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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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국가 대한민국 대한민국
언어 한국어
간행주기 일간
종류 전국판 종합일간지
판형 타블로이드배판
창간일 1904년 7월 18일[1]
가격 1부 800원 월 15000원
발행법인 (주)서울신문사
웹사이트 www.seoul.co.kr
(주)서울신문사
Seoul Daily Co., Ltd.
주요 주주 우리사주조합 39%
기획재정부 30.49%
(주)포스코 19.4%
KBS 8.08%
그 외 주주 3.03%
자회사 스포츠서울
나우뉴스
서울신문STV

서울신문은 현재 발간 중인 대한민국 신문 중 하나로, 일시적으로 대한매일 제호로 발간하였다.

구한말 대표적 구국민족지 《대한매일신보》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국권 피탈과 함께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로 전락하기도 했다. 해방 후 《서울신문》으로 속간되어 현재에 이른다.

사옥은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124 (태평로1가)에 있으며, 1985년 4월에 한국프레스센터와 함께 준공된 것이다.

현재 우리사주조합(39%), 기획재정부(30.49%), (주)포스코(19.4%), KBS(8.08%), 기타분산소유(3.03%)의 지분구조[정부주61%, 사원주39%]를 이루고 있는 대한민국 내 유일의 정부 출자 신문이다. 자매 언론기관으로는 《스포츠서울》, 《》, 《나우뉴스》, 《서울신문STV》 등이 대표적이다.

서울신문사는 가을밤 음악회, 서울갤러리, 신춘문예, 하프마라톤대회 등 다양한 사회공헌사업을 하고 있다.

글로벌 한류 문화교류 촉진을 위해 전세계 K팝 팬들이 참가하는 K-POP 커버댄스 페스티벌(www.coverdance.org)을 개최하여 한류 문화를 사랑하는 팬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프로그램으로 사랑받고 있다.

2007년에는 전라남도 무안에 태양광발전소를 준공하고, 이어 탄소배출권거래회사(코리아카본뱅크)를 설립하였으며, 그린에너지포럼을 발족하는 등 공익을 위한 녹색성장사업들에도 진출했다. 2009년 10월, 서울신문STV 개국으로 첫 방송사업을 시작하였다.

서울신문의 역사[편집]

제1기 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 1904년 7월 18일 ~ 1910년 8월 28일[편집]

대한매일신보 창간호

구한말 민족구국지였던 대한매일신보가 서울신문의 전신이다. 1904년 2월에 일어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던 영국인 베델양기탁 등 민족진영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1904년 7월 18일에 창간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영국인 베델이었기 때문에 통감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항일논설을 자유롭게 실을 수 있었다. 따라서 일반 민중들의 지지도가 높았고 발행부수도 가장 많았다. 영문판의 제호는 《The Korea Daily News》였다. 주요 논설진으로는 양기탁 외에 박은식·신채호 등이 있다.

양기탁이 편집과 경영의 실질적 책임을 지고 있었는데, 주요 논설의 대부분은 그가 집필했다. 박은식, 신채호등 애국지사들의 논설도 많이 실었다.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해 애국운동을 주도했으며, 1904년 4월에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설치했다. 이 신문은 항일논설을 통해 일제의 침략야욕을 폭로하며, 항일논조를 견지했다. 조선민중들의 민족의식을 드높여 신교육과 애국계몽운동에도 크게 이바지 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체 역할을 자임하였으며 간교한 통감부의 방해공작에도 불구, 1910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로 전락하기까지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의 부당성,그리고 일제의 야만적 행위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등 끊임없는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대한매일신보》가 일제의 침략전쟁을 정면으로 저항하자, 일제는 창간주 베델을 1907년1908년 2차례에 걸쳐 재판에 회부했다. 실질적 책임자인 양기탁 또한 국채보상의연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결국 무죄로 석방되었다.

베델이 일제의 탄압과 싸우는 가운데 1908년 5월 27일부터 발행인 명의가 영국인 만함(萬咸, Alfred W. Marnham)으로 바뀌었다. 1909년 5월 1일 베델이 죽고 난 후, 1910년 6월 1일부터는 발행인이 이장훈으로 변경됐고,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 이후에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每日申報)》로 전락했다.

제2기 매일신보 (每日申報.ㅡ新報) 1910년 8월 30일 ~ 1945년 11월 10일[편집]

1910년 8월 30일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창간호.

《매일신보(每日申報)》는 1904년 7월 18일 창간된 《대한매일신보》를 일본 제국이 매입하여 한일 병합 직후인 1910년 8월 30일부터 ‘대한(大韓)’ 두 자를 떼고 게재된 것이다. 일본 제국의 조선 통치를 합리화하고, 침략전쟁을 미화했으며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는 논조를 띠었다.

