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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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재필 | |
| 출생 | 1864년 1월 7일 |
| 사망 | 1951년 1월 5일 |
| 사인 | 병사 |
| 거주지 |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충청남도 대덕군 서울시 샌프란시스코 펜실베이니아 주 윌크스베리 워싱턴 D.C. 필라델피아 |
| 국적 | |
| 직업 | 정치가, 의사, 독립운동가 |
| 배우자 | 뮤리엘 암스트롱 |
| 자녀 | 스테페니, 뮤리엘 |
| 부모 | 서광언(부), 성주 이씨(모) |
서재필(徐載弼, 1864년 1월 4일 ~ 1951년 1월 5일) 또는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 미국 귀화명)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정치인, 의학자이다. 종교는 기독교이다. 본관은 대구, 호는 송재(松齋)이며, “피제손”[1]이라고도 자칭했다. 전라남도 보성군 출신.
목차 |
[편집] 생애
[편집] 갑신정변 이전
1864년 외가가 있는 전라남도 보성에서 서광효와 성주 이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서재필이 태어나던 해, 아버지 서광효가 진사 시험에 합격하자, 경사가 겹쳤다 하여 서재필의 아호를 ‘쌍경(雙慶)’이라 정하였다. 하지만, 서재필은 부모와 그리 오래 지내지 못하였다. 서광효의 6촌 형제 중 서광하가 아들이 없자, 서광효는 7살의 서재필을 서광하의 양자로 보낸 것이다.[2]
서광하의 부인이자 서재필의 양어머니는 세도가문 안동 김씨 출신이었는데, 서재필을 입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서울에서 이조참판 벼슬을 하고 있던 동생 김성근의 집에 서재필을 보낸다. 그리하여 서재필은 김성근의 집에 머물면서 과거 시험을 준비하였다. 18세 되던 1882년 과거(증광시, 병과3)에 급제하였다. 처음 받은 직책은 경서 인쇄 및 관인을 관리하는 ‘교서관 부정자(校書館 副正字)’였다.
벼슬에 오르면서 서재필은 본격적으로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를 갖게 된다. 서재필은 먼 친척 뻘 되는 서광범을 통해서 개화파의 중심인물인 김옥균과 조우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옥균은 12살 연하의 서재필을 ‘동생’이라 불렀고, 서재필은 김옥균을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당시 개화파는 서울 서대문에 자리한 봉원사를 중심으로 결속하고 있었다. 봉원사에는 개화파 승려인 이동인이 주지로 있었는데, 부산 출신인 이동인은 어려서 일본말을 배워 일본 지식인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고, 서양 문물에 관한 서적들을 일본에서 들여와 당시 개화파들에게 제공하였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유길준, 이동인 등은 모두 한때,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문하생이었기 때문에 서로 잘 알고 있었다. 후일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봉원사에 비밀리 모여 서양 문물에 대한 책을 읽고 시국을 논하면서 자연스럽게 ‘개화당’을 형성하여 결속을 다지게 된 것이다. 서재필은 이 중 가장 어린 나이였다.
국방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김옥균의 권유로 1883년 서재필은 14명의 평민출신 청년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 당도한 서재필 일행은 6개월 간 게이오 기주쿠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6개월 간은 토야마 육군 유년학교에서 신식 군사 훈련을 받았다. 1884년 조선으로 돌아온 사관생도들은 고종에게 신식 사관학교를 설립할 것을 간청하였고, 고종은 서재필을 사관장으로 삼아 조련국(操鍊局)을 만들 것을 윤허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청나라와 명성황후 측의 반대로 결국 무산되었다. 서재필을 비롯한 사관생도들은 궁궐수비대로 편입되었다.
