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
| 서재필 | |
| 출생 | 1864년 1월 7일 |
|---|---|
| 사망 | 1951년 1월 5일 (86세) |
| 사인 | 병사 |
| 거주지 |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충청남도 대덕군 한성부 샌프란시스코 펜실베이니아 주 윌크스베리 워싱턴 D.C. 필라델피아 |
| 국적 | |
| 직업 | 언론인, 교육인, 정치가, 의사, 작가, 상인, 독립운동가 |
| 종교 | 개신교 |
| 배우자 | 무리엘 암스트롱 (Muriel Amstrong) |
| 자녀 | 아들 요절, 딸 스테파니, 뮤리엘 |
| 부모 | 서광하(양부), 안동 김씨(양모)[1] |
| 친척 | 친동생 서재창, 여동생 서기석, 일족 서광범, 양 외삼촌 김성근 |
서재필(徐載弼, 1864년 1월 7일 ~ 1951년 1월 5일) 또는 미국 귀화명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은 대한제국의 정치인, 언론인이자 미국 국적의 한국 독립운동가, 언론인, 정치인, 의학자였다.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했다.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일본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가 망명 생활을 했다. 후에 귀국하여 독립 협회를 조직했다. 이후 독립협회를 통해 토론회와 강연회, 상소 활동, 집회 및 시위 등을 주도했고, 민주주의와 참정권을 소개하고, 신문물 견학을 위한 유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는데, 후일 이 신문의 창간을 기념해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지정하였다.
그의 개화 계몽 사상을 견제하던 고종에 의해 강제 출국된 뒤 미국에 체류하며 대학을 다니며 의사로 활약했다. 한일 합방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했으며, 이승만, 안창호 등과 재미한국인 지도자로도 활동했다. 광복 직후 귀국하여 미군정과 과도정부의 고문역을 역임하다가 1947년 출국 후 미국에서 병사하였다. 김성근(金聲根)의 문인이다.
갑신정변의 주동자라 하여 그의 두 형과 부모는 자결했고, 옥에 갇힌 그의 본처 역시 자결했다. 당시 군대에 있던 그의 동생 서재창 역시 처형되었다. 그때 그의 맏형 서재춘의 아들 중 살아남은 유일한 조카가 혈통을 이어 그 후손이 현존하고 있다. 본관은 대구, 호는 송재(松齋)·쌍경(雙慶)이며, 영문명은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일명 “피제손”[2]이라고도 자칭했다. 필명은 오시아(N. H. Osia)[3]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태어났고 본가는 충청남도에 있었으므로 충남 출신으로도 간주된다. 그는 한국인 출신 최초의 의학박사이기도 했다.
목차 |
[편집] 생애
[편집] 생애 초기
[편집] 출생과 가계
서재필은 1864년 1월 4일 외가가 있는 전라남도 보성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에서 진사 달성 서씨 서광효(徐光孝)와 부인 성주 이씨의 5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서재필의 출생 연도는 정확하지 않아 1864년생 설 외에도 출생연도가 1866년 10월 28일이란 설도 있다.[4] 그가 태어나기 전 생모 성주 이씨는 초당 후원의 뽕나무를 큰 용이 감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5] 한다.
그의 가계는 명문 거족이었으나 아버지 서광효는 진사시에 합격했을 뿐 관직에 나가지는 않았다. 서재필이 태어나던 해, 아버지 서광효가 진사 시험에 합격하자, 경사가 겹쳤다 하여 유년기에 서재필의 아호를 ‘쌍경(雙慶)’이라 정하였다. 하지만, 서재필은 생부모와 그리 오래 지내지 못하였다. 서광효의 6촌 형제 중 서광하가 아들이 없자, 서광효는 7살의 서재필을 6촌 서광하의 양자로 보낸 것이다.[6] 서재필은 어린 나이에 7촌 아저씨인 서광하의 양자가 되어 한성부로 갔다.
[편집] 유년기와 소년기
서광하의 부인이자 서재필의 양어머니는 세도가문 안동 김씨 출신이었는데, 서광하 내외는 서재필을 입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성에서 이조참판 벼슬을 하고 있던 동생 김성근(金聲根)의 집에 서재필을 보낸다. 그리하여 서재필은 김성근의 집에 머물면서 수학하고, 과거 시험을 준비하였다.
18세 되던 1882년 과거(증광시, 병과3)에 급제하였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장원급제함으로써 주위의 촉망[7]을 한 몸에 받게 된다. 서재필이 처음 받은 직책은 경서 인쇄 및 관인을 관리하는 ‘교서관 부정자(校書館 副正字)’였다. 이무렵 서광범, 김옥균 등을 만나게 된다.
[편집] 관직 진출
[편집] 갑신정변 이전
벼슬에 오르면서 서재필은 본격적으로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를 갖게 된다. 서재필은 먼 친척 아저씨뻘 되는 서광범을 통해서 개화파의 중심인물인 김옥균과 조우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옥균은 12살 연하의 서재필을 ‘동생’이라 불렀고, 서재필은 김옥균을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이후 박영효, 홍영식, 윤치호, 이상재, 박정양, 유길준 등을 만나게 된다. 당시 개화파는 한성부 서대문에 자리한 봉원사를 중심으로 결속하고 있었다. 봉원사에는 개화파 승려인 이동인이 주지로 있었는데, 부산 출신인 이동인은 어려서 일본말을 배워 일본 지식인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고, 서양 문물에 관한 서적들을 일본에서 들여와 당시 개화파들에게 제공하였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윤치호, 유길준, 이동인 등은 모두 한때,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문하생이었기 때문에 서로 잘 알고 있었다. 후일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봉원사에 비밀리 모여 서양 문물에 대한 책을 읽고 시국을 논하면서 자연스럽게 ‘개화당’을 형성하여 결속을 다지게 된 것이다. 서재필은 이 중 가장 어린 나이였다.
[편집] 일본 유학과 신문물 수용
국방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김옥균의 권유로 1883년봄 서재필은 14명의 평민출신 청년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1883년 5월 일본에 당도한 서재필과 일행은 6개월간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한다. 서재필은 게이오 의숙에서 일본어를 배우고[8] 어학의 재능도 뛰어나 유학 몇 달 만에 일본어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7] 일본어를 익히면서 일본에 체류중인 미국인들을 만나 기초 수준의 영어를 배웠다. 1884년 1월에 게이오 의숙을 수료하였다. 서재필은 게이오 의숙에서 일본어를 배우며 한편으로 선진국 일본의 제도와 문물을 눈여겨 보기도 했다.[9]
1884년 1월부터 7개월간은 토야마 육군 유년학교(戶山陸軍學校)에서 신식 군사 훈련을 받았다. 약 7개월간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7월 수료하였다. 조선으로 돌아온 사관생도들은 고종에게 신식 사관학교를 설립할 것을 간청하였고, 서재필을 사관장으로 삼아 조련국(操鍊局)을 만들 것을 건의하였다. 고종의 승락을 얻어내, 서재필은 장교를 양성하는 조련국 사관장(士官長)이 되었으나, 그러나 이 계획은 청나라와 명성황후 측의 반대로 결국 무산되었다.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이 민씨 일족과 1884년말 군대의 통솔권을 장악하고 군대의 훈련을 위해 청나라 장교를 부르자 군에서 쫓겨났다. 서재필을 비롯한 사관생도들은 궁궐수비대로 편입되었다.
[편집] 정치, 사회 개혁 활동
[편집] 갑신정변 전야
1884년초 서재필은 기회를 잡다가 우정국 낙성식을 기회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홍영식과 더불어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신분제 폐지, 문벌 폐지, 청나라 심양에 잡혀간 대원군의 복귀 등을 담은 혁신 정강을 발표하였다.
정변계획중에는 일본유학의 경험을 토대로 김옥균과 재조선주둔 일본육군 중대장 무라가미(村上)와 개화당 사이의 연락을 담당했으며[8], 일본의 토야마군관학교에서 훈련받은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전위대로 나서 공을 세웠고, 정변진행중에 사관생도를 지휘하여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다.
[편집] 갑신정변과 삼일천하
이 부분의 본문은 갑신정변입니다.
1884년 10월 17일 오후 6시 정동에 신축한 우정국 낙성식에는 우정국총판 홍영식(洪英植)의 초청으로 많은 내외 귀빈의 참석하여 낙성 축하연을 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김옥균은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일본 공사관의 시마무라 서기관에게 이날 거사를 일으킬 것임을 은밀히 알려서 일본군 동원을 준비시켰다. 김옥균의 연락을 받은 서재필은 바로 병력을 집결, 이동시켰고, 우정국 입구에 매복시켰다.
연회가 거의 끝날 무렵 우정국 북쪽 건물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화재가 발생했다. 가장 먼저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던 민영익이 매복하고 있던 개화파 무사들에게 칼을 맞고 한쪽 귀가 떨어진 채 피투성이가 되어 허겁지겁 다시 들어오자 연회장 안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때를 틈타 김옥균,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은 급히 우정국을 빠져나와, 매복하고 있던 서재필 휘하 사관 생도들을 다시 경우궁으로 이동시키고 김옥균은 교동에 있는 일본 공사관으로 가서 일본군의 출동을 확인한 후에 대궐로 향했다.
