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굴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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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
مغول سلطنت ھند
1526 ~ 1857
Flag of the Mughal Empire.png
국기
Mughal Empire (orthographic projection).svg
수도 라호르
델리
아그라
카불
정치
공용어 페르시아어, 차가타이어, 우르두어
정부 형태 전제군주제
황제 바부르 (1526–1530)
후마윤 (1530–1539, 1555–1556)
악바르(1556 - 1605)
제항기르(1605 - 1628)
샤 자한(1628 - 1658)
아우랑제브 1세(1658 - 1707)
역사
 • 성립 1526년 4월 21일
1857년 9월 21일
지리
면적 3,700,000km²
인구
1700년 어림 150,000,000명
기타
통화 루피, 토만
이전 국가
다음 국가
티무르 제국
로디 왕조
수리 제국
아딜샤히 왕조
벵골 술탄국
데칸 술탄국
마라타 왕국
두라니 왕조
영령 인도
하이데라바드 왕국
카르나틱 태수령
벵골 태수령
아와드 태수령
마이소르 왕국
바라트푸르국

무굴 제국(페르시아어: گورکانی, Gurkâni; 우르두어: مغلیہ سلطنت, Muġalīah Sulṭanat, 힌디어: मुग़ल सलतनत)은 16세기 초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오늘날의 인도 북부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한 이슬람 왕조이다.

무굴 제국은 티무르 왕조에 속한 바부르로부터 시작되었다. 바부르는 원래 인도보다 사마르칸트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티무르의 옛 영광을 되찾고 싶어했다. 하지만, 두 번에 걸친 시도에서 오히려 고향까지 잃어버린 바부르는 차선책으로 파니파트 전쟁을 통해 당시 쇠락한 델리로디 왕조를 멸망시키고 무굴 제국을 세웠다.

그의 뒤를 이은 후마윤은 강력한 저항 세력인 아프가니스탄계를 물리치고 영토 확장을 꾀하지만 오히려 그들에 쫓겨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이란으로 도망갔다. 그 사이 델리는 후마윤을 물리친 쉐르 샤수르 왕조를 세웠다. 하지만 수르 왕조는 겨우 15년 만을 유지한 채 이란의 도움을 받은 후마윤에 의해 멸망당했다. 후마윤의 뒤를 이은 악바르는 북인도 전역을 차지한 뒤 남부 데칸 지역까지 차지하면서 마우리아 왕조 이후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하는 국가를 이루었다. 악바르는 영토 확장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의 전 분야에서도 무굴 제국의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고 종교적으로도 이슬람교 이외의 종교를 포용하고자 인두세를 폐지하는 등 융화책을 취했다. 종교적 융화책은 자항기르샤 자한까지 이어지지만 6대 아우랑제브가 다시 인두세를 부활시키는 등 종교적 억압책을 실시하면서 제국의 분열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한편, 무굴 제국 시기에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 열강의 본격적인 인도 침입이 시작되었고,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이 인도를 차지함으로써 1857년 무굴제국은 멸망했다.

무굴 제국 시기에 형성된 문화는 인도 역사에서 황금기를 누렸다. 특히 건축, 문학, 음악 등은 힌두 문화와 터키-페르시아계 문화의 융합으로 오늘날 인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명칭[편집]

무굴 제국의 공식 칭호는 ‘구르카니’로, 이는 티무르 왕조의 지배자들이 칭기스 왕실과의 결혼으로 ‘구르칸’ 칭호를 사용한데서 유래했다.[1] 당대의 타국인들은 무굴 제국의 지배계층을 ‘차가타이인’이라 불렀다. 사자와 태양이 그려진 표장은 차가타이 울루스에서 사용했던 것이다.[2] 17세기 초 무굴 제국에 파견되었던 영국 최초의 공식 사신은 무굴 제국의 지배계층이 무굴인이라 불린다고 기록하였으며, 반세기 후 인도를 방문한 한 프랑스인은 무굴황제들이 스스로 칭기스 칸의 후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무굴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고 기록하였다.[3] 무굴 제국 스스로도 지배계층을 칭기즈칸의 후예라고 칭했지만 사실상 근접적인 연계성은 없었다. 당시의 중앙아시아및 유목제국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징키즈칸의 계승을 자긍심중의 일부로 여겨 억지로라도 꿰맞추던 습성이 있었다.

