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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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
출생 1861년
대한제국 조선 경기도 수원
사망 1939년 9월 21일 (78세)
일제강점기 조선 일제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사인 병사
국적 대한제국 조선, 대한제국 대한제국, 일본 제국 일본 제국
별칭 어릴적 이름은 무량(無量), 자는 자순(子純), 호는 춘고(春皐), 현현거사(玄玄居士)
직업 정치인, 사상가
종교 유교(성리학)
배우자 영혜옹주, 범씨
자녀 아들 박진서, 며느리 박원희, 손자 박찬범, 아들 박일서, 손녀 박찬주, 아들 박흥원, 손자 박혜륜
부모 아버지 박원양, 어머니 전주이씨
친척 형 박영교, 형 박영호

박영효(朴泳孝, 일본식 이름: 山崎永春(야마자키 에이하루)[1], 1861년 ~ 1939년 양력 9월 21일[2])는 조선 말기의 문신, 정치인, 사상가로 급진 개화파의 주요 인물이다. 북학파 박지원의 저술을 통해 평등사상을 배우는 한편 오경석이 베이징[北京]에서 가지고 온〈해국도지〉(海國圖志)·〈영화지략〉(瀛環志略) 등 청나라와 외국의 개화서적을 돌려보면서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 등과 함께 1870년대 후반에 개화당을 조직했다.

1884년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서재필, 서광범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주도하였으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으로 망명했다 귀국하였으며 을미사변갑오개혁으로 다시 일본에 망명하였다. 일본 체류 중 1900년 7월 고종의 폐위를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1907년 특별사면을 받고 귀국하였으나 이완용고종 양위 계획을 반대하는 과정에서 투옥, 유배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중추원 고문과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어릴적 이름은 무량(無量), 자(字)는 자순(子純), 호는 춘고(春皐), 현현거사(玄玄居士), 본관은 반남이며, 조선의 마지막 부마로, 조선 철종의 사위이기도 하다.[3] 당색으로는 노론 계열이었고, 박규수(朴珪壽)의 문인이다.

목차

[편집] 생애

[편집] 생애 초기

[편집] 출생과 가계

박영효는 1861년 노론의 실력자로 대호군을 지낸 박원양(朴元陽)과 그의 부인 전주이씨의 아들로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광해군의금부판사를 지냈던 오창 박동량의 후손으로, 인조 반정 이후 서인이 집권하면서 대대로 명문거족으로 성장해 왔다. 먼 일족으로는 북학파박지원, 박규수가 그의 일족이었고, 그와 같은 시대에 개화당에서 활동하던 박정양도 아저씨뻘 되는 일족이었고, 박제순은 족대부뻘 되는 일족이었다. 그가 태어날 때 위로는 형 박영교(朴泳敎)와 박영호(朴泳好)가 있었다.

어려서 그는 먼 친척이기도 한 박규수의 문하생이 되었다. 1872년철종의 고명딸 영혜옹주의 부마를 낙점할 때 수원부유수 신석희(申錫禧)의 천거와 우의정 박규수의 추천으로 철종의 부마로 선택되었다.

[편집] 결혼과 사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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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고종 9년) 음력 4월 선왕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3개월 만에 사별하고, 금릉위(錦陵尉)에 책봉되었다. 후일 후사가 없는 그를 불쌍하게 여긴 고종이 특별 배려로 궁녀 몇 인을 그에게 하사하는데, 이들에게서 서자, 서녀들을 본다.[4]

1870년대 중반, 형 박영교(朴泳敎)를 따라 재동 박규수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개화사상을 익히기 시작하였다.[5] 그러나 결혼 3개월 만인 그해 7월 영혜옹주가 사망하여 3년상을 마쳤다. 유대치를 중심으로 김옥균·홍영식·서광범개화당 요인들과 결속, 정치적 혁신을 부르짖고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간섭과 러시아의 침투를 억제하고자 했다.[1] 박규수의 문하에 드나들며 그는 이동인, 오경석, 김옥균, 서광범, 윤치호, 서재필, 홍영식, 윤웅렬 등을 만나 친분을 쌓게 된다.