정권장악 후 구성된 정부에서 병조참판 겸 후영정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갑신정변 당시 그는 토야마군관학교에서 같이 훈련받은 생도들과 함께 한때 개화당에 참여하였다가 배신한 환관 유재현를 처단하였고, 문신 조영하(趙寧夏)와 민태호(閔台鎬), 민영목 등을 대한제국 고종이 지켜보는 데에서 살해하였다.[10]
[편집] 정변의 실패와 가족의 최후
그러나 민씨 척족 정권은 청나라와 연락하여 청나라군대의 조선개입을 요청하였다.
갑신정변이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나자, 일본으로 도피하였다가 일본에서도 상황이 좋지 않아 일본 정부가 조선의 망명 정객들을 냉대하자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미국 선교사들이 이들을 도왔다.[11] 갑신정변 주역은 역적으로 몰렸고 서재필의 가족들은 모두 살해당하였다.[11] 서재필의 부모를 비롯하여 3명의 친형제 등 가족들이 사약을 받거나 사람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였다. 관가에 기생으로 보내지기로 된 서재필의 부인은 죽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여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당시 서재필에게는 두 살난 아들이 있었는데, 나라에서 굶겨서 죽였다고도 하고, 아이가 굶주림에 지쳐 죽은 어머니의 젖을 물었는데 어머니 몸 속에 있던 독이 아이 몸 속에도 퍼져 죽었다는 설도 있다.
군대에 있던 그의 동생 서재창(徐載昌)과 15세 된 남동생 역시 처형당하였다. 여동생 서기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누군가의 도움으로 함경도로 피신했다.[12] 연좌제는 전라남도 보성군에 있던 친 외가에도 미쳤다. 가산은 탕진되고 가족은 이산되는 참변을 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외사촌 형제인 이교문과 그의 아들 이용순은 살아남았고, 일제 강점기 당시 항일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5]
[편집] 일본으로 피신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실패하고 해외로 망명할 때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일본에 건너갔다.[13] 망명 초기 그는 조선에서 보낸 자객들의 위협에 시달려 은신하였으나 후쿠자와 유키치와 친분이 있던 독지가의 후원으로 숨어 지냈다.
서재필 자신은 1년간 일본에 피신해 있었지만, 갑신정변 주역들을 둘러싸고 일본-청나라 사이의 외교문제가 생겼고, 일본은 조선의 갑신정변에 깊이 참여했다는 국제 사회의 비난에서 벗어나고자 이들을 냉대하였다.[8] 일본 정부의 박대에 분개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갈 것을 결심, 김옥균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선교사가 써준 소개장을 들고 샌프란시스코로 넘어가게 된다.
낮선 땅에서 대화가 통하지 않아 손짓과 발짓으로 어렵게 일자리를 구하기도 했고, 불청객이나 부랑아로 몰려 쫓겨나기를 반복했다. 고단한 미국생활에서 연락을 주고 받은 유일한 친구는 윤치호였다. 여러 번 윤치호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고 윤치호는 선뜻 그에게 생활비를 우편환으로 송금해주었다. 주소가 수시로 바뀌었지만 그가 먼저 윤치호에게 연락을 하였으므로 연락이 계속될수 있었다.
윤치호와 서재필은 한 차례 만났었다. 1893년 가을 에모리 대학을 마치고 상하이로 되돌아가기 전인 윤치호는 인사차 서재필을 방문했었다.[14] 서재필은 윤치호의 방문이 내키지 않았다. 그를 만나자 잊고 있었던 십년 전의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모했던 정변이 떠올라 회한에 잠겨 스스로 부끄러워지며 자신 때문에 죽은 부모와 처자를 떠올렸다. 서재필은 졸업을 축하한다는 의례적인 인사만 하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윤치호는 왜 그런지 알면서도 무척 서운해했다.[14]
조선에서는 자객을 보내는 한편 그와 친분이 있던 인물들에 대한 감시, 탄압에 들어갔다. 이후 그는 조선에 대한 애정을 버리고, 민중에 대한 희망과 기대 역시 배신감과 증오로 변하게 된다.
[편집] 1차 미국 망명
[편집] 미국 망명 초기
1885년 5월 26일 서재필, 박영효, 서광범은 일본 요코하마에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조병옥에 의하면 이들은 배를 타고 미국에 도착하였으나 상륙하자마자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닥쳐올 생활위협을 헤쳐나갈 자신이 없었던 박영효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서광범도 얼마 동안은 언더우드 박사의 후원으로 뉴욕에 체류하며 지냈으나, 결국 앞서 돌아간 박영효의 뒤를 따라 그도 일본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13] 서재필은 미국생활을 견뎌냈으며 이역만리를 다니며 고학의 길을 찾아 헤맸다 한다.[13]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서재필은 낮에는 아르바이트와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영어를 공부했다.[8]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으며 교회에 나가던 그는 곧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됐고, 이것을 계기로 기독교적 인권사상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신념을 키울 수 있었다.[9]
나중에 서재필은 스스로 갑신정변을 회고하면서 갑신정변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두 가지 이유를 지적하였는데, 첫 번째는 개화파들이 일반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외세, 특히 일본을 너무 쉽게 믿고 의존하였다는 점이다. 이후 서재필의 활동을 보면 이 두 가지 각성이 서재필에게 얼마나 깊이 각인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편집] 고등학교 재학 시절
영어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곳에서 서재필이 처음 구한 일자리는 가구점의 광고지를 붙이는 일이었다. 서재필은 다른 노동자들이 하루 5마일을 다닐때 10마일을 뛰어 다니면서 일했다. 저녁에는 YMCA야간학교를 통해, 주말에는 교회를 다니며 영어를 배웠다. 낮엔 막일을 하고 밤엔 영어를 배우던 서재필은 그러던 어느 날 운 좋게 후원자를 만나게 된다. 사립고를 마치고 워싱턴 컬럼비안대(지금 조지워싱턴대) 의학부를 졸업했다.[11] 서재필은 어느 교회 신자를 통해 홀렌벡(John Wells Hollenbeck)이라는 사업가를 소개받는다.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탄광업을 통해 많은 돈을 번 대부호이자 자선사업가였던 홀렌벡은 서재필에게 미국에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1886년 서재필은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펜실베이니아 주 윌크스 배리(Wilkes-Barre)에 당도하여 "해리 힐만 아카데미(Harry Hillman Academy)"라는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1886년 9월 해리 힐맨 고등학교에 입학해 1889년 6월 졸업했다.
서재필은 해리 힐만 고등학교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수학 등 여러 과목에서 우등생이 되었고, 특히 웅변을 잘 하여 웅변대회에서 입상도 하고, 고등학교 졸업식에서는 졸업생 대표로 고별 연설도 하였다. 머무를 거처가 없었던 서재필은 해리힐맨 고등학교 교장 집에서 집안 일을 도우며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는데, 마침 법관으로 퇴임한 교장의 장인이 함께 살고 있어서 그에게서 미국의 역사 및 민주주의 제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서재필은 1888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되는데, 홀렌벡이 손수 지어주었다는 설도 있다. 필립 제이슨은 "서재필"을 거꾸로 하여 "필재서"로 만든 다음, "필"을 "필립(Philip)"으로 "재서"를 "제이슨(Jaisohn)"으로 음역한 것으로, Jaisohn이라는 성의 철자는 미국인들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고유한 철자 표기였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사립고를 다녔다.[11]
[편집] 대학 재학 시절
1889년 6월 서재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홀렌벡은 서재필을 불러 놓고, 이미 입학허가를 받은 라파예트(Lafayette) 대학에서 일단 공부를 마치고 그 다음 프린스턴 대학교 신학대를 졸업하여 조선에 기독교선교사로 돌아가겠다는 것을 서면으로 약속하라고 말했다. 그래야만 앞으로 더 서재필을 지원해 주겠다는 것이다. 당시 역적의 신세에 묶여 조선으로 돌아 갈 수 없었던 서재필은 홀렌벡의 서면 약속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은인과 결별하게 된다. 서재필은 곧 라파예트 대학교에 입학한다.
대학에 다닐 무렵, 서재필은 하루 3불의 품삯을 받고 유리창닦이 등 잡역부로 노동을 하였고, 노동의 여가로 틈타서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했다 한다. 그 뒤 교회당을 찾아 신앙을 발견하려고 꾸준히 노력하기도 했다.[15] 그러나 서재필은 라파예트 대학교를 중퇴하고 일자리를 찾아 워싱턴으로 떠났는데, 그가 찾은 일자리는 미육군 의학박물관에서 중국과 일본에서 온 의서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의학 서적을 번역하면서 서재필은 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1889년 워싱턴의 컬럼비안 코크란 대학(Columbian University, 현 조지워싱턴 대학교의 전신)에서 워싱턴의 고등학교 졸업자 공무원들을 위해 설립한 야간학부에 입학하였다.
