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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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출생 1851년 2월 23일(1851-02-23)
조선 조선 충청도 회덕군
사망 1894년 3월 28일 (43세)
청나라 청나라 장쑤 성 상하이
사인 암살
국적 조선 조선
별칭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筠), 별호는 고우(古遇), 시호는 충달(忠達)
직업 정치인
종교 유교불교
자녀 슬하 1남 2녀[1]
부모 생부 김병태, 생모 은진 송씨, 양부 김병기, 양모 전주 이씨, 풍양 조씨
친척 8촌 김형규, 9촌 김좌진

김옥균(金玉均, 1851년 2월 23일 ~ 1894년 3월 28일)은 조선정치인이다. 인조 때 우의정으로 지낸 문충공 김상용의 10대 손이다. 김병태의 장남으로 7세에 당숙 김병기의 양자로 입양되어 한성에서 성장하였다. 강화도 조약 이후 조사 시찰단이 되어 일본에 다녀와 개화 문물을 체험한 후 개화사상에 관심을 가져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개화당을 조직해 개혁을 꾀했다.

양아버지 김병기를 따라 강릉에서 율곡 학파의 서당에서 학문을 접하고 1870년 초부터는 유대치, 박규수 등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이동인 등을 만나 개화사상을 갖게 되고, 1872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고 1879년에 이동인을 파견하여 일본의 정세를 파악한 뒤 1881년 이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의 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왔으며 일본 유학생 파견과 군사 견습생 파견운동을 주도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승정원우부승지·참의교섭통상사무·이조참의·호조참판·외무아문협판 등을 역임하며 개화파의 확산에 힘썼다. 1883년 6월에는 서재필, 서재창, 이규완 등 청년들을 일본으로 유학시켜 군사 훈련을 받게 했다.

1884년 초부터 박영효 등과 정변을 기도, 그해 12월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만에 갑신정변 실패한 이후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피신하여 망명생활을 지냈으나, 여러 차례 테러위협에 시달리다가 청나라로 망명했다. 1894년 청나라 상하이 호텔에서 홍종우에 의해 암살당했다. 사후 시신은 부관참시되어 8도에 효수되었으나 1895년 개화파 내각이 들어서면서 복권되고 순종 때 충달공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그는 당대의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급진개화파로서 1884년 초부터 갑신정변을 계획, 주도하였다.[2] 그는 1883년(고종 20년) 4월 독도에 주민을 입주시켜 독도 유인도화 정책을 고종에게 건의하여 시행케 했다.

일본식 이름은 이와다 슈사쿠(岩田周作[3])로, 갑신정변 실패 후 망명하기 전 천세환의 선원 스치 후치츠로(十藤十郞)이 지어준 것이다. 충청남도 출신.

목차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김옥균은 1851년 2월 23일조선 충청도 회덕군에서 안동 김씨 김병태(金炳台)와 부인 은진 송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생부 김병태는 공주군 정안면에 살고 있었으므로 공주군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4]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의 생가는 그의 외삼촌인 송인식(宋寅植)의 집이었다. '옥균'이라는 이름은 그의 외모가 '백옥같이 곱고 희다'고 해서 짓게 되었다고 한다.[5] 생부 김병태호군을 지냈다.

유력한 세도가 출신으로[6] 6세 때 5촌 당숙인 부사를 지낸 김병기(金炳基)의 양자로 들어갔다. 원래 조선사회에서 맏아들은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양자로 보내지 않는데, 당시 김병기가 일문 내에서는 권세가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 김병태의 결정에 따라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간 것이다.

수학과 소년기[편집]

청년 시절의 김옥균

어려서부터 학문뿐 아니라 문장·시·글씨·그림·음악 등 예능부문에 재주를 발휘하였다. 그러나 그의 양가에서는 이런 것은 잡기라며 성리학 수학을 권고하였다. 11세가 되던 해에 양아버지 김병기가 강릉 부사로 부임하여, 양아버지를 따라 임지인 강원도 강릉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그곳의 송담 서원에서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5] 율곡 이이의 사당이 있던 송담 서원에서 그는 율곡 이이의 학통을 받은 스승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6세 때 중앙으로 전임하는 양아버지를 따라 한성부로 올라온 후 더욱 면학에 정진하였다. 1870년경 김옥균은 과거에 응시하기 직전에 박규수의 문하에 출입하였고, 또 한성부 북쪽에 있는 양반 거주 지역인 북촌(北村)에 드나들던 중인 출신 한의원 유대치(劉大致)를 통해 개화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박영효, 유길준 등 다른 청년들과 함께 1870년 전후부터 박규수의 문하에 출입하여 영환지략, 해국도지 등을 접하는 한편 개화사상을 배우고 발전시켜 개항론에 대해 확신하게 되었다. 이어 서재필, 윤치호 등의 청년들과도 교분을 쌓았다. 그밖에 한성 봉은사의 중 이동인을 만나 그로부터 지구본지도, 망원경 등을 접하였다. 1872년(고종 10년) 문과 알성시(謁聖試)에 장원으로 급제했다.[4] 그해 바로 권지 성균관학유를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에 보임되었다.

청년기[편집]

개화 사상 전수[편집]

일찍부터 유대치를 만난 그는 관료생활 초반부터 실학자인 박규수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였던 박규수(朴珪壽) 한때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는데, 그는 1866년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 중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변에 나타나 행패를 부리자 이를 공격하여 불살랐던 인물이다. 그러나 미국과 서구의 우수한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그는 개항을 해야 된다는 주장과 동양 삼국 외에도 더 발전된 미지의 문명국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박규수는 관직이 의정부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민씨 세력이 득세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젊은 청년들에게 신문물과 개화 사상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박규수가 관직을 은퇴한 뒤에도 김옥균은 박규수의 재동 집을 자주 찾아갔다. 재동에 있던 박규수의 집 사랑방은 그의 문하생들과 젊은 문인들의 시국담론의 장으로 활용되었다. 1876년까지 13년 가까이 박규수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유대치는 중인 출신의 한의사였지만 한성부의 고관 댁에 자주 출입하여 인망이 있었고, 일찍부터 역관(譯官) 오경석(吳慶錫), 승려 이동인(李東仁) 등과 같은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고, 선진 문물들을 소개한 책들을 탐독하여 오래전부터 개화의 중요성에 눈을 뜨고 있었다. 또한 박규수 등과의 신분을 초월한 유대관계와 유학에도 소질이 있어 양반가의 젊은이들이 그의 문하생이 되기도 했다.

유대치는 자신의 이념과 지식을 혈기왕성한 청년들에게 전하여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고 불렸으며 중국어 통역관이던 오경석 그는 중국을 여러차례 방문하면서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미지의 문명국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고,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여 중국에서 돌아올 때마다 이 미지의 문명국에서 쓴 책들과 새로운 지식들이 담긴 책들을 구해 와서 친구들에게 전해주었다. 오경석은 자신과 같은 뜻을 가진 인물을 찾던 중 유대치를 찾았고, 김옥균은 유대치의 문하를 출입하다가 오경석을 만나게 되었다. 오경석이 베이징 등에서 입수, 가져 온 책들은 유대치를 통해 김옥균과 같은 청년들에게 전해졌다. 김옥균과 청년들은 봉건적 신분 구조를 벗어나 유대치, 오경석 등과 스승과 제자로서 지내왔다. 후일 갑신정변 직전에 그가 찾아가서 거사를 자문했던 인물 역시 유대치였다.

관료생활 초반[편집]

김옥균 초상화

초임 관리로 임명된 김옥균은 당시 보고 느꼈던 조선 말기의 현실은 미몽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는 형상으로, 이를 극복하고 조국을 수렁에서 건져 올리자면 신사상에 의한 일대 혁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5] 관직에 나오기 전부터 접하여 알고 있던 선진 외국의 모습과 개혁 사상은 이 즈음 더욱 확고한 신념으로 자리잡게 되어 나라의 개화에 뜻을 같이하는 인물들과 깊은 교류를 하게 되었다.[5]

그는 조선이 나갈 길은 외국과 폭넓은 수교를 통해 문호를 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박규수의 문하에 들며 그는 청나라에서 왔다는 신문물에 적극 관심을 갖게 된다. 이 때부터 그는 정치적 결사로서의 개화당의 형성에 진력하여 다수의 동지들을 모아 정기적으로 모임을 구성하고 지도자가 되었다. 후에 회원수가 증가하자 그는 이를 충의계라 하였다.

1873년(고종 10년) 최익현 등의 보수적 유학자들을 앞세운 명성황후고종의 견제로 흥선대원군은 실각한 그 다음해에 김옥균은 24세의 나이로 홍문관 교리를 거쳐 관리로서 출세의 길이 열려 옥당 승지(玉堂 承旨)·정언(正言)을 거쳐 호조참판을 지냈다.[5] 1874년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에 임명되었다.

개화파 단체 조직[편집]

1876년 2월 일본과의 굴욕적인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체결 이후, 김옥균 등과 개화파(開化派) 청년들은 나라의 자주 독립과 실력 양성, 개혁을 추진 또는 건의할 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그는 개화를 추진할 단체 조직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조직을 착수해 나간다. 우선 새로운 단체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신분을 초월하거나 신분에 구애되지 않아야 된다고 주장하였다.[7]

1876년 2월 김옥균은 동지들을 통해 단체 조직을 설명하고 사회 각 계층의 동지들을 모아 '충의계(忠義契)'라는 비밀 지하 조직을 만들었다. 충의계는 조선시대 내내 존재하고 있던 신분제도의 틀을 뛰어넘어 개혁과 개화에 뜻을 둔 청년들의 모임으로서 조직하되, 칠서의 변, 홍길동사건 등 외부의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비밀 계의 형태로 조직을 구성하였다.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박영교(朴泳敎), 박영효, 서재필(徐載弼) 등이 회원이었고, 유대치, 오경석, 이동인, 윤웅렬 등이 이들 단체를 외곽에서 지원, 자문하였다. 지도부는 김옥균과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박영교, 박영효 등으로 구성되었다.

한성부 봉원사 소속의 승려인 개화승(開化僧) 이동인(李東仁)은 '일본통'으로 알려진 인물로, 처음에는 유대치와 교류하다가 1870년유대치의 소개로 그의 문하에 출입하던 김옥균을 만나게 되었다. 한자와 일어에 능했던 이동인은 일본 혼간사(本願寺)의 부산 별원을 왕래하면서 일본의 승려들로부터 입수한 만국사기(萬國事記)와 세계 각국의 풍물 사진을 청년 관리들에게 전해 주었다. 이동인은 일본에 가보길 원했으나 승려였고, 김옥균은 그의 일본행을 적극 주선, 건의하여 1876년(고종 16년) 조선정부의 사신 자격으로 일본에 보내 신문물을 견학하고 돌아오게 했다.

이동인은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1880년 6월에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을 방문한 김홍집(金弘集)과 만났는데, 이동인의 식견에 감동한 김홍집의 추천으로 조선조정에도 연이 닿게 되었다. 김옥균은 곧 자신도 일본에 가고자 했고, 80년말 이동인이 귀국하자 그가 입수해온 서적과 물건들을 선물로 받았다. 김옥균은 1881년일본에 갈 것을 결심하고 고종에게 여러번 건의하여 설득한다. 이때 이동인 역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에 동행하기도 하였으나 출발 직전에 왕궁에 들렀다가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다. 당시에는 이동인의 실종에 대하여 척화파(斥和派)들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신문물 수용과 일본 왕래[편집]

신문물 견학 건의[편집]

1877년 김옥균은 의관 유홍기를 통해서 역관 오경석이 가져왔던 서적을 입수하여 탐독하였고, 박규수·유홍기·오경석 등으로부터 개화사상을 습득하였다.[6] 유홍기는 김옥균에게 봉원사의 승려 이동인을 소개해 주었는데, 1879년 김옥균은 박영효와 함께 이동인의 여비를 대주어, 이동인은 그들이 제공한 돈으로 일본에 건너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를 포함한 일본 인사들을 만나고 돌아왔다. 이때 이동인은 정보와 함께 일본에서 구한 각종 책들과 문물을 김옥균과 유홍기에게 제공하였다. 그 뒤 김옥균은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과 함께 개화당을 이루어 그 지도자가 되었다.[6]

김옥균은 개화파에게 우호적이었던 김홍집(金弘集), 어윤중(魚允中), 김윤식(金允植) 등과 동지적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그들을 통해 국왕과 측근들에게 개화의 필요성을 설득, 호소했다. 그는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려면 부패의 척결과 낡은 인습을 타파하고, 신분차별을 완화할 것과, 문호를 열어 서구의 미지의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새로운 지식과 문물을 도입하여 나라를 근대화하는 길이 청나라나 외세로부터 자주독립할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하였다.

