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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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甲申政變)은 1884년 12월 4일(고종 21년 음력 10월 17일) 김옥균·박영효·홍영식개화당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정변이다.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켜 민씨 척족들을 축출하거나 일부 처형하였다. 그러나 치밀하지 못한 준비로 3일만에 진압되어 다른 이름으로는 3일 천하, 3일 혁명 등으로도 부른다.

목차

[편집] 배경

갑신정변의 원인에 대해서는 제물포 조약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882년(고종 19)에 일어났던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이 대립하게 되었다. 일찍이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하던 민씨가 청나라에 의존하는 보수 세력으로 되었으니, 왕실 및 민씨 세력의 대표적 인물로는 민영익·민승호 등과 정계의 요인(要人)이었던 김홍집·김만식(金晩植)·어윤중 등이 이에 속하였으며, 이 일파를 사대당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민씨 일파의 사대정책에 반대하고 일본 제국메이지 유신을 본받아 개혁을 단행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를 독립당 또는 개화당이라 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은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서재필·윤웅렬 등의 소장파들이었다.

임오군란의 사후 처리를 위한 제물포 조약에 따라 사과 사절 등으로 일본에 건너갔던 박영효 일행은 친일 성향을 가지고 귀국하여 일본의 힘을 빌려 개화와 정치개혁을 단행하고자 하였고, 이들 개화파는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집권파 세력과 긴장 관계에 있었다.

이 대립은 당시 청나라의 알선으로 내아문(內衙門)의 고문으로 있던 묄렌도르프의 의견에 따라 사대당이 당오전(當五錢)이라는 화폐를 만들어 악성(惡性) 인플레이션을 야기하고, 경제계를 혼란시킨 데서 더욱 격화되었다.

[편집] 전개 과정

1884년(고종 21) 청나라가 안남(安南) 문제로 프랑스와 싸워 패배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독립당은 청나라가 조선을 돌볼 여유가 없을 것이라고 믿고,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와 몰래 상의한 끝에 일본의 주둔 병력을 빌려 정변을 일으켜 혁신정부를 세우기로 계획하였다. 무기와 자금을 일본 공사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차관도입시도하여 빌리고 일본 유학생 출신과 사관생도들을 동원하자는 것이었다.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재필·서광범 등 급진개화파 세력들은 1884년 11월 4일 박영효의 집에서 회합을 가졌다. 그때 일본 공사관의 시마무라(島村久) 서기관이 참석하였는데, 그는 “서울에 주둔하는 청나라 병사를 구축하는 일은 우리의 1개 중대 150명으로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라고 김옥균과 서광범에 말하였다.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郞)와 밀의한 끝에 일본군 주둔 병력을 빌려 정변을 일으키고 혁신정부를 세우기로 기도하였다. 그때 다케조에 공사는 11월 16일자 보고 문서에서 “정변이 나면 그(김옥균)를 보호할 방침이며, 정변이 나더라도 우리의 1개 중대로써 청국의 현재 병력(단지 5~6백 명으로 추산됨)을 격퇴함은 지극히 용이한 일입니다.”라고 장담하였다.[1]

이러한 일본 공사의 호언장담에 고무된 김옥균 일파는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 개국 축하 만찬회를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이들 개화파들은 연회가 열릴 즈음 이웃집에 불을 질러 혼란을 일으킨 다음 행동 전위대로 나선 서재필을 비롯한 토야마 군관학교 출신 사관생도들이 초청한 사대당 요인들을 모조리 암살하려 했으나, 겨우 민영익에게 중상을 입혔을 뿐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김옥균·박영효 등은 창덕궁으로 달려가 고종에게 사대당과 청국군이 변을 일으켰다고 거짓으로 보고하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규모가 작아 수비가 수월한 경우궁으로 옮긴 후 일본군으로 하여금 궁을 호위케 한 다음, 입시하려던 윤태준(尹泰駿)·한규직(韓圭稷)·이조연(李祖淵)·민영목·민태호·조영하 등의 사대당 일파를 차례로 죽였다.

다음날 12월 5일(음력 10월 18일)에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와서 독립당은 각국 공사 및 영사에게 신정부의 수립을 통고하는 한편 좌의정에 이재선·우의정에 홍영식·호조참판에 김옥균·전후양영사(前後兩營使) 겸 한성판윤(漢城判尹)에 박영효·좌우(左右) 양영사 겸 서리외무독판에 서광범을 임명하였고, 갑신정변의 전위대로 나서 공을 세운 서재필은 병조참판 겸 정령관으로 임명되어 있었다. 6일에는 국정 혁신을 논의하여 14개조 혁신정강을 공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김옥균의 일기인 《갑신일록》에 전하고 있다. 《갑신일록》에 따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대원군을 조속히 귀국시키고 청에 대한 조공 허례를 폐지할 것.
  2. 문벌을 폐지하고 백성의 평등권을 제정하여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
  3. 전국의 지조법을 개혁하고 간리(간사한 관리)를 근절하며 빈민을 구제하고 국가재정을 충실히 할 것.
  4. 내시부를 폐지하고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할 것.
  5. 전후 간리(간사한 관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할 것.
  6. 각 도의 환상미(還上米)는 영구히 면제할 것
  7. 규장각을 폐지할 것.
  8. 시급히 순사를 설치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
  9. 혜상공국을 폐지할 것.
  10. 전후의 시기에 유배 또는 금고된 죄인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시킬 것.
  11.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고, 영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급히 설치할 것. 육군대장은 왕세자로 할 것.
  12. 일체의 국가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하고 그 밖의 재정 관청은 금지할 것.
  13. 대신과 참찬은 날을 정하여 의정부에서 회의하고 정령을 의정,집행할 것.
  14. 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하도록 할 것.