[편집] 정치 활동

[편집] 관료 생활 초반

일본 체류중 촬영한 사진
(맨 왼쪽이 박영효, 그 뒤는 서광범, 우측 두번째가 서재필, 우측 앞이 윤치호

1878년 오위도총부도총관, 1879년 혜민서제조를 거쳐 1880년 판의금부사에 임명된다. 1881년 다시 판의금부사에 임명되었다.

1883년 1월 일본에 체류중일 때 그려진 박영효의 초상화

1882년 임오군란의 수습책으로 제물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 이행을 위한 특명전권대신 겸 제3차 수신사로 선발된다. 1882년(고종 19년)의 제물포 조약에 따른 사과 사절로 일본에 다녀왔다.[6][7] 그의 임무는 군란에 대한 사과 국서를 전달하고 제물포조약의 비준 교환을 무사히 수행하는 것과 손해배상금 50만 원 지불방법의 완화를 교섭하는 것이었다. 일본에 도착, 도쿄에 체류하며 박영효 일행은 일본 정부의 고관을 만나 협상 및 사과 국서를 전달한 뒤 일본 조야(朝野)의 유력한 인사는 물론 영국·미국·독일 등 구미에서 일본에 파견된 외교사절과도 접촉해 국제정세와 국제관계에 대한 지식을 넓히는 한편, 병사(兵事)·재무(財務)·흥산(興産) 등의 개화상황을 견학, 시찰하고 많은 감명을 받았다.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김옥균, 윤치호, 서광범 등과 의논하여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 신학문을 배우고 귀국하게 하여 국내에 인재를 양성하고, 조선의 근대화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차관교섭을 일본 정부와 추진하며,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지원을 받아 신문을 발행할 것을 계획했다. 그해 11월 일본에 더 남아 공부를 하겠다고 하는 윤치호 등 다른 동지들을 남겨두고 단독으로 귀국했다.

[편집] 개화파 활동

[편집] 일본 시찰과 귀국

일본 조야(朝野)를 시찰하고 돌아와 그는 개혁을 기도했으나, 민태호·김병시(金炳始)·김병국(金炳國) 중심의 수구파들의 정권 장악으로 실패했다. 그가 없는 동안 정부는 친청사대(親淸事大)의 민씨일족이 장악하고 있었고, 박영효는 12월 대신직에서 제외되어 한성판윤으로 천거됐다. 1882년 음력 12월 19일에 그는 한성부판윤으로 임명되었다. 일본에서 접한 인력거를 들여와 한성부판윤 재임 기간 중 조선에 보급했다.[8] 한성부에 치도(治道)·경순(警巡)·박문(博文)의 3국을 신설하고 도로의 확장과 포장 등 도시 정비와 색깔있는 옷의 장려 등 개혁을 시도했으나 민태호·김병시 등 수구파들의 반대에 부딪혀 신설 3국은 폐지되었고, 도로 확포장 등 도시계획 사업도 전면 중단되었다. 그는 사헌부와 사간원, 그리고 유학자들로부터 줄기차게 탄핵을 받다가 1883년 3월 광주유수 겸 수어사로 좌천되었다. 1883년 음력 3월 17일 광주부(廣州府) 유수로 발령을 받았다.[9]

[편집] 한성순보 발행과 득남

한성순보, 박찬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광주유수로 발령된 그는 정조의 유지를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수어영에 연병대를 신설하고 일본식 훈련을 시작했으나 다시 비난 여론이 들끓자 그해 12월 다시 광주유수직마저 사퇴하고 재야로 물러앉았다. 단기간 국내 유람을 다녀온 뒤, 박영효는 후쿠자와 유키치와 꾸준히 연락, 그의 지원과 자문으로 신문을 발행할 것을 계획하고 10월 1일 한성순보를 창간했다.