1879년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을 일본에 파견해 일본의 근대화 실태를 알아보게 하였다. 그리고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파견을 주선하도록 하였다. 국내에서 혁신의 뜻을 가지고 있는 관리들과 청년들을 모아 개화당의 세력확장에 진력하였다. 그는 스스로 일본의 근대화 실정을 시찰하기 위해 1880년 비밀리에 일본 도쿄를 다녀온 뒤 이후 자신도 신사유람단의 한 사람으로 자청해서 일본을 다녀왔다.

일본 방문과 신문물 시찰[편집]

신사유람단 견학[편집]
일본 체류 중 처음 양복을 입고 찍은 사진

1881년 초 신사유람단에 동행하여 선진 문물 도입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로 한 이동인이 갑자기 의문의 실종을 당했다. 이에 김옥균은 1881년 12월에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일본을 시찰하기로 결심했다. 이때 김옥균은 생가와 양가의 재산과 주변의 후원금 등을 모아 환전, 일본돈 2만 엔의 자금을 마련해서 건너갔는데, 이것은 일본의 산업 시설을 자세히 살펴보고, 일부 제품들을 구입해서 조립, 분해하고 원리 등을 터득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먼저 신사유람단 일행은 나가사키(長崎)에 도착했고 이들은 일본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각자 흩어졌다. 김옥균은 나가사키 현의 조선소, 제련소, 탄광, 금광 등을 시찰하고 채굴기계의 존재와 금속 가공원리를 파악하였다. 이어 김옥균은 오사카(大阪)로 건너가서 군수기지 공장과 조폐국을 둘러보고 물자 운송용 차량의 존재를 접했고, 지폐 주조 기술을 목격하였다. 이어 교토(京都), 고베(神戶)를 거쳐 1882년 3월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에서는 일본의 개화파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집에서 4개월 정도 머물면서 일본의 발전상을 관찰하고, 그와 담론을 나누었는데 조선인 청년들의 애국심에 감격한 후쿠자와 유키치는 특히 김옥균과 서재필, 박영효, 윤치호 등과 수시로 서신을 주고받았다. 김옥균은 귀국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후쿠자와를 통해 일본 정계와 재계의 여러 인물들을 만나 그들의 조선에 대한 시각과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진의를 파악하려 하였다.

1881년 음력 12월에 일본에 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그는 박정양, 홍영식 등과 함께 일본 제국을 시찰했고, 일본의 힘을 빌려 국가제도의 개혁을 꾀할 결심을 굳혔다고 여겨진다. 당시 조선의 개화파들을 비롯한 아시아의 개혁파들에게 메이지유신으로 발전한 일본은 하나의 개혁의 본보기였기 때문이다. 김옥균은 동행하였던 이상재와도 교우를 쌓았다. 일본의 조야(朝野)를 시찰하는 동안, 조선 사회 개혁의 필요를 절감했다.

임오군란 직후[편집]

1881년 음력 12월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의 진전 과정을 살펴보고 후쿠자와 유키치, 이노우에 가오루 등 일본의 대표적인 정치가들과도 접촉하여 그들의 정치적 동향 등을 접하였다. 그리고 도쿄와 오사카, 나가사키 등으로 들어오는 네덜란드영국, 미국의 기계와 증기선, 전차, 자동차 등을 목격하였다. 이어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로 건너가 문물을 시찰하던 중 1882년(고종 20년) 6월 조선 본국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나가사키에서 배를 타고 황급히 귀국하였다.

상경하였을 때는 왕비는 피신한 상태였다. 제1차 일본 방문을 중도에 마치고 귀국한 직후에 그는 《기화근사 箕和近事》를 저술하였다. 그는 일본이 동양의 영국과 같이 되어가는 것을 보고 조선은 동양의 프랑스와 같이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만들어야 나라의 완전 독립을 성취하여 유지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정치 전반에 대경장개혁(大更張改革)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임오군란이 수습된 뒤 그는 승정원우부승지, 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에 임명되고 이후 이조참의를 거쳐 호조참판, 외아문협판(外衙門協辦) 등에 임명되었으며 개화당 인사를 조정에 심기 위해 노력하였다.

제2차 수신사 파견에 참여[편집]

1882년 7월 임오군란 후 사후(事後) 대책과 제물포 조약(濟物浦條約)에 의한 수신사 박영효 일행이 일본에 파견되자 그 역시 박영효 일행과 함께 건너가게 해줄 것을 건의하여 허락을 받아냈다. 수신사에는 철종의 부마(駙馬)인 박영효, 김만식(金晩植), 홍영식, 서광범 등 여러명이 임명되었다. 김옥균은 일본에서 귀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민영익과 함께 수신사의 고문이 되어 다시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수신사의 고문 겸 부사로서 일본에 갔을 때 메이지 유신 후의 일본의 조야(朝野)와 교제하는 동안 본국 개혁 혁신의 필요를 절감했다.

일본은 수신사 일행을 국빈으로 대접하고 극진한 환영을 하여 개화파들로 구성된 젊은 조선인 사신들을 친일본 내지는 지일본 정객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에게 처음에는 환대를 하다가 나중에는 돈을 차관으로 빌려주는데, 일본외무대신 이노우에는 개화파 관료들에게 차관(借款) 17만엔을 주선하면서 고종의 신임장을 가져온다면 더 많은 차관을 구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8] 당시 수신사 일행은 빌린 17만엔의 차관 중 5만엔은 일본에 대한 배상금 1회분으로 지급하고, 나머지는 수신사 체류 경비 등으로 모두 일본에서 사용되었다. 이들은 결국 얼마 빌리지도 못하고 귀국하게 된다.

귀국 직후[편집]

1882년 11월 수신사 일행은 새로 부임하는 일본 공사 다케조에와 함께 귀국하였다. 그러나 김옥균은 홀로 남아서 일본 정세를 더 살펴보고 협조와 지원에 대한 가능성을 집중적으로 알아보기로 하고 양해를 구했다. 그는 국빈 자격으로 있음에도 일본인 고관들의 집에 의탁하지 않고 여관에 투숙하면서 막일을 하며 생활비와 활동 자금을 스스로 모았는데, 그가 다른 수신사 일행보다 6개월 정도 더 일본에 머무르면서 얻게 된 중요한 정보는 일본이 주류()과 담배, 주요 해산물과 그리고 교통 시설 등에 세금을 부과하여 국가 재정을 늘린다는 것과, 그것으로 육군, 해군의 확장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었다.[9]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군세 확장이 일본의 국방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을 도와주기 위해서라고 감언을 흘리고는 차관을 주선할 용의가 있다는 말을 거듭 강조하며 사신 일행을 회유하였다. 그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일본이 개화파의 조선 개혁운동(改革運動)을 지원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조선을 침략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는 미치지 못했다. 1882년말 그는 박영효 등 수신사 일행에게 자신은 일본에 남아서 할 일이 있다며 수신사 일행을 먼저 귀국시키고 서광범(徐光範) 등과 함께 일본에 더 체류하면서 본국으로부터 유학생을 선발해 보낼 것을 상소하여, 유학생들을 일본으로 파견시킨 뒤 이들 유학생들의 신원을 보증하여 일본의 여러 학교에 입학시키고 1883년(고종 20년) 3월 나가사키에서 배편으로 귀국하였다.

신분제 폐지와 사회개혁론[편집]

그는 두 차례에 일본을 방문한 뒤 양반신분제도의 폐지, 문벌의 폐지, 신분에 차별받지 않는 인재의 등용, 공개 채용 시험의 도입을 건의하였다. 이어 그는 사회 전반의 개혁정책을 추진하여 국가재정의 개혁, 실제 농민에 대한 토지 부여를 주장하였다. 또한 산업 장려를 통한 근대화를 역설하여 공장제도에 의거한 근대 공업의 건설, 광업의 개발, 선진 과학기술의 도입과 채용을 주장하였고, 상공 부문에서도 상업의 발달과 회사제도의 장려, 화폐의 개혁, 관세 자주권의 정립과 탐관오리의 이중과세와 무단착취를 근절하기 위해 세금 영수증 제도의 도입을 건의하였다. 그밖에도 그는 철도의 부설과 기선 해운의 도입, 전신에 의거한 통신의 발전, 인구 조사의 실시, 농업과 양잠의 발전, 목축의 발전, 임업의 개발, 어업의 개발과 포경업 도입 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일본에 도입된 서양식 학제를 도입한 신식 학교를 널리 설립하고 신교육의 실시를 주장했다. 자주 국방력 양성과 지방관의 경찰권, 법관권한을 분리하여 경찰제도의 개혁, 형사행정과 사법권 개혁을 할 것을 촉구하였고, 도로의 개선과 정비, 위생의 개혁, 종교와 신앙의 자유 허용, 조선의 정치적 중립화 및 영세 중립화 등도 주장하였다.

정치 활동[편집]

개화파 활동[편집]

개혁정치 활동[편집]
김옥균의 친필 서신

그러나 일본이 재정을 늘린 것으로 군비에 투입하는 것을 목격했고, 정한론의 주장까지 일본 개화파에서 일부 나온다는 사실을 접하자 그는 이를 반신반의하면서도 일본이 미구에 조선을 침략할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을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등에게 알린다. 1883년(고종 20) 3월 귀국과 동시에 동남제도개척사겸관포경사로 임명되어 울릉도로 부임하였다.

1883년(고종 20) 4월 동남제도개척사겸관포경사에 임명되어 울릉도와 독도에 이주민들을 정착시켰는데, 당시 이주민의 대다수가 남해안과 호남 출신 어부들이었다. 이들은 울릉도와 인근 우산도(현, 독도) 주변에 고기잡이를 나가면서 우산도를 '돌섬'이라는 뜻의 호남 방언 '독섬'이라 호칭하였다. 이는 그대로 독도의 어원이 되었다. 5월 인천항을 통해 한성으로 입경하였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과 함께 국가의 개혁방안을 토론하였으며, 그들과 함께 개화독립당을 조직하였다.

개화파의 주요 인사가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사이 청나라를 뒤에 업은 위정척사파와 성리학자 집단, 민씨 척족 세력 등이 권력을 독점하고 개화파를 외직으로 축출했다. 귀국한 뒤 박영효는 한성 판윤을 거쳐 광주 유수로 좌천되었고, 김옥균은 포경사(捕鯨使) 겸 동남제도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에 임명되어 해안가의 외직으로 좌천된다.

이후 유학생을 받아 일본 제국의 여러 학교에 입학을[6] 주선하였다. 이 기간 중에 저서 《치도약론》을 집필하였는데, 도로 정비에 관련된 내용으로서 치도국 설치, 기술자 양성, 기계 구비, 오물 처리법 등을 포함한 17개 세목의 내용을 논하였고, 이는 한성순보에 게재되었다.[6] 특히, 김옥균은 조선의 종주국인 청나라의 내정간섭에 매우 비판적이었고, 조선의 자주권을 확립하려면 국방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1883년 김옥균은 고종을 설득하여 서재필과 그의 동생 서재창을 비롯한 17명의 청년들을 일본으로 보내 근대식 군사기술을 배워오도록 하였다.

민씨 척신, 척사파 세력과의 갈등[편집]
조일수호조약 연회기념도, 건너편 가운데가 김옥균, 왼쪽 끝의 무관복을 입은 이는 홍영식
(안중식 작, 1883년)

1883년 음력 3월 16일 동남개척사(東南開拓使)가 되어 포경(捕鯨) 업무를 겸하였다.[10] 조영하(趙寧夏) 등은 청나라의 소개로 입국시킨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정부의 재정 고문이 되었는데, 자기를 초빙해 준 수구파의 입맞 맞추기에만 급급하였고 당초 목적인 신문물 소개는 뒷전이었다.

1883년 음력 2월부터 파탄 상태에 이른 조선조정의 재정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논의될 때, 묄렌도르프는 수구파와 결탁하여 당오전(當五錢)의 주조를 주장하였는데, 김옥균은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당오전당백전의 발행은 이미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때 발행했찌만 물가만 인상되고 상거래의 혼선을 야기하였다. 김옥균은 당오전은 실질적인 재정 확보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면서 백성들의 고통만 가중시킨다며 반대했다. 민영익의 집에서 벌어진 토론을 통해 김옥균은 묄렌도르프를 논리적으로 몰아붙였는데, 이 일을 계기로 묄렌도르프와도 반목, 증오하게 된다.