[편집] 의사 면허, 미국 시민권 획득
컬럼비안 코크란 대학을 졸업한 서재필은 1892년 미국에서는 한인 최초로 세균학 전공으로 의학사(M.D.)가 되었고, 1893년 정식 의사면허를 받았다. 유태인 및 유색 인종은 의대에 입학할 수 없었던 당시 사정에 비추어 보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컬럼비안 대학 재학 중이던 1890년 6월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6월 10일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게 되었는데, 황인종에게 시민자격을 부여하지 않던 당시의 제도에 비추어보면 이례적인 일이었다.[11] 귀국 후 한국에서는 그를 '서재필 박사'라고부르는데 이는 그가 정식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아니었고 의사라는뜻의 닥터(Doctor)가 박사로 번역됐기 때문이었다.[9] 이후 서재필은 미국 육군의학박물관에서 동양서적을 번역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미국 초대 철도우체국장의 딸과 재혼하고 미국 주류사회에 편입됐다.[11]
미국에서의 생활은 서재필로 하여금 근대적 민주주의 사상과 제도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강하게 확신하게 했다.[9] 미국과 서구적 안목으로 조선을 돌아볼 때 그의 피는 끓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은 여전히 열강의 각축장이 된 채 외세종속적이면서 후진적인 사회로 정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9]
서재필은 1894년 한 호텔에서 뮤리엘 암스트롱(Muriel Armstrong)을 만나 연애를 시작, 같은 해 6월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뮤리엘은 제임스 뷰캐넌 전 대통령과 사촌 형제이자 남북전쟁 당시 철도우편국을 창설했던 미국의 정치인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George Buchanan Armstrong)의 딸로 그 아버지는 이미 작고한 상태였지만, 의붓아버지가 워싱턴에서 유명 인사였던 탓에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한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 후, 서재필과 뮤리엘 암스트롱은 두 딸 스테파니(Stephanie Jaisohn)와 뮤리엘(Muriel Jaisohn)을 두었다. 서재필은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한 후 1894년 6월 워싱턴에서 의사 개업을 하였으나, 백인들의 유색인에 대한 편견과 인종차별로 생계유지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신혼 살림도 워싱턴에 있던 조선공사관에 방을 빌려 차렸다.
1895년 3월 1일 법무대신(法務大臣) 서광범(徐光範)의 건의로 작위가 회복되었다.[16][17] 1895년 가을, 서재필은 10년전 헤어졌던 박영효를 워싱턴 시내에서 만나게 되고, 그의 권유로 같은 해 12월 조선으로 돌아가게 된다. 생활이 어려웠던 그는 조선으로 돌아올 때 주미조선 공사관에서 마련해준 여비[8]를 받아 귀국길에 올랐다.
[편집] 개화 계몽 운동
[편집] 복권과 귀국
독립신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명성황후를 정점으로 한 민씨 정권이 몰락한 후 개혁내각이 들어서자 1894년 김홍집에 의한 갑오개혁이 단행되었다. 갑오개혁으로 갑신정변 당시 서재필 등의 급진개화파에게 내려진 역적의 죄명이 벗겨지자 미국을 방문 중 워싱턴 시에 들른 박영효를 만나, 그의 권유를 받아들여 귀국을 결심한다. 박영효의 권유로 망명 10년 만인 1895년 12월 배를 타고 하와이와 일본을 경유하여 조선으로 귀환하였다. 체력이 좋았던 그는 한번도 뱃멀미를 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본을 경유할 때 일본 동경의 모교 토야마 사관학교를 방문하였고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났으며, 다시 일본을 출발하여 12월 25일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당시 내각을 맡고 있던 유길준이 그를 초빙형식으로 귀국시키는데 노력하였다.[18]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갑신정변이 민중의 지지가 결여되었기에 실패했던 교훈을 되새긴 유길준은 민중을 계몽하는 사업으로 신문 창간이 절박했다. 갑오경장이 개화파 내각의 주도로 제도 개혁을 하면서 일본측의 한성신보에 대항할 신문을 만들 한국인을 물색했는데, 그가 서재필이었다.[18]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유길준은 유길준 대로 개혁과 민중을 계몽하는 사업으로 신문 창간이 절박했고[18], 일본은 일본 대로 1895년 무렵부터 조선에 신문 창간을 후원한다는 명목으로 신문 개설을 권고하였고, 이에 내부대신 유길준은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의사 생활을 하던 필립 제이슨을 초빙하기에 이르렀다[18]는 것이다.
서재필이 처음 귀국했을 때 윤치호는 춘생문 사건에 가담했다가 체포대상이 되어 미국공사관에 피신해 있었다. 서재필은 두문불출하던 윤치호를 찾아 정세에 대해 자문했고, 윤치호는 선배 서재필의 공백기에 조선 정세를 친절하게 알려주면서 동시에 정동구락부 인사들과 접촉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기도 했다.[19] 서재필이 귀국하자 정부 고관들은 그가 갑신정변으로 동료들이 처형당하고 가족까지 연좌된 것에 원한을 품고 자신들에게 보복할 것을 우려, 서재필을 제거하려 했다. 그가 미국과 외국의 힘을 빌어 조선을 식민지화 하려 한다는 것이다. 윤치호는 이를 서재필에게 알려주고 각별히 조심할 것을 부탁했다. 서재필은 곧 미국인 경호원들을 대동하였다.
[편집] 관직 거부와 독립신문 준비
귀국 직후 시도했던 신문 간행이 일본에 의해 좌절될 뻔했을 때 서재필의 상심을 들어주던 유일한 대화 상대는 윤치호였다.[19] 윤치호는 아관파천 직후 신문 간행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서재필을 돕고 싶었지만, 이미 민영환을 수행해 러시아에 다녀오라는 고종의 명을 받았기에 도울 수 없었다.[19]
서재필은 곧 외무부 협판(지금의 외교부 차관)자리를 제수받았으나 거절하고, 형식적으로만 정부의 고문,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그는 미국인이기 때문에 수락할 수 없다고 하여 중추원 고문관 자리를 주었으며, 신문 창간을 할 수 있도록 국비를 지원했다.[18] 개화파정부는 개화인사 중 몇안되는 지도자인 서재필을 외무부협판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서재필은 보수파와 민씨 척족들로부터의 만약의 방해와 모략에 대비하기 위해 권력의 내부에 들어가기보다는 권력의 외부에서 안전한 미국시민으로 민중을 계몽[8]하려고 하였다.
대신 그는 개화파 정부와 근대화운동의 한 방편으로 신문의 발간을 합의하고 신문창간의 자금과 생활비를 지원[8]받아 활동하였다.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점과 민씨 내각의 반대를 잘 알던 그는 내각에 입각하는 대신 중추원 고문직으로 돕겠다고 하여 개화파 정치인들을 일단 안심시킨다. 신문 창립 비용으로 국고에서 3천원과 정착 자금으로 1400원 등 4400원을 받았고, 월 300원씩 10년간 중추원 고문직을 맡기로 한 것이었다.[18] 1896년 1월에 중추원고문에 임명되었다. 귀국 직후부터 계몽의 한 방법이라는 유길준의 설명을 듣고 그는 신문 발간을 준비해 왔고, 국내 온건개화파의 각종 보호와 지원 그리고 정부의 재정지원, 일부 지식인들의 자발적인 성금 모금 등으로 그는 신문을 발간하게 되었다.
[편집] 독립협회 활동과 독립신문 집필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신문인 《독립신문》을 순한글과 영어로 인쇄, 발간하였다.[20] 한편 그는 독립신문의 필진으로 박영효, 윤치호, 이승만, 유길준, 이상재, 이완용, 주시경 등을 영입했다. 또한 언더우드 학당에서 언더우드 목사와 관계가 다소 소원해졌으며 직업이 없어 고민인 김규식을 영입하여 취재기자로 고용하기도 했다. 1896년 4월 7일의 그의 독립신문 창건을 기념해 후일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지정하였다.
그는 신문을 발행하면서 전문 용어보다는 쉽게 한글로 풀이하도록 했는데, 처음에 300부를 찍었던 ‘독립신문’은 이내 발행부수 3000부가 넘는 신문으로 발전했고, 10여명으로 시작된 독립협회는 이내 4000명이 넘는 회원을 가진 큰 단체로 발전하면서 국민적 개혁 운동[7]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서재필은 일반 민초들이 쉽게 알아보게 하려면 한글 단어 사용을 신중히 고려하였고, 국문학자인 주시경을 영입하려 했고, 주시경의 노력에 힘입어 순한글로 간행할 수 있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 창간호에서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 여성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언문'을 공식적인 인쇄 언어로 채택하며 띄어쓰기를 도입한다고 밝혔다. 독립신문을 통해 서재필은 독립된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내부적으로는 교육 확대 및 산업 발전을 강조하였고, 그를 위해 의무 교육 도입, 서양 과학 기술의 도입, 식생활과 위생의 개선에 대한 여러 가지 안들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한 쪽에 의존하면 조선이 위험에 처할 수 있으니, 외부적으로는 중립외교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계몽강연 활동과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일 이외에도, 서재필은 목요일마다 매주 배재학당에 출강해 젊은이들에게 자유민주주의를 가르치기도 했는데, 이 때 이승만도그의 강의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9] 그 밖에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조선 팔도를 순행하기도 했다. 조선을 순행할 때 그는 항상 미국인 경호원을 대동하고 돌아다녔다. 동시에 그는 배재학당에 나가 강사로 활동하며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김규식 등의 학생들에게 세계사를 가르쳤고, 1896년 11월 학생들은 13명의 회원으로 협성회(協成會)라는 학생토론회를 조직했는데 1년 만에 회원이 약 200명으로 증가했다.[8] 협성회에도 이승만(李承晩), 김규식 등의 학생지사(志士)들이 모여들었고, 서재필은 학생 토론 모임인 협성회를 지도하였다.
