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바 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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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바 칸국
خانات خیوه

 

1511년 ~ 1920년
Bandera de Khiva 1917-1920.svg
1917년~1920년 내전 기간 동안의 국기
독립국
(1538년 ~ 1540년 부하라 칸국에게 점령[1])
(1740년 ~1747년 페르시아가 점령[2])
(1873년 ~ 1917년 러시아의 보호국[3][4][5][6])
Khiva1600.png
1600년의 히바 칸국
수도 구 우르겐치[7] (1511년 ~ 1619년)
히바 (1619년 ~ 1920년)[7] 북위 41° 23′ 동경 60° 22′  / 북위 41.383° 동경 60.367° / 41.383; 60.367
정치
공용어 우즈베크어, 투르크멘어
카자흐어, 카라칼팍어
페르시아어[8]
정부 형태 전제 군주제

1511년 ~ 1518년
1643년 ~ 1663년
1864년 ~ 1910년
1918년 ~ 1920년

일바르스 1세[초대]
아불 알-가지 1세 바하두르
무함마드 라힘 2세
사이드 압둘라[마지막]
역사
 • 설립
 • 온기라트 왕조 설립
 • 러시아에게 정복
 • 멸망
1511년
1804년
1873년 8월 13일
1920년 2월 2일
지리
1911년[9] 어림
년]] 어림 면적
67,521km²
인구
1902년[10] 어림
년]] 어림
[[

1911년[9] 어림
년]] 어림
700,000명
550,000명
인구 밀도 8.1 /km²
기타
국교 이슬람

히바 칸국(페르시아어: خانات خیوه, 우즈베크어: خیوه خانلیگی, 러시아어: Хивинское ханство)은 화레즘 지방에서 1740년에서 1747년 동안 페르시아의 나디르 샤가 점령한 때를 제외한[2] 1511년부터 1920년까지 존속한 우즈베크인의 국가이다.[11][12][13] 이 국가의 칸은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주치의 5번째 아들인 샤이반의 부계 자손이었다.[14] 아랄 해 남쪽의 아무다리야 강 하류에 있는 관개된 평야지방을 중심으로 히바라는 수도를 둔 칸국은, 아스트라한의 후예이자 몽골에서 온 투르크 부족인 온기라트에게 지배받았다. 이 나라는 19세기 중반에 러시아가 오기 전까진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서쪽과 카자흐스탄의 남서쪽, 그리고 투르크메니스탄의 영토 대부분까지 뻗어있었다. 또한, 히바 칸국은 코칸트 칸국, 부하라 칸국과 함께 우즈베키스탄의 3대 칸국 중 하나였다.[15].

1873년, 히바 칸국은 크기가 초라할 정도로 줄어들고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었다.[4][3][16][17][5][6] 1917년 벌어진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히바 칸국에서도 혁명이 일어났고 1920년 칸국은 화레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다. 1924년, 이 지역은 소련에 공식적으로 병합되었고, 오늘날 카라칼파크스탄우즈베키스탄호레즘 주로 남아있다.

역사[편집]

초기 역사[편집]

히바 칸국이 자리 잡았던 지역은 본래 구 우르겐치를 수도로 두던 차가타이 칸국의 일부였다. 이 차가타이 칸국은 중앙아시아의 가장 중요하고 거대한 무역 중심지였다. 하지만 티무르는 이 나라를 사마르칸트의 경쟁자로 보았고 5번에 걸친 원정 끝에 1388년 구 우르겐치를 완전히 파괴했다. 1505년, 무함마드 샤이바니의 지휘 아래 우즈베크인들이 티무르 왕조에서 화레즘을 빼앗았다.[14] 1510년, 샤이바니가 사파비에게 패배하자, 페르시아인들이 그 땅을 점령했다.[14] 그렇지만 1512년 야디가리드 샤이바니에 속한 우즈베크인들이 페르시아의 지배에 항거하면서 자신을 이 땅의 칸으로 선포했다.[18][19] 1559년에는 히바와 부하라의 사절이 러시아에 도착하면서 러시아와 우즈베크인 국가 간의 관계가 시작되었다.[20]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의 러시아인 노예를 사서 해방시켰으며, 히바 칸국은 러시아제 무기, 납, 독수리 등을 구매했다.[20]

1576년 아무다리야 강이 변화하여 구 우르겐치가 버려진 이후, 수도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1619년 아랍 무함마드 1세히바를 칸국의 수도로 삼았다.[7] 17세기 초반에는 카자흐족 및 우즈베크족 등 유목민들의 침입 및 왕실의 내분이 있는 가운데 부하라 칸국간의 경쟁 등으로 계속해서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다.[21][22] 예를 들어, 1593년에는 일시적으로 화레즘 지방이 부하라 칸국에게 점령당하기도 했다.[1] 이후 수도를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투르크멘인의 지지로 이스판디야르가 칸이 되었지만, 주변의 형제들과 경쟁을 해야 했다.[23]

1643년 아불 가지 바하두르 칸이 즉위한 이후 히바 내의 투르크멘인을 학살했다.[24] 1644년에는 부하라를 7번이나 원정하는 등 공세 정책을 강화했다.[25] 하지만, 18세기에 들어서는 우즈베크인과 투르크멘인의 대립, 왕가의 내분 등으로 인해 칸의 권력이 상실되고 실권은 우즈베크인의 온기라트가 차지하게 되었다.[26]

러시아 제국의 영향[편집]

1873년 5월 25일 히바 내부의 샤흐 아바트 운하를 건너는 베레브키네 장군 하의 러시아 카자크군
1873년 히바 전역 도중 아담-크리그란 우물에 쌓여있는 시체들(1888년 니콜라이 카라진이 그림)
화가 바실리 베레시차긴이 그린 1873년 히바 칸국으로 진격하는 러시아군.