김옥균은 고종에게 당오전 발행은 안 된다고 거듭 주장했으나, 결국 조정을 압도적으로 장악하던 수구파의 의사대로 당오전 발행이 관철되었고, 물가는 인상, 폭등하였다. 또한 당오전의 발행 이익금과 국가 재정은 수구파와 탐관오리들이 차지하면서 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당오전은 당시까지 통용되던 상평통보(常平通寶)의 5배에 달하는 액면가로 상평통보 5전과 동일한 액면가로 가치가 정해졌지만 시중에서는 상평통보와 동일한 액면가로 통용되고 있었다.[11] 수구파의 화폐 주조 사업은 실패했고 그런데 중앙관리들과 지방의 관리들은 조세를 상평통보로 거둬들이고서 국고에 상납할 때는 당오전의 액면가로 납부하고 그 차액을 착복하였다.

김옥균은 당오전 발행 이전에는 엔화에 대한 조선 화폐의 가치가 1 대 2.5 정도였는데, 당오전이 재발행된 이후에는 가치가 1대 8로 급락하여 무역 수지에도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다는 점과 그는 그야말로 잘못된 통화 팽창 정책으로 국가 경제가 악화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였지만 민씨 일파와 수구파, 묄렌도르프는 자신들의 정책 과오를 오히려 김옥균과 개화파가 발목을 잡는 것으로 돌려 얼버무리려고 했고,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1883년초 김옥균과 연락이 닿던 일본 외무성의 주요 인사로부터 일본영사관을 통해 국왕의 위임장이 있으면 일본에서 외채(外債)를 추가로 상환해줄 수 것이라는 소식을 전달받았다. 그동안 수구파, 성리학파의 방해와 비난 여론, 재정 부족과 정치 자금 부족 등으로 일본청나라 등으로의 유학생 파견과 군사 양성 사업이 차질을 빚게 되면서 김옥균은 일본 외무성 관리의 연락을 받고 바로 대궐로 들어가 고종에게 황폐해진 국가 재정 확보를 위해서는 외채를 도입해야 된다고 설득하여 위임장을 받아내는데 성공한다.

일본의 입장 변경과 차관도입 실패[편집]

김옥균, 1884년

1883년 6월에 고종의 위임장을 받아든 김옥균은 새 희망을 갖고 서재필, 서재창 등 50명에 이르는 유학생들을 인솔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자신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사이 수구파와 뭴렌도르프 일파가 음모를 꾸미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김옥균이 고종으로부터 위임장을 받았다는 사실을 궁에 심어둔 궁녀들로부터 듣게 된 묄렌도르프와 수구파는 백방으로 방해 공작을 펼쳤다. 수구파 대신들은 먼저 고종의 생각을 바꾸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시장의 상인들을 시켜서 개화파가 정치자금을 모아서 사적인 목적으로 유용하려 든다는 루머를 날조하였다. 또한 6월 중순 묄렌도르프일본 공사 다케조에에게 연락하여 김옥균이 일본에 가져가는 위임장은 김옥균이 위조, 날조한 것이라는 거짓말을 전했다. 다케조에는 이것을 곧이곧대로 믿고 본국 외무성에 보고하여 일본에서는 김옥균의 방문을 부정적으로 보게 된다.

김옥균 일행이 일본에 도착하여 유학생들을 보낸 뒤 김옥균이 이노우에를 만날 때에는 이미 다케조에를 통해 묄렌도르프의 루머가 전달된 뒤였다. 이를 생각하지 않던 김옥균은 외무대신 이노우에를 통해 차관 교섭을 벌였으나 이노우에는 그를 의심하고 부정적으로 대했다.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감지한 김옥균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차관 도입을 일단 뒤로 미루고, 일본에 주재하고 있는 외국 기업체와 민간 은행을 통해 외채를 얻을 계획을 짰다. 상사와 은행들은 일본 정부의 보증서를 받아올 것을 요구하였고, 차관 도입을 위한 일본 방문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차관 도입 실패는 수구파의 방해 활동도 있었지만, 당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책 변화 역시 작용했다. 일본이 개화파를 지원했던 것은 자신들이 쉽게 조선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개방적인 인사들이 조선 정부의 실력자가 되어야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런데 명성황후는 개화에 호의적이었고 위정척사파와 흥선대원군 세력의 견제를 위해 부분적으로 개항하여 일본의 조선 진출을 묵인해 주고 있었다.

결국 김옥균과 박영효 등의 자주성을 염려하던 일본측은 개화파 정부가 조선에 들어서면 도리어 진출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한 일본은 개화파의 입지가 강화되도록 조선에 차관을 빌려 주느니 그 돈으로 군비 확장에 더 주력해 경쟁 상대인 청나라를 무력(武力)으로 제압하는 것이 더 일본에 유익하다 보았다. 그런데 묄렌도르프 등의 연락이 일본에 닿으면서 이들은 김옥균 일행을 불신하게 된다.

미국행 고려와 단념[편집]

김옥균 등은 일본에만 의지한 것은 아니었다. 김윤식에 의하면 구미에도 기대하였다 한다. 그는 정변 이전에 이미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과 같이 '배화 존양지론 (排華尊洋之論)'을 논하고 말마다 자주를 칭하였다 하며(김윤식, 『속음청사』, 565쪽), 1883년 3월 3백만 원 차관 교섭 문제로 세 번째로 도일하였는데, 교섭이 여의치 않자 서광범과 함께 미국에 가려 하였다.[12] 그러나 시일이 촉박했던 그는 미국행을 단념하게 된다.

개화파 청년 일본유학 주선[편집]

김옥균은 1883년 5월 서재필, 서재창, 이규완, 신응희, 정행징(鄭行徵), 임은명(林殷明), 유혁로, 신중모(申重模), 윤영관(尹泳寬), 하응선, 정난교 등을 일본으로 유학보냈다. 이 중 서재창, 이규완, 유혁로 등은 도야마 하사관학교에 입학한다.

이들이 도야마 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은 김옥균이 개화파의 영향 아래 있는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시키기로 하였기 때문이다.[13] 김옥균은 개화파 청년들의 한 부류를 일본 육군 도야마 학교에 입학시켜 군사지식과 기술을 배우게 했다. 그리고 나머지 청년들은 전공 학교에서 정치, 경찰, 우편, 관세, 재정제도와 관련된 실무지식을 전문적으로 배우게 하였다. 군 계통의 유학은 1883년 정란교 등이 도야마 학교에 입학한 데서 시작되었지만, 이들 유학생들은 학자금이 점차 바닥이 나 1년 후 귀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13] 이 무렵 박영효광주유수로 있으면서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사관생도 신복모, 이규완, 유혁로, 정난교 등을 귀국시켜 신식 군대의 양성에 착수했다.[14] 인원은 600명으로[14], 이규완, 정난교 등은 병조 조련국 교관의 한 사람으로 병력 훈련을 담당했다.

갑신정변 전후[편집]

일본 차관도입 실패[편집]

수구파와 묄렌도르프의 계략과 일본의 입장 변화를 생각하지 못한 김옥균은 일본 정부가 1년 전에 약속했던 차관 제공에 당연히 협조해 줄 것으로 믿었지만 실패하자, 낭패와 분노를 삭이면서 스스로 여비를 모아 1885년 2월 어쩔 수 없이 빈손으로 귀국하게 된다.

1885년 2월 귀국 직후 그는 일본 영사관에 방문했다가 민씨 정권과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가 다케조에에게 허위 사실을 보고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분개한다. 그러나 아무런 수단이 없었던 김옥균은 조용히 일본영사관을 나와 고종에게 귀국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김옥균이 아무런 성과 없이 귀국하자 그동안 차관 도입을 기대하던 개화파는 실망했고, 동시에 개화파가 벌여 놓았던 사업은 모두 중지되었다.

박영효가 추진하던 병력 양성 사업과 신식 무기 구입은 자금 부족으로 중단되고 박영효, 서재창 등이 양성해 오던 병력은 한규직, 윤태준의 군대로 편입되어 결국 민씨 정권의 군사적 기반만 강화시켜 주었다. 박영효광주 유수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수구파 타도 계획[편집]
김옥균

또한 조선 최초의 언론사이자 최초의 신식 출판소인 박문국(博文局)에서 발행한 한성순보(漢城旬報)도 청나라 군사들이 민가에 행패를 부린 일을 보도했다가 외교문제로 말썽이 되어 일본인 기술자들이 추방된데다가 자금 부족으로 경영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15] 외채 도입 실패를 추궁하는 민씨 세력의 압력과 비난이 계속되었고 자객의 침투로 신변의 위협까지 느낀 김옥균은 관직을 사퇴하고 한성부 동쪽 외곽에 있던 집에 칩거하고 말았다.

1884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군인 양성을 위한 300만 원의 차관을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개화 사업에 필요한 차관을 얻으려 하였으나, 민비 세력과 뮐렌도르프의 방해로 차관 모집에 실패하고 빈손으로 귀국하였다.[6] 이때부터 민비 세력과의 갈등과 알력이 극에 달하게 되어 민씨 정권 타도를 획책하였다.

민씨 척족 수구파들은 공공연하게 "김옥균을 죽여라." 하고 주장하면서 노골적으로 신변에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다. 위정척사세력 역시 김옥균을 외세에 개항을 추구하여 잘못된 것을 유입하려는 존재로 인식하고 맹공격을 가했다. 그런데 동지로 믿고 있던 민영익(閔泳翊)은 1885년 유럽과 미국 시찰을 하고 그해 4월에 귀국하여 누구보다도 외국의 선진 문물을 직접 접했다. 그러나 가문의 이익과 개화파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민영익이 자신의 가족인 민씨 척족 정권과 개화파 사이를 오락가락하게 되자 김옥균 등은 당황해하면서도 무력 정변을 계획하게 된다.[16]

갑신정변 전야[편집]

민씨 정권과 위정척사파 양측의 공격과 청나라의 압력, 뭴렌도르프 등의 외국 언론에 개화파에 대한 공격 보도 등으로 사방이 궁지에 몰리게 되자, 김옥균은 점진적이고 순리적인 방법을 통한 개혁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일부의 급진 개화파와 함께 반정에 의한 정권 장악과 개혁실현 계획을 세웠다.

조선 내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의 저항으로 민란의 조짐이 보였고, 관공서 습격과 동학교도들의 교조 신원과 포교 허용 요청, 천주교의 포교 허용 요구와 충청남도 일대에 개신교의 유입과 확산, 전염병과 흉년, 유랑민이 발생하는 등 수구파 정권을 흔들고 있었다. 1884년 8월 청나라베트남의 종주권을 두고 프랑스와 충돌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청불전쟁이 발발하였고 청나라는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한 가능한 병력을 모두 차출하여 베트남 전선에 투입하였다. 이 당시 조선에 체류중이던 청나라의 조선 주둔군 병력도 절반으로 감군되어 있었다. 김옥균은 정변을 말하면서도 머뭇거렸으나 조선 국내외의 안팎의 정세는 개화파들의 결심을 더욱 재촉하였다.

우선 김옥균은 개화파 내부에서 동원 가능한 군사력을 확보했는데, '충의계'에는 40여 명의 비밀조직원이 있었고, 미국과 일본에 유학 갔다 돌아온 사관 생도들도 서재필을 비롯하여 30여 명이 있었다. 개화파 동지인 함경남도 남병사 윤웅렬(尹雄烈)이 이끄는 1500여 명의 함경남도병영의 군사가 있었고, 비록 수구파 군영으로 편입되었으나 박영효(朴泳孝)가 양성하던 병력도 어느 정도 동원할 수 있었다. 거사를 위한 병력은 자체 조달이 가능해졌으나 수구파의 배후에 있는 청나라 군사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적인 분위기로 협조가 어려운 점 등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일본군의 협조가 필요했다. 청군이 병력이 줄었으나 아직 조선국내에는 1500명이 남아 있었고, 만주에 주둔하던 병력도 존재하여 개화파의 군사력으로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김옥균은 일본 측의 의향을 알아보기 위해 일본 공사 다케조에를 만나 묄렌도르프 등의 무고를 설명한 뒤 차관 교섭에 비협조적이었던 일에 대해 항의하고 조선의 국정 개혁 필요성을 다시 역설하였다. 이때 다케조에는 차관 교섭 건은 루머에 속한 자신의 실수였음을 시인하면서 앞으로는 김옥균의 활동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다짐했다. 김옥균은 달라진 다케조에의 태도에 안심하였으나 전일의 행태를 생각해 보면 일본 사람을 좀처럼 신뢰할 수가 없었다. 며칠 후에 박영효를 보내 다시 다케조에의 마음을 떠 보았는데, 다케조에는 오히려 "청나라는 장차 망할 것이니 귀국의 개혁 지사들께서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마시오."라고 답하였다. 다케조에의 의심 많고 소극적이던 태도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변화에 김옥균은 의구심이 아직 가시지는 않았지만, 달라진 다케조에의 행동에서 일본 측의 정책 변화를 읽고 거사를 계획대로 추진하기로 결심한다. 당시 일본은 청나라와 프랑스 간의 전쟁으로 인해 청나라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을 이용해 조선의 개화파를 부추기고 청나라와 내통한 민씨 정권을 정권을 붕괴시킨 다음, 그 틈에 개화파를 이용하거나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의 계획을 알아탠 김옥균은 그 점을 거사에 역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거사 직전[편집]

그해 9월 추가 병력 모집과 물자 조달 등의 거사준비를 하였다. 김옥균은 거사 10월 초 다케조에를 다시 만나서 이른바 '삼책(三策)'을 알려 주고 협조에 대한 확답을 받아 냈다. 삼책이라 함은 첫째, 충의계를 중심으로 한 개화파의 단결을 통하여 정변을 계획대로 추진시키고 둘째, 고종을 설득하여 정변을 승인받아서 거사 명분을 확립한 다음 셋째, 청군의 간섭이나 방해 책동은 일본군이 막아 준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측의 동의를 얻어낸 김옥균은 거사 5일 전인 10월 12일에 대궐 안으로 들어가 고종과 단독으로 대면하여 세계의 정세와 청나라와 결탁한 민씨 정권의 매국적 작태를 설명하고, 민씨 일파가 요직을 장악하여 왕을 꼭두각시로 여긴다는 점을 지적한 뒤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새 정부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김옥균의 역설에 감동한 고종은 마침내, "국가의 명운이 위급할 때, 모든 조처를 경의 지모에 맡기겠다."는 지시를 은밀히 내렸다.

