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빌라이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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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 칸(忽必烈, 1215년 ~ 1294년)은 몽고 제국의 제5대 칸(재위 : 1260년 ~ 1294년)이며, 칭기즈 칸의 손자이다. 묘호는 세조(世祖)이다.
국호를 원(元)으로 고치고 대도(大都, 현재의 북경)를 도읍으로 정하였다.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였으며, 고려·버마·일본 등지에 침공하였다. 그는 색목인(중앙 아시아 인)을 중용하고, 서역에서 오는 문화를 중시하였으며, 티베트에서 라마교를 받아들였다. 서양인을 우대하여 마르코 폴로 등이 입국하는 등, 통일된 다민족국가의 발전을 위해 공헌하였고, 넓은 영토를 차지한 대제국을 완성하여 원의 전성 시대를 이루었다. 그는 한때 고려와 연합해 일본을 정복하려 했으나 두차례 모두 태풍으로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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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쿠빌라이는 즉위 직후 남송공략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으며, 1268년 한수의 요충 양양의 포위전을 개시했다.
쿠빌라이는 황후 차브이를 섬기는 인물로서 중앙아시아 출신의 상인 아흐마드를 재무장관에 발탁하여 증세를 꾀해 남송 공략의 준비를 진행시키는 한편, 이어서 복속한 고려를 통해 남송과 통상관계를 맺고 있었던 일본에도 몽골에 대한 복속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는 이를 거부했고, 쿠빌라이는 남송과 일본이 연합하여 원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 1274년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을 편성하여 일본으로 보냈으나, 쓰시마 섬, 이키노시마, 규슈의 다자이후 주변을 석권하는 것만으로 끝났다. 일본원정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 준비를 통해 원정 준비를 위해 설치한 출선기관인 정동행성과 고려정부가 일체화되어, 새로 속국이 된 고려는 원나라 조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1273년에 이르러 양양이 마침내 함락되고, 남송의 방위시스템은 붕괴되었다. 원나라는 병사가 각 성과 도시에서 약탈, 폭행을 저지르는 것을 엄중히 금지시키는 것과 더불어 항복한 적의 장군을 좋은 대우를 해주는 등 남송의 투항군을 아군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각지의 도시는 차례로 원나라에게 항복했다. 1274년 옛 남송의 투항군을 합친 대병력으로 공세에 나서자 방위 시스템의 붕괴된 남송은 이렇다 할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1276년 수도 임안(臨安;항주)이 무혈 함락되었다. 공제를 비롯한 남송의 황족은 북쪽으로 연행되었으나,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 그 후 해상으로 도망친 남송의 유민을 1279년 애산 전투에서 전멸시켜 북송 이후 15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하였다. 쿠빌라이는 풍부한 옛 남송 지역의 부(富)를 대도로 모이게 하여 그 이윤을 국가에 흡수하였고, 각종 경제제도 정비를 통해, 화북을 중심으로 했던 정권으로서는 유례없는 번영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 후 이루어진 군사원정은 특별한 성과 없이 끝났다. 1281년 다시 일본에 군대를 보냈으나 이번에도 실패로 끝났고, 1285년과 1288년에는 베트남에 침공한 군대가 차례로 패배했다. 그 이전에는 1276년 중앙아시아에서 하이두와 대치하던 원나라 군대에서 몽케의 아들 시리기가 반란을 일으켜 하이두의 세력 확대를 허용시켰다.
그런데도 쿠빌라이는 3번째 일본원정을 계획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원정을 추진했으나, 1287년 즉위 때 지지모체였던 동쪽 3왕가가 나얀을 지도자로 삼아 반기를 들었고, 또한 중국 내에서도 반란이 빈발했기 때문에 만년의 쿠빌라이는 이에 대응하는데 시간을 보내 일본원정도 포기했다. 또 1292년 참파원정을 시도했으나 이것도 실패로 끝났다. 무엇보다도 동남아시아에 대한 원정은 상업루트의 개척에 뜻을 둔 경우가 강해, 최종적으로는 해상루트의 안전이 확보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성공이라 말할 수 있었다.
쿠빌라이의 사후, 1294년 손자 테무르가 뒤를 이었다.
[편집] 고려에 대한 정책
쿠빌라이는 두 차례의 일본 원정에 고려에 협력을 종용하였다. 또한 한인(漢人) 학자들을 동원하여 고려로 하여금 성리학(주자학)을 도입하게 했다. 그러나 고려는 이때부터 계속된 원나라의 내정 간섭으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편집] 파스파 문자
파스파 문자(Phags-pa characters, 八思巴文字)는 1265년 몽골 원나라(元) 국사(國師)인 파스파(八思巴)가 쿠빌라이 칸(세조 世祖)의 명을 받아 몽골어를 표기하기 위해 만든 문자로서, 몽골신자·방형몽골문자라고도 하는데, 파스파의 백부(伯父) 사펜이 처음 고안한 것을 파스파가 개량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편집] 가족관계
황후는 소예순성황후 옹기라트 씨 이다. 그녀의 가문은 칭기스칸의 처이자 쿠빌라이의 할머니인 부르테 대카툰을 배출한 가문으로 보르지긴 일족에 이은 몽고 제국 서열 2위의 가문이였다.
자녀로는 12남 5녀가 알려져 있는데, "원사"와 "집사" 의 기록이 일부 상이하다.
- 도르지 [多爾濟] : 장남, 일찍 죽었다.
- 명효황태자 (明孝皇太子)
- 진왕 망갈라 [秦王 忙哥剌]
- 북안왕 노무칸 [北安王 那木干]
- 코리다이 [忽理台] : 원사에는 기록이 없고 집사에만 쿠빌라이 칸의 5남으로 기록이 있다.
- 운남왕 쿠카치 [雲南王 忽哥赤]
- 아야치 [愛牙赤]
- 서평왕 올로치 [西平王 奧魯赤]
- 영왕 쿠케추 [寧王 闊闊出]
- 진남왕 토곤 [眞南王 妥歡]
- 쿠틀룩 티무르 [忽都魯 帖木兒]
- 테무치 [帖木赤]
- 창국 대장공주 (昌國 大長公主) : 창왕(昌王) 옹기라트 부카에게 하가(下嫁)
- 조국 대장공주 (趙國 大長公主) : 조왕(趙王) 옹기라트 아이부카에게 하가
- 노국 대장공주 (魯國 大長公主) : 세 번 결혼하였다
첫 번째 남편은 알라친 [斡剌眞] 이며 옹기라트 씨족이다. 두 번째 남편은 티무르 [帖木兒] 이며 역시 옹기라트 씨족이다. 세 번째 남편은 만지타이 [蠻子台] 이며 역시 옹기라트 씨족이다.
| 전 임 형 원 헌종 몽케 칸 |
제5대 몽골 제국 대칸 1260년 ~ 1294년 |
후 임 몽골 제국 분열 |
| 전 임 - (황조 성립) |
제1대 중국 원나라 황제 1271년 ~ 1294년 |
후 임 손자 원 성종 테무르 |
| 전 임 남송 소제 조병 |
중국 황제 1279년 ~ 1294년 |
후 임 손자 원 성종 테무르 |
| 정치, 조직과 생활 | 군대와 침략 | 사람 | 용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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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과 체계 군사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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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장군 |
작위와 직책 정치와 군사 용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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