그 후 벌어진 히바 칸국의 역사는 두 강대국인 러시아와 영국과의 관계에 짜 맞춰졌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의 재위 기간에 아무다리야 강기슭에서 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인도로 통하는 무역로를 열고 아무다리야 강의 황금을 얻기 위해 1717년에서 1718년 동안 알렉산드르 베코비치 체르카스키 대공이 이끄는 750명에서 4,000명 규모의 무장한 무역 탐사단을 보냈다.[27] 탐사단을 만난 히바의 칸인 세르가지 칸은 호의를 표하는 척하며 야영지를 꾸린 다음, 급습을 가하여 10명만 빼곤 특사들을 전부 다 학살했다. 표트르 대제는 오스만 제국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이미 진 적이 있었기에 국력의 부족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28] 하지만, 그 후 칸국은 1740년에서 1747년 동안 나디르 샤페르시아 치하에 있게 되었다.[12]

차르 파벨 1세도 역시 칸국을 정복하려 했지만, 그의 원정은 인적, 물적으로 끔찍하게 부족했기에, 그의 암살 이후 곧바로 취소되었다.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그런 욕심이 없었기에 니콜라이 1세알렉산드르 2세가 즉위하고서야 히바 칸국을 병합하기 위해 제대로 된 노력이 시작되었다.

그레이트 게임이 벌어지는 동안 러시아는 1839년에 히바를 향한 원정에 몰두한다. 명목상으로는 이 원정은 카스피 해에서 투르크멘인에게 잡혀서 노예로 팔려간 러시아 개척민들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사실은 대영제국제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정신이 팔린 동안 자신들의 국경을 확장하기 위해서였다. 이 원정은 오렌부르크 요새의 사령관인 바실리 알렉세비치 페로브스키 장군의 지휘 아래 5,200명의 보병과 10,000마리의 낙타로 구성되었다. 어설픈 계획과 불운 때문에, 원정대는 역사상 최악의 겨울인 1839년 11월에 출정했고, 또한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알라쿨리 칸이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패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7]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못한 채 결국 1,000명이 죽었으며, 1840년 2월 1일 퇴군하여 5월에 오렌부르크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29]

그때, 러시아의 히바 병합 시도를 뿌리 뽑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영국은 노예들을 해방하기 위해 자기들만의 시도를 했다. 아프가니스탄헤라트에 있는 영국 정치장교인 토드 소령은 제임스 애벗 대위를 파견했다. 제임스 에벗 대위는 아프간 사람으로 위장하여 1839년 성탄절 전야에 히바로 떠났다. 에벗은 1840년 1월 말에 도착했고, 비록 칸이 그의 정체를 의심했지만, 노예 문제와 관련된 편지를 차르에게 전달하도록 허락받았다. 그는 1840년 3월 7일에 알렉산드로브스크 요새(악타우)로 떠났지만, 안내인에게 배신당하고 가지고 있던 것을 빼앗기게 된다. 그러다 강도들이 그가 나르고 있던 편지의 기원과 목적지를 알게 되자 그를 풀어주었다. 한편, 헤라트에 있는 그의 상사들은 에벗이 어찌 되었는지 모른 채 또 다른 장교인 리치먼드 셰익스피어 중위를 보냈다. 그는 에벗보다 더 성공적이어서 칸을 설득해 칸 휘하의 러시아인들을 해방하는 데 성공했고, 러시아 노예를 가지고 있는 죄를 사형으로 벌할 수 있도록 했다. 해방된 노예와 셰익스피어는 1840년 8월 15일 알렉산드로브스크 요새에 도착했고, 러시아는 한동안 히바를 정벌할 명분을 상실했다.[30]

