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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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불 전쟁
상륙하는 프랑스군.
상륙하는 프랑스군.
지도
SinoFrenchWar1884-1885.jpg
날짜 1884년 8월 ~ 1885년 4월
장소 베트남 북부의 화남, 대만
결과 프랑스의 승리
교전국





Civil and Naval Ensign of France.svg
프랑스 제3공화국
China Qing Dynasty Flag 1889.svg
청나라

Black Flag Army Flag.jpg
흑기군

Early Nguyen Dynasty Flag.svg
베트남


병력
15,000~20,000명 25,000~35,000명
피해 규모
2,100명 사상 10,000명 사상

청불 전쟁(淸佛戰爭) 혹은 중불 전쟁(中佛戰爭)은 1884년 8월에서 1885년 4월까지 베트남 북부의 통킹을 프랑스가 차지하기 위하여 벌인 전쟁이다. 이 전쟁은 베트남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놓고 프랑스와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기도 하다.[1]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전의 하나로서, 19세기 후반부터 프랑스는 베트남 공략을 적극화하여 1874년 '제2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 베트남 남부 6성을 할양받음과 동시에 베트남을 보호국으로 삼았다. 이에 대해 청나라는 종주국으로서 조약의 무효를 선언하는 한편, 베트남 북부에 군대를 파견하여 중국 의용군인 '흑기군'과 연합하여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다.[1] 그러자 프랑스 함대는 대만푸저우의 항구를 포격하고 청나라 군함(복건 함대)을 패퇴시키고, 청나라 상선들을 격침시키는 등 청국해군을 압도했다. 그 결과 1885년 6월 청나라 조정은 톈진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을 인정했다.[1]

프랑스의 베트남 진출[편집]

18세기 중엽에 프랑스인도에서 영국에게 패한 이후 베트남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당시 베트남은 남북 대립시기로 북쪽은 하노이에 여씨(黎氏)가, 남쪽에는 후에에 완(阮, Nguyen)씨(氏)가 세력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1777년에 또다른 완씨가 후에를 빼앗고 하노이 마저 차지하였다. 이에 처음부터 후에에 있었던 완씨(阮氏)가 프랑스 선교사를 통하여 프랑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프랑스는 영토 할양과 프랑스인의 거주, 왕래, 상무의 독점 등 특혜를 조건으로 내세워 원조하기로 하였으나, 프랑스의 별다른 도움 없이 1802년후에응우옌 왕조가 다시 일어나 마침내 베트남 전역을 통일하였다.[2] :335~337

프랑스는 혁명 이후 베트남의 경영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인 자세로 나왔다. 이에 베트남도 프랑스의 태도를 보고 경계하기 시작하여 쌍방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858년 나폴레옹 3세는 영국과 함께 제2차 아편전쟁을 치르면서 베트남을 압박, 사이공 등지를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1862년에 베트남은 프랑스의 압력으로 비엔호아(Bianhoa), 자딘(Giadhin), 딘뜨엉(Dinhtuong) 등 3성의 할양, 배상금 지불과 메콩강의 항해, 포교 특권을 인정하고, 또한 베트남이 다른 나라와 교섭할 때 프랑스 황제의 동의를 받도록 하는 불평등 조약 내용의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였다.[2] :335~337

프랑스의 베트남 진출은 베트남을 지배하려는 목적이었다. 이에 1867년에 프랑스는 남기(南圻)를 병탄하고 메콩강을 통해 운남으로 진출하려고 하였으나 그 상류로는 항해가 불가능하였다. 그런데 1871년에 프랑스의 모험가 뒤퓌(Jeon Dupuis)가 홍하를 통해 운남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자 프랑스는 이를 통하여 중국으로 진출하려고 1873년 11월에 군대를 동원하여 하노이, 하이두엉(Haiduong), 닌빈(Nihnbihn) 등지를 공격하였다.[2] :335~337

베트남은 프랑스의 공격을 받게 되자 '흑기군'(黑旗軍)을 불러들여 공동으로 프랑스에 대항하려 하였다. [2] :335~337그러나 베트남은 프랑스의 외교적인 압력아래 사이공에서 1874년 3월에 평화와 연맹조약(이를 '제2차 사이공 조약'이라고도 한다.)을 체결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프랑스와 베트남은 영구연맹하며, 베트남을 독립국으로 승인한다.
  • 베트남은 대외정책은 프랑스의 대외정책과 부합하여야 한다.
  • 베트남에서 천주교는 자유롭게 포교할 수 있다.
  • 하노이를 개항하고, 영해에서 운남에 이르는 수로로 대외무역을 개방하여, 프랑스 영사는 치외법권을 향유한다.
  • 조약체결 1년만에 후에에 공사를 파견한다.[2] :335~337

결과적으로 이 조약은 베트남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는 대신 기존 중국의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부인하는 것이었다.[2] :335~337

