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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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
Хүннү/匈奴
기원전 4세기 ~ 155년?
XiongnuMap.png
기원전 250년경 흉노의 강역.
정치
정부 형태 유목제국
탱리고도선우
? ~ 기원전 209년
기원전 209년 ~ 기원전 174년

두만 선우
묵돌 선우
기타
국교 텡그리교

흉노(匈奴, 중국어 병음: Xiongnu)는 기원전 3세기부터 5세기까지 몽골중국 북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민족, 그리고 그 민족이 형성한 유목제국이다.[1] 기원전 3세기 무렵 몽골 고원 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하여, 전성기에는 시베리아 남부, 만주 서부, 중화인민공화국내몽골 자치구(內蒙古自治區), 간쑤 성(甘肅省), 신장 위구르 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까지 지배하였다.

흉노는 중국의 한족(漢族)과 군사적 충돌을 겪기도 하였고, 때로는 조공무역이나 결혼동맹을 하는 등 복잡한 관계를 보였다. 흉노에 대한 기록은 극히 빈약하며, 남아 있는 기록의 대부분은 중국과의 군사적 충돌 관계에 대한 것으로 적대국에 의해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상당한 편견이 내재되어 있을 가능성이 지적되기도 한다.

흉노 민족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사료에만 있기 때문에, 현재 중국어로 음역된 일부 지명이나 이름들을 제외하고는 흉노어의 재구성은 거의 불가능하다.[2]

한편, 흉노와 훈족(Hun族)을 같은 민족[3]으로 간주하는 시각이 있다. 또한, 흉노의 '匈'(흉)은 '훈(Hun)'을 중국어 음차로 부른 명칭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흉노와 훈의 관계에 대한 명확한 결론은 아직까지 없는 상태이다.

민족[편집]

현재 흉노의 후계 민족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 헝가리터키, 몽골[4]은 이들을 자기 민족의 역사라고 가르치고 있다. 중국에서는 북방 이민족을 다 같은 종류로 생각하여 훈족, 흉노, 선비족을 동음이의어로 쓰는 경향도 있으나, 흉노 제국은 한나라와 같은 하나의 국가 형태로 그 구성 민족도 다양하였다. 한족들을 포로로 잡아 장수로 봉하기도 하였다. 전한 초기 한왕 신이라는 사람이 흉노로 도망갔고, 한고조 때 노관이라는 사람이 흉노로 도망가 노왕이 됐다고 전한다. 후한 이전에 흉노의 지배를 받았던 민족으로는 동호, 말갈족, 갈족 등이 있는데, 이들은 오랫동안 북방에서 섞여 살았지만 본래는 흉노족과 다른 유목 민족이었다. 북흉노가 서아시아로 이동한 후에는 동호가 들어와 갈족과 섞여 그 일부가 선비족이 되었다.

역사[편집]

몽골의 역사
Монголын түүх
DschingisMongoliaStatue.JPG
고대
  • 흉노(기원전 209년 ~ 155년)
  • 탁발부(93년 ~ 234년)
  • 유연(330년 ~ 555년)
  • 돌궐(552년 ~ 744년)
  • 위구르(742년 ~ 848년)
  • 견곤(539년 ~ 1219년)
  • 거란(4세기 ~ 11세기)
중세
근현대
  • 몽골 국가 혁명(1911년)
  • 복드 칸국(1911년 ~ 1924년)
  • 북양정부(1919년 ~ 1921년)
  • 몽골 인민 혁명(1921년)
  • 몽골 인민 공화국(1924년 ~ 1992년)
  • 몽골 민주 혁명(1990년)
  • 몽골국(1992년 ~ 현재)
v  d  e  h

전사(前史)[편집]