고종의 동의를 얻는데 성공한 김옥균은 윤치호를 통해 미국 공사에게도 곧 정변이 있을 것임을 알리고 협조를 부탁하여 대내외적으로 거사를 위한 준비 작업을 마쳤다. 아직 완전히 미덥지 않은 일본 측에게는 거사 일자를 정확히 알리지 않았지만, 홍영식의 우정국(郵政局) 낙성식 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동지들과 준비를 마무리했다. 이때 다케조에로부터 일본 정부의 정확한 지시를 받은 후에 거사를 일으키자는 요청을 받았지만 김옥균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1884년 10월 17일 오후 6시 정동에 신축한 우정국 낙성식에는 우정국총판 홍영식(洪英植)의 초청으로 많은 내외 귀빈의 참석하여 낙성 축하연을 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김옥균은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일본 공사관의 시마무라 서기관에게 이날 거사를 일으킬 것임을 은밀히 알려서 일본군 동원을 준비시켰다. 김옥균의 연락을 받은 서재필은 바로 병력을 집결, 이동시켰고, 우정국 입구에 매복시켰다.

연회가 거의 끝날 무렵 우정국 북쪽 건물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화재가 발생했다. 가장 먼저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던 민영익이 매복하고 있던 개화파 무사들에게 칼을 맞고 한쪽 귀가 떨어진 채 피투성이가 되어 허겁지겁 다시 들어오자 연회장 안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때를 틈타 김옥균,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은 급히 우정국을 빠져나와, 매복하고 있던 서재필 휘하 사관 생도들을 다시 경우궁으로 이동시키고 김옥균은 교동에 있는 일본 공사관으로 가서 일본군의 출동을 확인한 후에 대궐로 향했다.

갑신정변과 삼일천하[편집]

10월 17일 저녁 김옥균 등은 창덕궁 금호문 앞에 당도하여 김봉균(金奉均), 신복모(愼福謀) 등이 거느리고 온 40여명의 병사들을 문 밖에서 지키게 하고는 미리 내통하고 있던 수문군이 문을 열어주어 바로 입궐했다. 또한 윤경완(尹景完)이 인솔하는 무장병력 50여명에게는 전문 앞을 지키게 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세 사람은 고종이 있는 침전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고종에게 우정국에서 변란이 일어난 것과 그 원인이 민씨 척신 세력의 음모와 부패, 민생의 피폐때문임을 알리고 형세가 위급함으로 경우궁으로 피난할 것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사태의 자초지종을 다지던 고종 내외도 침전 동북쪽 통명전 부근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들려오자 놀라서 그들을 따라나섰다.

고종 일행이 경우궁에 도착하자 박영효는 다케조에와 함께 일본군 병사 200명을 경우궁 주변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서재필이 지휘하는 사관 생도 13명은 국왕의 거처 바로 앞을 지키면서 출입자를 통제하도록 조치한 후에, 왕명으로 중신들을 불러들여서 일단의 민씨 척신 세력을 척살해 버렸다. 그날 밤 군사들은 척신계와 수구파 인사들은 윤태준(尹泰駿), 이조연(李祖淵), 한규직(韓圭稷), 척신인 민영목, 조영하, 순명효황후의 친정아버지 좌찬성 민태호 등과 거사에 동조하기로 했다가 변절한 내시 유재현 등을 살해하였다.

10월 18일 척신 정권 지도자들을 처형한 개화파는, 18일 새벽 신정부의 발족을 알리고 인사를 단행하였다. 고종의 사촌형 이재원(李載元)을 영의정에, 홍영식(洪英植)은 좌의정에, 윤웅렬형조판서, 박영효전후영사, 서광범좌우영사, 서재필병조참판, 신기선(申箕善)은 이조참판, 승정원도승지박영교로 내정하여 내각을 장악하였다.

김옥균은 재무와 내무를 관장하는 호조의 차관인 호조참판을 맡아 개혁에 필요한 재정의 조달을 담당하기로 했다. 내각 구성을 마친 새 정부는 14조항의 강령을 발표한다.

  • 첫째, 청에 잡혀 간 대원군을 환국시키고 청에 대한 조공을 폐지한다.
  • 둘째, 문벌을 폐지하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한다.
  • 셋째, 조세 제도를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가난한 백성을 보호하여 국가 재정을 늘린다.
  • 넷째, 내시부를 없애고 그 중에서 우수한 자는 관직에 등용한다.
  • 다섯째, 탐관오리 중에서 그 죄가 극심한 자는 처벌한다.
  • 여섯째, 백성들에게 빌려 주었던 정부 소유의 환자미는 모두 탕감하고 받지 않는다.
  • 일곱째, 규장각을 폐지한다.
  • 여덟째, 빠른 시일 내에 순검(巡檢)을 두어 치안에 주력한다.
  • 아홉째,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폐지한다.
  • 열번째, 유배되거나 구속되어 있는 자는 형을 감해 준다.
  • 열한번째, 4개영을 1개영으로 통폐합하되, 그 중에서 장정을 봅아 근위대를 설치한다.
  • 열두 번째, 일반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하고 기타 모든 재정 담당 관청은 폐지한다.
  • 열세 번째, 대신과 참찬은 매일 합문 안에 있는 의정소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 열네 번째, 육조 이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은 없애되, 대신과 참찬이 이를 결정하게 한다.

그밖에 개화파 혁명 정부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개혁안을 발표했다.

  • 첫 번째, 전 국민은 단발한다.
  • 두 번째, 외국 유학생을 선발하여 파견한다.
  • 세 번째, 궁내성을 별도로 설치하여 왕실 업무와 일반 국무를 구분한다.
  • 네 번째, 국왕을 '성상(聖上) 폐하(陛下)'로 칭해서 타국의 황제와 동등하게 예우하며 대조선국의 군주로서 존엄을 유지한다.
  • 다섯 번째, 지금까지의 관제를 폐지하고 내각에 여섯개의 부서를 둔다.
  • 여섯번째, 과거제도를 폐지한다.
  • 일곱번째, 내외의 공채(公債)를 모집하여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한다.

그러나 지지기반이 취약한 내각은 척신 정권이 청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반격을 가하자마자 그대로 몰락하게 된다.

정변의 실패와 은신[편집]

이후 '인민평등', '문호개방' 등 개혁을 단행할 것을 주장하였으나[4] 오히려 역심을 품는 것으로 곡해되었다.

1884년 보수파인 사대당의 민씨 일파를 후원하는 청나라가 안남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틈을 타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사대당의 중심인물을 숙청하는 등 정변을 주도하여 당시 신정부의 호조참판 겸 혜상공국 당상에 취임했다. 그러나 정변이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삼일천하로 끝나자 다케조에 신이치로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여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의탁하였다.

명성황후 민씨는 경우궁으로 옮긴 다음 날 민씨 척신 세력으로부터 민영목, 조영하, 민태호 등의 암살 소식과 민영휘의 부상 소식을 접했다. 수구파의 일원인 전 경기감사 심상훈(沈相薰)을 통해 사건의 실상을 알게 된 민씨 세력이 청나라 군대를 개입시켰고, 곧 만주에 주둔중인 청나라 군사를 끌어들였다. 민비는 계속 거처가 너무 협소하다면서 창덕궁으로 환궁하자고 고종에게 닦달하였다. 넓은 창덕궁과 달리 경우궁은 좁아서 경비하기가 쉽기 때문이었는데 왕후 민씨가 이를 트집잡고 나온 것이었다. 왕후의 불만에 고종은 할 수 없이 조금 더 넓은 계동궁으로 옮기도록 하였으나 왕후는 계속해서 환궁을 요구했다. 그러나 명성황후와 민씨 일파가 청나라와 내통한 것을 인식하지 못한 김옥균 등이 외부 수습에 바쁜 틈을 타 민씨는 경비를 책임지고 있던 다케조에를 졸라서 다시 환궁하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옥균은 다케조에에게 항의했지만 다케조에는 "창덕궁으로 환궁해도 경비에는 문제가 없다."며 큰소리를 쳤다. 이미 왕후의 강력한 요구로 번복이 어렵게 되자, 박영효 등은 일본군의 무라카미 중대 병력과 함께 국왕 부처를 호위하여 창덕궁으로 인솔하였다. 그러나 해질 무렵 대궐 문을 닫으려고 하자, 선인문 밖에까지 당도한 청나라 지원군이 방해하여 양측 사이에 교전이 발생했다. 박영효는 강경하게 대응하자고 주장하였은아 김옥균과 다케조에는 타협안을 하기로 결정, 궐문을 닫지 않고 궐 밖은 청군이 경비를 서고 궐 안은 일본군이 지키는 것으로 청군 측과 합의했다.

10월 21일 아침이 되자 다케조에는 돌연히 태도를 바꾸어 일본군은 형편상 오랫동안 조선의 궐 안에 머무를 수가 없다고 하면서, 그날 안으로 철수하겠다고 통보했다. 갑작스러운 다케조에의 태도돌변에 당황한 김옥균은 바로 일본공사관으로 달려가 다케조에와 담판을 벌여서, 개화 정권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 때까지 3일간 동안 철병을 미루고, 개혁 사업의 추진을 위한 자금 조달에 협조한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그러나 다케조에는 철병을 강행한다.

21일 오전 청나라 제독 우주유(吳助維)는 도성이 평안하다는 편지가 고종에게 전달되고 바로 위안 스카이(袁世凱)가 600여명의 병사를 대동하여 국왕과의 접견을 요청했는데, 김옥균 등은 위안 스카이의 접견은 허락하나 청나라 군사들이 대궐로 들어오는 것은 안 된다고 주장하여 물리쳤다. 그러나 그날 오후 위안 스카이는 전 우의정 심순택(沈舜澤)에게 청군 출동을 요청하게 하여 청나라군의 군사적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억지로 확보한 다음, 마침내 5백명으로 구성된 한 부대는 우주유의 지휘 아래 선인문 쪽으로, 8백명으로 편성한 다른 부대는 위안 스카이 자신이 직접 지휘하여 돈화문에서 창덕궁 방향으로 진격하여 궁궐 외곽을 지키고 있던 일본군과 청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당시 창덕궁을 에워싸고 공격했던 인원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 전 병력과 수구파가 장악했던 좌우영 소속 조선 군졸들에다가, 개화파가 일본과 결탁하여 국왕을 연금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한 일반 백성들까지 가세하여 엄청난 수의 대부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궁궐을 수비하던 병력은 일본군 200명과 개화파 자체 동원 병력 800명 정도로 그 수에서 이미 결판이 나 있었으며, 더구나 개화파의 병력은 변변한 무기조차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았다.

도피 과정[편집]

청나라 군사와 조선인 가담자들과 개화파, 일본군이 교전하는 사이 왕후 민씨는 청나라군 진지를 통해 이미 북관왕묘로 옮겨갔고, 고종도 뒤따라가려고 했기 때문에 신정부 주요 인사들은 할 수 없이 일본군과 함께 이를 호위하여 나다가다 도중에 각자의 판단에 따라 방향을 달리하게 되었다. 홍영식, 박영교 등과 사관 생도 7명은 고종과 함께 북묘로 가고, 김옥균은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변수(邊洙), 이규완(李珪完) 등과 나머지 사관 생도는 다케조에를 따라 일본 공사관으로 향했다. 홍영식 등은 개화파 중에서 비교적 온건한데다가 위안 스카이와 친분도 있고 척신 중에도 가까운 사람들이 많아서 국왕을 따라가면 신변은 안전할 것으로 믿었으나 그들은 북묘에 도착한 직후 그들 모두는 참혹하게 살해되고 말았다.