스티브 데일은 바부르의 왕조가 티무르 가문과 차가타이 가문, 양자 모두를 계승했으며, 스스로도 그런 의식을 가졌기 때문에 무굴 제국의 지배 왕가를 지칭할 때 티무르 무굴 왕조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4]

바부르의 왕조가 인도로 들어온 티무르 왕조라하여, 이를 인도 티무르 왕조라 일컫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스티븐 데일은 이 명칭이 티무르 가문과 차가타이 가문 사이의 연관성을 표시해주지 못 하기 때문에 티무르 무굴 왕조가 더 적합한 표현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5]

역사[편집]

배경과 건국[편집]

무굴 제국의 시조 바부르는 본래 중앙아시아를 지배했던 티무르의 5대 직계후손으로, 1483년 2월 14일 우즈베크(Uzbek)의 시르 천(川) 상류 페르가나에서 태어났다.[6][7] 그의 아버지의 왕국은 중앙아시아 바다크샨(Badakshan)에 있는 페르가나의 조그마한 공화국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바부르가 우즈베크 공화국의 수장 무함마드 샤이바니으로부터 위협을 11세때부터 받아 그는 줄 곧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이후 1494년부터 1513년 동안 페르가나를 굳건히 하고 빼앗겼던 사마르칸트를 되찾고 나라를 세우고자 힘썼다.[7] 그러나 1491년1503년에 두 번씩이나 사마르칸트 정복하려고 했으나 우즈베크인에게 밀려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세력이 부족해 끝내 그의 본거지인 페르가나마저 적에게 빼앗기고 말았고, 바부르는 중앙아시아 대신 1504년에 서북 인도 정책에 전환점을 가지게 되었다.[7] 그 해 바부르는 카불간다라을 점령하고, 이곳을 근거지로 하였다. 1513년 바부르는 중앙아시아 지역을 정복하려는 꿈을 버리고 시선을 남쪽으로 돌렸다.[8] 1525년 인도 공격에 나섰다. 당시 인도에서는 아프간 출신인 로디 왕조의 술탄이 다스리고 있었다.[6] 이듬해 1526년 4월, 델리로 쳐들어가 로디 왕조(1451~1526)의 이브라힘 왕델리 북부의 파니파트 전투에서 격파했다.[9] 이어 바부르는 무굴 제국을 건국했다. 그는 델리에서 아그라(Agra)로 밀고 들어가 스스로 '인도의 파드샤'[10]임을 선언하고, 페르시아식 양식의 정원을 만들었다.[11]

이 때 즈음하여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크인들이 정치적 혼란기를 맞이했는데, 바부르는 이를 이용하기 위해 후마윤과 군대를 파견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4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1530-1556 : 후마윤 시기[편집]

제2대 황제인 후마윤벵골, 비하르 지방에서 일어난 아프간계(系) 수르 왕조셰르 샤에게 패하여[12], 1540년 페르시아로 도망쳤다. 1555년 셰르 샤가 죽은 뒤에 사파비 왕조의 힘을 빌려 수르 왕조를 공격하여, 델리를 탈환한 뒤 무굴 왕조를 다시 부활시켰다.