[편집] 갑신정변
1884년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과 더불어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신분제 폐지, 문벌 폐지, 청나라에 잡혀간 대원군의 복귀 등을 담은 혁신 정강을 발표하였다. 일본의 토야마군관학교에서 훈련받은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전위대로 나서 공을 세웠고, 병조참판 겸 정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갑신정변 당시 그는 토야마군관학교에서 같이 훈련받은 생도들과 함께 한때 개화당에 참여하였다가 배신한 환관 유재현를 처단하였고, 문신 조영하(趙寧夏)와 민태호(閔台鎬)를 고종이 지켜보는 데에서 살해하였다.[3]
그러나 갑신정변이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나자, 일본으로 도피하였다가 일본에서도 상황이 좋지 않아 일본 정부가 조선의 망명 정객들을 냉대하자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미국 선교사들이 이들을 도왔다.[4] 갑신정변 주역은 역적으로 몰렸고 서재필의 가족들은 모두 살해당하였다.[4] 서재필의 부모를 비롯하여 3명의 친형제 등 가족들이 사약을 받거나 사람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였다. 관가에 기생으로 보내지기로 된 서재필의 부인은 죽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여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당시 서재필에게는 두 살난 아들이 있었는데, 나라에서 굶겨서 죽였다고도 하고, 아이가 굶주림에 지쳐 죽은 어머니의 젖을 물었는데 어머니 몸 속에 있던 독이 아이 몸 속에도 퍼져 죽었다는 설도 있다.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실패하고 해외로 망명할 때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일본에 갔다.[5] 서재필 자신은 1년 간 일본에 피신해 있었지만, 갑신정변 주역들을 둘러싸고 일본-청나라 사이의 외교문제가 생기자, 김옥균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선교사가 써준 소개장을 들고 샌프란시스코로 넘어가게 된다. 조병옥에 의하면 배를 타고 미국에 도착하였으나 상륙하자마자 낮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닥쳐올 생활위협을 헤쳐나갈 자신이 없었던 박영효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서광범도 얼마 동안은 언더우드 박사의 후원으로 뉴욕에 체류하며 지냈으나, 결국 앞서 돌아간 박영효의 뒤를 따라 그도 일본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5] 서재필은 미국생활을 견뎌냈으며 이역만리를 다니며 고학의 길을 찾아 헤맸다 한다.[5]
나중에 갑신정변을 회고하면서 서재필은 갑신정변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두 가지 이유를 지적하였는데, 첫 번째는 개화파들이 일반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외세, 특히 일본을 너무 쉽게 믿고 의존하였다는 점이다. 이후 서재필의 활동을 보면 이 두 가지 각성이 서재필에게 얼마나 깊이 각인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편집] 1차 미국 망명
영어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곳에서 서재필이 처음 구한 일자리는 가구점의 광고지를 붙이는 일이었다. 서재필은 다른 노동자들이 하루 5마일을 다닐때 10마일을 뛰어 다니면서 일했다. 저녁에는 YMCA야간학교를 통해, 주말에는 교회를 다니며 영어를 배웠다. 낮엔 막일을 하고 밤엔 영어를 배우던 서재필은 그러던 어느 날 운 좋게 후원자를 만나게 된다. 사립고를 마치고 워싱턴 컬럼비안대(지금 조지워싱턴대) 의학부를 졸업했다.[4] 서재필은 어느 교회 신자를 통해 홀렌벡(John Wells Hollenbeck)이라는 사업가를 소개받는다.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탄광업을 통해 많은 돈을 번 대부호이자 자선사업가였던 홀렌벡은 서재필에게 미국에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1886년 서재필은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펜실베이니아 주 윌크스 배리(Wilkes-Barre)에 당도하여 "해리 힐만 아카데미(Harry Hillman Academy)"라는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서재필은 해리 힐만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수학 등 여러 과목에서 우등생이 되었고, 특히 웅변을 잘 하여 웅변대회에서 입상도 하고, 졸업식에서는 대표로 고별 연설도 하였다. 서재필은 교장 집에서 집안 일을 도우며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는데, 마침 법관으로 퇴임한 교장의 장인이 함께 살고 있어서 그에게서 미국의 역사 및 민주주의 제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서재필은 1888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되는데, 홀렌벡이 손수 지어주었다는 설도 있다. 필립 제이슨은 "서재필"을 거꾸로 하여 "필재서"로 만든 다음, "필"을 "필립(Philip)"으로 "재서"를 "제이슨(Jaisohn)"으로 음역한 것으로, Jaisohn이라는 성의 철자는 미국인들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고유한 철자 표기였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사립고를 다녔다.[4] 서재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홀렌벡은 서재필을 불러 놓고, 이미 입학허가를 받은 라파예트(Lafayette) 대학에서 일단 공부를 마치고 그 다음 프린스턴 신학대를 졸업하여 조선에 선교사로 돌아가겠다는 것을 서면으로 약속하라고 말했다. 그래야만 앞으로 더 서재필을 지원해 주겠다는 것이다. 당시 역적의 신세에 묶여 조선으로 돌아 갈 수 없었던 서재필은 홀렌벡의 서면 약속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은인과 결별하게 된다.