흉노가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4세기 말 중국의 전국시대의 기록이다. 기원전 318년, 흉노는 (韓), (趙), (魏), (燕), (齊)의 다섯 나라와 함께 (秦)을 공격했지만, 결과는 5국의 참패로 끝났다. 이후 조의 효성왕(孝成王), 재위: 기원전 265년 - 기원전 245년)의 시대에 장군(將軍) 이목(李牧)이 대(代)의 안문(雁門)에서 흉노를 막아 싸워서 흉노 선우(單于)의 군을 격파하였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기원전 215년, 장군 몽염(蒙恬)을 보내 융적(戎狄) 즉 흉노를 토벌하여 하남의 땅(오르도스 지방)을 점령하고 흉노를 축출한 뒤, 감숙(甘肅)에서 요동(遼東)까지 장성을 쌓아 북방 기마민족들의 침공을 막았다. 당시 흉노의 두만(頭曼, 터키어: Tumen, Teoman)은 여러 차례 중국을 공격했고, 기원전 210년에 사망하기에 황하(黄河)를 넘어 이 때 두만은 자신의 태자였던 묵돌(冒頓)을 인질로서 서쪽의 월지국(月氏國)에 보냈다. 그러나 곧 그 월지를 공격하여 아들을 죽이려 했고, 가까스로 월지를 빠져나온 묵돌은 귀국해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모아 아버지 두만 선우를 살해하고, 스스로 선우가 되었다.

묵돌 선우의 등장[편집]

묵돌이 등장할 당시 중국은 초한전쟁이라는 내전을 치르고 있었다. 묵돌은 정권을 강화시키고 동쪽의 만주 서부지역에 위치한 동호(東胡)를 쳐서 그 왕을 죽이고, 나아가 서쪽의 천산산맥과 감숙 지방에 자리잡은 월지국(月氏國)을 쳐서 몰아내고 남쪽으로 누란(樓蘭), 백양하남왕을 병합해 북방 최대의 유목민족국가를 수립하였다.

묵돌이 북쪽으로 혼유(渾庾), 굴야(屈射), 정령(丁零) 등의 여러 부족을 복속시키는 사이, 중국에서는 전한(前漢)의 유방(劉邦)에 의해 내란이 수습되었다. 기원전 200년에 흉노는 마읍성(馬邑城)을 쳐서 그곳을 지키고 있던 한왕 신(韓王信)의 항복을 받아내고 태원(太原)으로 진격, 진양(晋陽)으로 나아갔다. 그곳에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유방이 친히 이끌고 온 한군이 도착했으나, 큰 눈과 추위로 더 나아가지도 못하고 많은 병사가 추위로 곤욕을 치렀다. 묵돌은 한군을 북쪽으로 유인하고자 거짓으로 물러났고, 백등산(白登山)에서 7일간 포위된 유방은 진평(陳平)의 헌책에 따라 묵돌의 알지(閼氏, 역대 선우의 어머니)를 움직여 공격이 잠시 느슨해진 사이에 가까스로 달아났다. 이후, 전한은 흉노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었다. 화친의 결과 전한과 흉노는 형제 관계를 맺었으며, 유방은 "흉노와 전쟁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당시 흉노와 한이 맺은 화친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첫째,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5]
  • 둘째, 한이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공물을 바친다.
  • 셋째, 한과 흉노가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는다.
  • 넷째,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이 합의는 기원전 198년 가을, 중국 종실의 공주가 흉노에 도착함으로써 발효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양 조정(朝廷)에 왕위 변동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혼인으로 동맹을 갱신했다는 점이다. 또 중국이 흉노에 내는 조공 액수도 한과 흉노 사이의 역학 관계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는데, 대체로 한의 조공액은 매년 늘어났다. 기원전 192년부터 135년까지 적어도 아홉 차례에 걸쳐 한이 흉노에 대한 조공액을 인상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이 시기 전한이 흉노의 속국과 같은 존재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6] 이 시기의 영토는 동쪽으로 동호예맥(濊貊), 북쪽으로 예니세이 강 상류, 서쪽으로 동 투르케스탄, 남쪽으로 중국의 오르도스 지방과 칭하이 성(靑海省)의 북부에 이르렀다.

실크로드 장악[편집]

기원전 177년, 흉노의 우현왕(右賢王)이 하남 땅을 침략해 상군(上郡)을 약탈했다. 한의 문제(文帝, 재위: 기원전 180년 ~ 기원전 157년)는 승상 관녕(灌嬰)에게 우현왕을 치게 했는데, 백등산 전투 이후 한이 흉노에 대해 처음으로 손을 쓴 사례였지만, 이 무렵 서방 공략에 주력하던 묵돌 선우는 곧장 흉노측의 책임을 인정했다. 묵돌 선우는 한과의 조약을 깬 우현왕을 시켜 돈황(敦煌) 부근에 있던 월지국을 축출하게 하는 동시에, 누란(楼蘭), 오손(烏孫), 호갈(呼揭) 및 서역 26국을 흉노의 지배하에 두었다.