1556–1605: 악바르 대제 시기[편집]

무굴 제국은 제3대 황제인 악바르의 치세 동안 크게 발전하였는데, 악바르는 주변에 대한 정복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는 우선 수르 왕조의 잔당을 소탕하여 북인도에서 무굴의 세력을 확고히 하였고, 라자스탄 지방의 소국들과 동맹을 맺었다. 또한 악바르는 1573년 구자라트1576년 벵골을 점령하고, 1580년대에 악바르는 인도 북서부의 펀자브에서 아프가니스탄카불에 이르는 지역을 정복하였다. 1590년대에는 남으로 고다비리 강 유역과 북으로는 카슈미르 일대까지 장악함으로써 무굴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켰다.[9]

행정면에서도 악바르는 종파를 가리지 않았고, 힌두교도들을 회유하기 위해 브라만 계급층과 타협하고, 라지푸트 족의 왕비를 맞아들였다. 모든 종교의 사상을 하나로 유일사상으로 묶어 장려하는 등 종교에 관하여 만인평화 정책을 채택하였다. 비이슬람교도들에 대한 인두세(지즈야)등을 폐지하였다. 또한, 능력에 따라 관료를 임명함으로써, 지방 통치나 토지 측량에서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이 외에도 사회의 악습을 철폐하는 등 사회 개혁을 실시하였고 문학과 예술을 보호하고 교육과 학문을 장려했다.

1605–1627: 자한기르 시기[편집]

이러한 악바르의 개혁과 정복활동은 4대 황제 자한기르(Jahangir)에 계승되었다. 자한기르는 무굴 제국의 황제들 중 처음으로 인도 귀족 출신 어머니를 두었고, 인도에서 태어났다. 자한기르의 시대에 시크교와 무굴 제국 정부의 사이가 나빠졌다. 시크교가 자한기르의 장남이 반란을 일으키게 획책했기 때문이다. 이후 제국의 역사 내내 시크교와의 사이는 회복되지 않았다.

1627–1657/58: 샤 자한 시기[편집]

제5대 황제인 샤 자한 1세은 관용정책을 유지하고 영토확장을 계속해 영토를 넓혔다.[13] 셋째 황후 뭄타즈 마할이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자 국력을 소진시켜 가면서 타지마할을 지어버렸다. 이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딴 수도 샤 자한 나바드를 델리에 짓고, 카슈미르에 777개의 정원을 지었다. 타지마할은 심각한 국고 낭비 였으며, 곧 국력도 쇠퇴하게 되어서 신임을 잃어서 그의 아들이 왕위를 가로채가서, 샤 자한은 다른곳으로 유배가 되고. 8년만에 죽었다.

1658–1707: 아우랑제브 대제 시기[편집]

결국 샤 자한은 타지마할 축조로 인해 민심을 잃은 것을 빌미로 마흔살의 아들인 아우랑제브가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가 됐다. 6대 황제가 된 젊은 아우랑제브 황제(1658~1707)는 꽤나 야심만만하고 호전적인 군주였던지라 즉위 직후 바로 정복사업을 시작했다. 제6대 황제인 아우랑제브 1세는 남부의 비자푸르, 골콘다, 동부의 오리사를 병합하였으며, 데칸 지역의 여러 이슬람 소국들을 정복하여, 인도 제국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이룩했다.

아우랑제브는 힌두교도, 시크교도 국민들에게 철저한 불관용 정책을 실시했고, 아우랑제브의 강압에 반발한 힌두교도들이 결성한 마라타 동맹의 반란으로 제국은 분열을 맞았으며, 시크교 역시 그들의 구루가 아우랑제브에게 처형당한 이래 무굴 제국에 반발했다. 아우랑제브가 분노해 남부 고원의 마라타 동맹의 게릴라들을 진압하자, 시크교도들이 많은 북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아우랑제브는 선대 황제들과 달리 후사 문제를 제대로 수습해놓지 못한 채 데칸고원에서 전사해버렸기 때문에 그의 사후 국정 역시 극심한 혼란 국면에 빠져들었다.