청조의 대응[편집]

청나라는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하게 되는 이 조약(제2차 사이공 조약)에 대해 즉시 거부하는 입장을 표했다. 한편, 프랑스는 이무렵 보불전쟁에서 패한 이후 점차 국력을 회복하여 베트남에 대한 적극적인 진출을 기도하고, 1881년에 프랑스 의회는 240만 프랑을 베트남에서 군비로 사용하도록 승인하여 1882년초에 프랑스 교지지나해군함대 사령관 앙리 리비에르(H.L. Rivière)가 4월에 하노이를 점령했다. 그리고 다음해 1883년에는 흑기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2] :337~339

당시 러시아에 있던 증기택(曾紀澤)은 프랑스의 야심을 간파하고 총리아문에 베트남 문제의 해결방안을 제시하였다. 즉 베트남의 대표를 베이징에 장기적으로 파견하도록 할 것과 베트남인을 프랑스에 파견하여 중국공사관의 수행원으로 임명할 것, 베트남에게 중국의 명령에 따르도록 하여 홍하 등의 개방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홍장은 '홍하의 개방은 오히려 호랑이를 끌어들이는 것과 같다'고 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2] :337~339

청나라가 베트남 문제로 프랑스와 대립하게 되자, 유곤일은 베트남에게 유영복의 흑기군을 초무하여 프랑스의 세력을 막도록 건의하였다. 또한 운귀총독 유장우도 흑기군을 이용하자고 건의하였다. 장지동도 중국의 국방을 번속인 베트남으로 확대하여야 된다고 적극적인 주전론을 폈다. 그러나 이홍장은 프랑스와 담판으로 베트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2] :337~339

그리하여 1882년이홍장은 프랑스 공사 프레데리크 부레(Frédéric Bourée)와 톈진에서 담판을 시작하여 가조약 3조에 합의하였다. 즉 중국은 군대를 운남,귀주 성으로 철수시키고, 프랑스도 베트남을 점거하지 않으며, 베트남 국왕의 위신을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며, 보승(保勝)을 개항하여 중국과 프랑스가 여기에서 무역하며, 또한 이곳을 중국의 영토와 같은 비율로 세금을 징수하고, 중국과 프랑스는 경계를 설정하여 베트남 북부의 자치를 보호한다고 하였다.[2] :337~339

톈진 담판의 가조약이 체결되자 프랑스군은 철군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베트남 북부의 변경을 순시하였는데, 이 사실을 몰랐던 흑기군은 이들과 충돌을 일으켜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청나라에서는 이를 '양산대첩'이라 부른다. 흑기군을 과신하고 있던 청의 일부 인사들과 임오군란조선에 대한 간섭이 성공된 것을 본 청류파 세력들은 이홍장톈진 담판에 대하여 반발하였다.[2] :337~339

한편, 프랑스도 톈진 담판에 대하여 불만이었다. 이에 프랑스는 주일공사관인 아르튀르 트리쿠(Arthur Tricou)를 전권대표로 삼아 중국과 다시 교섭하여 시간을 끌면서 군사행동을 준비하였다. 이때 중국도 이홍장이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갔기 때문에 교섭의 성과가 없었다.[2] :337~339

1883년 8월에 프랑스는 무력으로 후에를 함락하고, 베트남과 '후에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내용은 베트남이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고 비엔투안성(Bienthuan Provinces)을 프랑스에게 할양하며, 프랑스는 홍하의 양안에 군사 보급지를 설치하고 흑기군을 축출하기로 하였다. 이 소식이 중국에 전해지자 주전파들은 베트남의 원조를 주장하였다. 단지 공친왕이홍장은 무력 사용을 반대하고 외교적인 방법으로 베트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여 '이홍장-트리코 회담'이 다시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북위 20도선을 경계로 하자는 이홍장의 주장과 북의 22도를 경계로 하자는 프랑스의 주장이 대립하여 결렬되고 결국, 프랑스는 무력으로 베트남 문제를 해결하고자 흑기군에 대하여 공격을 시작했다.[2] :337~339

그리고 프랑스는 1884년 4월에 푸르니에(François-Ernest Fournier)를 중국에 파견하여 이홍장과 담판하게 하였다. 그 결과, 청은 프랑스의 베트남 보호권을 승인하고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을 변경으로 철수시키기로 하는 대신, 프랑스는 중국의 변경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5개조로 된 '청-프 간명조약'을 체결하였다. 한편 프랑스1884년 6월에 베트남과 제2차 후에조약을 체결하여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국임을 받아들이고, 프랑스는 통감을 베트남에 두기로 하였다.[2] :337~339

전쟁의 발발과 외교적 해결[편집]

