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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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
YuanEmperorAlbumGenghisPortrait.jpg
몽골 제국의 초대 대칸
본명 보르지긴 테무진
재위 1206년 ~ 1227년 8월
대관식 1206년
출생일 1162년?
출생지 몽골 헨티 산
사망일 1227년 8월[1]
왕후 보르테
부왕 예수게이
모후 호엘룬
후임자 툴루이 (임시)
왕조 원나라

칭기즈 칸(몽골어: ᠴᠢᠩᠭᠢᠰ ᠬᠠᠭᠠᠨ Činggis Qaγan,Чингис хаан, 1162년? ~ 1227년 8월[1])은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대륙을 점유한 몽골 제국의 창업자이자 초대 대칸이다. 원래 이름은 보르지긴 테무진(ᠪᠣᠷᠵᠢᠭᠢᠨ ᠲᠡᠮᠦᠵᠢᠨ, Боржигин Тэмүжин)이었다.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출신이 아닌 능력에 따라 대우하는 합리적 인사제도인 능력주의에 기반한 강한 군대를 이끌어 역사상 가장 성공한 군사, 정치지도자가 되었다. 중국사에는 (元) 태조(太祖)로 기록된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몽골 칭기즈 칸 국제공항으로 남아 있다.

목차

생애[편집]

초기의 투쟁과정[편집]

오논 강, 테무진이 태어난 곳이다.

태어남[편집]

칭기즈 칸의 정확한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1155년, 1161년, 1162년[2], 1167년[3] 등 몇 가지 설이 존재하나, 정설로 인정되고 있는 것은 아직 없다. 현재 몽골에서 기념하는 칭기즈 칸의 탄신일은 1162년 11월 14일이다.[3] 테무진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다. 칭기즈 칸은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타타르족과의 전투를 승리로 끝낸 직후에 태어났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태어날 때 손에 고대 동방 사람들에게 생명을 상징하는 피 한 움큼을 쥐고 있는 등 여러가지 상서로운 징표들이 나타났다. 예수게이는 이를 길한 징조로 생각하여 패배한 타타르 군주, 테무진 우게의 이름을 따서 자식에게 테무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4] 칭기즈 칸의 이름에 대한 또 다른 해석으로는 ‘테무진’이 ‘대장장이’라는 뜻임을 근거로 당시 유목민 사회에서 쇠가 중요했음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5]

불행[편집]

그러나 그의 유년시대는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9세 때 몽골 왕족 보르지긴족의 후예인 아버지 예수게이가 그의 부족과 오랜 불화관계에 있던 타타르족에 의해 독살되었다. 예수게이가 죽자 부족 사람들은 예수게이와 정적인 타이치우트 일가의 사주를 받아, 예수게이의 미망인 호엘룬과 그 자녀들이 지도력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고 기회를 이용하여 권력을 찬탈했다. 이로 인해 테무진의 영세한 가문은 유목민의 일상음식양고기우유는 전혀 먹지 못하고 풀뿌리와 생선으로 연명하는 극심한 가난을 경험했다.

토그릴 완 칸과의 협상[편집]

테무진과 그의 가족은 비록 보르지긴족들의 배척을 받긴 했지만 왕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상당한 대접을 받은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기 전에 정혼해준 아내 보르테를 되찾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몽골 북방에 사는 메르키트족은 예수게이가 그들에게 빼앗은 여자인 호엘룬을 아내로 삼았기 때문에 테무진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메르키트족은 테무진의 아내인 보르테를 납치했다. 테무진은 아버지 예수게이와 의형제를 맺었던 케레이트족의 왕인 토그릴 완 칸에게 사정을 말하여 보르테를 다시 찾아올 수 있었다. 당시 토그릴 완 칸은 몽골 지역 안에서 가장 강대한 통치자였다. 테무진은 결혼기념물로 받은 잘의 모피를 토그릴에게 선물했고 답례로 토그릴 완 칸은 테무진의 흩어진 부족민들을 모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토그릴 완 칸은 테무진에게 2만 명의 병력을 제공하고 테무진의 어릴 적 친구인 쟈무카도 설득시켜 병력을 제공하게 함으로써 그 약속을 지켰다. 테무진 일가의 궁핍과 이웃 부족의 왕이 제공한 대규모 병력은 상반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실 여부가 의심스러우나, 〈몽골 비사〉, (원조비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권력자로 부상[편집]

메르키트족 정복[편집]

강력한 동맹세력의 후원을 받은 테무진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메르키트족을 패배시켰다. 또한 장래에 자신을 반역할 기미가 있는 부족은 초토화시키는 전략을 세웠다. 이 전략에 따라 그는 메르키트족에 이어 주르킨족귀족들도 패배시켰다. 왜냐하면 주르킨족의 귀족들은 테무진의 동맹세력이었으나, 테무진이 타타르족 공격에 나선 틈을 이용하여 그의 재산을 약탈하는 배반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부족의 귀족들을 사회적 영향력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여 모두 처형했고, 평민들은 병졸과 노예로 삼았다. 그는 배후에 적을 남겨놓는 경우가 절대 없었다. 수년 뒤 중국을 침공하기에 앞서 먼저 등 뒤에서 자신을 찌를 유목민 통치자가 없는지 확인했다.

