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여진족에서 넘어옴)
이동: 둘러보기, 검색
Jurchen woodblock print.png

여진(女眞, 문화어: 녀진, 중국어 정체: 女眞, 간체: 女真, 병음: nǚzhēn) 또는 주셴(여진어: Jurchen.png jušen)은 만주 일부와 한반도 북부에서 거주했던 퉁구스 계통 민족으로, 17세기에 중국에 거주하던 여진족은 청 황제의 명에 따라 만주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한반도)에 북부에서 거주하던 여진족은 조선인들이 계속 여진족으로 불러, 20세기까지 재가승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가 한민족에 흡수되었다.

정체성[편집]

여진(女眞)은 본래 갈족, 말갈족, 선비족이 융화된 민족이다. 삼국 시대 갈족과 선비족이 대륙에 침투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5호 16국 시대 나라를 세웠다. 선비족은 6개의 부족이 강성하다가 탁발부가 5호 16국을 정리하고 화북을 통일 북위을 세운다. 이후 말갈, 갈족은 선비족의 예하 부대에 포함되어 그들의 영향을 받다가 점차적으로 요동으로 이동하였다. 갈족이 처음 한반도에 등장한 것은, 서기 3세기경으로 관구검이 고구려에 침략했을 때 그 예하부대에 갈족, 말갈족이 있었고, 유연을 죽이고 후조를 세운 석륵(石勒)도 갈족이었다. 북위, 북주 시대 갈족과 선비족은 융화 되었고 당나라 시대 거란족의 일파가 되었다가 요나라가 성립할 무렵에 요동에서 만주 동남부로 일부가 이동하였다.

이들은 금나라1115년1122년 사이에 세웠으며 이 왕조는 1234년까지 건재하였다. 금나라가 거란을 통합하자, 거란과 여진의 민족 통합 과정이 있었다. 금나라는 거란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로록 그 주위에 여진인을 이주시겼다. 이 시기에 거란의 일부가 여진으로 융화된다. 금나라 멸망 이후, 여진은 야인 여진(野人女眞) 해서 여진(海西女眞) 건주 여진(建洲女眞)으로 나뉘었다.

그 후 1586년 누르하치가 여진의 세 부족을 통합하고 연합된 부족의 이름을 만주족으로 바꾸었다. 누르하치는 유목 법령을 통합하여 강력한 제도를 만드는데, 이는 후금(後金)과 중국을 점령한 후의 (淸)제국이 된다.

금나라[편집]

여진족이라는 표현은 여진어의 jušen(주셴)이라는 단어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이 단어의 기원은 현재 학계에서 합의되지 않은 상태이다. 숙신(肅愼)과 동일 기원을 가진 단어일 수 있다는 가정이 제기되었으나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영미권에서는 Jurche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몽골어에서 여진족을 가리킬 때 사용했던 단어인 Jürchen(주르첸)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북만주의 여진 부족들은 원래 거란의 신하들이었다. (요나라참고) 1115년 완안아골타요나라를 정복하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고 금나라를 건국하였다. 그 후 요나라의 잔당들과 함께 자신들을 공격하려고 하였던 송나라를 공격하였고, 마침내 1126년 송나라의 수도 카이펑을 점령하자 이들은 화북지역에 대한 패권을 쥐게되었다(정강의 변) 금군은 장강까지 남하하였으나 회하 부근에서 저지되고 남송은 일단 국경을 방어하게 되었다.

여진족은 자신의 왕조를 고향에 있는 강의 이름을 따라 금(金)이라고 지었다. 여진 부족들은 전쟁에 뛰어났으나 정착하여 수십 년을 지내게 되자 자신의 유목 정체성을 잃게 되었다. 결국 여진족은 점차 한족화 되어갔으며, 남송과의 평화를 공고히 하였다. 금나라의 지배자들은 유교를 따르게 되었다. 1189년 금나라는 몽골과 남송을 상대로 두개의 전선에서 싸우게 되었다. 1215년 몽골 군대의 압력 하에 이들은 수도를 베이징에서 카이펑으로 옮겼으나 1234년 몽골 제국에 의해 멸망되었다.

명대의 여진족[편집]

명왕조의 역사가들은 여진족을 세 분파로 나누어 파악하였다.