1840년대 코칸드 칸국과 히바 칸국이 러시아 식민 진출에 반대하여 카자흐스탄 지역을 공격했지만, 러시아 제국은 대대적 공새를 통해 코칸트의 메치트 요새가 함락되었다.[31] 이후, 시르다리야 강 어귀의 아랄스크 요새 구축과 함꼐 1848년 러시아인들은 화레즘에 영구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제국의 군사적 우위는 히바와 다른 중앙아시아 공국인 부하라코칸드가 수년 동안 싸워도 도저히 막을 수 없을 정도였다.[32] 러시아가 투르키스탄 쪽으로 확장하면서 히바 칸국의 영토는 서서히 줄어들었고 1873년 러시아가 히바 주변의 타슈켄트사마르칸트를 점령한 뒤, 콘스탄틴 폰 카우프만 장군은 13,000명의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히바를 침공했다. 히바는 1873년 5월 28일 함락되었고,[33] 1873년 8월 12일 겐데미안스키 평화 조약을 맺으면서 히바는 겉보기엔 독립적인 러시아 보호국이 되었다.[3][4][34][5][6] 이 평화 조약에서는 히바 칸국의 외교권 포기, 러시아 선박의 아무다리야 강 우선 통행권 보장 등이 있었다.[35] 또한, 이 조약으로 인해 노예제가 폐지되고 노예 시장이 문을 닫게 되면서 약 4만명에 달하는 노예가 해방되었다.[36] 노예제의 폐지와 함께 오랫 동안 유지되었던 가혹한 형벌도 폐지되었다.[37] 이후, 히바 칸국의 행정권은 러시아 총독령 하에 두어졌으며, 외교권은 투르키스탄 총독령과 샹트페테르부르크의 외무부 장관이 맡게 되었다.[37] 히바 칸국이 러시아에게 점령당한 이후, 1780년에는 무함마드 아민 비이가 투르키스탄 총독령의 지원 하에 메르브를 히바 칸국 지배 하에 둘려고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37] 이후 무함마드 라힘 2세 칸은 그의 관할 영토에 학교나 전기 전화 시설 등이 도입되는것을 방해하는 등 개혁에 대해 보수적이었다.[38]

유럽인들의 첫 번째 대대적인 칸국 이주는 1882년 히바로 온 메노나이트 교도들이었다. 독일어를 쓰는 메노나이트 교도들은 클래스 엡 주니어의 지휘 아래 볼가 지역과 몰로츠나 식민지에서 왔다. 메노나이트 교도들은 10월 혁명에 앞서 10년 동안 우즈베키스탄의 사진과 영화 제작을 촉발한 사진 기술과 더 효율적인 목화 수확법, 발전기 그리고 다른 발전된 기술을 소개하여 칸국이 근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39]

1921년 5월부터 쓰인 화레즘 SSR의 국기.

내전과 소비에트 공화국[편집]

1917년 2월 혁명이 발발한 이후, 히바 칸국의 "히바 청년단"이라는 단체가 의회 설치를 요구했다.[40] 이후 중앙아시아 지역에 바스마시 운동이 진행되는 가운데 히바 청년단과 같은 지식인 단체에서는 반외세 정책을 주장했다.[40] 이러한 가운데 1917년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하자, 반 왕당파와 투르크멘 부족민들은 1919년 말에 볼셰비키와 힘을 합쳐 칸을 몰아내기로 했다. 처음에는 소련이 불간섭 원칙을 주장했으나, 이후 혁명 전쟁을 일으켰다.[41] 쿠데타가 일어난 1920년 2월 2일, 히바의 마지막 칸인 2차 온기라트 왕조의 칸 사이드 압둘라는 왕위를 포기했다. 이후 투르키스탄 적군이 개입하여 1920년 4월 26일[42] 화레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훗날 화레즘 SSR로 불리게 됨)이 히바 칸국 영토에 세워졌다가[7], 1924년 소련에 완전히 병합되면서 투르크멘 SSR우즈베크 SSR로 나뉘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이 국가는 각각 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으로 불리게 된다. 오늘날, 칸국의 땅이었던 곳은 우즈베크인, 카라칼팍인, 투르크멘인, 카자흐인들이 산다.

히바 칸국의 사람들을 그린 그림.

사회[편집]

19세기 히바 칸국의 페르시아인 노예.

왕족은 영지가 분할되어 아미르(귀족)와 군인들에게 봉토가 하사되었다.[43][21] 이런 부족 제도의 개념은 동일한 우즈베크인 국가인 부하라 칸국 및 다른 칸국보다 더 깊게 배여 있었으며, 유목 생활을 유지하던 부족집단은 정책상활을 한 이후에도 여전히 부족 단위로 생활하고 있었다.[44] 실제로, 히바 칸국 내에는 콘기라토, 만기토, 킵차크 등의 부족 이름을 딴 도시가 존재했다.[44]

역사적으로 칸이 최고 국가원수이고 4명의 남자와 4명의 왕비가 지배하는 구조로 인해[43] 왕권은 대체로 약했지만, 일부 칸은 아불 가지 바하두르와 같이 내정과 외교 모두에서 실적을 남긴 칸도 있었다.[21] 아불 가지 칸 자신은 "누구든지 안전하게 황금 쟁반을 머리에 이고 해가 뜨는 땅에서 해가 지는 땅까지 여행할 수 있을 만큼 평화를 누렸다."라고도 말할 정도였다.[45] 칸들은 사이드(Sayyid) 칭호(선지자 무함마드의 자손을 의미)를 얻기 위해 토착 호자(Khoja)의 딸과 결혼했으며 그 결과 19세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사이드로 불리게 되었다.[46] 2차 온기라트 왕조의 창시자인 이르타자르 칸은 자신 왕가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효자 일쪽 딸을 빼앗아 후궁으로 삼았다.[47]

히바 칸국 내에서는 수피즘 아미르의 종교 지도자가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다음으로는 아미르 문관이 뒤를 이었다.[48] 칸과 아미르 사이의 대립은 부하라 칸국보다 심했으며 결국 17세기 이스판디야르 칸의 통치 시기에는 우즈베크인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이 있었다.[49] 이스판디야르 칸의 학살에 투르크인들이 협력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1645년 아불 가지 바하두르 시기에는 투르크인에 대한 학살이 이루어졌다.[24]