1707–1858: 쇠퇴와 멸망[편집]

쇠퇴[편집]

무굴 제국은 여러 정복활동으로 인하여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엄청난 재정난에 겪어야했고, 엄청난 유지비에 감당해야 했으며, 이것은 특히 세금을 내는 소영주들이나 일반 농민들이 부담하는 것이도 하였다. 제6대 황제 아우랑제브 1세는 기존의 종교 융합정책을 포기하였고, 토후 세력과의 소모전을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중앙정부의 통치권을 크게 약화 시켰다. 아우랑제브 1세 치세 말기에는 비이슬람교도들에 대한 인두세를 부활하고, 라지푸트 족에 대해서도 엄격한 정책을 취하면서 높은 세금을 감당해야했던 소영주와 농민들, 심지어 궁정 귀족들까지도 정부에 대해 반감을 사게 되었다.

이에 따라 펀자브지방에는 시크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1674년 힌두교도들이 서부 데칸 지방에 마라타 왕국을 세워, 남인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며, 무굴 제국의 강력한 적대세력으로 등장하였다.[9]

1707년, 아우랑제브가 데칸 일대를 원정 하던 중 사망하였고, 그의 죽은 후 강력한 군주가 뒤를 잇지 못한 채 귀족들의 부패와 토후들의 반란이 계속 이어졌다. 제위(帝位) 계승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났고, 여러 각지에 반란 진압으로 인한 재정난과 힌두 제후의 할거등으로 무굴제국의 중앙 권력은 급속히 쇠퇴해졌다.

18세기 말에 이르자, 마라타 동맹, 시크교도 세력 그리고 일부 라지푸트 소국들은 무굴의 중앙 정부에 격렬히 대응하였으며, 이것은 무굴의 재정적인 수입과 영토를 감소시켰다.[9] 즉, 많은 수의 독립된 혹은 준독립된 상태의 토후 세력들이 등장하였던 시기로 대표적인 세력을 들자면, 데칸지역에 기반을 둔 하이드라바드 족, 하이다르 알리 족, 사회·경제·군사 개혁을 실시하여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으로 떠오른 마리타 동맹, 펀자브 지방을 중심으로 한 시크교도 세력, 델리 중심지역의 라지푸트, 자트 농민 세력, 중북부 인도를 중심으로 한 아와드 족 등등 들을 수 있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법, 행정, 사회, 조세 등의 정책을 새롭게 수립하여 개혁을 시도했으나 총체적인 사회변화와 경제위기의 극복에 실패하였다.

1739년 페르시아나디르 샤의 델리 침공으로 무굴 제국은 빈 껍데기만 남은 상태로 사실상 패망했다.[14]

여기에 인도지역에 들어온 영국(동인도 회사)은 인도 정복에 발을 내밀게 된다.

영국 동인도 회사의 인도 지배[편집]

배경[편집]

15~16세기 동안 유럽에서는 신항로의 발견한 이후, 각국에서 아시아 국가들과 교역하기 위한 무역기지를 확보하고자 인도의 각지역을 점령하였다. 다른나라들에 비해 뒤늦게 진출한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앞세워 스라트지역에 근거지를 확보하면서 인도에 대한 침략경쟁에 뛰어들게되었다.

전개[편집]

18세기 초, 인도에는 각 지방에서 무굴제국에 대항하는 여러 정권들이 등장하면서 분열하였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이틈을 타 인도에 대한 지배를 확대해 나아가게되었는데, 여기서 프랑스와 벵골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자주 세력 다툼을 벌였다. 특히 영국은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를 무찌르고, 벵골과 오리사 비하르를 지배하게 됨으로써 인도 지배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15] 이후로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인도인으로 구성된 유럽식 군인 용병인 세포이를 양성함으로써 인도 각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영국은 1799년에 마이소르를, 1805년마라타 동맹을 해체하고, 그 영토를 흡수하였다. 또한 1843년 신드를 합병하고, 1849년에는 펀자브를 병합하였으며, 인도 내에 델후지 총독을 둠으로써 마라타를 비롯한 인도내의 소규모 토후국들을 흡수, 합병하였다.[16]

또한, 영국 동인도 회사는 자국 영국의 면직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인도산 면직물에 대한 수입 관세를 높이고, 영국산 면직물에 대한 인도의 수입관세를 최대한 낮추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결과, 수공업에 의존하던 인도의 면직물 산업이 무너지고, 인도는 영국의 산업 발달에 필요한 원료의 공급지 및 상품 시장으로 전락되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이에 나아가 인도인을 고용하여 면화와 차, 아편등 상품 작물을 강제 지배하는 농촌들등을 수탈하였으며, 이에 인도 민중들은 반영운동 기운이 높아져만 갔다.

