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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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의 조선귀족 정주영(鄭周永)도 있다.
정주영
1998년 판문점 자유의 각에서 기자회견중인 정주영
출생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
사망 2001년 3월 21일 (85세)
서울중앙병원
사인 폐렴으로 인한 급성호흡부전증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학력 초졸 (송전소학교)
직업 기업인
배우자 변중석
자녀 정몽구, 정몽헌, 정몽준
친척 동생 정세영, 정인영, 정상영

정주영(鄭周永,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 2001년 3월 21일)은 한국의 기업인이자 정치인이다. 호는 아산(峨山)이며, 현대그룹의 창업자 겸 명예회장이며 자수성가한 기업인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제3공화국 시절 박정희의 경제개발정책에 편승하여 건설사업을 추진, 성공을 거두었다. 1992년 통일국민당을 창당하여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으나 낙선하였다. 1998년 이후에는 김대중 정권을 도와 대북사업 추진의 한 축을 담당하였으며, 정 회장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목차

[편집] 생애

[편집] 생애 초반

[편집] 출생과 성장

송전보통소학교 졸업 사진
(네번째 줄 좌측 끝에서 두번째 화살표로 지목된 이가 정주영)

강원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하는 만큼 벌지 못하는 농사로 가난하였으며 가난함 속에 먹고 살기 위해 몇 차례 가출을 반복하였다. 8세 때 송전보통소학교(松田潽通小學敎)에 입학하여 13세에 송전소학교를 졸업하였다. 이때 그와 함께 졸업한 동창생은 27명이며, 그의 정식 최종학력은 송전소학교 졸업이 유일하다.

[편집] 고향을 떠나

1931년 청진의 개항 공사와 제철 공장 건설 공사장에 노동자가 필요하다는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소를 판 돈으로 고향을 떠나 원산 고원의 철도 공사판에서 흙을 날랐는데 이것이 첫 번째 가출이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는 무려 4번이나 가출을 하였다. 두 번째 가출하여서는 금화에 가서 일하였다. 1932년 세 번째 가출 때는 부친의 소판 돈 70원을 들고 도망하여 경성실천부기학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선친에게 덜미를 잡혀 고향으로 돌아갔다. 네 번째 가출한 때는 1933년으로 19살의 나이로 인천에서 부두하역과 막노동을 하다가 서울로 상경하였다. 19세인 1934년 복흥상회라는 쌀가게에 배달원으로 취직하여 일하였다. 이 일자리는 꽤 흡족하여 집나온지 3년이 지나 월급이 쌀 20가마가 되었다. 장부를 쓸 줄 아는 정주영은 신임을 받았다. 쌀가게 주인의 아들은 여자에 빠져 가산을 탕진 하여 쌀가게 주인은 가게를 아들이 아닌 정주영에게 물려 주었다. 1938년 주인으로부터 가게를 물려 받아 복흥상회라는 쌀가게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개업 후 2년 만인 1940년 중일전쟁으로 쌀이 배급제가 되면서 가게를 정리하게 되었다. 이후 고향으로가서 땅 2천 평을 아버지께 사드리고 결혼을 하였다.

일제말기인 1941년에는 빚을 내어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의 사업을 맡기도 하였으나 1달도 채 지나기 전에 불에 타버렸다. 다시 빚을 내어 신설동 빈터에다 다시 자동차 수리 공장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공장도 1942년 5월, 기업정리령에 의해 공장을 빼앗기다시피하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떠나게 된다. 홀동광산의 광석을 평양 선교리까지 운반하는 일을 3년간 하다가 1945년 5월 다행이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는데, 3개월 후 일본의 패망으로 홀동광산은 문을 닫고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은 소련군 포로로 잡혀갔다.