부족의 지도자들과의 관계[편집]

메르키트족을 패배시킨 이래 테무진은 스텝(기마인들이 살던 지역) 지역의 최고 실력자가 되려는 목표를 세웠다. 부족의 지도자들은 테무진의 주위에 몰려들기 시작했고, 12세기말에 이르자 그들 지도자 가운데 일부는 테무진을 몽골족의 칸(왕)으로 옹립하자고 제의했다. 또한 그 지도자들은 전쟁과 수렵에서 테무진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부족들과의 관계에서의 한계[편집]

그러나 그들이 내놓은 조건을 보면 테무진에게 자신들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믿음직스러운 장수가 되어달라는 것이었지, 그들을 지배하는 군왕(君王)이 되어달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 뒤 실제로 일부 부족의 지도자는 그를 배신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테무진은 세력이 미약한 족장에 불과했다. 당시 중국 북부를 통치하고 있던 금(金)나라의 황제는 테무진을 중요하지 않은 인물로 여기고 있었다.

타타르족 정복[편집]

유목민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하여 변방의 평화를 유지했던 금은 가끔씩 변방정책을 바꾸어 그들의 동맹세력인 타타르족을 공격했다. 토그릴과 함께 테무진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타타르족의 배후를 공격했다. 세력이 점점 강성해지자 그는 강대한 타타르족과 최후의 결전을 벌인 것이다. 전투에서 타타르족을 패배시킨 뒤 수레바퀴보다 키가 큰 자들은 곧 어른은 모두 죽이고, 단지 아이들만 살려두었는데 이들은 나중에 커서 자신들의 신분을 잊고 몽골의 충실한 추종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금나라 황제는 토그릴에게 왕(王)이라는 칭호를 내렸고 테무진에게는 그보다 낮은 칭호를 내렸다. 실제로 그 후 몇 년 동안 금은 테무진의 존재를 전혀 위협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테무진은 스텝 지역에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해나가는 일에 몰두했기 때문에 중국에게 그리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숙청작업[편집]

테무진은 조직적으로 모든 정적들을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친구이며 오랜 동료였던 자무카가 조직한 여러 세력의 연합은 그에게 패배를 거듭하여 그 존재가 없어졌고, 타타르족은 몰살당했다. 한편 케레이트족의 왕 토그릴과의 동맹관계도 마침내 붕괴되었고 테무진은 그마저도 최고권력을 잡는 데 장애가 된다고 판단하여 제거하려 했다. 토그릴은 자무카의 설득과 아들의 야망과 질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테무진에게 대항하여 싸울 수밖에 없었다. 테무진은 토그릴을 패배시킨 뒤 케레이트족을 모두 병졸과 노예로 삼았다. 테무진은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옛 정적·귀족 들은 하나도 살려두지 않을 속셈이었다. 그 이유는 첫째, 이들의 군대를 빼앗아 자신의 군대로 삼고, 둘째, 몽골 지역의 분열을 가져온 소속 부족 안에서의 충성심을 분쇄하고, 셋째, 모든 유목민 부족을 통일하여 테무진의 가문에만 충성을 바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나이만족 정복[편집]

서부지역의 나이만족 통치자는 몽골족의 강력한 세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자무카와 합동으로 연합세력을 형성했으나, 완전히 패배했고 나이만 왕국은 없어졌다. 한편 변덕이 심한 자무카는 마지막 순간에 나이만족 왕을 배신했다. 이같은 전쟁은 1200년대 초반에 벌어졌고 테무진은 스텝 지역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1206년 오논 강변에서 열린 족장대회의에서 테무진은 칭기즈 칸('전 세계의 군주라는 뜻')으로 추대되었다. 1206년 모든 스텝 지역을 통치하는 황제로 추대되었을 때 그는 수천 명에 달하는 피복속 부족의 사람들과 그 지역을 자신의 친·인척, 동료들에게 나누어 관리하게 했다. 그리하여 기존 부족·가문의 조직된 형태를 바꾸어 봉건제도와 유사한 조직을 만들어냈다.

몽골족의 통일[편집]

칭기즈칸의 지도력[편집]

1206년은 몽골 및 세계의 역사에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몽골족은 스텝 지역 밖으로 출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몽골 자체도 새로운 조직으로 재정비되었다. 칭기즈 칸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인해 통일된 몽골족이 존재하게 되었고, 몽골족은 많은 변천과정(봉건적 분열, 부족간의 세력다툼 재연, 영토병합)을 거쳐 오늘날까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몽골군의 특징[편집]

믿을 수 있는 군인들[편집]

몽골족의 야망은 스텝 지역 밖으로까지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었다. 칭기즈 칸은 세계정복의 원대한 야망을 실현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새로운 몽골국은 무엇보다도 전쟁을 치르기 위한 조직으로 정비되었다. 칭기즈 칸의 군대는 10진법 체제로 나뉘어 엄격한 기강을 유지했고, 보급품과 군비를 갖추었다. 부장(部將)들은 칭기즈 칸의 아들이거나 그에게 절대충성을 바치는 선발된 사람들이었다.

유연한 무기사용[편집]

칭기즈 칸은 군사적으로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급속하게 변하는 외부환경에 잘 적응했다. 처음에 그의 군대는 사료가 필요 없는 튼튼한 초식동물인 몽골 조랑말을 타는 기병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군대로 다른 유목민들은 패배시킬 수 있었지만 도시들을 함락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곧 몽골족들은 규모가 큰 성읍도 투석기·쇠뇌·사다리와 끓는 기름 등을 사용하여 함락시킬 수 있었고, 흐르는 강물을 다른 데로 돌려놓아 홍수가 일어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정착문화를 가진 국가와 접촉하게 되면서 칭기즈 칸은 서서히 공격·파괴·약탈보다 더 멋진 권력의 향유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능한 참모들[편집]

칭기즈 칸에 대항했던 마지막 몽골 부족인 나이만의 한 신하는 그에게 문화의 유용함을 일깨워 주었고, 몽골어를 문자로 정착시키는 일을 도와주었다. 〈몽골 비사〉에 따르면 1222년아무다리야 강(고대명은 옥수스)과 시르다리야 강(고대명은 작사르테스) 지역에서 호라즘 샤 왕조와 전쟁을 벌였을 때, 칭기즈 칸은 이슬람 출신의 측근으로부터 성읍의 의미와 중요성을 배우게 되었다.