러시아의 보호국이 된 이후, 칸은 형식적인 통치자였으며 실질적인 행정권은 평의회가 맡았다.[35] 평의회는 7명의 의원이 있었으며, 그 중 4명은 러시아의 투르키스탄 총독이 임명하고 나머지 3명은 히바에서 나온 귀족이 참여했다.[50] 평의회는 기존의 통치기관과는 달리 러시아군이 칸 국내에 주둔해 있는 동안만 권한을 행사 할 수 있었다.[51] 이로 인해 평의회를 맡은 러시아 장교 이바노프는 총독부를 이용하여 투르크멘의 요무도 부족을 러시아에 귀순시키는 등 탄압을 자행했다.[52]

경제[편집]

히바 칸국은 전통적인 유목 사회였기 때문에 국가를 지탱한 가장 중요한 산업은 농업이었지만 유목민인 우즈베크족이 호라즘 지역에 뿌리내리고 있던 농업 기법에 끼친 영향은 작았다.[53] 가장 중요한 산업이 농업이었기 때문에, 칸에게 복종하지 않는 사람에겐 가장 엄격한 조치로 곡물 판매 시장 출입을 금지시켰다.[54] 히바 칸국의 농업은 아무다리야 수계의 도움을 받아 18세기 말부터는 화레즘 지역에서 수로의 건설 및 수리가 이루어졌다.[55]

또한, 유목 사회라는 특성상 히바에는 전통적으로 노예시장을 운영했는데 19세기 초 러시아인이 남하하면서 히바 칸국은 이를 잡아들어 노예로 팔았다. 1873년 히바 칸국으로 원정을 간 러시아군의 보고서에 따르면 노예 시장 내에는 러시아인 노예가 약 3천명 정도 있었으며 그 외 약 3만명 가량 되는 노예가 존재했다고 밝혔다. 이들 노예는 투르크족이나 카자흐족에게 팔려 노동을 해야 했다.[56] 여기서 러시아인은 낙타 4마리에 거래되었다. 이후 1873년 러시아군이 히바 칸국을 점령하면서 노예 시장도 폐쇄되었다.[57]

히바 칸국은 전통적으로 투르크멘인들과 교역했지만[58] 이후 동투르키스탄의 정세가 안정된 18세기 말부터는 히바 칸국이 위치한 서투르키스탄과 러시아 사이의 무역도 활성화되었다.[59] 한편, 각지의 영주는 영토를 통과하는 상인이나 사자에게 통과세를 부여했기 때문에 상업의 정체를 초래했다는 주장도 있다.[53] 주요 교역 상대인 러시아에서 금속 제품, 모피, 서구 제품을 수입했으며 직물, 카펫, 수공예품을 수출했다.[60] 칸국 내에서는 독자적인 화폐가 있었지만, 화폐의 가치는 지역마다 달라서 경제적인 안정은 확보하지 못했다.[61]

문화[편집]

히바에 있는 칼타 미노르.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히바 칸국 내에 지어진 건축물들은 대부분 실용성을 중시하여 예술성은 낮다고 여겨진다.[24] 같은 시기 부하라 칸국의 잔 왕조 내 사마르칸트의 건축물에 비해 예술적 가치가 낮다는 평가도 존재한다.[62] 이 시기를 대표하는 건축물로는 재위 기간 1663년~1685년인 아누샤 칸 시기에 건설한 하바드 요새와 요새 주위에 둘러진 수로가 있다. 1740년에는 페르시아의 나디르 샤가 점령하면서 건축물이 파괴되었지만, 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많은 시설이 재건되었다는데, 히바 칸국 시기 재건된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흔히 히바 성이라 부르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이찬 칼라 성으로 16~17세기 초까지 히바 칸국의 수도였으며[63] 1788년 ~ 1789년 사이 재건축이 이루어졌다.[64]

17세기 히바 칸국의 문예 활동은 정체되었으며, 아불 가지 바하두르 칸 자신이 역사서를 편찬하게 된 계기로는 궁정에 역사 편찬을 맡길 수 있는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24][65] 19세기 온기라트 왕조의 시대가 되면서 문예의 발달이 시작되었다.[66] 2차 온기라트 왕조의 창시자인 이르타자르 칸은 젊은 문인인 무함마드에게 역사 편찬을 명령했다. 이후 티무르 제국의 역사가 밀 호르도의 저서를 페르시아어에서 터키어로 번역하라는 명령에 무함마드는 역사 편찬을 중단했지만, 번역을 다 끝마치지 못하고 병사했다.[67] 무함마드 사후 1839년~1840년에 그의 조카인 무함마드 리자가 편찬을 이어갔고, 이후 무함마드 라힘 2세의 통치 기간인 1910년까지의 통치 역사를 저술했다.[68]

알라쿨리 칸 시기에는 쿤나이크 궁전을 대신할 거처로 히바 시 동부 끝에 거대한 왕궁인 타쉬 하울리 궁전을 건설하였다. 이 왕궁은 150개의 방이 있으며, 채색 자기 타일과 여러 목조 부조로 장식하는 등, 부하라 칸국의 왕궁을 능가하는 중앙아시아의 거대한 궁전을 건설했다.[69]