대학에 다닐 무렵, 서재필은 하루 3불의 품삯을 받고 유리창닦이 등 잡역부로 노동을 하였고, 노동의 여가로 틈타서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했다 한다. 그 뒤 교회당을 찾아 신앙을 발견하려고 꾸준히 노력하기도 했다.[6] 그러나 서재필은 라파예트 대학교를 중퇴하고 일자리를 찾아 워싱턴으로 떠났는데, 그가 찾은 일자리는 미육군 의학박물관에서 중국과 일본에서 온 의서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의학 서적을 번역하면서 서재필은 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1889년 워싱턴의 컬럼비안 대학(Columbian University, 현 조지워싱턴대학의 전신) 야간학부에 입학, 1892년 미국에서는 한인 최초로 세균학 전공으로 의학사(M.D.)가 되었고, 1893년 정식 의사면허를 받았다. 유태인 및 유색 인종은 의대에 입학할 수 없었던 당시 사정에 비추어 보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컬럼비안 대학 재학 중이던 1890년 6월 10일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게 되었는데, 황인종에게 시민자격을 부여하지 않던 당시의 제도에 비추어보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후 미국 초대 철도우체국장의 딸과 재혼하고 미국 주류사회에 편입됐다.[4]
서재필은 1894년 한 호텔에서 뮤리엘 암스트롱(Muriel Armstrong)을 만나 연애를 시작, 같은 해 6월 결혼식을 올렸다. 뮤리엘은 제임스 뷰캐넌 전 대통령과 사촌 형제이자 남북전쟁 당시 철도우편국을 창설했던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George Buchanan Armstrong)의 딸로 그 아버지는 이미 작고한 상태였지만, 의붓아버지가 워싱턴에서 유명 인사였던 탓에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한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 후, 서재필과 뮤리엘 암스트롱은 두 딸 스테파니(Stephanie Jaisohn)와 뮤리엘(Muriel Jaisohn)을 두었다. 서재필은 의사 개업을 하였으나, 인종차별로 생계유지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신혼 살림도 워싱턴에 있던 조선공사관에 방을 빌려 차렸다. 1895년 가을, 서재필은 10년전 헤어졌던 박영효를 워싱턴에서 만나게 되고, 그의 권유로 같은 해 12월 조선으로 돌아가게 된다.
[편집] 독립신문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명성황후를 정점으로 한 민씨 정권이 몰락한 후 개혁내각이 들어서자 박영효의 권유로 망명 10년 만인 1895년 12월 조선으로 귀환하였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일본 동경의 토야마 사관학교를 방문하였고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났으며, 다시 일본을 출발하여 12월 25일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외무협판(지금의 외교부 차관)자리를 제수받았으나 거절하고, 형식적으로만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신문인 《독립신문》을 순한글과 영어로 발간하였다. 서재필은 독립신문 창간호에서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 여성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언문'을 공식적인 인쇄 언어로 채택하며 띄어쓰기를 도입한다고 밝혔다. 독립신문을 통해 서재필은 독립된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내부적으로는 교육 확대 및 산업 발전을 강조하였고, 그를 위해 의무 교육 도입, 서양 과학 기술의 도입, 식생활과 위생의 개선에 대한 여러 가지 안들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한 쪽에 의존하면 조선이 위험에 처할 수 있으니, 외부적으로는 중립외교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일 이외에도, 서재필은 목요일마다 배재학당에 나가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등의 학생들에게 세계사를 가르쳤고, 학생 토론 모임인 협성회를 지도하였다. 그리고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고, 이 일을 집행하기 위해 이완용을 비롯한 정부 관료 중심의 독립협회를 조직했다. 초기 관료 중심의 독립협회를 탈바꿈시켜 대중 토론회를 조직하였고, 이 토론회는 만민공동회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독립협회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의회 설립 및 입헌군주제로 개혁을 추진하였다.[7]
그러나 수구파가 다시 정권을 잡자 1898년 러시아 및 일본의 추방 압력과 고종을 비롯한 대한제국 정부의 권유로 독립신문을 윤치호에게 인계하고 미국으로 돌아간다.[4]
[편집] 2차 미국 망명
미국-스페인 전쟁에 군의관으로 잠시 참전한 이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해, 나중에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재정적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고등학교 동창과 동업으로 문구 및 인쇄 사업을 시작하였고, 10년 후에는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적으로 Philip Jaisohn & Co. 를 운영했다.
1919년 3·1 운동 소식을 듣고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의회(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하였다. 1919년 4월 13일에서 15일까지 3일 동안 열린 이 행사에는 이승만, 정한경, 유일한, 조병옥, 노디 김, 안창호가 설립한 국민회 간부 등 150여명의 한인들이 참여하였으며, 서재필과 개인적 친분이 있던 미국인 인사들도 참석하였다.