한때 금나라의 신하였던 또 다른 측근인 야율초재는 농민과 장인들이 생산해내는 물품은 과세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일러주었다. 칭기즈 칸은 당초 중국 북부의 비옥한 전답들을 말의 목초지로 만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몽골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시킬 위대한 정복은 아직 수행되지 않은 단계였고 그 주목표로 중국이 떠올랐다.

정복 사업[편집]

서하 정복[편집]

칭기즈 칸은 중국 북서쪽 변방지역의 국가인 서하(西夏)와 싸움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고, 1211년 중국 북부에 자리잡고 있던 금을 향해 진격했다. 1214년 금으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보상금을 받고 철수했다가 1215년 전쟁을 재개하여 연경을 함락시켰다. 그 뒤 중국 북부의 완전한 장악은 부장인 무칼리에게 맡겨졌다.

호라즘 정복[편집]

칭기즈 칸은 중국에서 더 나아가 호라즘 샤의 정벌에 나섰다. 그 전쟁은 칭기즈 칸의 보호하에 있던 450명의 이슬람 대상단을 몰살시킨 오트라르 시(市)의 지사(知事) 이날축 때문에 촉발되었는데, 호라즘 제국의 샤(황제)는 이에 대한 보상을 거부했다. 호라즘 샤와의 전쟁은 조만간 벌어지게 되어 있었지만 이제 더이상 그 전쟁을 연기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철저한 섬멸전[편집]

이 전쟁에서 몽골족은 끔찍한 야만적 행동을 자행하여 이그만족이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몽골족은 모든 도시를 휩쓸었고, 주민들은 몰살되거나 동족이라도 자신들보다 높은 신분이라면 모두 몰살시키는 몽골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도록 강요되었다. 칭기즈 칸이 호라즘 샤를 상대로 무자비한 복수전을 펼쳐나가는 동안 전답과 화원은 황폐화되었고 관개시설은 파괴되었다. 1223년 마침내 그는 철수했고 1226~27년 서하를 상대로 마지막 전역(戰役)에 나설 때까지 더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는 1227년 8월 18일에 죽었다.

칭기즈 칸의 정복활동[편집]

칭기즈 칸의 정복활동 및 정복지역.

무자비하고 잔인한 정복자의 모습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칭기즈 칸은 몽골에서 영웅이자 국부로 추앙받는다. 이 되기 이전에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몽골 연맹을 통합하여, 흩어져 있던 부족들에게 동질감을 형성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한 칭기즈 칸은 역설적으로 가장 넓은 지역에 전쟁의 처참함을 가져온 후에 가장 분쟁이 적은 평화의 시기를 가져왔다고 평가되고 있다.

서하을 정복하고 중앙아시아호라즘 제국을 포함한 수많은 정복을 통하여 무수히 많은 나라를 합병하였다. 칭기즈 칸은 몽골 제국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기록을 남겼다. 몇 세기 동안 유라시아 대륙의 넓은 영토를 통치했던 몽골 제국은 몽골 제국에 의한 평화시대를 이루고, 인구학지정학적으로 큰 변화를 일으켰다. 몽골 제국의 영토는 현대의 몽골, 중국,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몰도바,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이라크, 이란,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쿠웨이트, 터키, 키프로스, 시리아 일부를 포함하는 것이다.[6]

몽골 제국 최대의 판도

당시 고려와는 오랜 전쟁끝에 강화를 하고 고려의 자주권을 인정하는데, 이는 고려의 저항이 40여년 동안 지속되고 산악 지대가 많은 고려 정벌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끝까지 저항하는 고려인들을 힘만으로는 더이상 굴복시키기 어려운 이유 때문이었다. 비슷한 이유로 몽골군은 베트남 정벌에 실패했는데, 이는 밀림 지대인 베트남에서 몽골군의 주력인 기병이 제대로 힘을 쓸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하 정복[편집]

서하정복에서의 전술[편집]

몽골을 통일한 그는 정착문명 민족에 대한 몽골인 최초의 공격을 시작했다. 서하탕구트 유목민들이 감숙, 알라샨, 오르도스에 세운 나라로, 탕구트인들은 티베트 종족에 속했으며 종교는 라마교(티베트 불교)였고 중국의 영향으로 문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되어 있었으며 한자에서 파생된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평원에서 전쟁하는 것에 능했던 몽골인들은 서하군과의 유격전에서는 연전 연승을 거두어 여러 차례(1205년-1207년,1209년) 서하를 약탈하고 황폐화시켰다. 몽골의 총공격이 감행된 3차 침략 때 서하군은 전차 부대와 장창 부대를 앞세워 한순간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기동력의 부족으로 몽골군의 산개 작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고, 결국 총사령관 외명령공이 포로로 잡혀 처형당하며 사실상 궤멸 상태에 빠졌다.

서하의 항복[편집]

몽골군은 수도인 영하를 포위했으나 공성전의 경험이 없던 몽골군은 이를 함락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황하의 물줄기를 바꾸어 영하를 공격하려는 시도도 하였으나 건설의 경험이 없던 그들에게는 댐 건설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고, 오히려 사고로 수십명이 익사하는 피해를 보기도 했다(몽골군은 수영을 할 줄 몰랐기에 특히 피해가 심했다). 한편 양종 이안전은 농성 기간 동안 금에 구원요청을 하기도 했으나 거절당했고, 물자 부족에도 시달렸다. 결국 1207년 양종 이안전은 몽골에의 복속을 약속하고 자신의 딸을 보내 칭기즈 칸과 혼인시켰다. 이후 서하는 몽골의 명령을 받아 금나라와 오랜 전쟁을 치렀는데 이는 양국의 국력을 쇠퇴하게 하였다.

