 작업 20주년을 맞으며'를 게재했다. 1986년 5월 9일 고려대학교 교우회 '교우의 날' 행사에서 '자랑스러운 고대인'으로 선정되었다. 1986년 10월 9일 "단군은 신화 아닌 우리 국조 - 역대왕조의 단군제사 일제때 끊겼다"라는 제목으로 단군조선 실재의 가능성을 주장하였다. [9]1987년 10월 진단학회에서 편찬한 "이병도박사구순기념한국사학논총"을 봉정받았다.

1987년 11월 4일 총리공관에서 열린 만찬에 국무총리 김정렬의 초청을 받았다. 1989년 8월 14일 새벽,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한국병원에서 영면했다.

사후[편집]

1991년 10월 10일, 진단학회는 중진 역사학자 39인이 기고한 책 "역사가의 유향: 두계이병도선생추념문집(歷史家의 遺香: 斗溪李丙燾先生追念文集(일조각)" 을 발간하였다. 2008년 4월 29일 민간단체 민족문제연구소는 조선사편수회 경력 및 그의 연구활동을 근거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4776명에 포함하여 발표했다. 2005년 서울대 학생단체에서 발표한 ‘서울대 친일인물1차12인 명단’[10], 2005년 고려대 총학이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에 포함되어 있다 [11].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교육, 학술 부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12]

연구 및 평가[편집]

이병도는 1950년대 이후의 고대사학계를 이끌어 나갔다. 1955년에는 서울대학교 논문집에 〈남당고〉를 발표해 합좌제의 원형이 된 남당(南堂)의 실체를 밝히고, 고구려 국호 기원 문제를 해명하는 한편, 위만조선의 전개과정을 통해 위만이 조선계 인물임을 주장하였다. 또한 1930년대부터 시작한 자신의 연구 성과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한국사 ─고대편─》을 출간하여 고대사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였다.[13] 이후에도 고대사 연구뿐만 아니라 역사지리와 국가 기원 및 사회 제도까지 연구를 확대하여, 1976년에는 《한국고대사연구》를 출간하였다.

1977년에는 《삼국사기》에 역주를 달아 《국역 삼국사기》를 출간하고, 고대사·지리 도참과 함께 관심을 쏟고 있던 유학사를 연구한 성과는 1987년에 《한국유학사》를 간행하여 결실을 보았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실증주의 역사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실증적·객관적 방법을 중시하며, 철저한 문헌 고증에 입각한 연구 태도와 엄격한 학풍으로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문헌을 기본으로 하는 실증주의 역사학이 뿌리내리는 데에 큰 업적을 남겼다. 죽을 때까지 연구를 그치지 않았고, 왕성한 연구로 많은 저서와 다양한 논문을 남기기도 했다. 해방 이후의 고대사 연구에 독보적인 영향력을 끼치면서 대한민국의 사학계에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이병도의 제자들이 고대사학계에서 많은 활약을 하면서 일부 재야사학계 인사 및 일반인들은 그의 후학이 한국사학계를 장악하였다고 비판하기도 한다.[14]일제 강점기 조선사편수회에서 수사관보와 촉탁으로 근무하여 일본 관학자를 도운 경력이 친일행위로 비판받았으며, 광복 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할 때 일본에서 황국사관을 신봉하고 신도를 대표하는 대학으로 유명한 덴리 대학교에 가서 신도의 도복을 입고 예식에 참석했다는 증언이 제기되어 비판을 받았다.[15]

1980년대 이후 일부 재야사학계 인사들[누가?]이 벌인 '국사찾기운동'에서는 이병도와 그의 사관을 두고 실증적인 학풍으로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왜곡하고, 반도중심의 식민사관으로써 단군 조선을 신화화했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16]

주요 저서[편집]