한편 일본 공사관에서 하룻밤을 지새운 김옥균은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가 옷을 변복하고 숨은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변수(邊樹) 등 9명과 함께 인천주재 일본 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으로 제일은행지점장 기노시타의 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묄렌도르프가 추격대대대를 이끌고 오자, 기노시타의 배려로 일본인 옷으로 갈아입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10월 20일 오후에 다케조에와 함께 일본군의 호위 아래 제물포에 정박중인 천세환에 승선했다.

홍영식, 박영교를 처형한 척신 세력은 일본군함이 정박한 인천으로 사람을 급히 보냈다. 척신 세력인 심순택의정부영의정으로 하는 새로운 내각 구성을 마치고 김옥균 등을 '오적'으로 규정하여 인천에 사람을 보내 다케조에 신이치로에게 김옥균 등의 신병을 인도해 달라고 요구했다. 다케조에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일행에게 배에서 내릴 것을 요구했다.척신세력의 추적과 다케조에의 배신으로 자칫 배에서 내몰리는 상황에 빠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신의없는 행동에 분노한 천세환 선장 스치 가츠자부노우의 소신으로 일행은 목숨을 구하였다. 10월 21일 아침 인천항에 정박 중이던 스치 가츠자부노우(十勝三郞)의 지도세마루 호에 일본군사들과 함께 승선했다.

일본 망명 생활[편집]

피신과 일본 망명[편집]

10월 20일 추격대를 이끌고 온 묄렌도르프는 외무독판 조병호(趙秉鎬)와 인천감리 홍순학(洪淳學)을 대동하고 지도세마루 호에 와서, 선장 스치 가츠자부노우에게 국적(國敵) 일행이 있으니 내줄 것을 요구했다.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바로 지도마세루 호로 올라와 일행에게 내리라고 했다. 김옥균 등은 궁지에 몰렸으나 이때 지도세마루 호의 스치 가츠자부노우 선장이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신의 없음을 비난하고, 이 배에는 그런 사람이 없으며, 함부로 수색할 시 외교문제로 비화시키겠다고 호통쳐서 쫓아냈다. 스치 가츠자부노우 선장은 '내가 이 배에 조선 개화당 인사들을 승선시킨 것은 공사의 체면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이분들은 공사의 말을 믿고 모종의 일을 도모하다가 잘못되어 쫓기는 모양인데,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배에서 내리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도리인가? 이 배에 탄 이상 모든 것은 선장인 내 책임이니 인간의 도리로는 도저히 이들을 배에서 내리게 할 수 없다.'라고 다케조에 신이치로를 꾸짖고는 김옥균 일행을 배 밑의 석탄 창고 밀실에 숨겨 주었다. 스치는 심순택이 보낸 병사들에게 '그런 사람들이 탄 사실이 없다.'하고 극구 부인했고, 추적자들도 외국 선박을 수색할 수가 없으므로 돌아섰다. 이들의 망명 사건은 1942년 7월 조용만의 단편 소설 배 안에서의 소재가 되었다.

일본 망명 생활 중의 김옥균

스치 가츠자부노우 선장의 구명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살아난 김옥균 일행은 10월 24일 지도세마루 호가 인천항을 떠날 때까지 4일간 배의 밀실에 은신하였다. 10월 27일 인천항을 출발한 지 3일 후에 배가 나가사키에 도착했다가 도쿄로 옮겨가 예전의 연고에 의지하여 오랫동안 후쿠자와 유키치의 집에서 지냈다. 그러나 폐를 끼칠 수 없다며 셋집을 얻어 합숙하며 피곤한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조선 정부는 끊임없이 망명지에 있는 그들을 죽이려고 했는데 갑신정변 때 발생한 일본의 피해를 보상하기 위한 한성 조약을 체결하면서 김옥균 등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으나, 일본이 정치범은 국제법상 인도하지 않는다며 송환을 거부했다. 그 사이 개화파의 가족들은 모조리 붙잡혀 처형되었다.

김옥균의 생부 김병태는 즉시 충청남도 천안군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옥사하고, 동생 김각균(金珏均)은 대구 감영에 투옥되었다가 옥사하였다. 생모 송씨와 여동생은 독약을 먹고 자살하고 아내 유씨부인은 7세된 딸과 함께 충청남도 옥천군의 노비로 분배된다. 살아남은 그의 첩 송씨는 옥중에서 음행을 하였다고 한다.

일본이노우에 가오루는 자서전에서 배의 선원 쓰지 후치주로(十藤十郞)가 나가사키에서 김옥균 일행과 헤어질 때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회상했다.[3] 스치 후치주로는 이들이 조선 이름으로 생활하다가 자객에게 발각될 것이라 하여 이들에게 기념으로 일본식 이름을 지어주었다.

당신들이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게 되면 조선 이름을 가지고는 살기가 불편할 것이오. 그러니 내가 기념으로 이름을 지어 주고 싶소.[3]

그리고는 김옥균은 이와다 슈사쿠(岩田周作), 박영효는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岐永春), 이규완은 아사다(淺田良), 유혁로는 야마다 유이이치(山田唯一), 정난교는 나카하라 헤이키치(中原雄三)라고 지었다고 한다.[3] 이 때의 사정이 이노우에 가오루의 자서전에 기록돼 있다.[3] 이와다 슈사쿠(岩田周作)라는 가명 외에도 그는 이와타 상와(岩田三和)라는 가명도 사용했다.

망명 생활 초반[편집]

망명 직후 그는 간사이 지방에 머물렀으며 이때 야마토의 히가시히라노초(東平野町)에 살고 있는 야마구치 신타로의 집에 잠시 기거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야마구치의 어머니 나미와 관계를 맺어 다음 해 남자 아이가 태어났다.[17]

10월 27일 김옥균은 주변의 만류에도 일본 외무대신 이노우에를 만나려고 하였으나 불우한 처지의 망명객으로 이용가치가 없어진 그를 이노우에는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 일본의 배신에 분노한 김옥균은 갑신정변의 경위와 일본 측의 관여를 만천하에 알리겠다고 나섰으나 일본측에서는 조선에 송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일본1885년 4월 청나라 톈진 조약(天津條約)을 체결하고 조선에 주둔중인 군사를 공동으로 군대를 철수하기로 한 후 조선 문제에서 당분간 손을 떼었다. 불우한 정치망명객인 김옥균 일행을 일본은 부담스러워했고, 김옥균은 울분과 울화를 겨우 다스리고 거처에 은신하며 자신의 개혁운동을 회고하는 갑신일록(甲申日錄)을 쓰면서 연명하였다.

일본 망명 중에도 그는 조선으로 쳐들어가 민씨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21세기 한국의 언론인인 김충식은 자객 밀파의 원인을 그가 스스로 자초했다고 보았다. "자객 밀파의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옥균에게도 귀책사유가 있다. 성격이 급한 옥균은 일본에 와서도 명성황후 정권을 전복하려 절치부심했다.[18]"는 것이다. 그는 후쿠자와의 도쿄 집에서 두어 달 머물다 요코하마의 외국인 거류지 야마테초로 집을 얻어 나갔다. 이 지역은 ‘바다가 보이는 언덕 공원’으로 이름지어진 데서 알 수 있듯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경관 좋은 곳. 개항 이래 외국인들이 모여 살았고 지금도 외국인 묘지가 남아 있다. 현재 한국의 요코하마 총영사관이 야마테초에 한국식 건물로 들어서 있다.[18]

10년간의 망명생활을 통해 김옥균은 일본 고위층 인사들과 긴밀한 교류를 하게 된다. 그 중 한명인 도야마 미치루는 훗날 명성황후를 암살하는데 참여한 낭인 조직의 하나인 '겐요사'를 조직하기도 했다.

야마테초에서 옥균은 겐요샤(玄洋社)라는 우익 집단의 장사들과 접촉했다. 겐요샤는 도야마 미치루가 만든 조직이다.[18] 조선에는 그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고, 민씨 정권은 자객을 보내 그를 제거하려 했다.

연금 생활[편집]

그의 일본망명생활 후견인이자 연인이었던 일본인 게이샤 스기타니 오타마

1886년 7월부터 그는 2년간 절해고도인 오가사와라 섬(小笠原島)에 유배된 데 이어 1888년 8월~1890년 4월 홋카이도(北海道)에 연금을 당한다. 그는 이 무렵 두 명의 일본인 게이샤와 연인관계였는데, 이들 게이샤들은 김옥균이 자주 출입하던 술집에서 만나게 되어 그의 금전적, 정신적 후견인이자 연인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삿포로에 살던 김옥균은 지병인 류머티즘을 치료하기 위해 종종 하코다테의 온천여관에 들렀는데, 거기서 스기타니를 만나 애인관계로 발전한다.[19] 7월부터 2년간 절해고도인 오가사와라섬(小笠原島)에 유배된 데 이어 1888년 8월~1890년 4월 홋카이도에 연금을 당한다. 스기타니 다마의 원래 이름은 ‘오타마(小玉)’. 하코다테 도서관이 소장 중인 사진에는 ‘봉래정예기옥녀(蓬萊町藝妓玉女)’라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19] 게이샤였던 오타마는 곧 김옥균의 재정적 후견인의 한사람이 되었고 바로 연인관계로 발전하였다.

그녀의 이름은 당시 김옥균의 후원자였던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의 저서 ‘33년의 꿈’을 통해 알려지게 됐다. 이 책에 따르면 스기타니는 김옥균이 1894년 중국 상하이에 건너갔다가 홍종우에 의해 암살된 후 도쿄에서 치러진 장례식에 참석했다. 미야자키가 장례식장 한구석에서 슬피 우는 그녀에게 말을 건네자 “나는 여인의 몸. 선인(先人·김옥균)의 사상은 모르지만, 그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말했다.[19] 재일 사학자 금병동(琴秉洞)은 그의 저서 ‘김옥균과 일본’(2001년판)에서 “스기타니는 24~25세 정도의 미인이었으며, 두 사람 관계는 당시 하코다테에서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면서 “1890년 김옥균이 홋카이도에서 연금에서 풀려나 도쿄로 돌아올 때 함께 상경해 도쿄에서 살림집을 꾸리고 살았다”고 소개했다.[19] 스기타니는 김옥균이 상하이로 건너간 뒤에도 김옥균을 위해 따로 밥상을 차려놓고 그의 무사귀환을 위해 불공을 올리다가 부음을 전해들은 것으로 돼 있다. 스기타니는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후인 1916년 미야자키 도텐과 재회했을 당시에는 이미 한 실업가의 부인이 돼 있었다고 한다.[19]

이때 김옥균에게는 또다른 일본인 연인이 있었는데 역시 다른 술집에서 만난 게이샤인 마츠노 나카(松野なか)였다. 마츠노 나카에게서는 딸 1명이 태어났는데 이름은 사다(さだ)였다. 그 뒤 1884년 도쿄로 돌아오자 그는 청나라로 망명을 기획한다.

조선 자객 침투[편집]

1차 김옥균 암살 미수 사건[편집]

1885년 6월 고종명성황후의 밀명을 받은 장은규(일명 장갑복)가 일본으로 건너왔다. 장은규는 의친왕의 생모 귀인 장씨의 친정오빠였다. 장은규가 장귀인의 오라비라는 것을 안 유혁로는 그를 경계할 것을 김옥균에게 제안했고, 김옥균은 장은규를 피함으로써 1차 암살 기도는 미수로 돌아갔다. 그러자 조선 조정에서는 역관 출신의 온건 개화인사인 지운영을 자객으로 파견하였다.

통리기무아문 주사로 근무 중 밀지를 받은 지운영1886년 2월 23일 인천을 출발하여 나가사키를 거쳐 고베에 도착한다.[20] 그러나 김옥균은 지운영도 자객임을 간파하였다. 김옥균은 당시 고베를 떠나 도쿄에 은거 중이었다. 도쿄에 도착한 지운영은 이세강(伊勢勘) 여관에 투숙하며 인근에 살고 있는 김옥균에게 편지를 보내 면담을 요청했다.[21] 두 사람은 과거 같이 근무한 적이 있었기에 도쿄까지 찾아와 한번 만나자고 하는 지운영의 제의에 김옥균이 응할만도 했지만 김옥균은 서신을 보내 지운영의 면담 제의를 거절했다.[21] 장은규 일파를 상대한 유혁로는 지운영도 자객으로 의심하고 이를 김옥균과 박영효에게 전했다.