서하의 멸망[편집]

1211년 이준욱이 반란을 일으켰고, 양종은 퇴위하였으며 그 해 사망했다. 양종 역시 전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군주로, 이러한 일이 몇년 안에 잇따라 발생하자 이전의 정치적 혼란과 더불어 금과의 전쟁으로 국력은 급속히 쇠퇴해갔다. 게다가 1219년, 1226년에는 연달아 칭기즈칸의 서정(西征) 참가를 거부하여 칭기즈 칸의 분노를 샀다. 칭기스 칸이 호라즘 원정에 앞서 서하에 사신을 보내 출정을 명령하자 아샤 감부라는 탕구트 고관은 이렇게 답했다.

능력도 없으면서 칸은 다 무엇이냐?[7]

이는 만약 칭기스 칸에게 충분한 병력이 없다면 그는 최고 권력을 행사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8] 서하인들은 당시 중앙아시아의 최강국이었던 호라즘과의 전쟁에서 몽골군이 패배할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에 나온 반응이다. 또한 그들은 이 판단에 의거해 몽골군의 부재를 틈타 몽골의 영토를 침범하기도 했다.[출처 필요]

그러나 호라즘이 몽골의 침입에 무력하게 무너지면서 이러한 서하의 결정은 치명적인 실수임이 드러났다. 1224년, 칭기스 칸은 서하의 반란에 대한 소식을 듣고 서둘러 페샤와르를 떠나 몽골 고원으로 귀환했다.[9] 1225년 봄에 그는 몽골 고원에 도착했고, 여름에는 내정을 다지고,[10] 가을에는 카라 툰의 행궁에서 묵었다.[11] 1226년 가을, 칭기스 칸은 서하에 대한 원정을 개시했다. 칭기스 칸은 사고로 말에서 낙마한 뒤에 열병을 겪었고, 이에 아들들은 원정을 만류했다. 하지만 칭기스 칸은 원정을 강행했다. 칭기스 칸은 우선 서하에 사신을 파견해 서정에 동반하지 않고 그 자신을 모욕한 것을 책망하며 항복을 제의했으나, 서하는 이를 거부했다.[12] 칭기스 칸은 서하의 도시 대부분을 점령했고, 1226년 여름에는 서하 군대를 격파했다.[13][14] 이후 몽골군은 서하의 수도 흥경을 포위했다. 그때 칭기스 칸은 남하하여 육반산 남쪽에서 야영했다. 라시드 앗 딘은 이 남하의 목적은 칭기스 칸이 남송이었다고 적었다.[15] 그때 서하는 칭기스 칸에게 사신을 보내 한 달 뒤 주민들을 이끌고 도시 밖으로 나와 항복하겠다고 제의했고, 칭기스 칸은 이를 허락했다.[16] 하지만 죽음을 예감하고 있던 칭기스 칸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적이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절대로 곡을 하거나 애도하지 말라. 탕구트의 군주와 백성들이 기간에 맞추어 밖으로 나오면 그들을 모두 없애 버려라![17]

는 말을 남겼다. 1227년 8월 15일[18] 또는 8월 18일[19], 칭기스 칸은 죽었고, 그 뒤 서하의 수도 영하는 함락되고 그 주민들은 학살당했다.[19]

잔혹한 보복[편집]

한편 서하를 점령한 칭기즈 칸은 대대적인 민족 학살을 실시했는데, 이는 서하의 호라즘전 참가 거부가 칭기즈 칸을 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며, 2차 침략에 대한 저항이 끈질겼기 때문에 칭기즈 칸의 섬태멸진 방식의 정복 전쟁에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중국 국영 CCTV의 보도에 의하면, 몽골군은 서하사람들을 매우 철저하게 살육해서 멸족시켰기 때문에 현재까지 서하인의 유전자를 가진 서하인의 후손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한다.[20]

비판[편집]

정복지 나라의 국민이 이처럼 멸족당한 예는 세계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일로, 이는 칭기즈칸과 몽골 제국이 얼마나 잔학한 정복자였는지 알 수 있는 사례이며 학자들에 의해 비판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금 정복[편집]

금과의 관계[편집]

칭기즈 칸이 젊은 시절 케레이트와 함께 금의 마달갈(장종, 1189-1208)의 신하로서 타타르와 싸운 적이 있었다. 그는 장종의 신하였으며, 장종은 용병의 대가를 지불하였고, 중국식 칭호를 내려주었다.

그의 종증조부 안바가이 칸금나라로 끌려가 사지가 찢기는 형벌을 받고 처참하게 죽은 것을 그는 한시도 잊지 않았다. 마달갈이 죽자 그의 후계자 영제(위소왕)은 칭기즈 칸이 군신의 예를 갖추고 조공을 늘릴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의 사람됨을 알고 있던 칭기즈 칸은 무능한 통치자인 영제의 명령을 거부하고 정복의 기회로 이용하였다.