  • 《朝鮮史》, 조선총독부, 1922년 ~ 1938년, 총 35권, 총 24,409페이지
  • 《역주 삼국사기》, 박문서관,1943년[초판발행 박문문고 2책: 1책 342(?)쪽, 2책 479쪽]1945, 1956년(춘조사 재발행), 1965년(동국문화사,468쪽), 1977(을유문화사,국역본 736쪽, 원문교열본463쪽).
  • 《조선사대관》, 동지사, 1948, 1949(수정3판,501쪽).
  • 《고려시대의 연구: 특히 도참사상을 중심으로》, 을유문화사, 1948, 1986(개정판, 아세아문화사, 446쪽).
  • 《새국사 교본》, 동지사, 1948(208쪽)
  • 《한국사(고대편)》(김재원 공저), 진단학회 편, 을유문화사, 1959, 1965년 수정판(730쪽). 1980년 16판(70쪽, 부록 색인 31쪽, 역대왕실계보외 도표).
  • 《한국사(중세편)》진단학회 편, 을유문화사,1961
  • 《하멜표류기(역서)》, 1939년 박문각(초판), 1946(재판), 일조각 1954.
  • 《중등사회 생활과 우리나라의 생활 (역사)》, 일조각, 1949(210쪽)
  • 《국사대관》, 1954, 1955(보문각, 613쪽, 색인 6쪽), 1958, 1959.
  • 《국사와 지도이념》, 삼중당(90쪽), 보문각, 1954.
  • 《이병도수필집 두계잡필(斗溪雜筆)》, 일조각, 1956(519쪽).
  • 《중학교사회생활과 중등국사》, 을유문화사, 1956(204쪽).1963년판(212쪽), 1964년판(212쪽)
  • 《역주 삼국유사》, 동국문화사, 1956, 1962(재판, 468쪽)1965(3판, 468쪽), 1976년(광조출판사 수정판), 2000년(명문당,468쪽), 2000년(조선일보,누리미디어 제작 CD)
  • 《고등학교 사회과 국사》, 일조각, 195년(197쪽)
  • 《자료한국유학사초고(資料韓國儒學史草稿)》, 서울대 문리대사학연구실 유인물, 1959(철필 등사본).
  • 《중국어판 한국사대관(許宇成역)》, 正中書局, 1963.
  • 《한국사대관》, 보문각, 1964, 1969(589쪽).
  • 《내가 본 어제와 오늘》, 신광문화사, 1966(289쪽).
  • 《인문계고등학교 국사》, 일조각, 1969(274쪽).
  • 《나의 인생관: 풀뭇간의 쇠망치》, 휘문출판사, 1971, 1974(수정3판, 436쪽).
  • 《한국고대사회와 그 문화》, 서문당, 1973.
  • 《한국사회와 그 문화》, 서문당, 1973.
  • 《율곡의 생애와 사상》, 서문당, 1973.
  • 《두실여적(斗室餘滴)》,박영사, 1975.
  • 《수정판 역주화선 제주도난파기》, 일조각, 1975.
  •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2001(818쪽).
  • 《일어판 한국고대사연구》, 學生社, 1980.
  • 《한국의 유학사상 퇴계집/율곡집(한국사상전집2,공역)》, 삼성출판사, 1981.
  • 《한국사대관》, 동방도서, 1983(538쪽).
  • 《성기집(成己集)》, 정화출판문화사, 1983(318쪽).
  • 《한국사의 이해》, 삼성출판사, 1984.
  • 《한국유학사략(韓國儒學史略):한문본》, 아세아문화사, 1986(322쪽).
  • 《한국유학사》(한국유학사략 국역본), 아세아문화사, 1987(506쪽).
  • 두계이병도박사화갑기념사업위원회, 《이병도박사화갑기념논총》, 일조각, 1956(729쪽).
  • 두계이병도박사구순기념한국사학논총간행위원회,《두계이병도박사구순기념한국사학논총》,지식산업사,1987.
  • 진단학회 편,《역사가의 유향: 두계이병도선생추념문집》, 일조각, 1991(336쪽).
  • 《한국상고사입문》, 최태영 공저, 고려원, 1989.

상훈[편집]

가족 관계[편집]

일설에는 할아버지가 이완용이라는 주장이 항간에 떠돌고 있으나, 손자 이건무의 해명에 따르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18].[19] 이장무에 의하면 "이완용과는 500년 전에 갈라진 집안으로, 아무 상관이 없다"며 "동생(이건무)이 국립중앙박물관장을 하고 있는데 이미 다 검증받았던 사실이며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국립중앙박물관장을 하겠냐"는 것이다.[19]

일부 재야 인사들은 이병도가 이완용의 관뚜껑을 태웠다는 사실을 들어 이완용의 후손임을 숨기기 위한 행위라고 주장한다.[20] [21] 그러나 이병도의 증언에 따르면 이병도가 이완용의 관 뚜껑을 불사른 이유는 "매국노의 관 뚜껑을 박물관에 전시하는 것에 반대"하였기 때문이었다.[22]

윤치영, 윤보선 가문과의 관계[편집]

이병도는 4대 대통령 윤보선의 사돈이다. 윤보선의 가문과는 이중으로 사돈관계를 형성했는데, 이병도는 윤보선의 삼촌 윤치영의 처남인 동시에 윤보선의 아버지 윤치소의 사돈이었다.