서재필은 제1차 한인의회에 대표 기도자로 참석한 Floyd Tomkins 목사를 설득,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고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지지할 것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였다. 한국친우회는 당시 미국내 정계 및 학계에 포진한 친일세력에 대항하여 조직된 기독교 네트워크로 미국 내 20여개 도시에 지부를 두었으며,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에도 각각 하나의 지부를 두었다. 한국친우회에서는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박해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였고, 미국의 정치인사들이 이를 시정하기 위해 일본에 압력을 행사할 것을 요구하였다. 3·1운동 이후 서재필은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재산을 다 써버리는 바람에, 예순이 넘은 고령으로 생계를 위해 다시 본업인 의사로 돌아가 일해야 했다.[4]
[편집]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1920년 3월 1일에는 한국친우회 뉴욕지부 행사에 약 1000여명의 회원이 참석하여 한국의 3.1운동을 지지하는 집회를 열었다.
미국에서 일본이 벌이고 있던 조직적 선전활동에 대항하고, 미국인들에게 조선의 사정을 알리기 위해, 자신이 사용하던 사무실에 한국통신부‘Korea Information Bureau’를 설립한 후 《Korea Review》를 발간하였다. 서재필은 《Korea Review》 통해 미국 대통령에게 공개 편지를 보내 1882년 맺어진 조미수호조약을 준수하라고 요구하였다.
1921년 이승만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워싱턴에서 열린 평화군축회의에 파견되었다. 조선독립문제를 국제회의 석상에서 공식적으로 다루어줄 것을 요구하는 《Korea's Appeal》을 각국 대표들에게 제출하였지만, 일본의 방해와 미국의 반대로 끝내 무산되었다. 1922년 조병옥이 뉴욕 주에 한인교포들의 모임인 한인회를 조직하자 이승만과 함께 이를 지원하였다.[5] 한편 한인회의 총무로 활동하면서 시간적 여유를 얻은 조병옥은 서재필을 정치적으로 보좌하기도 하였다.[5]
서재필은 독립운동을 위해 몇 년동안 사업을 돌보지 못했고, 개인 재산을 많이 지출함으로써, 1924년 법적인 파산을 맞게 된다. 파산으로 극도로 생계가 곤란해진 서재필은 1926년 62세의 나이에 펜실베이니아 대학에 특별학생으로 입학하여 의업을 재개하였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승리가 조선의 해방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77세에 미군 징병검사관으로 자원봉사하기도 했다.
[편집] 해방 후
이승만을 견제할 만한 인물을 찾고 있던 미군정의 하지 중장은 서재필을 하지의 고문 겸 남조선 과도정부의 특별의정관으로 초빙하였다. 김규식도 서재필의 귀국을 원하고 있었다. 과도입법의회 의장 김규식의 추천을 받고 서재필에게 여러 차례 귀국 요청을 하였다.[8][9] 몇 차례 요청을 고사했던 서재필은 미군정 최고고문 겸 과도입법의회 특별의정관으로 초빙받아 1947년 7월 1일, 귀국하였다. 그날 오후 4시에 인천에 상륙했다. 부두에는 이승만, 김규식, 안재홍, 여운형 등이 마중을 나왔다. 서재필은 인터뷰에서 “한국인들은 비누 한 장도 만들 줄 모르면서 어떻게 독립 정부를 갖기를 기대할수 있는가”라고 하였다.[8] 이후 하지 중장에게 자문을 하고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하였으며 미 군정청 최고고문이 되었다.[4] 그리고 라디오 연설을 통해 민주주의, 교육,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서재필은 1948년 3월 14일자 인터뷰에서 이승만을 겨냥해 극우적인 운동, 거짓말, 거짓 선전 등과 같은 언어들을 구사하며 격렬하게 비난하였다.[10][11]
1948년 남한 단독 정부 수립 결정이 나고 대통령 선거 일정이 잡히자 1948년 6월 10일 60여 명의 국회의원이 참가하여 무소속구락부를 결성했는데 이들 중 일부는 서재필을 대통령으로 옹립하는 데 가담하였고 서재필이 고국에 남으라는 국회 결의의 통과를 주도하기도 했다. 6월 29일에는 서박사 추대 연합준비위원회까지 만들어졌다.[12] 백인제, 최능진, 김대중을 비롯한 1,929명이 서재필에게 초대 정부 대통령으로 추대하고자 하니 대통령 출마를 승낙해 달라는 내용의 요청서를 보냈으나, 서재필은 '미국 시민으로 남겠노라'며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편집] 만년
서재필은 미국으로 떠나기 수일 전 기자 김을한에게 '우리 한국사람은 단결할 줄을 모르고 당파싸움만 하다가 일을 그르치는 수가 많은데, 갑신정변때나 지금이나 그 점만은 똑같으니 한심한 일이오'라고 하였다.[12] 이념 대립을 딛고 통일된 조국을 건설해달라는 당부를 남기고 1948년 9월 11일 미군정을 따라 인천항을 떠났다. 서재필은 미국으로 떠나는 날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인민들은 정부에 맹종만 하지 말것이며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고 인민이 곧 주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13]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5일 전쟁의 충격 속에 87세의 일생을 마쳤다.