2차 온기라트 왕조 시대의 건축물부터는 예술성을 갖추기 시작하여 라힘쿨로프 칸이 세운 하자라스 궁전과 무함마드 아민 칸은 유럽에서 방문한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었다고 기록했다.[70] 칼타 미노르는 1852년 히바 칸국의 무함마드 아민 칸이 원래 100m의 높이로 중앙아시아 최대의 미나렛을 지을려고 하였으나[71] 칸이 사망하면서 건설이 중단되었고 높이는 28m에 그쳤다.[72] 1852년 무함마드 아민 칸의 마드라사는 중앙아시아 최대 규모의 마드라사로, 전성기에는 100여명의 학생들이 있었는데[72][73] 이러한 무함마드 아민 시기의 건설사업에는 다른 나라에서 강제로 포로가 되었거나 연행된 기술자가 지어졌다.[74]

러시아 제국의 보호국 시절인 1910년에 지어진 이슬람 칼타 미노르는 오늘날 히바 시의 상징이 되었다.[72]

국기[편집]

히바 칸국은 유목 민족이라는 특성상 전통적으로 국기가 존재하지 않았으나, 러시아 제국에게 점령당하여 보호국이 된 이후 국기를 지정했으며, 이후 내전 기간에는 별도의 국기를 또 사용하였다.[75]

히바 칸국의 국기
1917년 이전의 국기  
내전 시기 사용된 국기 (1917년 ~ 1920년)[76]  

국토 변화[편집]

히바 칸국의 역대 국토 변화를 나타낸 지도들이다.

히바 칸국의 국토 변화
1600년의 모습  
1729년 페르시아 만 지도 페르시아 북쪽의 주황색 테두리가 히바 칸국이다.  
1734년 프랑스어로 제작된 히바 칸국 지도.  
1750년 히바 칸국 (Burhara옆의 Khiva라고 적혀있는 보라색)  
1848년의 중앙아시아 지도. 페르시아 북쪽의 붉은색 테두리가 히바 칸국이다.  
1851년 중앙아시아의 지도. 이 지도에는 히바 (노란색), 타르타리아, 코칸트, 부하라, 고대 실크로드의 왕국이 나타나 있다.  
1874년부터 1920년까지 히바 칸국의 국경이 제거된 히바의 지도 (갈색)  
1890년 히바 칸국 (노란색)  
1891년 히바 칸국 (노란색)  
1900년 투르키스탄의 지도     히바 칸국  
1902년부터 1903년 사이 히바 지역 지도  
1907년 히바 칸국
(希瓦 汗国 : 히바 칸국)  