윤보선의 여동생이자 윤치소의 넷째 딸 윤계경(尹桂卿, 1918년 2월 13일 ~ ?)은 이재녕(李宰寧, 1918년 5월 4일 ~ )과 결혼했다.[17] 이재녕은 이병도의 형 이병묵(李炳默)의 아들로[17], 수군절도사 이봉구(李鳳九)의 손자이다.

윤치소의 동생 윤치영이병영(李丙暎, 1900년 ~ )과 결혼했는데, 이병영수군절도사 이봉구(李鳳九)의 딸, 이병도, 이병묵의 여동생이었다.

이병도, 이병묵윤치소의 동생 윤치영의 처남인 동시에 윤치영의 형인 윤치소의 사돈이었다. 동시에 이병도, 이병묵의 6촌 형 이병림은 윤치소, 윤치영의 매제, 매형이 된다. 윤치소의 여동생이자 윤치영의 둘째 누나인 윤정숙(尹貞淑)은 이병도, 이병묵의 6촌 형 이병림(李丙琳)과 결혼 했다. 또한, 윤치오의 아들인 윤승선은 이병도의 6촌 여동생인 이을남과 결혼했다.

학력[편집]

명예 박사 학위[편집]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4776명 명단 발표
  2. 이병도사관을 총비판한다, 이용림, 월간 자유, 1976.7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4. 조선총독부직원록, 1926년, 1927년
  5. 연속심포지엄 「일본에 있어 조선연구의 축적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 6 회, <조선사편수회의 사업을 중심으로>, 조선연구월보 14, 일본조선연구소,1963, ,
    "다만 진단학회의 주요 멤버의 한 명인 이병도씨가 청구학회의 멤버이기도 했습니다만 이름뿐이었습니다. 이씨는 우리들이 가기 전부터 조선사편수회의 수사관보로 있었고, 후에는 촉탁이 되었습니다만, 어떤 것도 이름뿐이었습니다." 32페이지, 스에마쓰 카즈요시(末松保和)의 증언 중에서
  6. 김덕형 언론인, "한국의 명가(근대편) 이병도 (한국어)", 《주간조선》, 2011년 7월 18일 작성. 2012년 1월 10일 확인.
  7. 이병도사관을 총비판한다, 이용림, 자유, 1976.7
  8. 상세한 것은 김창룡 참조. 정지환 (2004년). 《대한민국 다큐멘터리: 독립기자 정지환의 역사추적기》. 인물과사상사
  9. 조선일보 1986년 10월 9일 호
  10. 《오마이뉴스》 (2005.4.7)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247516 서울대 일제청산위, 1차 친일인물 12명 발표)
  11. 《한겨레신문》 (2005.3.28) 고대 총학 ‘친일행적’ 10명 발표
  12. 혼돈의 해방공간서 자유민주주의 초석을 놓다 동아일보 2008년 8월 22일자
  13. 문창로, 〈고대사연구 60년의 동향과 과제〉, 《한국고대사연구》 제40권, 한국고대사학회, 2005년 12월, 351~390쪽.
  14. 오마이 뉴스 정지환 기자 (2006년 6월 15일). 친일파 후손, 서울대 총장 임명 옳은가?. 2008년 8월 16일에 확인.
  15.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김용섭
  16. 네티즌들, 이장무 서울대 총장후보 반대운동 펼쳐 - 오마이뉴스
  17. 윤치호 일기(윤치호, 역사비평사, 2002.05.15) 189페이지
  18. 김재범 기자 (2005년 11월 15일). 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장, 본지 보도에 대한 반론. 브레이크뉴스.
  19. 성연진ㆍ오연주 기자 (2006년 6월 22일). 서울대 총장후보 이장무 일부서 이완용후손 주장. 헤럴드 경제.
  20. 민족문제연구소 (2008년 5월 13일). 매국노 이완용의 관 뚜껑은 어디로 사라졌나. 2008년 8월 14일에 확인.
  21. 오마이 뉴스 정지환 기자 (2006년 6월 15일). 친일파 후손, 서울대 총장 임명 옳은가?. 2008년 8월 16일에 확인.
  22. 진단학회 編, <실증사학과 민족사학> - 두계선생과 정홍준씨의 대담,《역사가의 遺香》pp.273~276, 일조각, 1991

참고문헌 및 링크[편집]

전 임
최재유
제7대 문교부 장관
1960년 4월 28일 ~ 1960년 8월 22일
후 임
오천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