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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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융푸
劉永福

출생 1837년
청나라 청나라 광시 성 친저우
사망 1917년 1월 (80세)
중화민국 중화민국 광둥 성 친 현
사인 병사
국적 청나라 청나라
중화민국 중화민국
직업 무관, 군인, 정치가, 무술가
소속 타이완 민주국 총통 권한대행
중화민국 광둥민단 총장

유영복(劉永福, 류융푸, 1837년 ~ 1917년 1월)은 중국 (淸) 왕조 시대의 무관(武官), 군인(軍人), 정치가(政治家), 무술가(武術家)이다. 광시 성 친저우(欽州) 출생이며 타이완 민주국 총통 권한대행을 지냈다.

젊은 시절에는 무뢰배로서 천지회(天地會)에 참가하여 후에 변경 지방의 무장 조직 흑기군(黑旗軍)에 참가한다. 그 후 청조 정규군의 공격에 의해 흑기군은 베트남으로 쫓겨났으나, 그곳에서 유영복은 흑기군을 이끌고 베트남에 진입한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그 공으로 베트남 황제로부터 '삼선정제독(三宣正提督)'에 임명되었으며, 일등의용작(一等義勇男爵)에 오른다.

청불 전쟁이 끝나자 유영복은 베트남에서 귀국하였고, 흑기군을 해산시킨다. 하지만 청일 전쟁(淸日戰爭)이 개시되자 청조로부터 다시 흑기군을 결성하여 타이완을 방위할 것을 명받는다.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에 할양한 타이완에서 그 조약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 타이완 민주국(臺灣民主國)의 독립선언이 행해졌다. 이 사대에 유영복은 민주국 정부로부터 대장군에 임명되어 타이베이 함락 후의 저항을 맡게 되었다.

타이완 민주국 총통인 당경숭(唐景崧)과 국방군사통령 구봉갑(丘逢甲)이 샤먼(廈門)으로 도망하게 되자, 유영복은 타이난(臺南)에서 타이완 민주국의 재흥을 노렸다. 민중으로부터 총통으로 취임을 부탁받았으나, 유영복은 이를 거절하고 총통 권한대행 직위인 방변(幇弁)이라는 지위로 타이완 민주국 정부를 지휘하게 된다. 이렇게 타이완 민주국의 실질적인 리더가 된 후, 타이난의회를 설치함과 동시에 지폐를 발행하였다.

하지만 군사적인 우위에 있던 일본군에 지속적인 저항을 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고 또한 청의 유력자에게서 지원을 얻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 일본군이 타이난에 육박해오자 안핑(安平)으로, 다시 독일 선박을 타고 중국으로 도망하였다.

중국에 돌아간 유영복은 1902년광둥 성에서 석진총병(石鎮総兵)의 직위를 하사받았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나자 광둥 민단 총장(廣東民團總長)에 임명되어 전투에 출정한다. 또 1915년 일본 정부로부터 위안스카이(袁世凱)에 대한 21개조 요구 사건 때에도 다시 전투에 참가를 요청받는 등 평생 무관(武官)과 군인(軍人)으로서 생활을 이어갔으나, 1917년 1월광둥 성 친 현에서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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