[편집] 교육, 청년 계몽 활동
그는 학생들에게 수업 이외에도 별도로 논리적 설득의 필요성과 토론하는 방법을 틈틈이 가르치기도 했다. 1897년 7월 8일 정동에 새로 지은 감리교회 예배당에서 배재학당 졸업식이 있었고 600명의 청중이 모였다. 1부는 문학 시강으로 한문과 영어의 공개 강독이 시행되었다.[21] 2부는 갈고 닦은 협성회 토론 시범을 보이는 차례였다.[21] 토론은 성공적이었고 서재필은 1년간 자신의 강연을 수강한 학생들 가운데 우등 1명, 이등 1명, 삼등 2명의 학생을 뽑아 각각 5원, 3원, 2원씩의 상금을 수여하였다.[22] 그 순간 서재필은 해리 힐맨 고등학교에서 영어로 연설하여 우등상을 받았을 때의 감격을 다시금 느꼈다 한다.
'이제 이 학생들로 크게 변하여 조선을 위한 큰 인재가 될 것이다.'
행사를 마친 학생들은 인근 배재학당으로 가서 다과로 연회를 열었다. 서재필은 귀국하며 세웠던 목표를 거의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연설했다.[22]
오늘 여러분은 1년간의 공부를 마쳤습니다. 여러분은 나에게서 크게 배웠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나는 여러분에게서 크게 배웠습니다. 배움의 자세는 진지했고, 배움의 목표는 웅대했습니다. 그 기상과 성실을 토대로 여러분은 이제 조선을 크게 변화시키는 길로 나아가리라 굳게 믿습니다. 비록 오늘로 배재학당에서의 수업은 끝나지만 제 마음은 영원히 여러분 곁에서 함께할 것입니다.[22]
학생들은 서재필의 연설이 끝나자 사은의 예로 준비한 선물(영어사전)을 정중히 올렸다.[22] 협성회 공개 토론회의 성공은 그날 하객으로 참석했던 독립협회 회원들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다. 러시아에 다녀온 뒤 의기소침했던 윤치호에게 남다른 감격이었다.[19] 이후에도 서재필은 협성회 활동과 계몽강연을 지도하며 전국을 순회하였다.
그리고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고, 이 일을 집행하기 위해 이완용을 비롯한 정부 관료 중심의 독립협회를 조직했다. 1896년 7월 2일 이상재·이승만·남궁억·박영효·윤치호·이완용·김가진·안경수 등과 함께 독립협회 창설에 참여하고 서재필은 독립협회 고문에 선출되었다. 윤치호는 미국에서 서재필을 만났을때 혹시나 조선의 정국이 변한다고 해도 서재필이 아픈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아 귀국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런데 뜻밖에도 2년 후 한성 정동에서 재회하게 되자 윤치호는 놀라워했다. 그리고 윤치호와 서재필은 독립협회에서 의기투합하여 활동했다.[14]
초기 관료 중심의 독립협회를 탈바꿈시켜 대중 토론회를 조직하였고, 이 토론회는 만민공동회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독립협회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의회 설립 및 입헌군주제로 개혁을 추진하였다.[23] 그러나 정부 관료들은 그가 황제에 불충하는 선동을 한다고 비난했다. 대한제국 조정의 수구파는 서재필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으나, 그가 미국 시민권자이므로 해코지하였다가 외교문제로 비화될 것을 우려하여 중단하게 되었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일본은 조선의 유길준, 윤치호가 국민들을 개화한다는 취지로 신문을 제작하는 것으로 보았으나, 반외세, 교육 계몽, 자립, 실력 양성 등을 논설로 내보내는 것을 내심 경계하였다.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독립신문을 일본이 서재필과 필진들을 앞세워서 운영하는 것으로 판단, 조선 정부에 압력을 넣어 독립신문 후원금이 끊어지게 된다.
[편집] 정부의 탄압과 출국
이 부분의 본문은 아관파천입니다.
아관파천 직후에도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일은 계속되었는데, 1896년 3월 14일, 그는 중추원 고문으로 재직 중이면서 신문 담당 부서인 농상공부 임시고문을 겸하게 되었다. 아관파천 전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러 있던 상황에서 조선에 대한 경제적·문화적 침투에 한계를 느끼던 러시아는 조선에 군사적·정치적 압력을 확대하면서 만주와 조선에 대한 침략정책을 폈다. 이에 서재필은 러시아의 대한정책과 동아시아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의 기사를 쓰는 한편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 고문단의 철수를 요구했다.[8] 친러정권과의 대립 외에도[8] 보수파가 다시 정권을 잡자 서재필을 사형에 처하거나 살해할 모의가 진행되었으나 미국시민권자라는 외교문제 비화에 엮일수 있다는 외교에 밝은 일부 보수파 인사들의 설득으로 살해위기는 모면되었다.[24] 고종황제에게 자신을 "외신"이라 칭했고, 고종 앞에서도 담배를 피우는 등, 완전히 미국인 행세를 한 점[18] 역시 눈밖에 나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1898년 러시아 및 청나라, 일본 등의 서재필 추방 압력과 고종을 비롯한 대한제국 정부의 권유로[8] 중추원 고문직에서 해고되고 1898년 5월 독립신문을 윤치호에게 인계하고 미국으로 돌아간다.[11]
한편 1896년, 97년 자신이 운영하는 독립신문에 찾아와 입사한 이승만, 김규식 등 청년들에게 미국으로 유학할 것을 설득, 권고하여 이승만, 김규식 등을 미국으로 유학보내는데 성공한다. 이승만, 김규식 등이 미국으로 유학한 뒤 이들의 학비를 일부 송금해주기도 하였다.[25]
[편집] 2차 미국 망명
[편집] 망명초기와 상점 경영
1898년 4월부터 8월까지 미국-스페인 전쟁에 미국군 군의관으로 잠시 참전한 이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였다. 서재필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해, 나중에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재정적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제2의 고향 윌크스베리에서 힐맨 아카데미 고등학교 시절의 일 년 후배 해롤드 디머와 함께 문구 및 인쇄 사업을 하는 '디머 앤 제이손' 상회를 설립하였고, 1905년에는 서재필이 '디머 앤 제이손 상회' 필라델피아 분점을 맡아 경영하였다. 1913년까지 해롤드 디머와 동업을 계속하였고, 1915년 부터는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적으로 필립 제이슨상회(Philip Jaisohn & Co.)를 운영했다. 그후 서재필은 필라델피아에서 1924년까지 인쇄업과 각종 장부를 취급하면서 사무실용 가구 등을 파는 필립제이슨상회를 경영했다.[8] 그의 회사는 필라델피아의 상업 중심지인 1537 Chestnut street에 소재하였다. 이후 필립 제이슨상회는 본점 외에 필라델피아 시내 두 곳에 분점을 둔 종업원 50명의 큰 사업체로 성장하였다.
1910년 8월 미국 체류 중 한일 합방의 소식을 접하였다. 서재필은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개혁인사들을 제거하고 척신들로 정부를 채웠으며, 내부부터 부패한 이상 어쩔수 없다고 봤다. 더구나 왕족들이 일본이 주는 작위를 받고 합방 은사금을 받는 것을 보고 한심하게 생각했다.
1918년 11월 독일이 일단 항복함으로서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나고 다음해 1월 18일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26] 서재필 역시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미주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평화회의에 이승만 박사, 민찬호 목사, 정한경을 파견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 시민이 아니므로 여권을 얻을 수 없었다. 이들은 일본 국민인 까닭에 마땅히 일본대사관에서 여권을 받아야 한다는 게 국무부의 해명이었다.[26]
[편집] 독립운동 참여
3·1 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재미한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그는 미국내 한인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활동하였으며, 1919년 3·1 운동 소식을 듣고 미국내 한인 교포들에게 만세 운동 소식을 전하였다. 3·1 운동에 호응하기 위해 서재필은 4월 초에 공지하여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하였다. 필라델피아 한인연합대회를 개최하고 의장이 되었으며, 1919년 4월 13일에서 15일까지 3일 동안 열린 이 행사에는 이승만, 정한경, 유일한, 조병옥, 허정, 노디 김, 안창호가 설립한 국민회 간부 등 150여명의 한인들이 참여하였으며, 서재필과 개인적 친분이 있던 미국인 인사들도 참석하였다.