인도 독립전쟁과 무굴제국 멸망[편집]

영국 동인도회사의 인도 침략과 수탈에 대한 인도인들의 불만을 배경으로 1857년, 영국 동인도 회사의 고용된 군인 용병들 세포이가 반란을 일으켜 세포이 항쟁으로 인도인들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특히, 세포이들과 각 주둔지에서 영국에 반란을 일으킨 인도인들이 델리에 집결하여, 무굴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를 추대하여 새로 정권을 수립하였다. 봉기는 점점 확대되어 인도 북부전체로 퍼져나아가게되고, 영국의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인도 독립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세포이항쟁 봉기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수탈로 피해를 입은 수공업자와 농민, 지주등 폭넓은 민중들이 참가하였다. 그러나 2년에 걸친 이 반란은 영국 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영국 동인도 회사의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세포이 항쟁을 진압한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폐지하고, 탄압정책을 한층 강화하여 그때까지 명목상으로만 남겨 두었던 무굴 황제 바하두르 샤 2세의 지위마저 폐위함으로써 무굴제국은 멸망하였다.[16] 이어서, 1877년에는 영국 국왕이 인도황제를 겸하는 인도 제국을 성립시켰다.

경제[편집]

무굴 제국 시대는 상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흥성하였으며, 화폐경제가 크게 활성화 되었다. 광대한 영역이 하나의 통치권 아래 놓이면서 법과 질서의 체계가 수립되고 전국이 도로와 통신망으로 연결됨으로써 부강한 제국을 형성하였다.

무역부분에서도 크게 발달했었다. 서아시아, 유럽 등과 매우 활발하게 무역이 진행되었는데, 특히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과의 교역은 무굴 제국 국내 산업의 발달에 커다란 자극이 되었고, 이를 통해 인도의 제품이 유럽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17세기 말부터는 경제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는데, 토지의 산성화로 인한 농업 생산력이 감소가 이 시기부터 뚜렷이 나타내게 된 것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경작 기술이나 농업 과학 등의 발전이 뒤따르지 못하였다. 반면에 매관매직으로 인하여 관리들 특히, 봉토의 토지세 징수권을 가진 관리의 수가 점차 늘어나면서 이를 둘러싼 권력의 암투가 빈발하여 곧 농민의 피폐와 직결되었다. 여기에 귀족 계층의 소비와 사치 생활이 이어져 많은 경제력의 손실을 가져왔다.

또한, 무굴제국의 끊임없는 영토 확장 정책으로 국가의 경제력은 막대한 낭비를 가져왔고, 사회변혁의 실패로 직계됨으로써 과학 기술의 후퇴, 해양 산업과 해군력의 취약 등으로 쇠퇴하게 되었다.

문화[편집]

건축[편집]

타지마할 묘당

무굴 제국은 이슬람교가 국교였으나, 힌두 문화와 융합하여 인도, 이슬람 문화를 만들어 내었다. 종교면에서는 16세기초, 나나크가 힌두교를 개혁하여 시크교를 만들었다. 시크교는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은 일신교로 우상과 카스트 제도를 철저히 부정하였다. 언어면에서는 페르시아어가 공식언어였지만, 군대에서는 힌디어, 페르시아어, 아라비아 언어의 어휘를 섞은 말들을 사용하였다. 건축에서는 무굴 제국의 5대 황제 샤 자한 때, 타지마할이라는 뛰어난 묘당을 세웠는데, 장식에서는 페르시아의 세밀화의 영향이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미술[편집]

