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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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서제
《光绪皇帝朝服像》.jpg
청나라 청나라제11대 황제
재위 1875년 ~ 1908년
황후 효정경황후
부친 순현친왕
모친 순현왕대복진
이전 황제 동치제
다음 황제 선통제

광서제(光緖帝, 1871년 8월 14일 ~ 1908년 11월 14일)는 중국 청나라의 제11대 황제이다. 묘호는 덕종(德宗). 시호는 동천숭운대지정경문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이다. 몽골어로 빠다라올트 투르 칸이라 불린다. 청나라 역사상 최초의 방계 혈통 출신 황제이다.

[편집] 생애

큰어머니이자 이모인 서태후(西太后)의 지원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에는 서태후가 섭정을 했으며 양무(洋務)운동으로 부분적이나마 중국의 근대화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1894년 - 1895년청일전쟁이 청나라의 패배로 끝나 대만일본으로 넘어가는 등 중국에서의 열강의 각축은 더욱 치열해졌다.

광서제는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등 신진 엘리트들을 등용하여 일본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모델로 한 무술(戊戌)개혁을 실행하여 완전 근대화를 꾀하였다. 당시 캉유웨이 등의 지식인들은 러시아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영국, 일본과 협력할 것을 제안하는 한편, 신문에 개혁안을 싣는 등 개혁운동의 선두에 섰으나, 보수적인 서태후, 이홍장(李鴻章) 등이 반격을 가하여 개혁에 가담한 지식인들이 망명을 하거나, 사형당하는 등, 개혁은 수포로 돌아가고 서태후의 섭정이 재개되었다.

1899년에 일어난 의화단(義和團)과 열강 8국의 연합군이 1900년 베이징에서 격돌하는 사이에 광서제는 서태후와 함께 시안으로 피난을 갔고 광서제의 애비(愛妃) 진비(珍妃)는 서태후의 명령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베이징 의정서가 성립되어 광서제는 베이징으로 돌아왔으나 여전히 실권이 없었다. 1908년 서태후와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에 대해 광서제는 독서를 즐겼고 이상주의적 성격이 강해 보수적 성격이 강한 서태후와 대립했다. 1908년 그는 사망했고 하루 뒤 서태후도 사망했다. 그가 독살 의혹이 있으며, 최근에는 법의학적으로 그가 서태후에 의해 독살이라는 것을 증명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1]

[편집] 가족 관계

[편집] 주석

  1. 청나라 말 비운의 황제 광서제 독살 사실 100년 만에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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