지운영의 정체에 의혹을 느낀 김옥균은 거절하는 답신을 보낸다.[22]

나는 국사범이므로 만나면 도리어 귀찮아질 것이네.[23]

김옥균은 유혁로 등에게 지운영이 가져온 거사금 5만 엔을 갈취할 것을 제안한다. 김옥균은 함께 있는 동지 유혁로, 신응희, 정난교 등에게 지운영에게 접근하여 그가 공작비로 가져온 5만 엔의 돈을 빼앗자고 제안한다.[23] 세 사람은 지운영을 만나 불평을 늘어놓았다.[23]

김옥균은 갑신정변의 동지들로 일본에 같이 망명해 있던 유혁로, 정난교, 신응희 등을 지운영에게 접근시켜 지운영이 자객임을 증명하는 증거를 잡도록 했다.[21] 유혁로 등은 지운영을 만나 이국에서 떠돌고 있는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김옥균을 비난하는 등 김옥균에게 큰 불만이 있는 것처럼 위장했다.[21] 지운영은 유혁로 일행과 2,3개월 이상 만나면서 신뢰하게 되었다.

2차 김옥균 암살 미수 사건[편집]

그러던 어느날 지운영은 일행에게 김옥균을 처치하면 망명자의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설득하면서 자신은 국왕의 밀지를 받들어 김옥균을 죽이기 위해 왔으므로 제군은 자신을 도우라고 본색을 드러냈다. 지운영은 그 증거로 고종의 칙서를 보여주었다.[24]

명여로 특차도해포적사(特差渡海捕賊使)인 바 임시계획을 일임 편의요, 위국사무(爲國事務)도 역위전권(亦爲全權)하니 물핍거행(勿乏擧行)할 사

이 사람은 명을 받은 특차도해포적사이니 임시계획은 편의로 일임하며 나라를 위하는 일 역시 전권을 위임하니, 조선의 신민이라면 핍박하지 않고 거행하도록 하라.
 
— 대군주모(大君主募)

발행 일자는 1896년 5월로 되어 있고 국왕의 옥쇄(대군주모)까지 찍힌 이 칙서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바다 건너의 역적을 체포하는 특명을 부여한다"고 되어 있다.[24] 게다가 김옥균 살해에 성공한 자에게는 5천 엔을 지불한다는 지불보증서도 가지고 있었다. 지운영은 한성에서 품고 온 비수도 보여주었다.[24]

유혁로 등 3인은 지운영을 포박한 뒤 구타, 위협해 가지고 있던 칙서와 비수 등을 빼앗았다.[24]

여성 편력 위장[편집]

망명 직후 그는 야마토의 히가시 히라노초의 야마구치 신타로의 집에 잠시 생활하였다. 이때 신타로의 어머니 나미와 관계, 이듬해 아들이 태어났다. 이후 그는 자중하였지만 도야마 미치루의 권고로 다시 여자를 찾았다.

조선에서 자객이 파견되자 도야마 미치루는 그에게 일부러 술과 여색에 탐닉하라고 권고했다.

옥균의 여자관계는 난잡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망명 직후 야마토의 히가시 히라노초 1465번지에 있는 야마구치의 집에 잠시 기식하는 동안, 야마구치의 어머니 나미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이듬해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25]

조선에서 김을 죽이려 자객을 보내자 그의 신변이 걱정된 나는 그에게 충고했다. 일본 고사(古事) 중 오이시우치가 교토에서 기라의 첩자를 방심시킨 내용을 인용하면서, 우국적 행위를 버리고 주색에 빠진 바보 시늉을 해보라고 권했다. 그랬더니 그가 매일같이 도쿄 유라쿠초의 여관에서 시바우라의 온천장까지 들락거리며 홍등가를 방황했다.[25]
 
도야마 미치루의 증언

반쯤은 자객의 칼끝을 무디게 하기 위해 일부러, 반쯤은 망명유랑에 지치고 지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도쿄의 윤락가를 배회하였다.[25]

박영효와의 결별[편집]

김옥균의 주색(酒色) 방종은 홋카이도 유배시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오타루에서 사귄 기생도 옥균의 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자기가 낳은 아이는 물론 다른 여자의 소생까지 거두어 옥균의 도쿄 쓰키지 집에서 함께 살았다고 한다.[25]

박영효는 이런 김옥균을 싫어하고 지겨워했다. 망명 동지들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짓이라고 비판도 했다.[25]

옥균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해대는 무능한 자야. 제멋대로 행동하는 방탕아지. 도쿄에서 조선 사람, 일본 사람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돈을 빌려 물쓰듯하고 말이지. 결국 갑신혁명이 실패한 것도 그런 엉터리 지도자 때문일세. 그를 믿고 설익은 청년들이 성급하게 일을 저질러서 그 꼴이 난 걸세. 그렇다고 옥균이 진짜 리더였나? 나와 홍영식이 다 했지.[25]

미국으로 망명한 윤치호가 도쿄에 들렀을 때도 박영효는 김옥균을 격하게 비난했다.[25]

박영효는 온순하도 침착한 데다가 세상사를 멀리하였으나 김옥균은 예민하고 다재다능한 데다가 세상의 교제도 넓었다.[26] 조선에 있을 대에는 박영효의 문벌이나 신분이 높아 김옥균을 능가하였으나 일본에서는 오히려 거꾸로 김옥균의 지위가 높아져 자연히 두 사람 사이가 벌어졌다. 김옥균을 남겨둔 채 박영효가 미국을 떠난 것도 그 때문이었다.[26] 이광린은 박영효가 김옥균을 두고 서광범, 서재필만 데리고 미국으로 갔던 이유도 김옥균과 박영효의 기질 차이로 이해하였다.

청나라 망명[편집]

일본 자유당계 무사들의 거사 탄로[편집]

1885년말 김옥균의 처소를 자주 출입하던 일본 자유당계 무사들이 오사카에 모여서 "조선 토벌을 위해 무장 집단을 파견하자"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었다.[22] 이들의 조선 정벌 주장은 일본 사회에 화제가 되었고, 이는 곧 정한론으로 발전한다.

이 일은 일본의 대륙 침략 세력의 선봉대가 기도한 음모로 김옥균은 전혀 알 리가 없었지만, '오사카 사건'은 김옥균을 배척하려는 무리들의 악의에 찬 선전에 좋은 구실을 제공했다.[22]

김옥균이 일본인 장사대(壯士隊)를 이끌고 조선에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22]

이 이야기가 일본은 물론 청나라 조정에까지 전해져, 청나라리훙장은 김옥균 일행을 단단히 구속해두라고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정부는 은근히 김옥균에게 일본에서 떠날 것을 종용했다.[22] 그러나 조선 정부가 그를 자객을 보내 제거하려는데 그를 내치는 것은 죽으라는 것과 같다는 후쿠자와 유키치이노우에 가오루의 반대로 일본 추방은 모면하였다.

암살 위협과 청나라 망명[편집]

망명객 김옥균은 '이와타 슈사쿠'(岩田周作)란 이름으로 10년간 일본 각지를 방랑하였으며, 청나라를 꺼리는 일본 정부에 체포되어 오가사와라에, 이어서 홋카이도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석방되어 도쿄에 귀환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그를 제거하기 위해 끊임없이 일본으로 자객을 파견하였다. 첫 자객인 장은규(張殷奎)는 김옥균의 민첩한 대응으로 암살이 실패하자 "김옥균이 자유당 계열 무사들과 결탁하여 조선을 침공하려 한다."라는 소문을 퍼뜨려서 이른바 '오사카 사건'을 일으켰을 뿐, 김옥균의 신변에 위해를 가하지는 못했다. 이 사건으로 국제적인 문제가 되자 일본 정부는 김옥균에게 일본을 떠나 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쉽게 떠날 수 없었다.

조선은 두 번째 자객인 지운영(池運永)을 보냈다. 그러나 지운영은 오히려 김옥균은 이를 일본 언론에 알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김옥균은 이 사실을 거론하며 외무대신 이노우에에게 신변 보호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사건이 일본 신문에 보도되자 일본 정부는 지운영조선에 송환하고, 김옥균에게는 일본과 조선의 우호에 방해가 된다면서 일본을 떠나 달라고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김옥균은 이에 항의하며 이노우에를 상대로 한 문서를 공개하고 일본 신문에 고종에게 보내는 장문의 상소와 청나라의 북양대신 리훙장 앞으로 사건의 책임을 따지는 공개 서한을 게재하였다.

청나라에서는 항의하였고 김옥균의 발언이 외교적인 문제가 되자 일본 정부는 1886년 7월에 그를 오카사와라 섬에 강제로 연금했다. 이때 동행한 동지는 이윤과 한사람뿐으로, 이곳에서 김옥균은 2년 동안 실의의 나날들을 보냈다. 습한 기후와 악조건을 견디지 못하여 연금 해제나 연금지역을 옮겨줄 것을 호소하여 김옥균은 1888년 훗카이도(北海道)로 이송되었다가 1890년에 석방되었다. 오카사와라 섬에서는 소일 삼아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기도 했는데, 이때 만난 와다라는 청년이 그를 추종하여 상하이에서 죽는 순간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연금에서 해방되어 도쿄로 돌아온 김옥균은 한동안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청나라로 들어가 실권자 리훙장(李鴻章)과 담판을 짓기로 했다. 리훙장에게 연락이 닿자 마침 일본 주재 공사로 새로 부임한 리훙장의 아들 리징방은 자신의 아버지가 그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편지를 건네주었다. 김옥균으로서는 일본에서의 거듭된 재기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자 아직도 조선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청의 실권자를 만나서 협조를 얻어 보려 했다. 청나라 행을 결심한 김옥균은 스스로 막일을 다니며 비용을 마련하는 한편 백방으로 여비를 조달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오사카의 한 후원자에게서 경비를 지원해 주겠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동료들은 그의 신변을 걱정해서 비밀리에 행동하고 여러명의 수행원과 함께 가도록 권했으나, 그는 일본인 와다와 심부름꾼 한사람만 데리고 떠났다. 그러나 김옥균의 이동 정보는 곧 조선조정의 간자에 의해 조선조정으로 전달된다.

망명 만류와 암살자의 잠입[편집]

홍종우 초상화

1894년 2월 이홍장과 담판을 지으려고 청나라 상하이로 건너갔다. 3월초 그가 오사카 역에 도착하자 조선에서 온 자객인 이일직(李逸直)과 홍종우(洪鍾宇)가 마중을 나왔다. 이일직은 자신을 청나라와 일본을 왕래하면서 약재상을 하는 사람이고, 홍종우는 프랑스 유학생이며 자신의 친척이라고 거짓으로 소개했다. 그들은 평소부터 김옥균의 행적을 잘 알고 있고 그들을 존경해 왔기 때문에 자신들이 청국행 경비를 제공하겠노라고 말했다.

김옥균은 한눈에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객임을 알아보았지만 이들을 역이용하려는 생각으로 도움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김옥균이 눈치챈 것을 알자 이일직은 홍종우가 동행하며 김옥균을 도와줄 것이라고 말해 그의 의심을 줄이려고 했다. 그러나 사실은 김옥균이 상하이로 떠난 것을 확인한 후에 박영효까지 암살하려는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이일직박영효를 암살하러 갔다가 그가 민첩하게 일본인의 집에 숨어버리는 바람에 그를 찾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일본경찰의 수사 결과 이들을 지휘한 민영소의 사주가 밝혀지기도 했다.

3월 10일 오사카역에서 헤어진 도야마 미치루와는 14일과 16일 두 차례 다시 만난다. 옥균은 도야마와 바둑을 두며 시간을 보내면서 중국행을 걱정하는 도야마에게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는 호랑이를 잡을 수 없다”고 호언했다.[18] 도야마는 만류를 단념한 듯, 옥균에게 ‘이홍장에게 선물로 갖다주라’며 뭔가를 내밀었다. 최고의 일본도로 치는 교토의 산조(三條)칼 한 자루였다. 이 일본도는 상하이에서 옥균이 살해당하자 임자를 잃고 말았다. 그래서 보디가드 와다가 소중하게 챙겨 도야마에게 정중히 돌려줬다.[18]

오사카역까지 동행한 도야마가 그에게 상하이행의 이유를 묻자 김옥균은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 호랑이 새끼를 잡겠느냐"고 반문했다.[17] 그 해 2월 김옥균이 후쿠자와 유키치가 묵고 있던 도쿄 인근의 휴양지 하코네(箱根)로 찾아갔을 때 후쿠자와는 중국행을 상의하는 김옥균에게 위험하다며 만류했다. 그의 대답은 '호랑이 굴' 운운이었다.[17]

김옥균은 그동안 위험하다며 중국행을 만류하는 일본인 지인들에게 입버릇처럼 이 '호랑이 굴' 비유로 답하고 있었다.[17] 3월 10일 오사카에 도착한 김옥균은 여인숙에 숙소를 잡아놓고 중국 입국 절차를 밟으면서 도쿄에서 즐겨 치던 당구도 치고 골동품점에 들려 중국에 가지고 갈 선물도 샀다.[17]

암살 과정[편집]

홍종우가 김옥균에게 접근한 방법은 간단했다. 프랑스 요리 솜씨도 어찌나 기가 막혔던지 김옥균의 일본 친구들 입맛까지 당길 정도였다.[27] 개화파 성향에 프랑스 유학까지 갔다 온 홍종우는 김옥균에게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이듬해 상하이에 있는 호텔 뚱허양행(東和洋行)에서 리볼버권총으로 김옥균을 저격, 암살하였다.