모돈이 죽은 뒤 선우가 된 노상(老上, 재위: 기원전 174년 ~ 기원전 161년)에게 한 문제는 화친 조약에 따라 공주를 출가시켰는데, 이때 공주를 수행하는 임무를 맡게 된 환관 중항열(中行說)은 흉노의 땅에 가고 싶지 않다고 몇 번이나 고사했지만 강제로 보내지게 되었고, 흉노에 붙어 노상 선우의 상담역으로서 선우가 한을 침공하도록 부추겨 한의 골칫거리가 된다.

흉노의 분열[편집]

기원전 141년에 즉위한 전한 무제(武帝)는 흉노와 맺은 조약을 파기하고 흉노와 전면적인 전쟁을 시작하였다. 무제는 기원전 129년부터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 등을 파견, 흉노를 공격하고 서역(西域 : 간쑤성 및 신장 자치구 일대)을 정벌하였다. 한군이 서역을 정벌하고 비단길을 통제하게 되자 흉노는 경제적으로 약화되었다. 한과 흉노의 전쟁으로 전한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며, 흉노의 피해는 더 커서 흉노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기원전 60년경 흉노에서는 선우 자리를 놓고 내분이 일어났으며 호한야 선우(呼韓邪 單于)는 기원전 51년 중국에 입조하여 지원을 얻었다. 이후 호한야에 의해 흉노는 재통일되었으며 전한과 화친을 맺었다. 이때 질지(郅支) 선우는 서흉노를 이끌었는데, 후에 동흉노에 패하여 다시 흡수되었지만, 일부 집단은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이 시기 흉노의 내분과 약화의 원인으로는 당시 몽골 고원이 한랭화되었던 것을 꼽기도 한다.

왕망(王莽)이 (新)을 건국한 후 흉노와 중국의 관계는 악화되어 흉노는 다시 중국을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후한이 건국된 이후 흉노는 다시 분열되어 남흉노는 후한에 복속되어 오르도스 및 산시 성(山西省) 일대에 거주했으며, 북흉노는 몽골 고원에 남았다. 89년에 후한과 남흉노의 연합군은 북흉노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며 북흉노의 일파는 서방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서방으로 향한 북흉노를 훈족으로 보기도 한다. 이후 몽골 고원에는 선비(鮮卑)·오환(烏桓) 등의 다른 유목 부족이 성립되었다.

남흉노는 중국의 번병(番兵) 역할을 하며 오르도스 및 산서 일대에서 북방을 방어하였다. 후한은 남흉노의 군대를 용병으로 활용하여 선비, 오환, 강(羌) 등을 토벌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선우에 대해서 흉노의 여러 유력자들은 많은 불만을 가졌으며 이로 인해 선우와 흉노의 유력자들 간에는 끊임없는 알력이 존재하였다. 또한 중국 측에서도 간섭하여 선우의 직위는 크게 실추되고 위태로워졌다. 삼국 시대에는 조조(曹操)에 의해 흉노의 선우는 유명무실하게 되고 흉노는 5부로 재편되어 중국의 실질적인 통제를 받게 되었다.

오호십육국 시대와 소멸[편집]

북흉노는 서진하여 유럽으로 항하였는데, 가는 길목의 여러 민족이 합쳐 졌다. 훈족이라 함은 북흉노와 게르만 민족의 이합집산이다. 따라서 흉노와 훈족은 약간 다르지만 북흉노의 일파가 많은 영향을 주었다. 남흉노는 남하하여 대부분 중국인이 되었다. 후한의 유표는 고대 흉노 모계 조상 가운데 한나라 공주 유(劉)씨가 있었기 때문에 유(劉)씨로 창성하였다. 그의 후손 서진(西晉) 말기, 흉노의 좌부수(左部帥) 유연(劉淵)은 중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산서 일대에서 (漢)을 건국하였다. 이는 흉노가 과거 한나라와 형제의 맹약을 맺은 것을 근거로 한 것으로, 유연은 형인 한나라를 대신하여 한나라를 계승할 것을 천명하였다. 흉노의 한나라는 서진을 멸망시키고 화북 지역을 초토화하여 지배권을 얻었다. 이후 흉노의 일파인 갈족(羯族)의 석륵(石勒)이 후조(後趙)를 건국하자 국호를 (趙 : 후조와의 구분을 위해 보통 前趙라고 부른다.)로 고치고 화북을 양분하여 서로 물고 물리는 전쟁으로 대립하였다. 329년에 후조에 의해 전조는 멸망하였으며, 후조 역시 351년에 멸망하였다.