1884년 3월 12일의 박닌 침공

간명조약 체결 이후 철군 명령을 전해받지 못한 베트남 주둔 청나라 군대와 홍하를 순시하려는 프랑스 군대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를 '북려충돌'이라 부른다. 이 때 청조에서는 주전파 장지동을 다시 양광총독으로 임명하고 진보침장패륜을 광동과 복건에 보내 군무를 처리하도록 하는 한편, 베트남에 있는 유영복을 데려오도록 하였다.[2] :339~341

프랑스도 대대적인 중국 공략계획을 수립하고 해군에게 대만의 기륭을 공격하도록 하는 한편, 복건의 마미(馬尾)를 공격하여 청나라복건 함대를 패퇴시켰다.[2] :339~341

이에 청은 지금까지의 타협정책을 버리고 8월 6일에 정식으로 프랑스에게 선전포고하였다. 우선 육로로 군대를 신속하게 베트남으로 이동시키는 한편 연해의 해군에 대하여는 프랑스군의 공격을 철저하게 방어하도록 지시하였다. 육로의 작전은 주로 중국과 베트남의 국경과 베트남의 영토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공격으로 1884년 2월에 변경의 요지인 진남관이 함락되었다가 풍자재가 이끄는 군대의 공세로 겨우 수복하였다. 해로의 경우 전세가 중국에게 유리하지 못하였으나 프랑스에게도 결코 유리한 편은 아니었다.[2] :339~341

이때 영국,미국,독일 등이 조정에 나섰는데, 특히 영국은 총세무사인 하트를 이용하였다. 하트는 영국정부로부터 위임을 받고 중국해관의 영국 런던사무처의 제임스 캠벨(James Dunean Campbell)을 1885년 4월에 프랑스 파리 시로 파견하여 '청-프 간명조약이 유효하다'는 전제 아래 프랑스와 정전협정을 체결하였다.[2] :339~341

그리하여 청프전쟁은 끝났으며, 1885년 6월에 이홍장과 프랑스공사인 쥘 파트노트르(Jules Patenôtre) 사이에 톈진에서 '청-프 신약'을 체결하였다. 그 내용은 중국이 베트남을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인정하고, 중국과 베트남의 변경 두 곳의 통상 장소를 정하기로 하는 한편, 프랑스 화물은 베트남과 광서성 변경에서 관세율을 감하기로 하고, 이후 중국에서 철도를 건설할 때 프랑스와 협상하도록 하였다.[2] :339~341 전쟁배상금은 청나라프랑스에 지급하지 않았지만, 이 전쟁에서 청나라는 은 10억 냥 이상을 지출했고 2억 냥 가량의 빚을 지게 되었다.

결과[편집]

결국 청불전쟁은 청나라로서는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는데 패한 것이 되고, 프랑스도 제대로 승리하지 못한 채 승리한 셈이 되었다. 이로 인해 청나라는 프랑스와 또 다른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이는 앞서의 제1차 아편전쟁,제2차 아편전쟁과 달리 청나라가 어느정도 프랑스의 사정을 알고 있어 적절한 전략이나 전술을 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2] :339~341

또한 청나라 내부의 정치적으로는 이 시기 서태후의 독재정치가 확립되고, 당시 당권자를 비판하면서 주전파였던 청류파의 세력이 해체되었다. 그리고 20여 년 동안 군사공업을 중심으로 전개해왔던 양무운동의 성과가 나타나지 않아 서양의 제도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청조는 '회풍은행'으로부터 차관하여 군향을 충당하려는 양광총독 장지동의 의견을 받아들여 외채를 빌려 전쟁비용을 충당하였다.[2] :339~341

국외적으로는 청나라의 연약함이 드러나자 영국,러시아,프랑스,일본 등이 중국과 그 주변의 나라에 대하여 야심을 품기 시작하였다. 특히 조선과 중국 동북지역(만주)가 전략적인 요충지로 청불전쟁 이후 10년 간 열강의 쟁탈목표가 되었다.[2] :339~341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한국근현대사사전》, p27
  2. 《근대중국:개혁과 혁명-중화제국 마지막 왕조의 몰락(上)》,신승하 저. 대명출판사.

참고 서적[편집]

  • 패트리샤 버클리 에브리 (2010년 6월 25일).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중국사》. 시공사. ISBN 978-89-527-5892-7
  • 백범흠 (2010년 4월 19일). 《중국 외교관의 눈으로 보다》. 시공사. ISBN 978-89-93324-15-0
  • 존 K. 페어뱅크,류광징 편/김한식,김종건 등역 (2007년 9월 10일). 《캠브리지 중국사 11권 상 : 청 제국 말 1800~1911년 2부: 근대화를 향한 모색》. 서울: 새물결. ISBN 978-89-5559-225-2
  • 이윤섭 (2009년 5월 15일). 《다시 쓰는 한국 근대사》. 평단문화사. ISBN 978-89-7343-301-8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