[편집]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서울의 돈암동의 스무 평 남짓한 집에서 동생들과 아이들 모두 스물과 함께 벌어놓은 돈으로 살다가 해방 후인 1946년 4월에는 미군정청의 산하기관인 신한공사에서 적산을 불하할 때 초동의 땅 200여 평을 불하받아 현대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였다. 또한 1947년 5월에는 현대토건사를 설립하였다. 1950년에는 두 회사를 합병하여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때 자본금은 삼천만원이었다.

한국 전쟁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동생 정인영부산으로 피난한 정주영은 동생 정세영이 미군사령부의 통역장교로 일하던 덕에 서울에서 하던 토목사업을 계속 할 수 있었으며 서울 수복후 미8군 발주 공사를 거의 독점하였다.

[편집] 현대그룹 경영

[편집] 창업 초기

낙동강 고령교 복구, 한강 인도교 복구, 제1한강교 복구, 인천 제1도크 복구 등의 사업을 수주하여 1960년에는 국내 건설업체중 도급한도액이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1964년 단양에 시멘트 공장을 완공하였으며, 1965년에는 국내 최초로 태국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를 건설하였다. 1967년에는 다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어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편집] 경제건설사업 참여

박정희 대통령의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지지 하였으며 현대건설은 경부고속도로 공정의 2/5를 담당하였다. 1970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와 함께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 직접 참여 하기도 하였다. 이 해에 고리 원자력발전소 1호기를 착공하였다.1972년에는 현대조선소를 기공하였고, 이듬해에는 울산조선소 1호선을 기공한 후 현대조선중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 당시 일화는 유명하다. 1971년 정주영 회장은 혼자서 미포만 해변 사진 한 장과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 하나 들고 유럽을 돌았다. 차관을 받기 위해서였다. 부정적인 반응만 받다가 1971년 9월 영국 바클레이 은행의 롱바톰 회장을 만났지만 대답은 역시 'No'였다. 이 때 정주영은 우리나라 5백원짜리 지폐를 꺼내 거기 그려진 거북선 그림을 보여줬다.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어 외국을 물리쳤소. 비록 쇄국정책으로 시기가 좀 늦어졌지만, 그 잠재력만큼은 충분하다고 생각하오."라며 설득해 결국 차관 도입에 성공할 수 있었다.

1978년에는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분양특혜사건'으로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로 풀려났다. 건축법 위반에 대해 징역 6월 벌금 500만원에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한국도시개발공사(현 현대산업개발) 사장이었던 정몽구가 서울지검 특수부에 구속돼 `아들이 아버지 대신 처벌받는' 전례가 만들어졌다.

1977년에는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설립하였으며 1978년 4월 29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위치한 현대고등학교 (서울)을 설립하고 초대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80년에는 신군부에 의하여 창원중공업을 강탈당했으며, 이어 1983년에는 현대전자주식회사(2001년 해체)를 설립하였다.

[편집] 대통령 선거 출마

1992년에는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그해 12월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근소한 차로 김영삼 후보에게 3위로 석패하였다. 그런데 선거 직후 김영삼 정권의 세무조사를 받았는데, 이를 두고 정치 보복이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당을 해체한 뒤, 기업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편집] 금강산 개발

그러나 김대중이 15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98년 2월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정주영은 다시 한 번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당시 정부의 대북 포용 정책에 발맞춰 정주영이 금강산 개발 사업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1998년 10월 27일 북으로 가고 있는 소 1000마리와 트럭 50대

1998년 6월 16일, 통일소라고 이름 붙인 소 500마리를 끌고 판문점을 통해 북한을 방문하고, 2차로 1998년 10월 27일에는 소 501마리를 가져갔다. 그리고 마침내 금강산 관광사업에 관한 합의를 얻어 1998년 11월 18일에 첫 금강산 관광을 위한 배가 출발하였다. 대북사업을 위해 1999년 2월현대아산을 설립했다.

사실 정주영은 1989년북한소련을 방문하여 금강산 공동 개발 의정서에 서명하였는데, 이것이 9년 만에 현실화된 것이다. 이때 정주영은 원산과 평양을 둘러봤으며, 특히 자신의 고향 통천도 방문했었다.