무굴제국은 세밀화가 크게 발달하였는데, 크게 두 화파로 나뉜다. 하나는 민간신앙을 표현한 '라지푸트 회화'이고, 또 하나는 왕이나 귀족을 그린 무굴제국의 '궁정 세밀화'이다. '라지푸트 회화'는 16세기경에 라지푸타나에서 발달한 양식으로 붉은 바탕에 빈틈없는 부조 모양의 구도를 가진 세밀화였는데, 힌두교나 민중예술에 기반을 둔 종교적, 신비적인 관념세계를 그린 것이 특징이다. 반면에, '궁정 세밀화'는 페르시아의 세밀화가 인도 전통 수법인 '라지푸트 회화'의 영향 아래 발달한 것으로, 황제나 궁정 귀족들의 초상화와 생활모습 등을 소재로 삼았으며, 세필을 써서 색채를 선명하게 그린 것이다. 또한, 투시적 원근법과 음영을 이용하여 주제를 사실적이면서 현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배경을 장식적으로 꾸민 것이 특징이다.

역대 황제[편집]

  1. 바부르 1526 - 1530
  2. 후마윤 1530 - 1540 / 1555 - 1556
  3. 악바르 1세 1556 - 1605
  4. 자항기르 1605 - 1628
  5. 샤 자한 1세 1628 - 1658
  6. 아우랑제브 1세 1658 - 1707
  7. 바하두르 샤 1세 (샤 알람 1세) 1707 - 1712
  8. 자한다르 샤 1712 - 1713
  9. 플루크시야르 1713 - 1719
  10. 샤 자한 2세 1719
  11. 라피 우드 다울라트 1719
  12. 니쿠시야르 1719
  13. 모하메드 샤 1719 - 1720 / 1720 - 1748
  14. 모하메드 이브라힘 1720
  15. 아메드 샤 바하두르 1748 - 1754
  16. 알람기르 2세 1754 - 1759
  17. 샤 자한 3세 1759
  18. 샤 알람 2세 1759 - 1806
  19. 악바르 2세 1806 - 1837
  20. 바하두르 샤 2세 1837 - 1858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이주엽, 16세기 중앙아시아 신흥국가들의 몽골제국 계승성 연구:우즈벡·카자흐칸국과 무굴제국의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단국대 대학원, 2003, p.65.
  2. Nicolle, Mughul India 1504 - 1761, Osprey, 1993, p.23.
  3. Gascoigne, The Great Moguls (New york: Carroll & Graf Publishers, 2002), p.2-3.
  4. Stephen Frederic Dale, The Garden of the Eight Paradises(Leiden: BRILL, 2004), pp.16-17.
  5. Stephen Frederic Dale, The Garden of the Eight Paradises(Leiden: BRILL, 2004), p.17, n.8.
  6. 마이클 우드 저/김승욱 역 (2009년 4월 27일). 《인도 이야기 (The story of India)》. 서울: 웅진지식하우스. ISBN 978-89-01-09422-9 p295
  7. 정병조 (2005년 2월 25일). 《세계각국사 - 인도사》. 서울: 대한교과서. ISBN 978-89-378-3064-8 p254
  8. 정병조 (2005년 2월 25일). 《세계각국사 - 인도사》. 서울: 대한교과서. ISBN 978-89-378-3064-8 p255
  9. Parker, Geoffrey. 《아틀라스 세계사》. 사계절, p.70쪽
  10. 황제, 즉 무굴제국 역대 황제 칭호를 말한다.
  11. 정병조 (2005년 2월 25일). 《세계각국사 - 인도사》. 서울: 대한교과서. ISBN 978-89-378-3064-8 p257
  12. 두산백과사전. 무굴 제국.
  13. http://www.asia.si.edu/exhibitions/current/muraqqa/mapsmall.gif
  14. Parker, Geoffrey. 《아틀라스 세계사》. 사계절, p.71쪽
  15. Parker, Geoffrey. 《아틀라스 세계사》. 사계절, p.104쪽
  16. Parker, Geoffrey. 《아틀라스 세계사》. 사계절, p.105쪽

참고문헌 및 참고 자료[편집]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