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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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출생 1942년 2월 16일
소비에트 연방의 국기 소비에트 연방 하바로프스크 크라이 (러시아측 기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량강도 삼지연군 (북한측 기록)
거주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국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학력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
직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조선로동당 총비서
배우자 성혜림, 김영숙, 고영희, 김옥?
자녀 김정남, 김정철, 김정운, 김설송, 김춘송, 김여정
부모 김일성(부), 김정숙(모)
친척 김평일, 김영일, 누이 김경희

김정일(金正日, 1942년 2월 16일 ~ )[1]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조선)의 국방위원장이며 조선로동당의 총 책임자이다. 1970년대부터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며, 1980년 제6차 당 대회를 통해서 공식적인 후계자로 자리잡았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실제적인 제1통치자가 되었으며, 경제적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던 1993년 이후 6년간의 고난의행군 시기를 극복하면서 능력있는 대중적 지도자로 국내외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목차

[편집] 생애

[편집] 출생

북한측에서는 1942년 2월 16일 량강도 삼지연군의 백두산 밀영에서 김일성김정숙의 장남으로 출생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한미일학계나 소비에트 연방의 기록에서는 김정일이 1942년 2월 16일 당시 소비에트 연방 하바로프스크 크라이 하바로프스크에서 동북쪽으로 70km 정도 떨어져 있는 작은마을인 뱌트스코예에서 태어났다고 보고 있다. 러시아식 이름은 유리 이르세노비치 김(러시아어: Юрий Ирсенович Ким Yuri Irsenovich Kim[*])이였다고 한다.

[편집] 교육

광복 뒤 북조선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일곱 살 때 어머니가 난산 끝에 세상을 떠난다.[2]

그의 일대기에 따르면, 김정일은 1950년 9월부터 1960년 8월 사이에 일반 교육 코스를 끝냈다고 되어 있다. 젊은 시절에 그의 관심거리는 음악, 농업, 그리고 자동차 수리였다. 그는 학술 경쟁과 세미나를 조직하였을 뿐 아니라 야외 연구여행을 도와주기도 했다. 또한 그는 1964년 4월에 김일성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던 그는 권좌에 오른 뒤 김정숙에게 ‘항일의 여성혁명가 백두 여장군’이라는 칭호를 붙이며 영웅화하였고, 북한 여성이 따라야 할 귀감으로 미화시켰다. 김정숙의 출생지인 함경북도 회령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81년에는 양강도 신파군이 김정숙군으로 지역명을 바꾸기도 했다.[2] 그가 어머니의 우상화에 공을 들인 것은 계모인 김성애와의 권력투쟁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2] 아버지 김일성은 재혼한 김성애와의 사이에 김평일(폴란드 주재 대사)·김영일(사망)·김경진(오스트리아 주재 북한 대사 부인) 등 세 자녀를 뒀는데, 김정일은 후계자 지명 과정에서 이들 및 이들의 후견인격으로 있던 삼촌 김영주와 권력투쟁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2]

[편집] 정치 입문

김정일은 1957년 평양제1중학교를 졸업하고, 1963년김일성종합대학에서 정치경제학과를 공부한 다음 문학, 교육, 예술, 언론 개혁, 그리고 천리마운동에 대해서 보다 과학적인 방법들을 주장하였다. 또한 김일성 당시 국가주석 밑에서 주체사상을 지도하는 데 관여하기도 했다. 1970년대 말부터 3대 붉은기 쟁취 운동을 벌여 근로자의 노동 능률을 높이는 데 노력했으며, 1998년 이후에는 중국경제 특구제를 도입하여, 4개의 경제특구를 지정하였다. 사상적으로는, 주체사상의 최종적인 해석권은 수령과 그 계승자에게 있다는 정치적 특권을 강조하여, 국가지도자 한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북조선의 현 제도를 이론적으로 확립시켰다.