[편집] 사망 이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았고, 1994년 대한민국의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본가는 충남 논산이었으나 출생지는 외가가 있던 전남 보성이어서 2008년 7월 8일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에는 ‘서재필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14] 기념공원은 넓이 4만 5700제곱미터이며, 그 안에는 당시의 외가를 복원한 ‘서재필 기념관’이 세워져 있고,[14][15] 그밖에도 독립문, 사당, 조각공원, 동상, 야외공연장 등이 들어서 있다.[14] 1975년 미국 필라델피아에 서재필기념재단이 만들어져 의료, 봉사, 장학 및 교육, 지역사회 활동을 하고 있으며, 필라델피아 근교인 미디아에 서재필박사가 살던 집을 서재필기념관으로 만들어 개방하고 있다. 2008년 5월 미국 워싱턴에 동상이 세워졌고[4][16] 워싱턴시는 5월 6일을 ‘서재필의 날’로 지정했다.[4]
[편집] 평가와 비판
[편집] 1940년대의 평가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5%가 서재필을 지목하였다.[17] 그뒤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때는 지목되지 않았고,[17]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118표로 3위를 하였다.[17]
조병옥은 그가 우리 한민족의 한사람으로서 제일 먼저 미국식 민주주의와 독립정신을 배우고 나가서는 그 현실에서 생활할 수 있었던 최초의 선각자라고 평가하였다.[18]
[편집] 함께 보기
[편집] 주석
- ↑ 주진오 (1993). 〈교과서의 독립협회 서술은 잘못되었다〉, 역사문제연구소 편: 《바로 잡아야 할 우리 역사 37장면 1》. 역사비평사, 31~40쪽 “그러나 그는 귀국 후 단 한 번도 자신을 이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고 필립 제이슨 또는 피제손으로 표기하였다”
- ↑ 김도태 (1948-07). 《서재필박사자서전》. 서울: 수선사, 31~32쪽
- ↑ 갑신정변 다시 보기 - 근대화 10년 늦춘 '실패한 혁명', 2003-03-17, 프레시안.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이선민 논설위원. “<만물상> 워싱턴의 서재필 동상”, 《조선일보》, 2008년 5월 7일 작성. 2008년 8월 9일 확인. (한글)
- ↑ 가 나 다 라 마 조병옥 《나의 회고록》(조병옥, 도서출판 해동, 1986) 75페이지
- ↑ 조병옥 《나의 회고록》(조병옥, 도서출판 해동, 1986) 76페이지
- ↑ 유영렬, 〈독립협회의 민권사상연구〉, 《사학연구》22호, 한국사학회, 1973, 68~71쪽.
- ↑ 가 나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41~42쪽
- ↑ 이정식, 《구한말의 개혁, 독립투사 서재필》(서울대출판부, 2003) 357~360쪽.
-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57쪽
- ↑ 이정식 《구한말의 개혁 독립투사 서재필》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363~365쪽
- ↑ 가 나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58쪽
-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59쪽
- ↑ 가 나 다 ““보성군에 서재필 기념공원 개관식 열려””, 《나라사랑》, 2008년 8월 1일 작성, pp. 11면 3단 아래. 2008년 8월 9일 확인. (한글)
- ↑ “서재필 박사 큰 뜻 함께 느꼈으면…” , 서울신문.
- ↑ 서재필 동상 내달 워싱턴서 제막, 동아일보
- ↑ 가 나 다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26~228쪽 참조.
- ↑ 조병옥 《나의 회고록》(조병옥, 도서출판 해동, 1986) 75페이지
[편집] 참고 자료
- 임창영, 《서재필 박사 전기》(공병우 글자판 연구소, 1987)
- 이정식, 《구한말의 독립투사 서재필》(서울대 출판부, 2004)
- 이광린, 〈서재필의 개화사상〉, 《동방학지》Vol.18,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78
- 조정희, 〈개화기 서재필의 사상에 대한 고찰〉, 《공자학》Vol.9, 한국공자학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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