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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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장의 초상

이홍장(중국어: 李鴻章, 병음: Lǐ Hóngzhāng 리훙장[*], 1823년 2월 15일 ~ 1901년 11월 7일)은 말기의 한족계 중신으로 청의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 등을 주도한 사람이다. 태평천국의 난 이후 정계의 실력자로 등장하였으나, 청일 전쟁을 계기로 실각하였다.

정계 진출[편집]

1886년에 발간된 이홍장이 청나라와 외국이 맺은 조약을 유형별로 분류하여 기록한 책인 通商章程成案彙編(통상장정성안휘편)에 실린 조선왕조의 국기

이홍장은 본래 청나라 말기 나라의 혼란에 즈음하여 발생한 여러 한족계 민병단을 이끌고 있었다. 이홍장의 군대는 본래 '회군'이라 이름지어졌는데, 태평천국의 난에서 스승인 증국번과 함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하여 조정에 등용되었다.

증국번 사후, 이홍장은 청나라의 한족계 대신이 되어,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른다. 북양대신은 본래 남양대신과 함께 청나라의 군권을 쥐고 있는 자리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정 유일의 실력자의 위치이다. 이홍장이 북양대신이 된 것과 더불어 그의 회군은 북양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양무 운동[편집]

이홍장은 일본영국 등 밀려드는 외세에 대항하여 양무운동을 펼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양무운동은 청나라 본래의 정치체계는 유지한 채, 군사, 과학 등의 분야에서는 서구화를 추진하여 외세에 당당히 맞서려는 자강 운동이었다.

양무운동은 청나라의 만주족 지배층에게도 지지를 받았다. 조정의 실권자인 서태후가 그를 후원하였으며, 이홍장 역시 한족이기는 하나, 청나라의 유지를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양무운동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독일, 영국 등 외국에서 파견된 장교들이 이홍장의 북양군을 훈련시켰으며, 서양에서 들어온 무기와 기술을 이용하여 이홍장은 강력한 군사력을 자기의 손에 쥐게 된다. 그리고 무기와 탄약을 만드는 군수공장을 각지에 설립하고, 경제 분야에서도 전국에 여러 회사와 공장을 세웠다. 또, 각종 서적을 번역하고 신식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미국과 유럽에 많은 유학생을 보냈다.

이홍장의 북양군북양함대를 구성하고, 청나라의 수도인 베이징톈진 주위에 포대를 설치하였다.

양무운동의 결과[편집]

청 내부의 보수파 관료들이 양무파의 활동을 견제하면서 자신의 권위를 지키는데 치중하였다. 그래서 행정과 정치 제도의 개혁은 원활하지 않았고, 새로 세워진 회사와 공장에 대한 관리들의 부당한 경영 간섭, 자금과 판매망 부족 또한 문제가 되었다. 그 결과, 양무운동은 일관성 있게 추진되지 못하였다.

말년[편집]

이홍장의 북양군이 청일 전쟁에서 대패한 후, 북양군은 몰락했으며, 이홍장 및 양무운동을 주장한 세력들의 발언권은 크게 쇠퇴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나라의 광서제와 함께 청나라의 정치체제 자체를 개혁하려는 세력들이 변법자강운동을 펼친다. 그러나 서태후를 비롯한 청나라 귀족들에게 쫓겨난 후, 이홍장은 다시 기용된다. 그러나 이미 70살이 넘은 이홍장은 예전처럼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대신이 아닌, 외교관 역할을 수행하며 일본과 서구 열강과의 평화를 정착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1901년 세상을 떠났다.

사후[편집]

이홍장의 유산은 회군과 북양군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장교들에게 계승되었다. 그들은 청나라의 멸망 이후 각종 군벌을 형성하였으며, 장제스에게 토벌되기 전까지 중국의 북방을 장악하였다. 이홍장의 후계자 중 가장 강력한 사람은 위안스카이로, 그는 쑨원과 함께 중화민국을 창설하였지만, 곧 쑨원을 배신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병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