김옥균은 홍종우를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생각했다. 홍종우는 그만큼 암살 의도를 철저히 숨기고 위장 접근에 완벽하게 성공했다. 자, 홍종우는 이렇게 해서 김옥균을 상하이로 꼬여냈고 거사를 '깨끗이' 처리했다. 그리고 자신이 왜 김옥균을 제거했는지 청국 측 경찰서에서 변론하였다.[27]

나는 조선의 관원이고, 김옥균은 나라의 역적이다. 김옥균의 생존은 동양 삼국의 평화를 깨뜨릴 우려가 있다.[27]

홍종우는 김옥균을 암살한 첫 번째 이유로 공무라고 밝혔다. 김옥균 암살은 첫째로, 공무다. 어명을 받든 것이다.[27] 두 번째 이유로는 김옥균이 동양 평화에 위협적인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최후[편집]

1894년 3월 중순 경 상하이에 도착한 김옥균 일행은 외국인 거주지 안에 있는 한 여관에 투숙하였다. 투숙한 다음 날 오후, 김옥균 일행은 거리를 구경하기로 하고 오전에는 각자 용무를 보았다.

1894년 3월 27일 오후, 윤치호청나라 상하이에서 체류하면서 지냈을때 윤치호는 김옥균과 홍종우등 일행을 맡아들였다. 김옥균은 윤치호에게 '리훙장의 양아들 리징황의 초청으로 오게되었다.[5][28] 경비는 홍종우라는 자가 대고 있다."고 말하자, 윤치호는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홍종우는 (조선에서 보낸) 스파이 같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그러자, 김옥균은 "그가 스파이일리가 없다."고 답했다 한다.[5][28] 김옥균이 일본 망명 시절,단발을 하고 이와다 슈사쿠로 개명한데 반해 홍종우는 파리 체류 시절 늘 한복을 입고 다녔다. 김옥균은 일본을 조선의 나아갈 모델로 보고 일본의 도움을 받아서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했었으나,홍종우는 서구 문명을 익히면서도 그 속에 숨겨진 제국주의의 야심을 경계했다.[29]

3월 27일 김옥균은 인편으로 윤치호에게 오후 1시 반에 자신이 숙박하고 있는 동화양행(일본 호텔)로 와서 함께 갈 곳이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급히 보낸다. 그러나 윤치호는 학교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김옥균의 제안을 사양한다. 3월 28일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온 김옥균은 피곤하다고 침대에 누우면서, 와다에게 일본에서 타고 온 배의 사무장인 마쓰모토에게 전할 말이 있으니 그를 불러달라고 했다. 와다가 나가자 김옥균의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눈치챈 자객 홍종우가 때를 놓치지 않고 김옥균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였다.

1894년 3월 28일 상하이 동화양행 호텔에서 조선 정부가 보낸 홍종우에 의해 리볼버 권총으로 저격당하였다.[5][28][30] 그는 곧 일본인 수행원들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오후 4시 경 사망한다. 미행의 그림자를 예상한 윤치호는 김옥균의 암살 소식을 접하고 수시로 거처를 이동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44세였다.

부관참시와 복권[편집]

공개 부관참시[편집]

김옥균 암살 당시 일본의 어느 신문사에 실린 기사와 삽화

사건이 발생하자 청나라 상하이 경찰은 홍종우를 체포하고 김옥균의 사체는 일본인 와다의 요청에 따라 일본으로 인계하기로 했다. 일본 영사관에 인계된 시신은 일본인 지인과 그의 추종자가 손톱과 발톱을 잘라내 봉지에 담아 유품으로 일본 도쿄로 보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조선 개화파의 존재를 껄끄럽게 여겨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홍종우와 김옥균의 사체를 청나라에게 넘겼고, 청나라 정부는 홍종우의 범행을 조선인 상호간의 문제라고 하여 다시 조선에 인계하였다.

효수되어 한성부 저잣거리에 내걸린 김옥균의 수급

1894년(고종 32년) 4월 27일 유해가 선박으로 옮겨졌고, 4월 28일 조선에 도착한 그의 시신은 강화도 양화진에서 공개적으로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하고, 머리는 저잣거리에 효시된 후 실종되었다. 효시(梟示)된 그의 목에는 '모반(謀反) 대역부도(大逆不道) 죄인 옥균(玉均) 당일 양화진두(楊花津頭) 능지처참'이라고 쓰여진 커다란 천이 나부끼고 있었다. 1894년 4월 28일자 일본 시사신보에는 양화진에서 고균의 시신을 참시하는 광경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김의 시신을 관에서 끄집어내 땅위에 놓고 절단하기 쉽게 목과 손, 발밑에 나무판자를 깔았다. 목을 자르고 난 다음에 오른쪽 손목 그다음 왼쪽 팔을 잘랐다. 이어 양 발목을 자르고 몸통의 등 쪽에서 칼을 넣어 깊이 한 치 길이 여섯 치 씩 열 세 곳을 잘라 형벌을 마쳤다.

시신을 조각조각 떼어서 팔도에 보내어 저자거리에 내다 걸게 하고, 목은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고 커다랗게 쓴 현수막과 함께 양화진 형장에 효수해 놓았다. 이 끔찍한 형벌은 임금(고종)의 이름을 빌려서 민비와 민영익의 십년을 벼르다 벌인 철저한 복수극이었으리라. 아! 그렇게 조각조각 잘려진 시신은 그 후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어느 기간동안 저자거리에서 구경거리로 내 보인 다음엔 누군가 조각시신을 다 모아서 장례를 치러도 되는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시신을 처리할까?
 
일본 시사신보 1894년 4월 28일자

그의 가족 역시 연좌제에 의한 처벌이 건의되었고, 생부 김병태는 처형당하고 모친 등은 음독 자결하였다. 또한 이 사건으로 그의 가까운 친척들은 항렬자를 균에서 규로 바꾸기도 한다.

홍종우가 돌아오자 고종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았다고 한다.[27] 김옥균의 죽음은 곧바로 동북아 정세의 외교적으로 확대되었고, 김옥균이 일본에 망명해 있을 때,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던 일본제국은 곧바로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언론매체 등을 통해 김옥균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등 분위기를 이끌어내고, 청일전쟁을 향한 일본제국의 국민감정으로 발전시키는 데 이용했다.

갑신정변의 실패를 본 청년지사 박중양은 분노하였다. 특히 박중양은 김옥균을 유인해서 암살한 조선의 조정을 잔인하다며 지탄하였다. '김옥균은 일본 동경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홍종우의 유인으로 상해에 나가게 되어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인면수심의 홍종우를 논할 필요도 없지만은 김옥균의 시체가 경성으로 도착했을 때 종로시상에서 목이 잘리고 사지를 분열하였다. 이런 행사가 야만인들에게도 없을 것이다.[31]'라며 분개하였다. 개화파 인사들을 선각자로 보고 존경했지만 그들 가족들의 비참한 최후와 능지처참, 연좌제 등의 악형을 목격하면서 박중양조선이란 나라가 존재할 가치가 있는 나라인가에 일찍부터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일본의 규탄[편집]

김옥균의 부관참시는 외국인 기자들과 프랑스인, 일본인, 미국인 등에 의해 외국으로 보도되었다. 그런데 이같은 조선 정부의 조처에 일본 지식인층의 여론이 들끓기 시작하였다.[32] 후쿠자와 유키치조선에 호의적이었던 일본 자유주의자들의 분노는 증폭되었다. 조선인들은 반문명적인 야만인들이며 이와 같은 조선인들의 비인도적인 테러 행위, 생명 경시 현상을 방치해야 되는가 하는 주장이 일본의 개화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후쿠자와 유키치, 이노우에 가오루 등은 바로 조선인들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규탄하였다.

김옥균이 처음 일본으로 망명했을 때부터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냉대했었다. 그를 국외로 추방하려 했던 일본인들이 이번에는 김옥균에게 가형한 조선 정부를 비방하고 나섰다.[32]

일본의 지식인들은 김옥균 추도회 또는 김옥균 기념회, 김옥균 연구회 등을 조직하여 연일 추모 모임을 갖는 것이었다. 일본측의 기록에 의하면 1894년 4월 21일에는 간다니시키정(神田錦町)의 금휘관(錦輝館)에서 '김옥균 사건 연설회'가 열렸고[32], 여기서 조선 정부의 야만성을 대대적으로 성토하였다. 4월 23일에는 일본 정계의 유력자 1백여 명이 모여서 '대외경파간친회'라는 모임이 이사쿠사(淺草)에 있는 본원사(本願寺)에서 열렸는데 대단한 성황이었다고 되어 있다.[32]

아오야마의 외인 묘지에 서 있는 김옥균 묘와 비석에는 박영효가 비문을 짓고 이준용(李埈鎔)이 글씨를 쓴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상 그 비문은 유길준이 쓴 것이다.[33] 비문은 박영효가 지었고, 이준용이 글씨를 썼지만 이 것을 돌에 직접 조각한 이는 유길준이었다.[33] 훗날 대한민국의 역사가 겸 작가 신봉승은 이를 두고 '참으로 공교롭게도 이때 유길준조선에서의 또다른 쿠데타에 연루되어 일본 정부로부터 오사가하라 섬모도에 유배되어 있었다. 김옥균이 유폐되었던 바로 그 절해고도에서 김옥균의 비문을 써야 하는 유길준의 심정은 착잡함을 넘어서 아픔이었을 것이다.[33]'라고 평하였다.

복권[편집]

김옥균의 부인 유씨는 딸 1명과 함께 관비가 되어 끌려갔다. 한편, 김옥균에게는 정실 부인의 딸 외에도 1894년 3월 사다라는 딸을 가진것으로 알려진다.[34] 1895년 11월 갑오개혁으로 개화당 내각이 들어서자 법무대신 서광범과 총리대신 김홍집의 상소로 사면·복권되었고, 아관파천 후 복권이 취소되었다가 순종 때인 1910년 다시 복권되어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28] 시호는 충달이다.

사후[편집]

그가 일본에 남긴 머리카락으로 일본인들은 도쿄에 그의 가묘를 만들고 위패는 일본의 한 신사에 안치한뒤 제사를 지냈다. 그의 연인인 오타마는 후일 어느 일본인 기업인과 결혼하였고, 그의 다른 연인인 마츠노 나카는 딸 사다 를 데리고 행상과 노동을 하면서 겨우 생계를 이어갔다. 1910년(융희 4년) 한일 병합 이후 조선에서는 그가 생존하여 개혁정책을 펼쳤더라면 한일 병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여론이 나타나면서 재평가되기 시작하였다. 유길준, 박영효, 윤치호 등은 그가 암살당하지 않고 오래 살았다면 한일 병합을 막았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암장한 묘소는 한일 합방 이후 충청남도 아산군 영인면 아산리 143번지(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143번지)로 이전되었다.

일본에서는 조선을 개화하려다가 억울하게 희생된 선각자로 추모되었다. 1920년 초부터 김옥균을 추모하는 여러 추도 모임이 개최되었고, 1935년에는 김옥균을 기리는 단체를 조직하자는 일본 지식인들의 자발적인 운동으로 그와 친한 친구들과 지인들을 중심으로 고균회를 결성하고 기관지로 '고균'을 발행했다. 고균회의 초대 이사장은 이노우에 가쿠고로였다. 그가 일본인 여인에게서 얻은 딸 사다는 이 고균회의 회합과 고균회가 주관하는 각종 모임에 참석, 종종 비와를 읊고 연주하였다. 사다는 도요바시 출신 언론인이자 인쇄업자인 스즈키 이치고로(鈴木市五郎)와 결혼했는데, 일부 김옥균 추종자들과 관람객들이 그녀에게 사례금과 대한 봉투를 준 것이 스즈키 집안에 전해지고 있다.