1920년, 민족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기 전까지 《매일신보》는 유일한 한국어 일간지였다. 이인직·이해조 등이 쓴 신소설들이 이 신문에 게재되었다. 이광수의 처녀작인 《무정》도 이 신문을 통해 발표됐다. 《조선일보》,《동아일보》 등의 민족지가 창간된 이후로는, 이 신문들과 대립된 논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1920년, 편집국이 《경성일보》 에서 분리됐으며, 1930년에 처음으로 한국인 부사장이 임명되었다. 1938년 4월 16일 《경성일보》에서 완전히 독립되었다. 동시에, 제호도 《매일신보(每日新報)》로 바꾸고 최린(崔麟)이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주요 자매지로는, 《월간매신》(1934.2) 《매일신보사진특보》(1938.11) 《국민신보》(1939.4) 등이 있다. 《매일신보》는 일제가 조선을 통치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광복까지 중단 없이 발행되었던 유일한 한국어 신문이었다는 점에서 언론사적 의의가 크다.

당시 사옥은 경기도 경성부 태평통 1가 31번지(現 서울특별시청 자리)에 있었고, 8·15광복 뒤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었다.

제3기 서울신문 (The Seoul Shinmun. --新聞) 1945년 11월 23일 ~ 현재[편집]

해방 이후 미군정의 정간처분과 함께 《매일신보》라는 제호는 없어지게 되었다. 이후 경영진을 새로 꾸려 제호를 《서울신문》으로 바꾸고, 11월 23일자부터 석간으로 속간하였다. 《대한매일신보》 때부터 《매일신보》까지의 지령을 그대로 계승하여 13,738호부터 시작하였다.

초대 임원진은 사장 오세창, 주필 이관구, 편집국장 홍기문이었다. 1949년, 반공사건의 기사시비로 발행정지처분을 당했다가 6월 20일에 속간하면서 공보처의 지시·감독을 받게 되었고 한국 전쟁때는 《진중신문(陣中新聞)》을 발행하기도 했다.

1959년 3월 23일부터는 《대한매일신보》와 《매일신보》로부터 계승해 온 지령을 버리고 《서울신문》제호로 창간된 1945년 11월 23일 이후부터의 지령으로 다시 환산하여 새 지령으로 발간되었다. 1950년대, 자유당 정권 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다가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자 데모대들이 사옥과 시설을 불태워 일시 정간했기도 했다.

1960년 6월 27일, 제9대 사장 오종식이 재건에 주력했지만 재정난으로 1961년 5월 9일 휴간되었다가 5·16 군사정변12월 22일에 다시 속간하였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전폭적인 지지로, 이때부터 서울신문은 명실상부한 정부기관지로 자리잡게 된다. 정부행사 주최 및 국민계도에 앞장서는 등의 언론활동을 주로 하였는데, 일각에서는 “정권의 나팔수”라는 오명을 듣기도 했다.

《서울신문》은 한글전용신문 제작에서 다른 신문보다 앞장서 노력을 기울였음은 특기할 만하다. 1968년 11월 22일 창간 23주년을 맞아 한글전용판으로 개혁하였으나, 몇 년 후 다시 국한문혼용판으로 환원하였다.

본지 외에1946년 1월 15일 종합잡지 《신천지(新天地)》를 창간하였고,이 후 연예오락주간지 《선데이 서울》(1968.9.22), 《소년서울》(1970.4.22), 《서울평론》(1973.11.4) ,《주간스포츠》(1975.3.30), 등의 잡지들을 발행하다가 모두 폐간했다.

연예 주간지 《TV가이드》(1981.7.18), 여성월간지 《(Queen)》(1990.7.22), 시사주간지 《뉴스피플(NewsPeople)》(1992.1.12), 스포츠연예전문지 《스포츠서울》(1985.6.22)을 창간했다. 1999년 12월 29일, 스포츠서울은 분사 조치됐다.

1998년 11월 11일 제호를 《대한매일》로, 사명을 《대한매일신보사》로 변경했다가 2004년 1월 1일, 《서울신문》으로 환원했다.

본사는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124 (태평로1가)에 있으며, 1985년 4월에 한국프레스센터와 함께 준공된 것으로 현재 대표이사는 이철휘이다.

서울신문사는 가을밤음악회, 사이버서울갤러리(www.seoulgallery.co.kr),신춘문예,하프마라톤대회 등 다양한 사회공헌사업을 하고 있다. 주요 수익사업으로, 택시버스광고와 태양광발전소 사업이 대표적이다.

2011년부터 한류 문화교류 촉진을 위해 전세계 K팝 팬들이 참가하는 K-POP 커버댄스 페스티벌(www.coverdance.org)을 개최하여 한류 문화를 사랑하는 팬들을 케어하는 캠페인 프로그램으로 진행됐다.