웅구트 사람들의 협조[편집]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던 투르크계 웅구트인들이 몽골에서 만리장성으로 가는 산서성 북부의 길을 금을 위해 방어하고 있었다. 1211년 웅구트의 알라쿠쉬 티긴은 금의 정복을 위해 칭기즈 칸에게 이 길을 열어주었다. 그는 북경의 옛 주인이었으나 금에 의해 쫓겨난 거란인들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공격하였다. 특히 거란인 출신 장수 석말명안몽골군을 도와 금 황제의 목마장을 습격해 수십만 마리의 군마를 탈취하여 몽골군의 기병력을 대폭 증강하는데 기여했다. 1212년에는 거란의 옛 영토인 만주 서남부의 요하에서 야율유가가 반란을 일으켰다. 거란인들은 몽골계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퉁구스계 언어를 사용하는 금의 여진족보다는 몽골과 더 친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 야율유가는 몽골의 도움으로 요양을 빼앗고 요나라를 세웠으며 1220년 죽을 때까지 몽골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몽골과 함께 하였다. 이로써 금나라 서북의 웅구트와 동북의 거란은 몽골과 연합하게 되었다.

금나라 정복시작[편집]

칭기즈 칸의 금나라 정복은 1211년에 시작되어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그의 후계자 시대인 1233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될 수 있었다. 몽골인들은 중국의 오래된 전투방법인 공성전을 다루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그들이 공포를 조성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던 학살의 방법은 인구가 많은 중국인들에게 큰 인상을 주지 못하였다. 또한 여진은 정주한 지 100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목민의 용맹함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1213년에는 선화를 정복하고 산서 중부를 돌파하여 태원평양을 빼앗았다. 이 후 남으로 기수를 돌려 하북과 산둥 평원을 가로질러 하간과 제남을 함락시켰다. 칭기즈 칸이 북경을 봉쇄작전으로 공격하려고 했을 때, 금 조정에는 궁정분란이 일어나 영제가 홀사호에게 암살을 당하였고, 홀사호는 영제의 조카인 오도보(선종)을 제위에 앉혔다. 당시 북경을 공격하고 있었으나 잇따른 실패에다 물자 부족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칭기즈 칸은 오도보의 화의를 받아들이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고 철수하였다.

북경 함락[편집]

이후 오도보는 바로 개봉으로 천도하였고, 칭기즈 칸은 그것을 반격의 준비로 생각하고 다시 북경을 쳐서 마침내 성공적으로 함락해 불사르고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초원의 거주자들은 아무런 과도기적 단계도 없이 도시문명을 가진 고대국가를 소유하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더 나은 방법을 알지 못했던 그들은 난감함에 의하여 방화와 살육을 하게 되었다. 개인적인 약탈은 몽골군의 규범인 야삭에서 금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북경에 들어가서 한달 동안이나 약탈을 계속 하였다. 이것은 10세기거란이나 12세기의 여진 사람들이 살육을 최소화하고, 그들의 재산을 파괴하지 않음으로써 이전 왕조를 계승하여 차지한 것과 비교해 볼 때 후진적이었다.

금나라 정복의 마무리[편집]

금은 개봉 천도 이후 섬서성의 일부와 하남성 지역 정도로 축소되었다. 몽골이 중앙아시아에서 전쟁을 하고 있어 여력이 없을 때, 금은 다시 북경을 제외한 여러 성을 수복하였다. 칭기즈 칸의 신하 무칼리는 중국의 작전을 일임받고 지속적인 전투를 계속하였으나 이제 전투는 중국식 공성전으로 완전히 변해 버려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칭기즈 칸은 금나라 정복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으며 그의 아들인 우구데이톨루이에 의하여 1233년 5월에야 정복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호라즘 정복[편집]

1차 충돌[편집]

금나라 정복 기간 중 칭기즈 칸은 중앙아시아에서 강성한 세력을 자랑하던 호라즘 제국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몽골과 호라즘의 1차 충돌은 1218년에 있었는데, 1218년 당시 호라즘은 알라 웃딘 무함마드 샤(황제)의 통치 하에 쇠퇴하고 있던 아바스 왕조를 몰아내고 서요를 속국으로 삼으며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 몽골에서는 명맥만 유지하던 메르키트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한 몽골군은 남은 메르키트 병사들을 서요 국경지대까지 쫓아가 전멸시켰다. 이 때 서요를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방문한 무함마드 샤의 군대와 마주치게 되었고, 이를 우습게 본 샤가 몽골군에 선전 포고를 함으로써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몽골군은 호라즘군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으나 치밀한 전략과 기마술로 호라즘군 절반을 죽이고 샤의 본진을 습격해 왕실 물품을 소수 탈취했다.

외교결렬[편집]

이후 칭기즈 칸은 나이만전 당시 도망쳤던 나이만 족장 타양 칸의 아들 쿠츨루크가 서요의 국왕이 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장수 제베를 시켜 서요를 공격해 쿠츨루크를 죽이고 서요를 점령함으로써 호라즘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그러나 금나라와의 전쟁 중에 호라즘과 같은 강국과 전쟁을 치를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 칭기즈 칸은 이후 호라즘과 통상을 맺기 위해 사신을 보냈으나, 샤는 편지에 쓰여진 '그대를 사랑하는 내 아들처럼 대할 것'이라는, 자신을 비하하는 글귀에 분노했다. 그는 통상에 응하였으나 통상을 위해 방문한 450명의 상단을 오트라르 성의 성주 이날축을 시켜 붙잡아 처형했고, 항의하러 온 사신단마저 처형했다.(일각에는 칭기즈 칸의 전쟁을 위한 계략이 숨어있었다고도 한다). 이는 사실상 선전 포고나 다름이 없었으니 칭기즈 칸은 이에 선전 포고를 하고, 1219년 20만의 병력으로 호라즘 침공을 개시했다.