[편집] 죽음

정주영은 2000년 들어서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부인 변중석 여사가 입원해있던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이후 자택에서 요양중 2001년 3월 21일, 폐렴으로 인한 급성호흡부전증으로 나이 86세로 사망했다.

[편집] 사후

[편집] 학력

[편집] 서훈

[편집]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 14대 총선 국회의원(전국구) 14대 통일국민당 17.4% 3,574,419표 비례대표 3번 전국구 국회의원 당선
제 14대 대통령 선거 대통령 14대 통일국민당 16.3% 3,880,067표 3위 낙선

[편집] 가족관계

[편집] 형제

[편집] 자식

호적에 올라와있지만 공개되어 있지 않은 딸.

[편집] 현대가

정봉식
 
 
 
한성실
 
 
 
 
 
 
 
 
 
 
 
 
 
 
 
 
 
 
 
 
정주영
1915년-2001년
현대그룹 창업
 
변중석
1922년-2007년
정주영의 부인
 
 
 
 
 
 
 
 
 
 
 
 
 
 
 
 
 
 
 
 
 
 
 
 
 
 
 
 
 
 
 
 
 
 
 
 
 
 
 
 
 
 
 
 
 
 
 
 
 
 
 
 
 
 
 
정몽필
1936년-1982년
 
정몽구
1938년-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 회장
 
정몽근
1942년-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정경희
1944년-
 
정몽우
1945년-1990년
전 현대알루미늄 회장
 
 
 
 
 
 
 
 
 
 
 
 
 
 
 
 
 
 
 
 
 
 
 
 
 
 
 
 
 
 
 
 
 
 
 
 
 
 
 
 
 
 
 
 
 
 
 
 
 
 
 
 
 
정몽헌
1948년-2003년
현대그룹 회장
 
현정은
1955년-
현대그룹 회장
 
정몽준
1951년-
국회의원, 현대중공업그룹 대주주
 
김영명
1956년-
김동조의 딸
 
정몽윤
1955년-
현대해상화재고문
 
정몽일
1959년-
현대기업금융회장
 
 
 
 
 
 
 
 
 
 
 
 
 
 
 
 
 
 
 
 
 
 
 
 
 
 
 
 
 
 
정인영
1920년-2006년
한라그룹 명예회장
 
정순영
1922년-2005년
성우그룹 명예회장
 
정희영
1925년-
 
김영주
1920년-2010년
한국프랜지공업 명예회장
 
 
 
 
 
 
 
 
 
 
 
 
 
 
 
 
 
 
 
 
 
 
 
 
 
 
 
 
 
 
 
 
 
 
 
 
 
 
 
 
 
정세영
1928년-2005년
현대그룹,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박영자
 
정신영
1931년-1962년
 
장정자
1935년-
현대학원 이사장
 
정상영
1937년-
KCC 명예회장
 
 
 
 
 
 
 
 
 
 
 
 
 
 
 
 
 
 
 
 
 
 
 
 
 
 
정숙영
1959년-
 
노경수
1954년-
서울대학교 교수
 
정몽규
1962년-
현대산업개발 대표
 


[편집] 저서

  •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1992년
  • 이 땅에 태어나서, 1998년

[편집] 정주영을 연기한 배우들

[편집] 드라마

[편집] 참고 자료

[편집] 참조

  1. 정주영을 모델로한 천태산 역을 연기하였다.
  2. 정주영을 모델로한 천태산 역을 연기하였다.

[편집] 관련 항목

전 임
(초대)
제1대 현대그룹 회장
1971년 1월 ~ 1987년 1월
후 임
정세영
전 임
김용완 (경방 회장)
제13·14·15·16·17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1977년 ~ 1987년
후 임
구자경 (럭키금성 회장)
현대그룹 명예회장
1987년 ~ 1992년, 1993년 ~ 1998년
현대건설 대표이사 명예회장
1998년 ~ 2001년
개인 도구
이름공간
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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