3일간의 제1차 한인연합회의가 끝난 뒤, 바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고자 4월 16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던 '한인자유대회'를 열었다.
제1차 한인연합회의 대회 소집 이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구미외교위원회가 설치되자 구미위원회 산하에 한인통신부를 설치하고, 서재필은 영문 기관지〈한국평론〉 (Korea Review)을 월간으로 발간했으며 '어린이', '순난자', '대한정신' 등 영문 소책자를 발간하여 배포하였다. 이 책들은 서재필의 자비와 여러 한인 지사들의 후원비로 발행되었으며, 미국에 일본의 만행을 소개하고 독립의지를 표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이는 무료 배부 및 지방순회강연의 홍보책자로 활용되었다.
서재필은 제1차 한인의회에 대표 기도자로 참석한 플로워드 톰킨스(Floyd Tomkins) 목사 등 기독교인사들을 설득,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고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지지할 것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였다. 구미외교위원부의 한인통신부에 한인연합대회에 연사로 초빙되었던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한국의 자유독립 원조 및 한일기독교도의 선교자유 보장과, 한인이 당하는 일본인의 악형을 영구히 방지하며 미국의 일반 국민에게 한국의 진상을 전파할 것을 목적으로 한 한국친우회는 당시 미국내 정계 및 학계에 포진한 친일세력에 대항하여 조직된 기독교 네트워크로 미국 내 20여개 도시에 지부를 두었으며,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에도 각각 하나의 지부를 두었다. 한국친우회에서는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박해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였고, 미국의 정치인사들이 이를 시정하기 위해 일본에 압력을 행사할 것을 요구하였다.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의 활동은 이승만의 구미외교위원회의 활동에 많은 기여를 했다.[8] 그러나 3·1운동 이후 서재필은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자신의 전재산을 다 써버리는 바람에, 예순이 넘은 고령으로 생계를 위해 다시 본업인 의사로 돌아가 일해야 했다.[11] 그러나 1920년 무렵 그는 다시 한인단체 활동에 다시 참여한다.
[편집] 한인단체 활동과 독립운동
[편집]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1920년 3·1운동 기념식을 뉴욕에서 준비, 1920년 3월 1일에는 한국친우회 뉴욕지부 행사에 약 1000여명의 회원이 참석하여 한국의 3.1 만세운동과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집회를 열었다. 1921년에도 뉴욕에서 3·1운동 기념식을 여는데 기여하였다.
미국에서 일본이 벌이고 있던 조직적 선전활동에 대항하고, 미국인들에게 조선의 사정을 알리기 위해, 자신이 사용하던 사무실에 한국통신부‘Korea Information Bureau’를 설립한 후 《Korea Review》를 발간하였다. 서재필은 《Korea Review》 통해 미국 대통령에게 공개 편지를 보내 1882년 맺어진 조미수호조약을 준수하라고 요구하였다.
1921년 일본의 해군력 팽창을 억제하고 중국침략을 견제하려는 취지에서 미국이 주최한 태평양회의가 열리자 이승만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 대표로 워싱턴에서 열린 평화군축회(1921년~1922년)에 파견되었다. 조선독립문제를 국제회의 석상에서 공식적으로 다루어줄 것을 요구하는 《한국독립청원서 (Korea's Appeal)》을 각국 대표들에게 제출하였지만, 일본의 방해와 미국의 반대로 끝내 무산되었다. 파리평화회의에서 서재필은 370여 단체의 서명을 받은 연판장을 일본측 대표 도쿠가와(德川家達)에게 전달하고,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줄 것을 각국 대표와 세계여론에 호소했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문제가 논의는 커녕 전혀 언급조차 되지 않자 실망하여 경제난으로 한인통신부와 한국친우동맹에 관한 사업을 정지한다는 보고를 구미위원회로 보냈다.
1922년 조병옥이 뉴욕 주에 한인교포들의 모임인 한인회를 조직하자 이승만과 함께 이를 지원하였다.[13] 한편 한인회의 총무로 활동하면서 시간적 여유를 얻은 조병옥은 서재필을 정치적으로 보좌하기도 하였다.[13] 그러나 한인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도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국민회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국민회이탈파 및 동지회 계열이 갈등하면서 일부 한국인 청년들은 서재필을 찾아 중재를 요청하였으나 서재필은 호응하지 않았다.
1905년부터 잡화상을 경영하며 재산을 모았던 그는 독립운동 자금과 인쇄및 홍보활동, 한국인 대표단 파견 등의 경비로 재산을 쓰다가 파산을 맞이하게 됐다. 이때 일제 강점기 치하의 한국에서 동지인 윤치호가 보내오는 약간의 생활비와 동포들이 기부하는 기탁금으로 겨우 연명해나갈 수 있었다. 상점을 문닫은 그는 다시 일자리를 알아보며 취직을 준비한다.
[편집] 제2차 세계대전 후반
가정 형편이 어려워졌던 서재필은 1922년 이후 양탄자를 취급하는 이탄뉴상회에 입사, 이탄뉴상회 사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8] 그러나 간간히 한인단체 활동에 관여하였고 수시로 자문을 청하는 이승만, 안창호, 조병옥, 허정 등에게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1925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범태평양회의가 개최되자 한국에서 온 송진우, 윤치호, 김활란, 김성수, 백관수, 신흥우 등과 함께 한국인 대표자의 한사람으로 참석하여 일본의 식민통치의 잔혹함을 규탄하고 독립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독립운동을 위해 몇 년동안 사업을 돌보지 못했고, 개인 재산을 많이 지출함으로써, 1924년 법적인 파산을 맞게 된다. 파산으로 극도로 생계가 곤란해진 서재필은 1926년 62세의 나이에 다시 펜실베이니아 대학에 특별학생으로 입학하고 동시에 의업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병원 활동이 어려워지자 그는 여러 병원의 고용의사로 취직하여 활동하였고, 의사로 활약하며 몇 편의 병리학 관계논문을 썼다. 1936년부터 다시 필라델피아에서 병원을 개업, 개업의로 생활하였다.[8] 그동안 국내의 잡지에 대개 민족성 개조와 실력 양성을 주장하는 몇 편의 글을 기고했으며 동아일보 등 국내 언론에 '회고갑신정변', '미국체류 오십년' 등의 글을 영문으로 적어 보내어 번역, 연재물로 수록되기도 했다. 1939년에는 한민족의 위대성을 찬양하는 편지를 한국의 언론에 보내오기도 했다.
한국 민족은 훌륭한 민족이다. 그들은 영리하고 건강하며 생산적이다. 수세기 동안 시련과 고난에 시달려 왔지만 여전히 고유한 민족문화를 갖고 있으며, 세계 속에서 더 높고 고귀한 지위를 획득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한국 민족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한 열망을 결집하는 것이며, 정치적·경제적·개인적 자유를 위한 열정을 키우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진다면 더 많은 나라들이 한국 민족의 장점을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서재필, 1939년 12월 7일[5]
1938년 3월 10일 안창호가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간장병과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그는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차 일제 강점기 한국에 입국, 경성의 안창호 장례식에 참석하고 되돌아갔다.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는 그의 귀국을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당시 그는 미국 국적이었으므로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는 그를 체포할 수 없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승리가 조선의 해방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77세에 미군 징병검사관으로 자원봉사하기도 했다.
[편집] 해방과 죽음
[편집] 광복 직후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그는 미국에서 한국의 광복과 일본의 패전 소식을 접하였다. 9월부터 미군정이 실시되고 10월 미국에 체류하던 이승만은 비행기편으로 필리핀 마닐라와 일본 도쿄를 경유하여 귀국했다. 서재필은 출국하는 이승만을 배웅하러 필라델피아 공항까지 직접 마중나와 이승만 내외를 전송하였다.
미군정에서는 이승만을 견제할 만한 인물을 찾고 있던 미군정의 하지 중장은 서재필을 하지의 고문 겸 남조선 과도정부의 특별의정관으로 초빙하였다. 김규식도 서재필의 귀국을 원하고 있었다. 과도입법의회 의장 김규식의 추천을 받고 서재필에게 여러 차례 귀국 요청을 하였다.[27][28] 그는 미군정으로부터귀국 교섭을 받았으나 그는 조용히 사양하였다.
나는 연로했고, 원래 지위와 권세에는 아무런뜻이 없으며 오로지 동포들의 교육과 계몽에 힘쓰고 싶다.[9]
1947년, 이승만을 견제할 목적으로 미군정청 사령관 존 하지가 미국에 있던 서재필을 군정 고문관으로 초빙하려 하자 김규식 역시 서재필의 귀국을 원하였다.[29] 그는 서재필 귀국 환영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서재필이 귀국하자 김규식, 여운형, 이승만, 김구 등은 친히 공항에 나가 서재필을 환영하기도 했다.[30]
몇 차례 요청을 고사했던 서재필은 미군정청 사령장관 하지의 요청을 받아들여 미군정청 최고정무관 겸 남조선과도입법의원 특별의정관으로 초빙받아 1947년 7월 1일, 미국을 출발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이승만은 처음에 개화파 선배이자 스승인 서재필을 극진히 대접하였으나, 미군정청 사령장관 하지가 자신을 견제할 목적으로 서재필을 활용하려 하자 서재필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귀국 직후 충청남도 아산의 윤치호 묘소를 참배한 뒤 김규식, 여운형, 김성수, 김구 등을 찾아 면담하기도 했다.