407년에는 흉노 철불부(鐵弗部)의 혁련발발(赫連勃勃)이 산시 성(陝西省) 일대에서 (夏)를 건국하여 선우를 자칭하였으나 431년에 멸망하였다. 이후 흉노는 중국 역사에서 소멸되었다.

5호 10국 시대 유지원 (후한)후한 (오대)을 건국하는데, 석경당 휘하에 있다가 한을 건국하였기 때문에 흉노의 후예라고 믿어지고 있어서, 공식기록에 유지원이 사토족 출신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에는 한나라 유씨 이외에도 주나라와 항우 계통이 있어서 검증이 필요하다.

정치 제도[편집]

흉노의 군주는 선우라고 불렀다. 흉노의 선우는 흉노의 중앙집권화를 이룩한 묵돌 선우 이래 부자세습제를 통해 자리를 이어갔다. 흉노의 신앙 체계는 천신사상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통치자 선우(單于)는 천신(天神)의 아들로서 하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제사장으로 표현되고 있다. 흉노는 군주를 선우(單于)라고 불렀고, 수하 장수를 왕으로 지칭하였다. 흉노열전의 곤야왕 (昆邪王), 절란왕, 휴도왕 등은 왕이 아니고 한나라 접경 지역에서 활동하는 제후(장수)을 가리켰다.

흉노의 주요 지배 집단은 연제, 호연(呼衍), 수복(須卜), 난(蘭), 구림(丘林) 등 5개 부족이 있었다. 국가를 구성하는 5부족 족장은 1년에 세 번, 선우의 본거지에 모여 무속적(巫俗的)인 제사를 거행하고 국사를 의론하였다. 이들 5부족은 개별적으로 차이가 있으며, 현재의 몽골족과는 전혀 다른 유럽인과 비슷한 계통이다. 고대 흉노족에서는 게르만족과 유사한 민족도 있었다고 한다. 한나라 시대 연제 씨족이 왕통을 이어 갔고 황후는 다른 4개의 부족에서 나왔다. 남흉노 "류" (劉)씨는 연제 부족에서 나왔으며, 구림(丘林)은 북위 무렵에 남하하여 "림"(林)으로 성을 가졌다. 셀렝가 강에서 기원한 "설연타"의 일파인 사토족이 후당을 건국했을 때 흉노족이 "리"(李)를 성으로 취했다.

4세기 이후, 오르도스와 중앙아시아 등지의 유목 왕조들의 군주들은 선우라는 명칭은 거의 쓰지 않았고, 한이나 가한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또한 선우를 보좌하는 좌현왕, 우현왕이라는 직책도 있었다. 흉노 선우의 시각은 중원 왕들과 반대로 남방을 정면으로 삼았기 때문에, 좌현왕은 동부, 우현왕은 서부를 관장했다. 당시 중국 왕조인 한나라 식으로 하면, 선우는 황제, 좌우현왕은 황제가 봉해주는 왕에 해당한다. 또한 좌우현왕과 비슷한 두 왕(좌곡려왕, 우곡려왕)이 더 있어 선우와 함께 유목민족 특유의 5부 체제를 이끌었다. 또한 흉노가 강성하여 서역 지방을 다스렸을 때 서역 지방 제후를 일축왕에 봉했다. 골도후라는 직책도 있는데, 정확히 무엇을 칭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골도후에도 좌, 우의 개념이 있어 각각 선우의 보좌직이라는 설이 있다. 좌우현왕 밑에는 각각 지방관 등으로 여겨지는 각종 직위들이 있었으며, 여기서 흉노의 지역 체제가 군사 체제와 일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언어[편집]