한성순보를 창간한 그는 김옥균, 윤치호, 서재필 등을 필진으로 위촉했다. 그를 근친으로 보고 총애하던 고종은 영혜옹주 사후 후사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첩을 축첩할수 있도록 허용하고[10], 궁궐의 상궁 범씨를 비롯한 몇인의 궁녀들을 그에게 하사하였다. 박영효는 상궁 범씨에게서 아들 박진서와 박일서를 보았고, 둘째 아들 박일서의 딸이 바로 뒤에 의친왕의 왕자와 결혼하는 박찬주이다.

[편집] 갑신정변
동지 서재필
이 부분의 본문은 갑신정변입니다.

개화당 요인들과 협의하여 1884년(고종 21년) 음력 10월 17일 우정국 청사의 낙성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내각이 조직될 때 친군 전후영사 겸 좌포장이 되어 군사와 경찰의 실권을 장악했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정변이 실패하자 역적으로 몰려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미처 피신하지 못한 그의 어머니는 처형당하였고, 아버지 박원양은 투옥된다. 그해 11월 이조(吏曹)의 탄핵으로 아버지인 대호군(大護軍) 박원양(朴元陽), 형 사사(司事) 박영호(朴泳好)는 삭탈관직당한다.

아버지 박원양은 감옥에 갇혔다가 아사하였다. 김구의 백범일지나 조병옥의 나의 회고록에 의하면 박원양은 감옥에서 섬거적(볏짚으로 만든 거적)을 뜯어 먹다가 굶어죽었다고 기록해 놨다. 갑신정변이 일본군의 무기력과 배신행위, 민씨정권이 끌어들인 청나라군에 의해 실패하고 개혁인사들이 처형당하자 실망한 그는 개혁 의지를 포기하게 된다.

[편집] 일본 망명 생활
일본 망명생활 중 일본인 수행원과 함께 (오른쪽에 앉은 이가 박영효)

그는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김옥균 등과 함께 도피, 윤치호와 김옥균은 중국으로 건너가고 박영효는 서광범, 서재필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1885년 잠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일본으로 되돌아왔다. 후일 허정에 의하면 양반가 출신이라 막노동을 하는 것을 힘들고 불쾌하게 여긴 것이 박영효와 서광범이 귀국한 원인이라 했다.

망명생활 중 그는 이름을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泳春)로 개명(改名)하고, 1888년 메이지 학원(明治學園)의 영어과를 졸업하고 요코하마(橫濱)로 건너가 미국교회에 출석하며 동·서양의 서적들을 두루 읽었다.[11] 1888년(고종 25년) 초 일본에 체류하던 그는 국정 전반에 걸친 장문의 개혁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이른바 '건백서'(建白書)라 불리는 것으로 봉건적 신분제도의 철폐, 근대적 법치국가의 확립에 의한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3년간의 추적 끝에 부쳐진 편지의 주소지를 알아낸 수구파 대신들은 1892년 박영효를 암살하기 위해 본국으로부터 이일직(李逸稙), 권동수(勸東壽), 권재수(勸在壽) 등 수십여 명이 그를 암살하기 위한 자객으로 보내졌으나, 사전에 정보를 탐지한 일본 정부 측의 암살단 도착 소식을 접한 뒤 바로 피신하여 암살기도는 미수에 그쳤다. 일부 자객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일부는 다시 조선으로 도피했다. 1893년 후쿠자와 등 일본 유력 인사들의 후원금과 협조를 얻어 교포학생 교육지원을 목적으로, 유학생들의 기숙사로서 친린의숙(親隣義塾)을 설립하여 경영하였다.

[편집] 암살 위협

1893년조선정부 내 수구파 대신들의 밀명을 맡고 이일직(李逸稙) 등이 박영효를 암살하고자 친린의숙에 잠입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이후 그는 일본사무라이를 경호원으로 고용하여 대동하고 다녔다.