[편집] 해방 정국의 정치활동
그날 오후 4시에 경기도 인천부에 상륙했다. 부두에는 이승만, 김규식, 안재홍, 여운형 등이 마중을 나왔다.[27] 그의 귀국 환영을 위해 3·1운동 33인의 한 사람인 오세창을 환영회 위원장으로 해 5만명 정도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개최되었다.[9] 그러나 서재필은 정부수립을 원하는 한국인 지도자들을 겨냥, 인터뷰에서 “한국인들은 비누 한 장도 만들 줄 모르면서 어떻게 독립 정부를 갖기를 기대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27]
이승만은 처음에는 친히 환영사를 발표하여 서재필의 귀국을 환영하였으나 뒤에 미 군정청이 자신을 견제할 목적으로 서재필을 귀국시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서재필을 적대시하였다. 김규식은 그의 귀국으로 이승만, 김구의 독주가 견제되기를 희망하였다.
귀국 인사로 서재필은 '자신이 한국말을 잊어버렸으며 한국 사정을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을 솔직하게 시인하였다.[9] 그러나 '힘을 다하여 한국 인민들을 도와주려고 한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도'나는 권한이 없는 사람이며 다만 하지 사령관에게 진언할 따름이다'고 덧붙였다.[9] 그를 환영하러 나왔던 한국인 지도자들은 그의 발언에 수긍하였다. 한편 그는 윤치호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그의 묘소를 방문하였다. 기자회견장에서 의친왕 등이 존재하니 그들을 찾아가 볼 것을 권유하는 기자들의 요청을 그는 거절하였다.
이후 하지 미육군 중장에게 자문을 하고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하였으며 미 군정청 최고고문이 되었다.[11] 서재필의 집무실은 중앙청의 207호실이었다. 그는 숙소인 조선호텔로부터 매일 출근해 성실하게 근무하였다.[9] 그리고 라디오 연설을 통해 민주주의, 교육,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방송에도 출연하여 매주 금요일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해 주로 자유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를 설명하고 우리국민이 걸어야 할 길을 강의했다. 서재필의 방송과 라디오 그의 연설은 영어로 이뤄졌기 때문에 손금성 박사가 꼭 한국어로 통역을 하거[9]나 다른 번역가들에 의해 번역되어 보도되었다.
[편집] 과도입법의원 의원
1946년 12월 미군정에 의해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관선)으로 선출되었다.
군정은 김규식과 서재필의 제휴, 협력을 은근히 바랐다. 서재필이 일부 깨인 민중들 사이에 인기가 높고 존경을 받고 있음을 확인한 미군정은 두 사람의 제휴가 성립되면, 그 무렵 미군정이 뒷받침하던 김규식 노선이 현실적으로 큰 지지를 얻게 되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9] 서재필은 기본적으로 김규식의 노선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나이가많음을 내세우며 정치활동에 참여하기를 사양했다.[9] 서재필은 1948년 3월 14일자 인터뷰에서 이승만을 겨냥해 극우적인 운동, 거짓말, 거짓 선전 등과 같은 언어들을 구사하며 격렬하게 비난하였다.[31][32]
1947년 3월 남조선 과도정부 최고정무관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좌우합작운동에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그에게 대통령이 되어 달라는 지지 성명, 청원 운동이 있었다.
[편집] 대통령 추대운동과 사양
그의 정치 참여 요청, 대통령 출마 요청은 단독 총선거를 치른뒤 48년 6월 1일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5·10 총선이 끝나고 제헌국회가 개원한 그 다음날인 이날, 정일형, 백인제, 이용설 등을 비롯한 지도층 인사들이 서재필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9] 1948년 7월 남한 단독 정부 수립 결정이 나고 대통령 선거 일정이 잡히자 1948년 6월 10일 60여 명의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참가하여 무소속구락부를 결성했는데 이들 중 일부는 서재필을 대통령으로 옹립하는 데 가담하였고 서재필이 고국에 남으라는 국회 결의의 통과를 주도하기도 했다.
6월 11일 서재필에게 보내는 연명의 간원문이 전달되었다. '지금 조국이 요구하는 사람은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민의 뜻을 알아서 이에 충실히 순종하는 정직한 민주주의적 지도자입니다.이 나라에는 그러한 인격자가 한분 계시니 그는 서박사입니다'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이 편지는 서재필이 '정계 최고지도자로 출마하시기를'간청했다.[9] 6월 29일에는 서박사 추대 연합준비위원회까지 만들어졌다.[33][9] 백인제, 최능진, 김대중을 비롯한 1,929명이 서재필에게 '한국 초대 정부 대통령으로 추대하고자 하니 대통령 출마를 승낙해 달라'는 내용의 요청서를 보냈으나, 서재필은 '미국 시민으로 남겠노라'며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서재필 추대 운동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에 의해 공개적으로 견제됐다. 이에 서재필은 7월 4일 공식 불출마 성명을 발표했다.[9]
그러나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국회에서 행해진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자로 추천되었으나 1표를 얻었다. 그러나 1표도 서재필이 미국 국적을 가졌기 때문에 무효로 처리되었다.
[편집] 출국과 사망
서재필은 미국으로 떠나기 수일 전 기자 김을한에게 '우리 한국사람은 단결할 줄을 모르고 당파싸움만 하다가 일을 그르치는 수가 많은데, 갑신정변 때나 지금이나 50년이 지났지만 그 점만은 똑같으니 한심한 일이오'라고 하였다.[33] 또한 과도입법의원 선거와 시도지사 선거로 선출된 입법의원과 시도지사를 상관처럼 깎듯이 대하는 시민들에게 선거로 뽑은 것은 대리인이지 윗 사람이 아닌데 윗 사람처럼 깎듯이 존대한다며 잘못을 지적했지만 시민들은 그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이념 대립을 딛고 통일된 조국을 건설해달라는 당부를 남기고[34] 1948년 9월 11일 둘째 딸 뮤리엘 제이슨을 대동하고 미군정을 따라 인천항을 떠났다. 서재필은 미국으로 떠나는 날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인민들은 정부에 맹종만 하지 말것이며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고 인민이 곧 주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34]는 말을 남기고 배에 올랐다. 1948년 10월 9일 일시 귀국,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민족청년단 창단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하였다.
1949년 8월 주미한국대사 장면(張勉)으로부터 초청장을 받고 대한민국 정부수립 1주년 기념행사에 초대되었다. 이후 그는 주미한국대사로 부임해온 장면의 방문을 받았다.
49년 9월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의료활동에 전념했다.[35] 그러나 암에 걸린 서재필은 곧 노환과 과로로 쓰러졌고 병원에 실려가게 된다.
1950년 6월 미국에서 한국 전쟁 소식을 접하였고, 6월 필라델피아 병원에 입원하였다. 장면은 서신을 보내, 입원 중인 서재필의 빠른 완쾌를 비는 한편, 당시 전쟁 상황을 전하며 '지금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반드시 승리 할 것이다.'는 것과 '자유로운 분위기 내에서 제2대 총선거가 진행되었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휴전을 못보고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5일 필라델피아 병원에서 일생을 마쳤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87세였다.
[편집] 사망 이후
1962년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공로훈장 수훈 대상자로 지정되었으나 외국 국적자라는 이유로 취소되었다. 1970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았고, 1991년 외가인 전라남도 보성군에 서재필 기념공원이 설립되었다.[5] 그 해 고향인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에 송재 서재필선생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
사망 직후 미국에 묻혔다가, 1994년 대한민국의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서재필 유해의 국내 봉환문제가 논의되었을 때 그의 외손자 필립 하디칸은 반대하였다. 서박사의 유일한 외손자(첫째딸 스테파니 제이슨의 아들) 필립 하디칸은 유언을 통해 서재필 유해의 국내봉환을 반대했다.[36] 딸 뮤리엘 제이슨 역시 "내가 사망하기 전에는 안된다"고 주장해왔고, 이후 몇차례의 추진에서도 국내 안장지 등을 놓고 논의단계에 맴돌다 수포로 돌아가기도 했다.[36] 필립 하디칸은 1993년 3월에 사망하였으나 그의 유언도 큰 걸림돌이 됐었다. 필립 하디칸은 그동안 한국 정부의 성격을 문제삼아 국내봉환을 반대해 왔었다.[36] 또한 대한제국 정부에서 그의 가족을 연좌제를 적용해 처형한 점 역시 서재필에게 개인적인 상처가 되었고,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은 그가 미국에서 재혼해서 얻은 자손들에게도 부분적으로 이어졌다. 이때문에 묘지 측에서는 서재필의 유해를 내주는 것을 반대했고, 우여곡절 끝에 유해는 국내로 봉환되어 1994년 대한민국의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서재필의 생부 서광효가 살던 곳, 그의 본가는 충청남도 논산군이었으나 출생지는 그의 외가가 있던 전라남도 보성군이어서 2008년 7월 8일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에는 ‘서재필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37] 기념공원은 넓이 4만 5700제곱미터이며, 그 안에는 당시의 외가를 복원한 ‘서재필 기념관’이 세워져 있고,[37][38] 그밖에도 독립문, 사당, 조각공원, 동상, 야외공연장 등이 들어서 있다.[37] 1975년 미국 필라델피아에 서재필기념재단이 만들어져 의료, 봉사, 장학 및 교육, 지역사회 활동을 하고 있으며, 필라델피아 근교인 미디아에 서재필박사가 살던 집을 서재필기념관으로 만들어 개방하고 있다. 2008년 5월 미국 워싱턴에 동상이 세워졌고[11][39] 워싱턴시는 5월 6일을 ‘서재필의 날’로 지정했다.[11] 전라남도청에는 신설 강당 중 서재필실을 개관하기도 했다.