히바의 역대 칸 (1359년 ~ 1920년)[편집]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堀川「民族社会の形成」『中央アジア史』, 159쪽
  2. БСЭ, 3-е издание.
  3. 조영록 외 (1998년 10월). 《동양의 역사와 문화》. 국학자료원, 152쪽. ISBN 10-8982062734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코칸트 · 부하라 · 히바한국을 보호국으로 하고(1868-1873년)”
  4. 마노 에이지 (2009년). 《교양인을 위한 중앙아시아사》. 책과함께, 123쪽. ISBN 10-899122153X “... 부하라와 히바 양국은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었고 ...”
  5. 플레이북 편집부. 《토픽세계사 2》. 플레이북. ISBN 10-8998000377
  6. 장병옥 (2001). 《중앙아시아 국제정세의 이해》.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18쪽. ISBN 13-9788974642242
  7.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세 유럽과 아시아/르네상스와 종교개혁/사파비 왕조와 우즈베크족
  8. Nancy Rosenberger (2011), Seeking Food Rights: Nation, Inequality and Repression in Uzbekistan, p.27
  9. The Politics of Muslim Cultural Reform: Jadidism in Central Asia, Adeeb Khalid, page 16, 1998
  10. Vegetation Degradation in Central Asia Under the Impact of Human Activities, Nikolaĭ Gavrilovich Kharin, page 49, 2002
  11. http://www.britannica.com/EBchecked/topic/621041/Uzbek-khanate#ref117856 Uzbek khanate
  12.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이란의 쇠퇴와 아프간족의 독립
  13. 타케미츠 마코토 (2001년 06월). 《세계 지도로 역사를 읽는다》. 황금가지, 219쪽. ISBN 10-8982733183 “우즈베크족은 16세기에 히바한국, 부하라한국, 코칸드한국을 세웠다.”
  14. セミョノフ「チムール以降のウズベキスタン史」『アイハヌム 2009』、117쪽
  15. (영어) Uzbek khanate. 《Encyclopædia Britannica》. 2012년 8월 5일에 보존된 문서.
  16. 김상훈 (2011년). 《통 아시아사 2 외우지 않고 통으로 이해하는, 근대부터 현대까지》. 다산에듀, 204쪽. ISBN 9788963706412 “... (러시아는) 이어 1873년에는 히바 칸국을 점령했고, ...”
  17. 오홍엽 (2009년). 《중국 신장 위구르족과 한족의 갈등》. 친디루스연구소, 74쪽. ISBN 9788996135920 “... 19세기 중엽에 러시아가 중앙아시아의 히바, 부하라, 코칸드 3개 칸국을 흡수하고 ...”
  18. (러시아어) История Хорезма. Ташкент, 1976, с. 82.
  19. 마노 에이지 (2009년). 《교양인을 위한 중앙아시아사》. 책과함께, 115쪽. ISBN 10-899122153X “호라즘 지방에서는 1510년에 샤이바니 칸이 전사했을 당시 이곳을 점령한 사파비조를 격퇴하고 아불 하이르 칸의 직계가 아닌 다른 계에 속한 일바르스 칸이 1512년에 정권을 장악했다. 이 왕조는 남부의 히바를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히바 칸국이라 불린다.”
  20. 江上『中央アジア史』、520쪽
  21. (일본어) 堀川「ヒヴァ・ハン国」『中央ユーラシアを知る事典』, 439-440쪽
  22. 堀川「民族社会の形成」『中央アジア史』, 170쪽
  23. セミョノフ「チムール以降のウズベキスタン史」『アイハヌム 2009』, 162-163쪽
  24. バルトリド『トルキスタン文化史』1권、247쪽
  25. 마노 에이지 (2009년). 《교양인을 위한 중앙아시아사》. 책과함께, 115쪽. ISBN 10-899122153X “... 1644년에 즉위한 이불 가지는 잔조의 내분에 개입하여 부하라를 7번이나 원정하는 등 공세를 가했다.”
  26. 마노 에이지 (2009년). 《교양인을 위한 중앙아시아사》. 책과함께, 115쪽. ISBN 10-899122153X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면서 히바 칸국은 왕가의 내분, 우즈베크와 투르크멘 부족의 대립, 부하라와 러시아의 개입, 유목민의 공격에 시달리면서 칸의 권력이 극단적으로 약화되었으며, 우즈베크의 온기라트가 재상이 되어 실권을 장악했다.”
  27. 피터 홉커크 (2008년 8월 23일). 《그레이트 게임》. 사계절, 38~42쪽. 2014년 9월 20일에 확인.
  28. 김호동 (2007년 12월 3일). [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24)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 2014년 8월 31일에 확인. “시베리아로의 ‘동진’이 눈부신 성공을 거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중앙아시아로의 ‘남진’은 그야말로 좌절의 연속이었다. 그 최초의 시도는 1717년 표트르 대제에 의해서 감행되었다. 그는 아랄해 남쪽에 위치한 히바 칸국을 공격하기 위해서 3500명의 원정군을 편성하여 카스피해 동부 연안의 크라스노보드스크에서 출발시켰다. 그러나 러시아 군대는 사막을 건너는 데 필요한 물자 수송문제와 현지민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해 거의 몰살을 당하고 극히 일부만 살아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실패는 러시아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고 상당 기간 중앙아시아로의 진출은 저지될 수밖에 없었다.”
  29. 김호동 (2007년 12월 3일). [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24)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 2014년 8월 31일에 확인.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카자흐인의 ‘반란’은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 러시아의 팽창에 반발하는 중앙아시아의 칸국들도 그들을 직접적으로 지원하고 러시아의 대상단(隊商團)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 예가 1836~1846년에 일어난 카심울리(Kasimuli)의 ‘반란’과 히바 칸국의 공개적 지원이었다. 러시아는 히바를 응징하기 위해 1839~1840년 대규모 원정군을 보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무참하게 괴멸되어 표트르 시대에 당했던 것 이상으로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30. 도서출판 천우 (2006년 12월 30일). 《문학세계 2007년 1월호(통권 제150호)》. 도서출판 천우, 204쪽. ISBN 10-BAV2007010. 2014년 8월 31일에 확인. “... 19세기 초 러시아에서는 자국민의 노예해방을 구실로 하여 군대를 파견하였고...”
  31. 최한우. 러시아의 카작 합병 (카자흐스탄 지역 역사). 2014년 8월 31일에 확인.
  32. John Ayde, Indian Frontier Policy.
  33. 김호동 (2007년 12월 3일). [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24)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 2014년 8월 31일에 확인. “타슈켄트 점령으로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방위선은 완성되었다.... (중략) ....그는 부하라 칸국의 주요 도시인 사마르칸트를 점령하고 조약을 체결했는데.... (중략) ....카우프만은 1873년 마침내 중앙아시아의 마지막 칸국인 히바를 점령하고...”