1894년 2월김옥균이홍장과 담판을 지으려고 청나라 상하이로 건너갔다. 3월초 그가 오사카 역에 도착하자 조선에서 온 자객인 이일직(李逸直)과 홍종우(洪鍾宇)가 마중을 나왔다. 이일직은 자신을 청나라와 일본을 왕래하면서 약재상을 하는 사람이고, 홍종우는 프랑스 유학생이며 자신의 친척이라고 거짓으로 소개했다. 그들은 평소부터 김옥균의 행적을 잘 알고 있고 그들을 존경해 왔기 때문에 자신들이 청국행 경비를 제공하겠노라고 말했다. 김옥균은 한눈에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객임을 알아보았지만 이들을 역이용하려는 생각으로 도움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김옥균이 눈치챈 것을 알자 이일직은 홍종우가 동행하며 김옥균을 도와줄 것이라고 말해 그의 의심을 줄이려고 했다. 그러나 사실은 김옥균이 상하이로 떠난 것을 확인한 후에 박영효까지 암살하려는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94년 2월 이일직은 박영효를 암살하러 갔다가 그가 민첩하게 일본인의 집에 숨는 바람에 이일직은 그를 찾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일본경찰의 수사 결과 이들을 지휘한 민영소의 사주가 밝혀지기도 했다.

[편집] 귀국과 정치 활동

이 부분의 본문은 갑오개혁입니다.
이 부분의 본문은 을미개혁입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면되자 그해 8월에 귀국한 뒤 12월에 내부대신에 임명되어 7개월가량 재임했다.[12] 일본의 후원과 압력으로 귀국한 그는 김홍집의 친일 내각(제2차 김홍집 내각)에 내부대신으로 입각하여 개혁을 시도했으나 김홍집과 심한 갈등을 계속하다가 김홍집을 실각시킨 뒤 자신이 총리대신서리가 되었다. 곧이어 개각에서 실권을 장악한 뒤 약 200여 일 동안 을미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행정·군사·교육 면에의 개혁을 추진하기 위하여 나라의 자주성을 강조하고, 일본식보다도 오히려 구미식의 채택을 주장했다. 이무렵 삼국간섭으로 일본세력이 퇴조하자 조선정부는 친러시아 정책을 폈다. 불안을 느낀 박영효는 왕실과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훈련대로 하여금 왕실을 호위하게 했으나 고종에 의해 거절당하였다.

1895년 3국간섭으로 일본 세력이 퇴조하자 불안을 느껴 이노우에 가오루의 권고를 무시하고 김홍집파를 내각에서 퇴진시킨 뒤 독자적으로 을미개혁(제2차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1895년 3월에는 김학우 암살 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체포된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을 체포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거리 시위와 일본영사관, 청나라영사관 등을 찾아다니며 손자 이준용의 석방, 구명 운동을 벌였고, 박영효와 서광범의 이준용 심문 과정에서 악형한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여론의 악화를 초래했다.

도리어 그는 명성황후 암살 음모를 꾸미는 것처럼 루머가 날조되어 1895년(고종 32년) 반역 음모사건(고종 양위 사건) 관련자로 지목되고, 연이어 7월 왕비시해음모죄로 궁지에 몰리자 신응희(申應熙)·이규완(李圭完)·우범선(禹範善) 등 일행 20여 명과 함께 일본으로 다시 망명하였다.

[편집] 을미사변과 을사조약

이 부분의 본문은 을미사변입니다.