[편집] 사상과 신념
[편집] 독립에 대한 희망과 좌절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당에 몸을 담았던 그는 당시 급진적이었다. 미국 망명에서 돌아온 서재필은 밑으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하여 언론과 교육을 중요시하였다. 또한 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그는 일본의 후원을 얻어 친일적인 성격을 띄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민족주의자이기도 하였는데 1896년 고국에 돌아와 처음 발표한 글에서 조선이 동양의 강대국 중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데 조선 사람들이 과학이나 예술의 어느 분야라고 해도 배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사고방식은 매우 논리적이라고 평하였는데, 불운했던 10년 미국 망명 후에도 조선의 민족성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40] 1904년 4월 한성 감옥에 수감중이던 청년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러일전쟁을 치르고 있는 일본은 옳은 쪽에서 모든 개명된 나라들이 지지하고 옹호하여야 할 원칙을 위해서 전쟁을 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정의와 문명을 위해 싸우는 나라와 같이 하기를 진정으로 기도한다고 하며 일본의 의도를 선의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1918년 11월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한국이 일본의 밥이 되었고 그 모든 권리가 박멸되고 백성들이 승전국의 노예가 되어 구차한 명을 보전하였다고 적었으며 자신이 이 원통한 사정을 알리고자 한다고 하였는데 그 사이에 일본의 침략주의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다. [41] 이후 그는 삼일운동에 적극 호응했으며 1919년 4월 한인연합대회(제1차 한국의회)를 필라델피아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편집]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
해방후의 서재필의 사상의 핵심은 한국이 통일 독립되고 번영하려면 자유민주주의를 착실하게 운영해야 한다는데 있었다.[9] 그 때 온 겨레가 열망하던 민족통일의 비결도 자유 민주주의의 실현에 있다고 그는 외쳤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은 당 독재체제 아래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으며 독립된 인격을 가질 수 없는 만큼 국민의 힘이 모아지지 않음에 반해, 자유민주주의 아래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게 됨으로써 국민의 힘이 저절로 모아져 통일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게된다는 뜻이었다.[9]
[편집] 정부 맹신에 대한 비판
서재필은 한국이 봉건 왕조체제였던 1894년 무렵부터 강연과 글을 통해 인간의 평등, 자유의 필요성, 신분 차별 철폐, 국민의 참정권을 요구하였다. 갑신정변으로 그는 민중들을 대상으로 한 개혁 설득을 일시적으로 중단하였으나, 1895년 12월 귀국하면서 다시 평등, 자유, 차별철폐, 참정권 요구를 강연과 글을 통해 발표하였다. 그러나 1946년 10월의 과도입법의원 선거와, 각 지역민의 시도지사 선거 때에도 국민들은 선거를 자신을 다스려 줄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서재필은 선거를 통해서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은 자신을 다스릴 지도자를 뽑는 것이 아니라고 설득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도리어 그가 이상한 사람인 것처럼 인식되기도 했다.
정부를 맹신하고 관리들을 지나치게 어려워하는 것 역시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1948년 9월 11일 다시 출국하면서 서재필은 '인민들은 정부에 맹종만 하지 말것이며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고 인민이 곧 주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34]'고 거듭 당부하였다.
[편집] 평가와 비판
[편집] 1940년대의 평가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5%가 서재필을 지목하였다.[42] 그뒤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때는 지목되지 않았고,[42]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118표로 3위를 하였다.[42]
조병옥은 그가 우리 한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제일 먼저 미국식 민주주의와 독립정신을 배우고 나가서는 그 현실에서 생활할 수 있었던 최초의 선각자라고 평가하였다.[13]
[편집] 평가
서재필은 개화사상가, 혁명가, 독립운동가, 군인, 의사, 정치가 등 실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5] 생계를 돌보지 못하면서까지 한인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서재필이 청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로 힘이 넘치고 주장이 명확한 연설로 유명하다면, 윤치호는 특유의 온화함과 차분함으로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설득시켜 감화시키는 연설이 특징[14]이 있다는 평가도 있다.
[편집] 비판
대한민국의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를 지낸 허정(許政)은 "그에게서도 강렬한 양반의식(양반으로서의 우월의식)을 느낄수 있었다." 고 평가했다.[43] 허정에 의하면 그의 사고 방식이나 생활 태도는 이미 상당히 미국화되어 있었다고 평가했다.[44] 한국국적을 버리고 미국 국적을 취득한 것 역시 부정적인 평가가 되고 있다.
친일파의 거두 이완용, 박영효 등과 친분관계가 있었던 점이 부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역사 재해석이 유행이 된 최근에 와서는 서재필이 친일파 이완용과 친밀해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이 썼을 정도였다는 점과 독립신문의 시국관, 친미적 시각 등 부정적인 평가문제들도 역사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5]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건립한, '독립문의 건립자'로도 알려져 있다.
[편집] 성격
차갑고 냉정했다는 평가가 있다. 대통령 권한대행 겸 내각수반을 지낸 허정(許政)은 후일 그가 매우 정열적이라는 인상을 주었다고 회고하였다. [43] 그의 독립심과 투지는 대단하였다. 박영효나 서광범은 갑신정변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귀국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이 양반의 자제라는 자존심[43]과 함께 노동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같은 양반집 도련님인데도 철도 노동자로 일하면서 학업을 마쳐 의사가 되었다.[43]고 하였다. 허정은 서재필이 자기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을 제일 싫어했다고 회고하였다.[43]
[편집] 윤치호와 서재필의 비교
서재필이 배재학당의 젊은 학생들과 애국적인 시민을 독립협회로 모으는 데 기여했다면 윤치호는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여 양심적인 중견 관료들과 개혁적인 젊은 관료들을 하나로 묶어 독립협회의 내적 통합에 기여했다.[45]
급진적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윤치호는 1884년 갑신정변의 정국에서 서재필과 달리 점진 노선을[45]택해 살아남을 수 있었고, 가족 또한 안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잠재적인 신변의 위협 때문에 결국 유학이란 명분으로 망명객이 되어 십년 이상 외국을 떠돌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서재필과 크게 차이는 없었다. [14]
서재필이 미국에서 혈혈단신으로 고투하였던데 반해[14], 윤치호는 상하이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후 미국에서도 교회와 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기 때문에 연설의 경험을 풍부하게 축적할 수 있었다. 작은 일까지 매일 기록하는 꼼꼼한 성격과 겸손하며 성찰적인 태도 덕분에 남의 장점을 수용하여 늘 나아가고자 노력한 윤치호의 연설에는 깊이가 있었다. 서재필은 미국 망명 후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기독교 신앙 자체와 그 세속화된 형태의 미국의 시민종교(공화주의와 민주주의)를 구분할 수 있었다. 자신의 은인 홀렌백이 '선교사가 된다면 대학교 학비를 대겠다'는 요청을 뿌리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잊지는 않았지만 기독교 그 자체가 사회운동을 대체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때로는 과하다고 할 정도로) 미국식 사유와 생활 방식을 조선에 이식하여 그 근본적인 급진성을 통해 사회운동을 일으키려고 한 것이다.[46]
반면에 윤치호는 기독교 개종 이후 삶의 중심을 언제나 신앙에 두었다. 개종의 동기는 개인적 차원이었지만 개종과 동시에 민족적 차원에서 기독교와 조선을 언제나 결부시켰다. 조선 문화에 깊게 뿌리박은 가족주의적 습속을 돌파하지 않고는 개혁이 불가능하고, 그 낡은 구질서를 깨뜨리기 위해 조선의 사회에 예수의 가르침을 설파할 책무를 수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종교와 민족을 하나로 놓고 사유하는 윤치호의 선지자적 태도는 독립협회 회원 및 참여 민중 대부분에 파고들 여지가 없었다.[46]
[편집] 가계
양아버지 서광하는 생부 서광효의 6촌 형제였다. 큰딸 스테파니 제이슨은 미국인과 결혼했다.[35] 화가인 둘째 딸 뮤리엘 제이슨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아버지를 곁에서 도왔다.[35]
형 서재춘의 손자 서태원(전 감신대 교수)은 6·25 전쟁 때 북조선으로 납북되어 갔고 [47][48] 생존 자손으로는 현재 종손자인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서희원, 서태원의 아들이며 서재필의 종증손자인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변호사로 있는 서동성이 생존해 있다. 서동성은 변호사업 외에 이민100주년남가주기념사업회 공동회장과 서재필기념사업을 하고 있다.