  • 야인 여진(野人女眞) : 만주 최북방
    • 파아손 (巴兒孫)
    • 착화(著和)
    • 홀라온 (忽剌溫)
    • 호(胡)
  • 해서 여진(海西女眞) : 현대 헤이룽장 성에 거주
    • 하다 (哈達) : 왕타이(萬汗/王台: 1548-1582년)
    • 후이파 (輝發)
    • 우라 (烏拉)
    • 예허 (葉赫)
  • 건주 여진(建洲女眞) : 지린 성에 거주
    • 오도리(斡都里, 斡朵里, 吾都里, 斡朵怜)
    • 호리개로 (胡里改路)
    • 도은 (桃温 혹은 桃溫)
    • 발고강(荸苦江)
    • 탈알령(脱斡怜)

이들은 유목과 농경을 병행했으며 사냥과 낚시 그리고 제한된 농업을 생업으로 삼았다. 1388년 홍무제는 오돌골과 훌리가이 그리고 퉁비족들과 조공 관계를 맺었으며 이리하여 여진족의 한화(漢化) 과정이 시작되었다.

영락제북원과 대항하기 위해 여진 부족 중에서 동맹자를 찾았다. 영락제는 부족장에게 작위를 수여하거나 성을 하사하는 방법을 통하여 그들이 주기적으로 조공을 해 오기를 바랐다. 요동의 북변에서는 무역을 위한 말시장이 열리기도 했다. 뒤에 이일이순신이 이끄는 조선군은 여진족을 조선의 강역으로부터 몰아내게 된다.

1586년 30년이 지나 건주 여진의 우두머리였던 누르하치가 여진의 세 부족을 통합하고 연합된 부족을 만주족으로 개명한다. 누르하치는 유목 법령을 통합하여 강력한 제도를 만드는데, 이는 후금과 중국을 점령한 후의 청(淸)의 기반이 된다.

문화, 언어 그리고 사회[편집]

여진족은 일반적으로 초기 조상들의 유목 전통을 따랐다. 거란과 몽골족들처럼 이들은 힘과 말을 다루는 기술 그리고 궁술과 사냥을 즐겼다. 그들은 샤먼 의식을 행하였으며 하늘 신(abka-i enduri, 압카이 언두리 또는 abka-i han, 압카이 한)을 섬겼다.

초기 여진 문자는 1120년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명에 따라 완안희윤(完顔希尹)에 의하여 발명되었다. 이것은 거란 문자에 기반한 것이었으며 거란 문자는 다시 한자에 기반하였다. 그러나 중국어는 고립어이며 여진 및 거란의 언어는 교착어이기 때문에 이러한 표기 방식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여진 문자는 금나라가 멸망하자 급속히 사라졌고 여진어는 입말로만 살아남게 된다. 이후 16세기 말까지 여진족은 몽골어와 중국어를 이용해서 문자생활을 하다가 만주어가 문어로 정리되기 시작하면서는 만주어를 이용한 문자생활을 하게 된다.

여진 사회의 문화는 몽골족의 큰 영향을 받았다. 몽골족과 여진족 둘 다 정치적 지도자에게 "한"(Khan: 문어몽골어로는 qaɣan, 만주어로는 han으로 표기됨.)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으며 이는 왕이든 부족장이든 가리지 않고 사용되었다. 아주 강력한 부족장은 "beile"(bəilə, 버일러)(귀족)라고 불리었는데 이는 몽골의 "beki"(베키)와 터키 민족의 "beg"(베그) 또는 "bey"(베이)에 해당한다. 또한 몽골족과 터키 민족처럼 여진족은 맏아들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능력이 있는 아들 또는 사촌은 누구든지 지도자로 선택받을 수 있었다.

명나라 시대 동안 여진족은 고대적인 씨족(姓: hala, 할라)의 소규모 씨족(氏: mukun, 무쿤, 또는 hala mukun, 할라 무쿤)적인 사회 단위에서 생활했다. 여진족 씨족의 일원들은 동일 조상에 대한 인식을 공유했으며 단일한 장(mukunda, 무쿤다)의 통치를 받아들였다. 모든 씨족들이 혈연으로 얽혀져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는 자주 분쟁과 합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여진 가정 (boo, 보오)은 하나의 가족 (booigon, 보오이곤)처럼 살았으며 일반적으로 혈연으로 맺은 다섯개에서 일곱개의 가족원들과 노예들이 살았다. 가정들은 소대 (tatan, 타탄)를 형성하여 사냥을 하며 음식을 구하였다. 전쟁 등의 대규모 활동을 위하여 기업 (niru, 니루)을 조직하였다.

참고 문헌[편집]

더 보기[편집]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