내분전략[편집]

침공 전 칭기즈 칸은 호라즘 제국 내의 불화와 반목을 이용하는 계락을 펼쳤다. 호라즘은 알라 웃딘의 통치기간 동안 넓은 지역을 정복했으나 내정을 안정시킬 기간이 없어 나라 안 민중귀족, 왕족들 간의 파벌 갈등이 심했다. 칭기즈 칸은 호라즘 내의 여러 장수나 귀족들이 몽골과 내통하고 있는 것처럼 한 편지를 샤에게 들어가도록 했고, 몇몇 귀족이나 왕족에게 복속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에 불안해진 샤는 수도를 사마르칸트로 옮기고, 몽골군의 몇 배가 넘던 대군을 이리저리 갈라 배치하는 실책을 저지르게 되었다. 이는 몽골군의 호라즘 정복을 쉽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아바스 왕조의 정보제공[편집]

아바스 왕조에서는 호라즘을 중앙아시아에서 몰아내기 위해 몽골군에게 호라즘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기도 했다.

호라즘 함락[편집]

호라즘을 침공한 몽골군은 오트라르 성을 함락하고 샤의 명에 따라 몽골 대상단을 처형한 성주 이날축의 눈과 귀에 끓는 은물을 부어 처형했다. 이후 몽골군은 호라즘의 전 수도 부하라를 공격해 항복을 받아내고, 샤 알라 웃딘이 숨어있던 사마르칸트까지 포위해 5일만에 함락했다.

알라 웃딘은 함락 전 성에서 빠져나와 달아났고, 칭기즈 칸은 도망친 샤를 잡기 위해 제베와 수부데이 두 장수에게 알라 웃딘 무함마드를 추격할 것을 명했다. 이에 쫓긴 알라 웃딘은 나라 안을 이리저리 떠돌아야 했고, 그가 도중 머문 성이나 마을은 몽골군에게 철저히 짓밟혔으며, 알라 웃딘 무함마드의 어머니인 황태후가 살던 마잔다란마저 함락당하고 황태후는 몽골군에게 농락당해야 했다.

샤의 죽음[편집]

결국 숨을 곳을 찾지 못한 카스피해의 작은 으로 피신했다가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이후 샤의 아들 잘랄 웃딘이 몽골군에 항전했으나 그가 지키던 우르겐치 성은 끝내 몽골군에 의해 함락되면서 아내와 아들을 포함한 일가족을 잃었고, 군대를 모아 파르완에서 시기 쿠투쿠가 이끄는 몽골군을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패배 소식을 접한 칭기즈 칸이 직접 토벌에 나서자 끝내 당해내지 못하고 패배한 뒤 인더스 강을 건너 도망쳤다가 1년 뒤 쿠르드 산지에서 그곳 주민에게 살해당했다.

호라즘 정복의 의미[편집]

한편 호라즘 정벌을 떠나기 전 칭기즈 칸은 서하에 참전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이는 이후 몽골이 서하를 재침략하여 멸망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호라즘 정벌은 몽골군이 중앙아시아를 넘어 아랍, 카프카스, 러시아까지 침략하는 계기가 되었다. 호라즘 정벌전 때 호라즘을 몰아내기 위해 몽골군을 이용하려던 아바스 왕조는 이후 그 몽골군에 의해 멸망했고 바그다드칼리프 역시 살해당했으며, 이집트맘루크 왕조를 제외한 모든 이슬람권이 몽골군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호라즘의 어리석음[편집]

무함마드 샤가 몽골의 대상단을 살해한 것에 대해 많은 이슬람 역사가들은 이슬람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직접적인 요인으로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 무함마드 샤는 뛰어난 통치술로 단기간에 넓은 땅을 차지했으나, 어리석게도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에게 자신에게 칼리프 자리를 넘길 것을 요구해 이슬람 형제의 반감을 샀고, 안정되지 않은 국내 사정을 무시하고 몽골을 도발하여 화를 자초하는 무모한 모습을 보여 후세에 어리석은 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역사적 배경[편집]

칭기즈 칸

유목민과 정착민의 관계[편집]

야담(野談)으로 가득 차 있는 〈원조비사 元朝秘史〉(1240년경)를 제외하고는 몽골 쪽의 자료가 아닌 사료들이 칭기즈 칸이 살았던 시대와 비슷한 시대적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유사 이래 유목민과 정착민은 늘 접촉관계를 유지했다. 이 두 사회는 정반대되는 생활양식을 유지했기 때문에 늘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호의존적인 처지에 있었다.

유목민의 정복활동[편집]

북방의 유목민들은 남부지역의 일부 주요산품과 그 지역의 사치품들을 필요로 했다. 유목민들이 이같은 물품을 얻는 방법은 무역·대상(隊商)·무력약탈의 3가지가 있었다. 중국의 정착민들은 유목민들이 사는 스텝 지역의 생산품들을 절실히 필요로 하지는 않았지만, 유목족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유목민들의 내침을 막아내야만 했다.

유목민의 단합과 분열[편집]

스텝 지역 유목민들의 단합과 분열은 중국 왕조의 흥망성쇠에 따라 결정되었다. 유목민들은 세력이 강성할 때 결단력 있는 지도자를 옹립하여 다른 유목민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그 후 중국의 왕조가 쇠망의 길을 걷고 있으면 그들의 세력을 스텝 지역 밖으로까지 확장시켰다. 그러나 유목민들이 이같이 세력을 확장하여 남방정착민들의 문화를 수용하게 되면 결국에는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흥망성쇠의 반복[편집]

유목민들은 원래 기동성이 뛰어나 후방에서 별도의 물자보급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세력확장 이후에는 이 전통적인 우월성을 상실해 끝내는 그들이 복속시킨 중국인들에 의해 동화되고 말았다. 그 후 중국에는 다시 강력한 제국이 일어나고 유목민들은 족장들끼리 끊임없이 싸움을 벌여 분열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의 흥망성쇠는 계속 반복되었다.