2007년, 전라남도 무안군에 태양광발전소인 서울신문 솔라토피아를 건설하고, 이어 탄소배출권거래회사(코리아카본뱅크)를 설립하였으며,그린에너지포럼을 발족하는 등 공익을 위한 녹색성장사업들에도 진출했다.

2009년 10월, 서울신문 STV 개국으로 첫 방송사업을 시작하였다.

국채보상운동[편집]

국채보상운동은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가 앞장선 구한말의 대표적 구국민족운동이다.

일본 제국은 대한제국에 차관을 제공하여 대한제국의 경제를 일본에 예속시키고자 하였다. 그것의 일환으로 일본 제국은 1905년(광무 8년)에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타를 조선에 보내, 화폐정리사업을 실시하여 대한제국의 은행들은 일본 은행에 종속되었고 차츰 대한제국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차관 제공도 이와 같은 의도에서 시작되었고 결국 1300만원이라는 빚을 진 한국정부는 이를 갚을 능력이 없었다. 이에 1907년 대구에서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이 범국민적으로 촉발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의 본취지는 전국민이 주권 수호운동으로 전개하여 국채를 상환하고 국권을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를 비롯하여 당시의 언론기관인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이 참여하였고 남자는 담배를 끊고, 여자는 비녀와 가락지를 내면서까지 국채를 갚으려는 국민들의 열망은 뜨거웠다. 또한 대구를 비롯하여 한성부, 진주, 평양 등지에서 여성국채보상운동 단체가 설립되었다.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국민의 열망이 뜨겁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본 제국은 일진회를 조종하여 방해하고 그 주도자인 양기탁을 구속하였다. 이와 함께 사실상 국채보상운동은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모인 돈의 행방은 분명치 않으나 통감부가 모두 가져간 것으로 보인다. 통감부는 국채보상기성회의 간사인 양기탁을 보상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했다. 일제는 친일파 송병준이 지휘하던 친일매국단체인 일진회의 국채보상기성회에 대한 공격을 적극적으로 부추기는 등 갖은 방해공작을 꾸몄으며, 이로써 국채보상운동은 더 이상 진전없이 좌절되었다.

아래는 당시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국채보상운동 취지서이다.

지금 우리들은 정신을 새로이 하고 충의를 떨칠 때이니, 국채 1천 3백만원은 우리나라의 존망에 직결된 것입니다. 이것을 갚으면 나라가 보존되고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함은 필연적인 사실이나, 지금 국고에서는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으며 만일 나라가 못 갚는다면 그때는 이미 3천리 강토는 내 나라 내 민족의 소유가 못 될 것입니다. 국토가 한 번 없어진다면 다시는 찾을 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찌 베트남 등의 나라와 같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반 인민들은 의무라는 점에서 보더라도 이 국채를 모르겠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갚을 길이 있으니 수고롭지 않고 손해보지 않고 재물 모으는 방법이 있습니다.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금지하고, 그 대금으로 한 사람에게 매달 20전씩 거둔다면 1천 3백만원을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 액수가 다 차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응당 자원해서 일원, 십원, 백원, 천원을 특별 출연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 대한매일신보 1907년 2월 21일자-[2]

자매 언론기관[편집]

서울신문사는 1946년 1월 15일 종합잡지 《신천지(新天地)》를 창간하였고,이후 연예오락주간지 《선데이 서울》(1968.9.22), 《소년서울》(1970.4.22), 《서울평론》(1973.11.4) ,《주간스포츠》(1975.3.30), 등의 잡지들을 발행하다가 모두 폐간했다. 연예 주간지 《TV가이드》(1981.7.18), 여성월간지 《퀸(Queen)》(1990.7.22), 시사주간지 《뉴스피플(NewsPeople)》(1992.1.12), 스포츠연예전문지《스포츠서울》(1985.6.22)을 창간했다. 2008년에는 연예,오락 전문 온라인 뉴스컨텐츠 《나우뉴스》,《나우뉴스TV》,《서울신문NTN》를 창설하였고,2009년 10월에는 서울신문STV 개국으로 방송사업에 진출했다.

서울신문사의 자매지들은 대한민국의 시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것이 많다. 특히 1968년 9월 22일 창간된 《선데이서울》은 청소년과 직장인 사이에서 파장이 컸다. 《선데이서울》은 언론자유화에 따라 탄생한 다른 오락잡지에게 밀려 1992년에 폐간되었다. 서울신문 본사에 가면 《선데이서울》의 지난 호들을 열람할 수 있으며, 서울신문 홈페이지에 게재된 《추억의 선데이서울》을 통해서도 접할 수 있다.

참고 출처[편집]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서울신문 홈 > 서울신문안내 > 100년 전통
  2. 서울신문 100년史

읽어보기[편집]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