1895년 8월 을미사변 소식을 접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을미사변에 가담한 조선인 협력자로 지목되었다. 8월에 발생한 을미사변에 그가 직접 가담한 혐의가 보이지 않자 1898년 12월 16일 중추원 회의에서 박영효를 불러들여 정부요직에 등용하자는 건의가 나왔다. 그러나 고종은 이를 거절했다. 도리어 박영효의 정계복귀를 꾀했다는 이유로 고종과 척족 대신들은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독립협회의 해산 이후 그는 무력으로 정부를 전복해야 된다고 결심하여 무력 쿠테타를 계획, 국내의 정보를 입수하는 한편 1900년(광무 7년) 7월에 고베(紳戶)에서 이승린(李承麟)·이조현(李祖鉉)·김창한(金彰漢) 등을 불러모으고 망명중인 동지를 규합해 정부를 전복하고 고종황제를 양위시킨 뒤 의화군(義和君) 이강(李堈)을 국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다. 그리고 한규설과 윤석준(尹錫準)에게 자금조달을 부탁할 목적으로 그해 11월 극비리에 이승린과 이조현을 조선에 파견했지만 발각되어 그의 정계복귀공작은 수포로 돌아가고, 궐석재판에서 교수형이 선고되었다.

1905년 일본 체류 중 을사 보호 조약 소식을 접한다. 1907년(융희 1년) 오랜 망명 끝에 6월 초순 비공식으로 귀국해 부산에 정박, 비밀리에 체류하고 있던 중 6월 7일 한성으로 올라가 궁내부 일본인고문 가토(加藤增雄)와 접촉하고 한편으로는 박제순 등과도 교류, 박제순 내각의 알선으로 귀국하여 사면을 받고, 7월에 궁내부대신으로 임명되었고, 헤이그 밀사사건 후에 벌어진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이완용(李完用) 내각의 고종 양위압력을 무마시키려다 실패했다. 이후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대신을 하다가 순종 즉위 후 군부 내의 반양위파(反讓位派)와 공모해 고종의 양위에 찬성한 정부대신들을 암살하려 했다는 대신 암살 음모사건으로 재판에 회부, 그러나 그는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였다.

[편집] 이완용의 탄핵과 유배

정적이자 경쟁자인 이완용

순종 즉위 직후 다시 조정에 출사한 박영효는 1907년 7월 29일 궁내부대신에서 면직되고,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칙임관(勅任官) 1등에 임명된다.

고종 양위식 직후 일본군의 출동으로 시위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이완용과 법부대신 조중응은 '궁내부 대신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은 박영효를 처벌하라'는 상소를 새 황제 순종에게 올렸다.[13]

이완용은 상소문에서 '이번에 황제의 위를 물려준 것은 태황제의 순수한 심정에서 나온 것이며 종묘사직이 억만년토록 공고하게 될 기초가 여기에 있으므로 경사롭게 여기고 기뻐하지 않은 신하와 백성이 없다 그런데 박영효가 그 직책을 회피했으니 그 죄를 물어야 한다'고 사태를 완전히 왜곡하는 주장을 했다.[13]

순종은 물론 그대로 허락했다. 순종이 한일병합 때까지 3년여 황제로 재위한 동안 내각에서 올린 상소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수정 또는 보완을 지시한 경우는 거의 없다. 그저 '올린 대로 처리하라'는 것이 한결 같은답변이었다. 순종은 그것을 거부하거나 보완을 지사할만한 지적 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저 황제의 자리에 앉아 있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토가 기를 쓰고 그를 황제로 올린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14]

이완용의 상소에 따라 박영효는 역시 황제 대리 의식 집행을 거부한 시종원경 이도재, 전 홍문관 학사 남정철과 함께 법부에 구속되었다.[14] 이때 감옥에 갇힌 박영효가 배탈이 나 고생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토가 그에게 약을 보냈으나 박영효는 한국에도 약이 있다면서 되돌려 보냈다. 박영효는 경무청에서 심문을 하자 "총리대신 이완용 씨를 역적이라고 말했을 뿐 죄지은 것이 없다"고 호통을 쳤지만 결국 유배형을 받고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14]

보안법 위반의 죄목으로 유배형을 선고받고 제주도에 1년간 유배된 그는 1908년 유배에서 풀려난다. 그러나 서울 상경이 금지되었고, 1910년 육지 상륙을 기획했으나 실패한다. 1910년 8월 경상남도 마산에 머물러 있다가 한일 병합을 맞았다.