1926년 10월 10일에는 경성박문서관에서 민태원에 의해 《오호 고균거사 - 김옥균실기》 (경성 박문서관, 1926)가 출간되었다. 그러나 곧 판매금지조치 되었다. 그의 일대기를 다룬 이 서적은 해방 이후에 공식 판매되었고, 1947년에는 민태원에 의해 《갑신정변과 김옥균》 (국제문화협회, 1947)이 출간되기도 했다. 광복 이후에야 그가 역적이라는 시각이 사라지고 혁명가라는 평가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말 야담운동가 김진구는 “김옥균 전집 간행회”를 조직하고, 잡지에 김옥균 관련 글을 발표하였다. 갑신정변을 한국근대사의 ‘劃時期的一大革命’(획시기적일대혁명)으로 묘사하고, ‘민중본위’라 하면서 민의 열렬한 희망, ‘排淸獨立’(배청독립), ‘開化進取’(개화진취)를 갑신정변의 성격으로 규정하였다. 《학생》지에 김옥균의 최후를 장렬하게 극화한 희곡 ‘대무대의 붕괴’를 연재한 후 조선시대극연구회를 만들어 순회 공연하였다. 시대극을 민인 계몽의 수단으로, 위인을 대중역사 교육의 소재로 삼아 김옥균 등 갑신정변에 참여한 인물들을 영웅화해, 김옥균에 대한 부정적 인식 대신 혁명가로 부각시켰다.[35] 1989년 2월 22일 공주군청의 주도로 충청남도 공주군 정안면 광정리(현 공주시 정안면) 소재 생가 터를 정비하고, 복원된 생가 앞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사상과 신념[편집]

박규수, 오경석 등으로부터 신문물을 접하고 서방에 문명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는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개화(開化)를 해야야 나라의 부흥과 발전을 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리학적 위정척사파들의 폐쇄적인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를 반대, 비판하였지만 족벌체제로 변질되는 민씨 정권을 지지하지도 않았고, 외세의 강요에 의하여 무분별하게 개방하는 것도 비판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여는 것은 세계적인 흐름이기 때문에 조선이 스스로의 힘을 기르고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조선 스스로 개항을 하여 외국의 선진문물과 장점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옥균은 처음에 평화적 수단에 의한 개혁운동(改革運動)을 추진했으나, 민씨 일족의 부패와 청나라와 결탁한 민씨 일파의 벽, 청나라의 영향력 등에 부딪치자 위로부터의 점진적인 개량주의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쿠데타를 기도, 준비하게 된다.

평가와 비판[편집]

긍정적 평가[편집]

김옥균

개화사상에 철저히 심취하여 스승 유홍기중인 신분임에도 그에게 존댓말을 썼다고 전해진다.[6] 이후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명되지 못하거나 부정적으로 평가되어 왔으나 2007년 이후 뉴라이트등 일부 단체에서 '한국 근대화를 빛낸 선각자'로 높이 평가하는 시각이 나타나고 있다. 뉴라이트의 견해에 따르면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가 기존에 청나라에 바치던 조공제도와 문벌제도를 폐지하는 등 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을 평가, 한국 근대화를 빛낸 선각자로 보기도 한다.[36][37][38]

그는 민씨 일파의 외교 정책에 대한 폐쇄적인 위정척사 주장도 반대하면서도 외세의 강요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무분별하게 개방하는 것도 배척했다고 한다.[5] 실제로 처음에 그는 평화적 수단에 의한 개혁 운동을 추진했으나 청나라와 결탁한 민씨 세도정권의 벽에 부딪히자 부득이 쿠테타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변혁을 시도했으나, 민심의 지지를 받지못한 채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했다는점에서 한계를 드러냈다.[5] 그의 생가 터에는 추모비가 설치되었으며, 1976년 충청남도 기념물 13호로 지정되어 공주시가 관리하고 있다.[4] 일본 도쿄 아오야마 공원묘지 외국인 묘역에 머리털과 옷을 묻은 무덤이 있다.

부정적 평가[편집]

그는 청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나 명나라 혹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와 외세의 개입을 비판하면서도 갑신정변 당시에는 일본에 의지하게 되었는데 외세에 의존했다는 점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사전 준비가 치밀하지 않았던 점과 정변의 주체 세력이 너무나 허약했던 것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그때까지 조선에서 수구파(守舊派)의 후견세력인 청나라 등의 영향력이 조선사회 내에 막강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것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가 계[편집]

  • (10대조)우의정 증영의정 문충공 선원 김상용-병자호란때 강화도에서 순절
  • (9대조)이조참판 부제학 수북 김광현-소현세자 민회빈강씨와 인척관계
  • (8대조)덕산현감 증이조참판 김수민
  • (7대조)고성군수 김성달
  • (6대조)청산현감 김시윤
  • (5대조)증이조참의 김겸행
  • (고조부)증이조참의 김이적
  • (증조부)증이조참판 김후순
  • (조부)광주목사 증이조참판 동지돈녕부사 김교근
  • (생부) 김병태
  • (생모) 은진송씨
    • 누이 김균이(? ~ 1944년)
    • 매제 송병의
    • 동생 김각균(金珏均)
  • 부인 : 기계유씨, 유영환의 손녀
  • 첩 이름 미상
  • 첩 송씨
  • 부인 스기타니 오타마(小玉)
  • 부인 마츠노 나카(松野なか)
    • 딸 : 사다
    • 사위 : 스즈키 이치고로(鈴木市五郎)
  • 내연녀 : 나미 - 망명 직후 잠시 거주하던 집주인 야마구치 신타로의 어머니
    • 아들 : 이름 미상
  • 첩 : 이름 미상
  • 외증조부 : 송양전(宋養銓)
  • 외할아버지 : 송윤덕(宋潤德, 1791년 ~ 1822년)
    • 외삼촌 : 송인식(宋寅植, 1818년 ~ 1900년, 호는 삼사재(三斯齋))
    • 이모부 : 서유봉(徐有鳳)

기타[편집]

김옥균의 암살 사건은 청일전쟁의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김옥균 암살 계획을 미리 감지한 쪽은 일본 정부였다. 그러나 암살을 애써 저지하지 않았다. 한때 김옥균을 근대화의 선구자 운운하며 전폭적으로 지원한 일본이었지만, 김옥균이 정변에 실패하고 자객에게 쫓기는 몸이 되자 찬밥 대하듯 했다. 그런데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암살당하자 일본 정부와 언론은 일제히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마치 암살당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것처럼 그를 애도하고, 의연금을 모으고, 시체 수습 문제를 협의하는 등 재빠르게 움직였다.[27]

한편 조선은 김옥균 암살이 국가의 경사라고 큰 의미를 부여했다.[27] 홍종우가 돌아오자 고종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홍종우는 단번에 실력파 황실 관료로 부상한다. 그로서는 프랑스에서 외롭게 공부하며 조선을 근대 국가로 발돋움시키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실행에 옮길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27] 상하이에서 암살 사건이 일어난 것은 청에 불행이었다. 일본은 김옥균은 일본인이나 다름없고, 일본 여관에서 사건이 일어난 만큼 사건 관할은 일본에 있다고 주장했다. 암살을 방치한 청국 정부를 맹비난했다. 그러나 청은 홍종우의 신원을 확인한 다음 조선 정부의 요구 대로 홍종우와 김옥균 시신을 조선에 넘겼다.[27]

조선은 일본의 속내를 꿰뚫지 못했다. 만국공법과 같은 허울 좋은 세계 공존론을 맹신한 나머지 제국주의가 침투하리라는 예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조선 침략, 나아가 대륙 침략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에게 김옥균 암살 사건은 대단한 호재였다. 김옥균 암살 사건은 장기적으로는 조선 합병, 당장에는 청과 전쟁을 벌일 수 있는 기막힌 명분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그해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 청과 일본은 정면으로 부딪친다. 이것이 바로 청일전쟁이다.[27]

저서[편집]

  • 기화근사(箕和近事)》
  • 치도약론(治道略論)》
  • 갑신일록(甲申日錄: 手記)》 : 최근 김옥균의 저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아마도 일본사람)이 쓴 위작이라는 주장(김옥균이 다른 저서에서는 쓰지 않은 "일본식 한문체"가 다수 섞여 있다.)이 있다.

김옥균을 연기한 배우[편집]

같이 보기[편집]

참고 자료[편집]

  •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개화파의 개혁운동〉
  • 김형광, 《조선인물전》 (시아출판사, 2007)
  • 김기진, 청년 김옥균(한국문학대표작선집 16) (문학사상사, 1993)
  • 조재곤,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조선의 운명을 바꾼 김옥균 암살사건 (푸른역사, 2005)
  • 유영익, 《갑요경장 연구》(일조각, 1990)

주석[편집]

  1. 아들은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던 김영진이다.
  2. '프라하의 연인'과 김옥균, 북촌을 걷다, 《오마이뉴스》, 2008년 5월 18일 작성.
  3. 신정일, 《똑바로 살아라》 (다산초당, 2011) 328페이지
  4. 공주시, `김옥균 선생 유품 찾습니다', 《연합뉴스》, 2006년 1월 24일 작성.
  5. 《인물로 보는 조선사》,p 437~p464
  6.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교과서포럼 저, 도서출판 기파랑, 2008.3.24) 40쪽.
  7. 처음에는 반발이 있었으나 그는 청나라로부터의 자주독립과 외세의 개입, 부패한 사회 개혁을 위해서는 신분을 초월한 식자층의 가입이 필요하다고 설득하였고, 그들의 동의를 얻어낸다.
  8. 그리고 어떤 대가도 이자도 없다고 공언하였다.
  9. 귀국 직후 김옥균은 조정에 술과 담배, 인삼 등의 특산품에 세금을 부과하여 정부의 재정을 늘릴 것을 건의하였으나 묵살당한다.
  10. 1883년 음력 3월 16일~: 《고종실록20년 3월 16일: 金玉均爲東南開拓使, 兼捕鯨等事
  11. 이는 당백전이 상평통보와 같은 가치로 활용되었던 사태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12.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 제17호:1992 여름호》 (역사비평사, 2007) 274페이지
  13. 북악산악회, 《역사에 비춘 한국 근현대인물》(백산출판사, 1999) 82페이지
  14. 신봉승, 《조선왕조 500년/24. 왕조의 비극》 (금성출판사, 2010) 128페이지
  15. 박영효와 김옥균의 개인 비용으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였다.
  16. 갑신정변 이후 민영익은 척신 정권의 편에 서게 된다.
  17. 이종각,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동아일보사, 2009) 274페이지
  18. [열도의 한국혼 ⑪] 풍운아 김옥균 일본 망명 10년의 궤적:절해고도 오가사와라에 남긴 두 글자, ‘정관(靜觀)’! (3)
  19. 조선 망명객 설움 달래준 日 게이샤의 순정야화 조선일보 2005년 11월 29일자
  20. 이종각,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동아일보사, 2009) 259페이지
  21. 이종각,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동아일보사, 2009) 260페이지
  22. 이은직, 《조선명인전 3》 (정홍준 역, 도서출판 일빛, 2005) 202페이지
  23. 이은직, 《조선명인전 3》 (정홍준 역, 도서출판 일빛, 2005) 203페이지
  24. 이종각,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동아일보사, 2009) 261페이지
  25. [열도의 한국혼 ⑪] 풍운아 김옥균 일본 망명 10년의 궤적:절해고도 오가사와라에 남긴 두 글자, ‘정관(靜觀)’! (5)
  26. 이광린, 《개화기의 인물》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3) 137페이지
  27. 조선의 운명을 바꾼 김옥균 암살 사건 오마이뉴스 2005년 11월 24일자
  28. 김삼웅, 《친일정치100년사》(동풍, 1995년) 43쪽.
  29.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암살자 홍종우와 김옥균, 과연 누가 옳았는가 쿠키뉴스 2005년 11월 25일자
  30. 이때 홍종우를 보낸 곳은 수구당 또는 민씨파라는 의견도 있다.
  31.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 9권》(민족문제연구소, 1996) 15페이지
  32. 신봉승,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 (답게, 1996) 287페이지
  33. 신봉승,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 (답게, 1996) 288페이지
  34. [1]
  35. 김태웅 (2003년 12월). 일제 강점기 김진구(金振九)의 활동과 내선일체론 (역사연구 학술저널). 《역사학연구소》 (13). 2012년 7월 5일에 확인.
  36. JOINS | 아시아 첫 인터넷 신문
  37. 토론이 있는 인터넷신문 - 데일리안
  38. donga.com[뉴스]-[사설]역사인식의 지평 넓힐 뉴라이트 대안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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