흉노인들이 사용한 문자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노인울라 16호 고분을 비롯한 흉노 유적지에서 발굴된 출토품에 흉노 문자로 추정되는 기호들이 새겨져 있다. 몽골어로 ‘훈’은 ‘사람’이라는 말이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흉노제국은 스스로를 ‘훈’이라고 불렀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7]

외국과의 관계[편집]

중국과의 관계[편집]

흉노는 유목민족으로써, 경제의 유지를 위해 농경을 영위하는 정주민에게 필요한 물자를 획득해야 했다. 이를 위해 흉노는 때로는 중국을 침략·약탈하고 때로는 조공이나 세폐를 통해 평화적으로 물자를 확보하였다.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중국은 국력을 기울여 장성을 쌓고 막대한 세폐를 바치기도 하였다.

중국측 역사 교과서에 의하면[8],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하던 중국이 전한 무제 때 대대적으로 흉노를 토벌하여 세력을 약화시켰으며 흉노 부족의 일부가 한나라에 화친을 청하며 신하라고 자칭했었다고 한다. 전한의 원제는 궁녀 왕소군을 공주로 만들어 흉노에게 시집보냄으로써 비교적 장기간 국경이 안정되었다고 한다. 이는 결혼 동맹을 통해서 양국과 우호관계를 담보하기 위한 행위였다.

전한 무제가 흉노와 전쟁을 시작한 이후 경제적인 중심지였던 서역을 상실한 흉노는 세력이 약화되었으며 이후 흉노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더욱 약화되어 일부는 중국에 복속되어 번병이 되기도 하였다.

훈족과의 관계[편집]

서흉노 또는 북흉노가 훈족의 원류라는 주장이 있으나 명확한 관계는 밝혀지지 않았다.

한민족과의 관계[편집]

문무왕의 능비문에는 투후(秺侯)라는 인명이 등장하는데 일부에서는 투후 김일제를 신라 김씨의 선조로 보기도 한다.[9][10][11][12] 그러나 신라의 선조가 흉노라는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특히 영남 지역에서 출토된 토분묘와 적석분의 양식이 흉노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름이 판명났다. [13]

같이 읽기[편집]

[편집]

  1. Ebrey, Patricia Buckley (2010). The Cambridge Illustrated History of China, 2nd, Cambridge University Press, 69쪽. ISBN 978-0-521-12433-1
  2. 《후한서》중에서 1곡의 《흉노 노래》가 있고, 많은 학자는 몽골어, 돌궐의 언어, 위구르 언어 등으로 분석과 해독을 하고 있지만, 모두 이상적인 결과를 얻지 않았다.
  3. 권오진 사라진 고대 유목국가 흉노!, 《YTN》, 2007년 1월 13일 작성, 2011년 3월 14일 확인.
  4. Hunnu Period The establishment of the Hunnu in Mongolia in the 3rd century BC landmarks the beginning of the statehood on the territory of Mongolia.
     
    — (http://www.mongoliatourism.gov.mn/history/ History of Mongol, Official Tourism Website of Mongolia Government)
  5. 이 관례는 문제(文帝, 기원전 179∼157) 때까지 계속되었다.
  6. (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todo=view&atidx=0000020267 개인 연구자인 이종호 씨의 의견이다.)
  7. G. 에렉젠, 〈몽골의 고대 주요 고고유적〉, 《몽골의 역사와 문화》, 2006, 서울: 서경문화사, p. 163.
  8. (2005년) 《중국역사》(7학년 상책, 의무교육과정 표준실험교과서)
  9. 고구려와 흉노의 친연성에 관한 연구. 《백산학보》 (제67호).
  10. 김대성 (1999년년 8월월). <이색보고> 金氏 뿌리 탐사,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 유적을 찾아서. 《신동아》.
  11. 조갑제 (2004년년 3월월). 騎馬흉노국가 新羅 연구, 趙甲濟(月刊朝鮮 편집장)의 심층취재. 《월간조선》.
  12. 김운회.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23> 금관의 나라, 신라", 《프레시안》, 2005년 8월 30일 작성.
  13. 이형구, <한국 고대 문화의 비밀>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68051&cid=824&categoryId=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