그러나 명성황후 측에서 청나라 총독 원세개에게 편지를 보내 개입을 요청함으로써, 혁신정강 14조를 공포하기도 전에 청나라와 조선 연합군 군사 1,500명이 갑신정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여 창덕궁을 공격하였으며, 6일 오후에는 창덕궁과 창경궁 후원 일대에서 호위 중인 일본 병사와 싸웠다. 청나라 군대 1,500명을 맞아 싸울 수 있었던 개화파의 군사는 사관생도를 중심으로 한 150명에 불과하였고, 개화파를 군사적으로 도와주기로 약속한 다케조에 공사의 일본 군대도 쉽게 퇴각해 버렸다. 고종은 박영효·김옥균 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명성황후가 있는 북관종묘(北關宗廟)로 돌아갔다.

[편집] 실패

이로써 집권은 삼일천하로 끝났고 홍영식박영효의 형 박영교는 고종을 북관종묘까지 호위하다가 청군에게 죽었다.

나머지 김옥균·박영효 등 갑신정변 주역들은 후퇴하는 일본 병사를 따라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해 있다가 인천항을 통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날 일본 공사관은 조선 병사와 난민의 습격을 받아 수명의 일본 사람이 학살당하였고, 갑신정변 직후 조선 정부는 이 사건을 역모로 규정하였고, 갑신정변 주모자들을 대역죄인으로 공표하고 서재창·이희정·김봉균·신중모·이창규·이윤상·오창모·차홍식·남흥철·고흥종·이점돌·최영식을 처형하였다.[2]

관련자로 지목된 김옥균의 처는 관노가 되기 전에 딸과 함께 음독 자결하였고, 서재필의 아버지 서광효 내외와 맏형 등은 음독 자결하였다. 박영효의 아버지 박원양은 판서직에서 해임된 뒤 투옥, 옥사하였다. 김구백범일지에 의하면 박원양은 감옥에서 거적(볏짚)을 뜯어먹다가 굶어서 아사했다 한다.

이후 박정양은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상재는 주동자는 아니었으나 우정국의 직원으로 박정양의 후원 하에 개화파 정치인으로 활약한 점과 홍영식과의 친분 관계를 이유로 스스로 사직하고 낙향한다.

[편집] 결과와 영향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사대당 정부는 더욱 보수적이 되었고 조선에서 청의 세력이 강대해진 가운데 청·일 두 나라의 조선 쟁탈전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일본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하기에 이르렀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이들은 14개조의 개혁요강을 내세우는 등 개화·개혁의 순수성도 있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들이 사대당으로 매도한 이들이 단순히 청나라와 친하자는 세력인지 무조건적 청나라에 사대하자는 세력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으며, 또한 개화파도 철저하게 일본의 힘을 빌려 집권하려는 친일 사대정신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에 대해 내정간섭을 하게 한 구실을 만들었고,[3] 나아가 청나라의 조선 간섭을 심화시켰다.

게다가 갑신정변을 선동한 일본은 이듬해인 1885년 4월 천진조약을 맺고 청·일 양군의 공동 철병을 의정했다. 작게는 일본 병사 150명을 철수함으로써 청나라 병사 3천 명을 철병하는 성과를 이루었고, 크게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경제 침략을 더욱 가속화하여 1886년 한양에는 외국 상인은 오로지 일본 상인만 남게 되었다.[1]

망명한 갑신정변 주역들은 일본에서 냉대를 받았다. 조선 정부가 갑신정변에 다케조에 공사가 연루된 점을 항의하자, 일본은 갑신정변 주역을 조선으로 송환할 것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전해들은 갑신정변 주역은 일본도 안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하고, 일본에 많은 지인을 두고 있던 김옥균을 제외하고, 박영효를 비롯한 서광범,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885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들은 각자의 살 길을 향해 뿔뿔이 흩어졌다.

그 와중에 김옥균은 암살되었고, 서광범과 임은명(林殷明)은 병사했으며, 살아남은 류혁로를 비롯한 박영효, 신응희, 이규완, 정란교 등은 단순한 개화파에서 친일 개화파로 변신하게 된다.[1]

1950년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학에서는 갑신정변을 봉건체제를 전복하고자 했던 서양의 부르주아 혁명에 비견된다고 평가했다.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주석

  1. 임종국 (1991년 2월 1일).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서울: 돌베개, 62~63쪽쪽. ISBN 89-7199-036-8
  2. 갑신정변 - 번역문, 한국문화컨텐츠진흥원
  3. 김삼웅 (1995년 7월 1일). 《친일정치 100년사》. 서울: 동풍. ISBN 978-89-86072-03-7

[편집] 참고 자료

[편집] 관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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