  34. Ram Rahul. 《March of Central Asia》, 150쪽. 2014년 9월 7일에 확인.
  35. バルトリド『トルキスタン文化史』2권, 256쪽
  36. 樺山紘一、山内昌之『近代イスラームの挑戦』(世界の歴史20, 中央公論社, 1996年12月), 362-363쪽
  37. 江上『中央アジア史』, 656쪽
  38. 장병옥 (2001년 5월). 《중앙아시아 국제정치의 이해》.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사, 208쪽쪽. ISBN 13-9788974642242
  39. Ratliff, Walter (2010). 《Pilgrims On The Silk Road: A Muslim-Christian Encounter in Khiva》. Wipf & Stock. ISBN 978-1-60608-133-4
  40. 中見、濱田、小松「革命と民族」『中央ユーラシア史』, 389쪽
  41. 이지현. 3. 소비에트 연방. 2014년 9월 2일에 확인. “10월 혁명을 전후한 구 러시아 제국내의 중앙아시아 변방지대에는 이슬람 승려와 봉건 귀족이 지배하는 부하라칸국과 히바칸국이 있었는데, 새로 탄생한 소비에트 정부는 처음에는 이 두 나라에 대하여 민족 자결권의 원칙을 표방하면서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국주의 열강의 대 소비에트 간섭이 시작되면서 중앙아시아가 반혁명 세력의 근거지가 되자, 혁명 전쟁을 일으켜 칸의 권력을 붕괴시키고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42. 小松久男「現代の中央アジア」『中央アジア史』, 211-212쪽
  43. (터키어) Türk Tarihi
  44. (일본어) バルトリド『トルキスタン文化史』1권, 248쪽
  45. 정은주 (2005년 9월 5일). 《비단길에서 만난 세계사》. 창작과비평사, 306쪽. ISBN 9788936471040. 2014년 9월 1일에 확인. “히바칸국의 군주이자 역사가인 아불가지는 "누구든지 안전하게 황금 쟁반을 머리에 이고 해가 뜨는 땅에서 해가 지는 땅까지 여행할 수 있을 만큼 평화를 누렸다."라고 말했다.”
  46. (일본어) バルトリド『トルキスタン文化史』1권, 251~252장
  47. (일본어) バルトリド『トルキスタン文化史』1권, 270쪽
  48. バルトリド『トルキスタン文化史』1권, 246쪽
  49. バルトリド『トルキスタン文化史』1권, 246-247쪽
  50. バルトリド『トルキスタン文化史』2권, 256-257쪽
  51. バルトリド『トルキスタン文化史』2권, 257쪽
  52. バルトリド『トルキスタン文化史』2권, 259-260쪽
  53. バルトリド『トルキスタン文化史』1권, 245쪽
  54. 천규석 (2010년 08월).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 실천문학사, 253쪽. ISBN 10-8939205359 “18~19세기 히바한국의 군주들이 자신에게 순수하게 복종하지 않는 투르크멘들에 내린 가장 엄혹한 조치가 그들이 필요로 하는 곡물을 파는 시장에 출입을 금지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55. 小松「ロシアと中央アジア」『中央アジア史』, 188쪽
  56. 박순국. "[잠에서 깨어나는 21세기 실크로도 제2부> 3. 히바의 노예시장", 2012년 4월 4일 작성. 2014년 9월 2일 확인. "19세기 초순부터 많은 러시아인들이 남쪽으로 내려왔고 히바는 이들을 잡아 노예로 팔아넘겼다. 러시아인 노예 해방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해 온 러시아는 1873년, 만3천 명의 병력을 보내 공략함으로써 결국 히바를 전면 항복시켰다. 베일에 싸였던 공포의 오아시스도시는 실체가 드러났고 노예시장도 없어졌다. 당시 파견됐던 러시아 장교 등의 보고에 의하면 러시아인 노예는 3천 명 정도였고 그 외에도 약 3만 명 정도의 노예가 있었다고 한다. 건장한 러시아인 남자노예는 낙타 4마리에 팔렸다고 한다. 노예들은 카라코람 사막을 넘어온 투르크족이나 초원의 카자흐족에게 팔렸다."
  57. 도서출판 천우 (2006년 12월 20일). 《문학세계 2007년 1월호》. 도서출판 천우, 204쪽. ISBN 10-BAV2007010 “... 이런 사실을 근거로 하여 19세기 초 러시아에서는 자국민의 노예해방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였고, 1873년 드디어 히바를 점령하여 노예시장을 없애게 된다. 당시 파견된 러시아의 보고서에 의하면 러시아인 노예는 3천명 정도였으며 그 이외 약 3만명의 노예가 있었다고 하며 체력이 강한 러시아민족인 경우 낙타 4마리에 거래되었다.”
  58. 장병옥 (2001년 5월). 《중앙아시아 국제정치의 이해》.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소, 207쪽. ISBN 13-9788974642242
  59. 江上『中央アジア史』, 521쪽
  60. 江上『中央アジア史』, 520-521쪽
  61. 江上『中央アジア史』, 524쪽
  62. セミョノフ「チムール以降のウズベキスタン史」『アイハヌム 2009』, 165쪽
  63. 이주희 (2009년 2월 25일). 사막 위의 작은 도시, 히바성. 2014년 9월 3일에 확인. “히바성은 16세기부터 17세기 초에 히바 칸국의 수도이기도 했으나, 지리적 여건으로 인하여 그 위세가 오래가지는 못했다고 한다.”
  64. UNESCO (2009년 1월 26일). UNESCO - Itchan Kala. 2014년 8월 31일에 확인. “Little has survived that is earlier than the 17th century, apart from the Djuma Mosque, although it was largely rebuilt in 1788-89.”
  65. セミョノフ「チムール以降のウズベキスタン史」『アイハヌム 2009』, 164쪽
  66. バルトリド『トルキスタン文化史』1권, 271쪽
  67. バルトリド『トルキスタン文化史』1권, 272쪽
  68. バルトリド『トルキスタン文化史』1권, 272-273쪽
  69. 마르코 카타네오, 자스미나 트리포니 (2014년 3월 7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아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 글램북스. ISBN 4801195154570. 2014년 9월 1일에 확인. “... 알라쿨리는 하릴없이 웅장한 궁전을 지어 자신의 야심을 표출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히바 시의 동쪽 끝에 있는 '왕궁'은 150개의 방이 있고, 채색 자기 타일과 스투코, 목조 부조 등으로 장식하였다.”
  70. バルトリド『トルキスタン文化史』1권, 273쪽
  71. 박하선 (2012년 6월). 우즈베키스탄 히바. 2014년 8월 31일에 확인. “히바 최고의 회교 건축물인 마흐무트 아민 칸 메드레세와 미완성의 미나렛으로 유명한 카르타 미나렛이다. 메드레세란 학당을 말하며, 미나렛은 사막 속의 등대나 전망대 역할을 하는 둥근 기둥의 첨탑을 가리킨다. 1852년 히바한국 시대에 건설자 마흐무트 아민 칸이 이 미나렛에서 400km나 떨어져 있는 부하라를 내려다보려는 꿈을 가지고 서역 최대의 미나렛을 지으려고 시도했으나 그 꿈은 건설 3년 만에 중단되고 말았다.”
  72. 『ユネスコ世界遺産 4(東アジア・ロシア)』, 84-87쪽
  73. 関『ウズベキスタン シルクロードのオアシス』, 46쪽
  74. 関『ウズベキスタン シルクロードのオアシス』, 43쪽
  75. http://www.crwflags.com/fotw/flags/uz-khiva.html
  76. After the original flag on display in the museum of Khiva. Described by J. Renault and H. Calvarin, Franciae Vexilla # 5/51 (April 1997), cited after Ivan Sache on the Khiva page at Flags of the World (FOTW). According to David Straub (1996) on FOTW, "The flag of the Khivan Khanate in the pre-Soviet period is unknown."