칭기즈칸의 현실이해[편집]

몽골 정복의 역사는 이같은 형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이러한 정치적 갈등과 긴장을 배경으로 하여 칭기즈 칸의 생애가 검토되어야 한다. 그는 자신 부족들 내부에 재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었고 또 그당시 중국과 기타 정착문화를 가진 나라들이 쇠퇴의 길을 걷고 있음을 인식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정복자의 길로 나선 것이었다.

칭기즈 칸의 통치법[편집]

칭기즈 칸은 주변 국을 확장해나가면서 자신에게 협력할 경우 자치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여러가지 혜택을 부여했다. 그러나 반항하게 되면 그 지역 전체를 풀 한 포기 남김없이 모조리 멸족시켰는데 전멸시킨 사람들의 해골을 모아서 탑을 쌓았다. 바그다드이스파한 등의 지역에는 거의 100,000개 가량 되는 해골들로 탑을 쌓기도 했다. 특히 샤리 골골라의 경우 정복활동 도중 징기스칸의 손자인 모토칸(또는 무투겐)이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므로 징기스칸의 분노를 사서 풀 한 포기 남김없이 모두 죽일 뿐만 아니라 모든 건물을 파괴시켜 전대미문의 폐허로 만들면서 멸망시켰다.

칭기즈 칸의 지도자로서의 장점[편집]

칭기즈 칸이 활발한 정복활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다음과 같다.

  • 철저한 능력위주의 군 인사행정
  • 이민족이라 해도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인재흡수
  • 승마능력과 기동성이 뛰어난 군대
  • 상인들을 통한 정확한 정보수집
  • 다른 종교(기독교, 이슬람)에 대한 존중
  • 정복하고자 하는 나라가 다종교사회인 경우, 특정종교를 지지하여 내분을 조성

기년[편집]

칭기즈 칸 원년 2년 3년 4년 5년 6년 7년 8년 9년 10년
서력 1206년 1207년 1208년 1209년 1210년 1211년 1212년 1213년 1214년 1215년
육십간지
(六十干支)
병인(丙寅) 정묘(丁卯) 무진(戊辰) 기사(己巳) 경오(庚午) 신미(辛未) 임신(壬申) 계유(癸酉) 갑술(甲戌) 을해(乙亥)
칭기즈 칸 11년 12년 13년 14년 15년 16년 17년 18년 19년 20년
서력 1216년 1217년 1218년 1219년 1220년 1221년 1222년 1223년 1224년 1225년
육십간지
(六十干支)
병자(丙子) 정축(丁丑) 무인(戊寅) 기묘(己卯) 경진(庚辰) 신사(辛巳) 임오(壬午) 계미(癸未) 갑신(甲申) 을유(乙酉)
칭기즈 칸 21년 22년
서력 1226년 1227년
육십간지
(六十干支)
병술(丙戌) 정해(丁亥)

가족 관계[편집]