[편집] 한일 병합 이후

[편집] 일제 강점기 초반

한일 병합 조약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마산에 체류해 있다가 한일 합방 소식을 접했다. 이후 그는 체념하였고, 1910년 10월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일본 제국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와 매국공채 28만 원을 받고, 조선 귀족에 편입되었다. 1911년 조선귀족들의 친목단체인 조선귀족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조선은행의 주식을 매입하여 1918년에는 조선은행 이사에 피선되었다.

1919년 3월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 지도자로 서명을 요청받았으나 실패할 것이라며 거절했다. 그뒤 3·1운동 뒤 일제의 문화통치에 따라 유민회(維民會)·동광회(同光會)·조선구락부·민우회(民友會) 등 친일단체와 관계를 맺었다.

1920년 김성수 등의 주도로 결성된 동아일보의 창립 발기인의 한사람으로 초빙되었으며, 그 해 동아일보의 초대 사장으로 취임한다. 1921년 중추원고문에 선임되고, 1926년 중추원 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그해 이완용이 사망하자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편집] 말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귀족원 의원(1932년)과 조선식산은행 이사,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 선전 심사위원, 조선농회 부회장 및 조선농회 회장 등을 지내며 친일행위로 시종하였다.[15]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16][17]

의친왕의 아들 이우가 일본 왕실이나 일본 귀족과의 결혼을 거부하자, 그는 중재에 나섰는데, 이때 그는 타협의 조건으로 자신의 손녀와 결혼하는 안을 제시했다 한다. 그러나 다른 설에 의하면 이우가 이미 그의 손녀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1935년 5월 3일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이우와 결혼하였다.

1939년 정 2위 훈 1등으로 사망하였다.[7] 사망 당시 그는 후작·중추원부의장직에 재직중이기도 했다.

[편집] 사후

1962년 독립유공자 서훈 대상으로 선정되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후작 등을 역임한 점이 감안되어 서훈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사후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 수록되었다.

[편집] 후손과 묘

박영효에게는 여러 부인이 있었는데, 그 중 셋째 부인 범(范)씨와 사이에서는 2남 1녀를 두었다. 자녀 가운데 박흥원(朴興元)은 불가에 귀의해 서울 봉원사 주지로 있었으며, 박흥원의 아들 박혜륜(朴彗輪) 역시 승려이다. 범씨의 딸 박묘옥(朴妙玉)은 인천의 부호 한갑현과 결혼하여 5남2녀를 두었다.[18]

그의 묘는 부산 사하구 다대동에 있었으나 그의 손자 박환범이 묘터를 팔고, 유골을 영혜옹주와 함께 화장하였다.[19] 그뒤 경기도 남양주군 화도면 마석리 모란공원 근처 야산에 돌무덤에 안치되었다. 옆에는 서자 박일서, 서손 박찬범의 묘소가 옆에 있다.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는 의친왕의 차남 이우의 처가 되었다.

[편집] 가족 관계

손녀 사위 이우
  • 증조부 : 박해수 (朴海壽)
  • 조부 : 박제당(朴齊堂)
  • 부 : 박원양(朴元陽, ? - 1884년)
  • 모 : 전주이씨(全州李氏, ? - 1884년)
    • 형 : 박영교(朴泳敎)
    • 형 : 박영호(朴泳好)
  • 부인 : 영혜옹주(永惠翁主, ? - 1872년 7월 4일, 철종의 서녀)
  • 첩 : 범씨(范氏)
    • 서자 : 박진서(朴振緖)
      • 손자 : 박찬범
    • 서자 : 박일서(朴日緖)
    • 며느리 : 박원희(朴元熙)
  • 첩 :
    • 서자 : 박흥원
      • 서손 : 박혜륜, 승려
    • 서녀 : 박묘옥(朴妙玉, 5남 2녀)
    • 서녀 사위 : 한갑현

[편집] 평가

[편집] 긍정적 평가

박영효는 반조선의 근대화에 이바지한 공을 평가하는 견해도 있으며, 뉴라이트 등은 박영효와 김옥균개화파청나라에 바치던 조공과 문벌제도의 폐지 등, 정치 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을 들어 근대화의 선각자로 평가하기도 한다.[20][21][22]

[편집] 부정적 평가

급진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그 밖에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어 지탄받았다.