참고 자료[편집]

  • (러시아어) 'Баскаков,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Титулы и звания в социальной структуре Хивинского ханства // Советская тюркология, № 1. Баку, 1989년.
  • (러시아어) Султанов, Турсун Икрамович (2006년). 《Чингиз-хан и Чингизиды. Судьба и власть》, 5 000쪽. ISBN 5-17-035804-0
  • (독일어) Peter Lerch, Khiva oder Kharezm. Seine historischen und geographischen Verhältnisse, Saint-Pétersbourg, 1873년
  • (독일어) Henry Hoyle Howorth: History of the Mongols from the 9th to the 19th Century. Part 2: The So-Called Tartars of Russia and Central Asia. Div. 1–2. Longmans, Green & Co., London 1880 (Nachdruck: Burt Franklin, New York NY 1970 (Burt Franklin Research & Source Work series 85, ZDB 844446-8)).
  • (독일어) Gavin Hambly (Hrsg.): Zentralasien. 62.–63. Tsd. Fischer-Taschenbuch-Verlag, Frankfurt am Main 1995, ISBN 3-596-60016-2 (Fischer-Weltgeschichte 16)
  • (프랑스어) "Ouzbékistan", guide Le Petit Futé, 2012년 에디션
  • (일본어) 塩谷哲史 『中央アジア灌漑史序説』(風響社, 2014년 2월)
  • (일본어) 江上波夫『中央アジア史』(世界各国史, 山川出版社, 1987년 1월)
  • (일본어) 小松久男「ロシアと中央アジア」「現代の中央アジア」『中央アジア史』収録 (竺沙雅章監修、間野英二責任編集, アジアの歴史と文化8, 同朋舎, 1999년 4월)
  • (일본어) 関治晃『ウズベキスタン シルクロードのオアシス』(東方出版, 2000년 10월)
  • (일본어) 中見立夫、濱田正美、小松久男「革命と民族」『中央ユーラシア史』収録 (小松久男編, 新版世界各国史, 山川出版社, 2000년 10월)
  • (일본어) 堀川徹「民族社会の形成」『中央アジア史』収録 (竺沙雅章監修、間野英二責任編集, アジアの歴史と文化8, 同朋舎, 1999년 4월)
  • (일본어) 堀川徹「ヒヴァ・ハン国」『中央ユーラシアを知る事典』収録 (平凡社, 2005년 4월)
  • (일본어) 本田実信「ヒヴァ・ハン国」『アジア歴史事典』8巻収録 (平凡社, 1961년)
  • (일본어) ワシーリィ・バルトリド『トルキスタン文化史』1巻 (小松久男監訳, 東洋文庫, 平凡社, 2011년 2월)
  • (일본어) V.V.バルトリド『トルキスタン文化史』2巻 (小松久男監訳, 東洋文庫, 平凡社, 2011년 3월)
  • (일본어) A.A.セミョノフほか「チムール以降のウズベキスタン史」『アイハヌム 2009』収録 (加藤九祚編訳, 東海大学出版会, 2009년 10월)
  • (일본어) デニスン・ロス、ヘンリ・スクライン『トゥルキスタン アジアの心臓部』(三橋冨治男訳, ユーラシア叢書, 原書房, 1976년)
  • (일본어) 『ユネスコ世界遺産 4(東アジア・ロシア)』(ユネスコ世界遺産センター監修, 講談社, 1998년 5월)
  • (일본어) 『中央ユーラシアを知る事典』562-565쪽, 収録の系図 (平凡社, 2005년 4월)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