  • 황후 : 광헌익성황후 홍길랄씨(光獻翼聖皇后 弘吉剌氏) - 제 1알아타 관리
    • 장남 : 추존황제 목종 출적(穆宗 朮赤)
    • 차남 : 추존황제 성종 찰합대(聖宗 察合臺)
    • 3남 : 태종 와할대(太宗 窩闊臺)
    • 4남 : 추존황제 예종 타뢰(睿宗 拖雷)
    • 장녀 : 창국대장공주 화신 별길(昌國大長公主 火臣 別吉) 코친 베키
    • 차녀 : 연안공주 차차역견(延安公主 撦撦亦堅)
    • 3녀 : 조국대장공주 아랄해 별길(趙國大長公主 阿剌海 別吉) 알라타이 베키
    • 4녀 : 운국공주 독만륜(鄆國公主 禿滿倫)
    • 5녀 : 아아답로흑 공주(阿兒答魯黑 公主)
  • 황후 : 홀로륜 황후(忽魯倫 皇后)
  • 황후 : 활리걸담 황후(闊里桀擔 皇后)
  • 황후 : 탈홀사 황후(脫忽思 皇后)
  • 황후 : 첩목륜 황후(帖木倫 皇后)
  • 황후 : 역련진팔랄 황후(亦憐眞八剌 皇后)
  • 황후 : 불안홀독 황후(不顔忽禿 皇后)
  • 황비 : 홀승해 비자(忽勝海 妃子)
  • 황비 : 야간 비자(耶干 妃子)
  • 황비 : 야축 비자(耶逐 妃子)
  • 황후 : 홀란황후 올와사씨(忽蘭皇后 兀洼思氏) - 제 2알아타 관리
    • 6남 : 활렬견 태자(闊列堅 太子)
  • 황후 : 고야별속 황후(古兒別速 皇后)
  • 황후 : 역걸렬진 황후(亦乞列眞 皇后)
  • 황후 : 탈홀사 황후(脫忽思 皇后)
  • 황비 : 야진 비자(也眞 妃子)
  • 황비 : 야리홀독 비자(也里忽禿 妃子)
  • 황비 : 찰진 비자(察眞 妃子)
  • 황비 : 합랄진 비자(哈剌眞 妃子)
  • 황비 : 내만녀 비자(乃蠻女 妃子)
    • 8남 : 출아철 황자(朮兒徹 皇子) - 요절
  • 황후 : 야수황후 탑탑아씨(也遂 皇后 塔塔兒氏) - 제 3알아타 관리
  • 황후 : 홀로합랄 황후(忽魯哈剌 皇后)
  • 황후 : 아실륜 황후(阿失侖 皇后)
  • 황후 : 독아합랄 황후(禿兒哈剌 皇后)
  • 황후 : 찰합황후 이씨(察合 皇后 李氏)
  • 황후 : 아석미실 황후(阿昔迷失 皇后)
  • 황후 : 완자홀도 황후(完者忽都 皇后)
  • 황비 : 혼도로알 비자(渾都魯? 妃子)
  • 황비 : 홀로회 비자(忽魯灰 妃子)
  • 황비 : 날백 비자(剌伯 妃子)
  • 황후 : 야속간황후 탑탑아씨(也速干 皇后 塔塔兒氏) - 제 4알아타 관리
    • 7남 : 찰올아 황자(察兀兒 皇子) - 요절
  • 황후 : 홀답한 황후(忽答罕 皇后)
  • 황후 : 합답안황후 속륵손도씨(合答安 皇后 速勒遜都氏)
  • 황후 : 알자홀사 황후(斡者忽思 皇后)
  • 황후 : 연리 황후(燕里 皇后)
  • 황후 : 독해 황후(禿該 皇后)
  • 황비 : 완자 비자(完者 妃子)
  • 황비 : 금련 비자(金蓮 妃子)
  • 황비 : 완자태 비자(完者台 妃子)
  • 황비 : 노륜 비자(奴倫 妃子)
  • 황비 : 묘진 비자(卯眞 妃子)
  • 황비 : 쇄랑합 비자(鎖郞哈 妃子)
  • 황후 : 모개 황후(謨蓋 皇后)
  • 황비 : 숙량합 비자(肅良合 妃子) - 고려 여인
  • 황후 : 아복합 황후(阿卜哈 皇后)
  • 황비 : 팔불별걸 비자(八不別乞 妃子)
  • 황후 : 공주 황후 완안씨(公主 皇后 完顔氏)
  • 황비 : 탑탑아녀(塔塔兒女)
    • 5남 : 올로적 황자(兀魯赤 皇子)
  •  ?
    • 9남 : 올로찰 황자(兀魯察 皇子) - 생모미상, 요절
    • 6녀 : 고창공주 야립 가돈(高昌公主 也立 可敦) - 생모미상
    • 7녀 : 포역색극 공주(布亦塞克 公主) - 생모미상, 공주의 외모가 추해 부마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자, 칭기즈칸은 크게 노하여 부마를 죽였다.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라츠네프스키에 따르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칭기스 칸이 1227년 8월에 죽었다는 것이다. 칭기스 칸의 정확한 사망일에 대해서 남겨진 사료들의 기록은 모두 다르다.” Paul Ratchnevsky, 1991, p. 142; 르네 그루세는 《원사》의 기록에 따라 칭기스 칸이 1227년 8월 15일에 죽었다고 적었다. 르네 그루세, 1998, p. 361; 스기야마 마사아키는 칭기스 칸이 8월 17일에 죽었다고 적었다. 스기야마 마사아키, 1994, p. 52; 라시드 앗 딘은 칭기스 칸이 회력 624년 라마단, 즉 서력 1227년 8월 ~ 9월에 죽었다고 적었다. 라시드 앗 딘, 2004, p.386.
  2. 스기야마 마사아키, 1994, p. 37.
  3. 르네 그루세, 1998, p. 295의 각주 33.
  4. 라시드 앗 딘, 2003, pp. 125-126.
  5. 김호동, 2010, p. 90.
  6. 지금도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주민들의 Y염색체는 그 곳의 원주민 유전자보다는 몽골 족 유전자에 가까운 것으로 드러났는데, 결과에 의하면 이들 유전자들은 8~13세기에 존속했던 어느 몽골족 계통의 남성을 조상으로 하는 유전자들이 많이 발견된다고 한다.
  7. 유원수 역, 《몽골비사》, 256절.
  8. 르네 그루세, 1998, p. 360.
  9. 라시드 앗 딘, 2003, p.374.
  10. 라시드 앗 딘, 2003, p.381.
  11. 유원수 역, 《몽골비사》, 264절.
  12. 유원수 역, 《몽골비사》, 265절.
  13. 유원수 역, 《몽골비사》, 266절.
  14. 라시드 앗 딘, 2003, p.382 - 83.
  15. 라시드 앗 딘, 2003, p.384 - 85.
  16. 라시드 앗 딘, 2003, p.385 - 86.
  17. 라시드 앗 딘, 2003, p.386.
  18. 스기야마 마사아키, 1994, p. 52.
  19. 르네 그루세, 1998, p. 361.
  20. 中国人种迁徙解密:DNA检测下已无纯种汉族人 --중국중앙방송, 2007年02月14日
    http://discovery.cctv.com/20070214/100813.shtml

참고 문헌[편집]

  • (1994). 《몽골비사》. 유원수 역주. 서울: 혜안. ISBN 89-85905-03-1 03910.
  • 김호동. (2010).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파주: 돌베개. ISBN 978-89-7199-331-6.
  • 라시드 앗 딘. (2003). 《칭기스 칸 기》 (김호동, 역주). 서울: 사계절. ISBN 89-7196-984-9.
  • 르네 그루세. (1998).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서울: 사계절. (원서출판: 1939) ISBN 978-89-7196-506-1.
  • 스기야마 마사아키. (1999). 《몽골 세계제국》 (임대희, 김장구, 양영우, 옮김). 서울: 신서원. (원서출판: 1996). ISBN 89-7940-525-1.
  • Paul Ratchnevsky. (1991). Genghis Khan: His Life and Legacy. Blackwell Publishing. ISBN 0-631-16785-4.

바깥 고리[편집]

전 임
아버지 예수게이 칸
보르지긴의 씨족장
1161년~ 1206년
후 임
-
(한국 성립)
전 임
-
(한국 성립)
제1대 몽골 제국 대칸
1206년~ 1227년
후 임
4남 툴루이 칸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