[편집] 저서

  • 《사화기략》(使和記略)

[편집] 기타

그는 1882년 일본으로 건너가는 배 안에서 음양 팔괘를 보고 태극기를 최초로 도완, 제작하였다. 태극기는 그때까지 국기가 없던 조선의 국기로 채택되었다.

어윤중은 아버지 박원양의 문하생이기도 하다.[23]

[편집] 박영효를 연기한 배우들

[편집] 함께 보기

[편집] 주석

  1. 글로벌세계대백과》, 〈개화파의 개혁운동〉, 박영효.
  2. 에듀넷-브리태니커 학습백과, 박영효.
  3. 영혜옹주는 철종의 유일한 혈육이자 조선에서 가례를 올린 마지막 옹주였다.
  4. 부마였던 인물은 재혼이 불가능하며, 축첩을 하는 것도 불법이었다.
  5. 반민족문제연구소,《친일파99인》(돌베게, 1993년) 119쪽(윤해동 집필 부분)
  6. 김삼웅 (1995년 7월 1일). 《친일정치 100년사》. 서울: 동풍. ISBN 978-89-86072-03-7
  7. 임종국 (1991년 2월 1일).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서울: 돌베개, 64쪽쪽. ISBN 89-7199-036-8
  8. 일본에서 접한~: 이이화, 《한국사이야기22. 빼앗긴 들에 부는 근대화바람》(한길사, 2004) 46쪽.
  9. 1883년~:《고종실록》20년 3월 17일: 朴泳孝爲廣州府留守
  10. 조선시대 공주나 옹주, 군주, 현주와 결혼한 이는 재혼도 불가능했고, 축첩을 할수 없었다.
  11. 신앙 보다는 독서 목적의 교회 출석이었다.
  12.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521062449&Section=04
  13.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61페이지
  14.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62페이지
  15. 김삼웅 (1995년 7월 1일). 《친일정치 100년사》. 서울: 동풍. ISBN 978-89-86072-03-7
  16. 성강현. “‘조선공로자명감’친일 조선인 3백53명 기록 - 현역 국회의원 2002년 발표한 친일명단 일치 상당수”, 《일요시사》, 2004년 3월 18일 작성. 2008년 4월 16일 확인.
  17. 성강현. “3백53명 중 2백56명 명단”, 《일요시사》, 2004년 3월 18일 작성. 2008년 4월 16일 확인.
  18. 박영효 친필 붓글씨, 베일을 벗다!
  19. 박영효가 묻힌 부산에 생긴 태극기 공원
  20. JOINS | 아시아 첫 인터넷 신문
  21. 토론이 있는 인터넷신문 - 데일리안
  22. donga.com[뉴스]-[사설]역사인식의 지평 넓힐 뉴라이트 대안 교과서
  23. 고종 실록 23권, 고종 23년(1886 병술 / 청 광서(光緖) 12년) 7월 24일(을묘) 2번째기사

[편집] 참고자료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2월 1일). 〈박영효 :친일 거두가 된 개화파 영수 (윤해동)〉, 《친일파 99인 1》.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1-7
  •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개화파의 개혁운동〉
  • 《주간조선》, 1833호, 2004년 12월 16일.

[편집] 외부 고리

[편집] 참고 문헌

  • 철종실록
  • 고종실록
  • 순종실록
  • 순종실록 부록
  • 일성록
  • 승정원일기
전 임
이돈응
제1738대 한성부판윤
1882년 음력 12월 29일 ~
후 임
조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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