- 6대조 : 서명형(徐命珩)[49]
- 5대조 : 서유승(徐有承)
- 고조 할아버지 : 서정보(徐庭輔)
- 증조 할아버지 : 서범순(徐范淳)
- 할아버지 : 서상요(徐相堯)
- 아버지 : 서광효(徐光孝, ? ~ 1884년 12월)
- 어머니 : 성주 이씨(星州李氏, ? ~ 1884년 12월)
- 양 아버지 : 서광하(徐光夏, )
- 양 어머니 : 안동 김씨(安東金氏)
- 친형 : 서재춘(, ? ~ 1884년 12월, 음독자살)
- 친형 : ?(, 1851년 ~ 1884년, 처형되었다.)
- 친동생 : 서재창(徐載昌, 1866년 ~ 1884년 12월 13일, 조선의 군인, 참형되었다.)
- 여동생 : 서기석[12]
- 매제 : 송종섭
- 처 : 광산김씨(光山金氏, ? ~ 1884년 12월, 음독자살)
- 후처 : 뮤리엘 암스트롱(Muriel Armstrong, 1877년 ~ 1944년)
- 친족 : 서광범(徐光範)
- 양 외삼촌 : 김성근(金聲根)
- 외척 : 김옥균
- 외증조부 : 이유원[5], 조선에서 이조참판 역임
- 외조부 : 이영석, 참판 역임
- 외조모 : 장흥 임씨, 1남 5녀, 5녀가 그의 어머니이다.[5]
- 외조모 : 경주 김씨, 1남
- 친 외삼촌 : 이지용(1825년 ~ 1891년)
- 친 외사촌 : 이교문 (1846년 ~ 1914년, 항일의병장[5])
- 외종질 : 이용순, 독립운동가
- 종손 : 서희원, 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36]
[편집] 저서
[편집] 기타
[편집] 참고 자료
- 서재필 -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 송재 서재필
- 미주 한인의 아버지 서재필
- (운명의 20년) 서재필은 조선일보 2004.08.24
- 서재필 동상 제막 한겨레 2008-07-08
[편집] 관련 서적
- 임창영, 《서재필 박사 전기》(공병우 글자판 연구소, 1987)
- 이정식, 《구한말의 독립투사 서재필》(서울대 출판부, 2004)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 이광린, 〈서재필의 개화사상〉, 《동방학지》Vol.18,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78)
- 조정희, 〈개화기 서재필의 사상에 대한 고찰〉, 《공자학》Vol.9, (한국공자학회, 2002)
- 유영익, 《갑요경장 연구》(일조각, 1990)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주석
- ↑ 그의 양아버지 서광하는 친할아버지 사촌의 아들로, 그에게는 실제 7촌 아저씨뻘이 된다.
- ↑ 주진오 (1993). 〈교과서의 독립협회 서술은 잘못되었다〉, 역사문제연구소 편: 《바로 잡아야 할 우리 역사 37장면 1》. 역사비평사, 31~40쪽쪽 “그러나 그는 귀국 후 단 한 번도 자신을 이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고 필립 제이슨 또는 피제손으로 표기하였다”
- ↑ 가 나 의사-언론인 서재필, 소설가이기도 했다, 코메디닷컴, 2010년 12월 2일.
- ↑ 강준만 (2007년 11월). 《한국 근대사 산책》. 서울: 인물과사상사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서재필 외가의 태교철학 담긴 보성 - 오마이뉴스 2004년 3월 5일
- ↑ 김도태 (1948년 7월). 《서재필박사자서전》. 서울: 수선사
- ↑ 가 나 다 (운명의 20년) 서재필은 조선일보 2004.08.24일자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거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1s3852b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거 너 더 러 머 버 donga.com[뉴스]-송재 서재필(해방공간의 주역:18)
- ↑ 갑신정변 다시 보기 - 근대화 10년 늦춘 '실패한 혁명', 2003-03-17, 프레시안.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이선민 논설위원. “<만물상> 워싱턴의 서재필 동상 (한글)”, 《조선일보》, 2008년 5월 7일 작성. 2008년 8월 9일 확인.
- ↑ 가 나 내 외할머니는 서재필 박사의 동생이었다 - 오마이뉴스 2010년 6월 5일자
- ↑ 가 나 다 라 마 바 조병옥 《나의 회고록》(조병옥, 도서출판 해동, 1986) 75페이지
- ↑ 가 나 다 라 마 바 이황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2007) 100페이지
- ↑ 조병옥 《나의 회고록》(조병옥, 도서출판 해동, 1986) 76페이지
- ↑ :::::조선왕조실록의 홈페이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 조선의 관료제는 직책은 없거나 퇴직해도, 가선대부, 통정대부 등의 품계는 유지되었었다.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73048
- ↑ 가 나 다 라 이황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2007) 93페이지
- ↑ 독립신문의 영문판은 The Independent 라는 이름으로 발행되었다.
- ↑ 가 나 이황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2007) 91페이지
- ↑ 가 나 다 라 이황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2007) 92페이지
- ↑ 유영렬, 〈독립협회의 민권사상연구〉, 《사학연구》22호, 한국사학회, 1973, 68~71쪽.
- ↑ 이 기간 중 서재필은 끊임없는 살해 위협에 시달렸고, 위협을 피해 미국인 경호원들과 일본인 무사들을 고용하여 수행원으로 붙이고 다녔다.
- ↑ 한편 이승만과 김규식 역시 귀국후 한국인 청년들에게 유학을 권고하였고 그들의 영향을 받은 청년지사들이 미국유학을 떠나게 된다.
- ↑ 가 나 정한경은 한 달 만에 쫓겨났다 - 오마이뉴스 2010.11.08
- ↑ 가 나 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41~42쪽
- ↑ 이정식, 《구한말의 개혁, 독립투사 서재필》(서울대출판부, 2003) 357~360쪽.
-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2권 43쪽
- ↑ 칼을 든 혁명투사에서 청진기 든 의사가 된 서재필
-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57쪽
- ↑ 이정식 《구한말의 개혁 독립투사 서재필》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363~365쪽
- ↑ 가 나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58쪽
- ↑ 가 나 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59쪽
- ↑ 가 나 다 칼을 든 혁명투사에서 청진기 든 의사가 된 서재필 중앙일보 2010년 3월 22일자
- ↑ 가 나 다 라 마 서재필선생 전명운의사/태극기 앞세우고 그리던 조국땅에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 ↑ 가 나 다 ““보성군에 서재필 기념공원 개관식 열려” (한글)”, 《나라사랑》, 2008년 8월 1일 작성, p. 11면 3단 아래. 2008년 8월 9일 확인.
- ↑ “서재필 박사 큰 뜻 함께 느꼈으면…” , 서울신문.
- ↑ 서재필 동상 내달 워싱턴서 제막, 동아일보
- ↑ 이정식 《구한말의 개혁 독립투사 서재필》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275~284쪽
- ↑ 이정식 《구한말의 개혁 독립투사 서재필》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275~284쪽
- ↑ 가 나 다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26~228쪽 참조.
- ↑ 가 나 다 라 마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80페이지
- ↑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81페이지
- ↑ 가 나 이황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2007) 99페이지
- ↑ 가 나 이황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2007) 101페이지
- ↑ 서재필 박사―최병헌 목사…후손이 기념사업 추진 2002년 11월 13일자
- ↑ “선조들 발자취 좇아 기념사업 모색” 경향신문 2002년 11월 12일
- ↑ 서재필 기념재단이 미국의 퀘이커보관소에서 수집한 서재필의 족보는 한문체이고, 독립기념관에 한부 소장되어 있다.
|
1996년 선정 이 달의 독립 운동가 |
|---|
|
1996년 선정 이 달의 문화 인물 |
|---|
- 갑신정변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 대한제국의 정치인
- 대한제국의 관료
- 대한제국의 민권운동가
- 대한제국의 교육인
- 대한제국의 언론인
- 한국의 독립운동가
- 한국의 혁명가
- 조선의 문신
- 조선의 정치인
- 조선의 군인
- 조선의 작가
- 과거 급제자
- 육군 군인
- 혁명가
- 사상가
- 반공주의자
- 일제 강점기의 의사
- 일제 강점기의 언론인
- 일제 강점기의 의학자
- 일제 강점기의 사회운동가
- 일제 강점기의 작가
- 일제 강점기의 기업인
- 미국의 의사
- 미국의 군인
- 군의관
- 미국의 기업인
- 미국의 소설가
- 한국의 군정기
- 제1공화국
- 윤치호
- 이승만
- 한국계 미국인
- 반전체주의자
- 게이오기주쿠 대학 동문
- 프린스턴 대학교 동문
- 전라남도 출신
- 충청남도 출신
- 대구 서씨
- 1864년 태어남
- 1951년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