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구데이 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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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구데이 칸국(Ögedei Khan國) 또는 오고타이 한국(窩闊臺 汗國)은 칭기스 칸의 3남인 우구데이가 칭기스 칸에게서 영지를 받아 세운 국가로 현재의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중앙아시아 지역을 다스렸다. 수십 년간 원나라와 대립했으며, 빠르게 중국에 동화된 원나라와는 달리 몽골의 유목민적 전통을 고수하는 데 힘썼다. 일부에서는 우구데이 칸국을 지배한 카이두를 원에 저항한 반란세력으로 간주하여 우구데이 칸국을 인정하지 않기도 한다.

카이두 이전[편집]

우구데이 칸국은 칭기스 칸의 3남인 우구데이가 칭기스 칸에게서 받은 영지로부터 시작됐다. 우구데이가 받은 영지는 현재의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 북서부 지역의 작은 땅이었다. 하지만 이 땅의 본래 주인인 우구데이는 이 땅과는 별 연관이 없었다. 1229년, 칭기스칸이 사망한 지 2년 만에 쿠릴타이를 통해 몽골 제국의 대칸으로 선출된 우구데이는 1235년에 몽골 제국의 수도인 카라코룸을 건설하고 그 곳에 자리를 잡았다.

1241년, 우구데이가 사망하자 킵차크 한국바투와 우구데이의 아들인 구유크 간의 분쟁이 발생했고 결국 구유크가 독단적으로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1246년에 왕위에 올랐다. 구유크의 즉위 이후 구유크와 바투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어 재위 3년째인 1248년에는 전쟁 직전까지 치닫았지만 구유크의 사망으로 무산됐다. 구유크가 사망한 이후 바투는 톨루이 계의 소르칵타니와 손을 잡고 1251년에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톨루이 계의 몽케를 칸위에 올렸다. 몽케가 칸으로 즉위하자 구유크의 미망인인 오굴 카이미쉬와 우구데이계의 왕자 시레문이 몽케를 제거하고 다시 우구데이계 대칸을 세우려는 음모를 세웠지만 발각당해 몽케에 의해 숙청당하고 말았다.

카이두[편집]

몽케 칸의 숙청으로 우구데이계가 사실상 멸망하자 카이두는 자신의 영지에서 복수를 준비했다. 1259년, 몽케 칸이 사망하자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1271년차가타이 칸국바락을 궁지로 몰아넣고 이후 차가타이 칸국을 복속시켰다. 차가타이 칸국을 복속시킨 뒤 원나라의 쿠빌라이와 여러 차례 대립하였으나 바얀에 의해 번번이 막혔다. 1294년에 숙적인 쿠빌라이가 죽자 기회를 노려 1301년에 차가타이 칸국의 두아와 함께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패배하고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도져 사망하였다.

카이두 이후[편집]

카이두 사후 차가타이 칸 두아는 카이두의 유언대로 카이두의 둘째 아들 오르스를 옹립하지 않고 첫째 아들[차파르를 지지해 둘 간의 분쟁을 유도했다. 두아의 지지 덕분에 차파르는 2년 뒤인 1303년에 동생 오르스를 물리치고 칸위에 올랐다. 칸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1304년(혹은 1305년)에 차파르는 두아의 제의에 따라 전 몽골 제국의 평화 협정에 동의했다.

하지만 평화 협정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 1306년에 차파르와 차가타이 칸국 간의 전쟁이 다시 발발하였다. 차가타이 칸국은 우구데이 칸국의 영토를 유린했고 원나라가 차가타이 칸국을 지원하고 나서자 차파르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차가타이 칸국에 항복했다. 차파르의 항복을 받아낸 두아는 원나라와 함께 우구데이 칸국의 영토를 분할한 뒤 차파르에게 작은 영지를 주었다. 하지만 두아는 차파르에게 영지를 준 지 얼마 안 돼 차파르를 쫓아내고 그의 동생인 얀기차르와 투그메에게 영지를 나눠주었다.

두아1307년에 죽고 차가타이 칸국이 칸위를 둘러싼 내분에 휩싸이자 카이두의 네 아들 차파르, 오르스, 얀기차르, 투그메는 힘을 모아 1310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이 이끄는 반란군은 알말리크 근처에서 콘첵 칸이 이끄는 차가타이 칸국의 군대와 결전을 벌였으나 대패하였고 이 패배 이후 차파르는 원나라무종에게로 망명했다. 차파르가 원나라로 망명하면서 우구데이계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역대 칸[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