[편집] 북조선의 식량난

북조선은 1993년부터 역사적으로 유래없는 자연재해와 사회주의권 나라들의 붕괴, 그리고 서방세력의 경제봉쇄 등으로 최악의 경제난 및 식량난을 겪었는데, 이를 북조선에서는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른다. 약 6년 간의 고난의 행군을 마치고 북조선은 이제 강성대국으로 향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고난의 행군 기간동안 국제 사회에서는 약 60만에서 90만명의 사람들이 아사했다고 보고 있다. 2003년에 발표된 국제앰네스티의 리포트에서는 북한 인구의 절반을 넘는 1300만명이 기근에 시달리고 있으며 2001년에는 미국,한국,일본,유럽연합등으로 부터 $300억 가량의 식량, 비료 원조를 받기도 하였다.[3]

[편집] 남북 정상 회담

이 부분의 본문은 남북 정상 회담입니다.

그의 대표적인 정치적 결정은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김대중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을 가진 뒤 발표한 6·15 남북 공동선언이다. 이 선언은 분단 52년 동안 서로 대립하고 있었던 남북의 긴장을 완화하고, 남북 경제교류 활성화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시금석이 되었다. 이에 따라 2000년 시드니 올림픽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남북선수들이 동시 입장하였고, 1998년 시작된 금강산 관광 사업을 활발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이 사업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정몽헌 회장을 만나 성사시킨 것이다.

2007년에는 10월 2일부터 10월 4일에 걸쳐 노무현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과 두번째 남북 정상 회담을 가졌다. 회담의 결과는 남북간 신뢰 구축, 협력 강화 등의 목표를 담은 10·4 남북 공동선언(정식 명칭은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으로 발표되었다. 김대중의 평양 방문 때 다음번 회담에는 서울에 답방하겠다고 했던 김정일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편집] 김정일 건강 이상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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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60주년을 맞아 북조선의 최대 명절인 9·9절 기념행사에 참가하지 않아 김정일 건강설이 증폭되었다.[4][5][6] 그러다가 김정일의 동정이 묘연해지면서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라는 건강 이상설이 미국 언론을 중심으로 제기되었고, 조사 결과 김정일은 8월 15일 전후로 뇌졸중뇌일혈 증세를 일으킨 것으로 밝혀졌다.[7][8] 9월 13일에는 양치질을 할 수 있다는게 확인되었다.[9] 그리고 아소 다로 일본 총리는 최근 김정일이 입원했다는 것을 전하면서, 상황이 좋지 않은 듯이라고 말했다.[10] 김정일이 잠행을 계속하면서 그와 관련된 건강상태도 해석이 제각각이다.[11] 김정일은 80일 만에 은둔생활에서 벗어나면서 공식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12] 일본 언론은 미국 정부가 김정일 건강이 예상보다 악화되었고, 실각 및 사망 전제 대책에 착수했다는 것을 보도했다.[13][14] 2009년 1월 23일에 김정일은 왕자루이 대외연락부장을 만나 한반도정세의 긴장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15] 2009년 3월 19일에 북조선의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사진에 김 위원장은 배가 쏙 들어가고 매우 야윈 모습으로 나와서 건강이상설에 힘을 실었다.[16]

[편집] 문제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추천한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상봉을 지키지 않았고, 2002년핵 확산 금지 조약의 탈퇴 선언, 중국의 압력에 의한 신의주 경제 특구 계획 실패, 1995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국제사회에 식량원조를 요청하면서 부각된 식량난[17]과 경제난은 그의 집권 사상 최대의 상처가 되고 말았다. 실제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식량난은 1992년이후 식량절약을 위해 '하루 두끼 먹기 운동'을 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다. 더군다나 중국인에 대한 비자 면제도 자신의 뜻대로 폐지하여 중화인민공화국과의 마찰을 빚기도 했다.

2006년 들어서는 대포동 2호 미사일 발사 사건으로 전 세계의 비난을 받은 것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같은 해 10월, 국제 사회의 심각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핵실험을 감행했고 미국 등 세계 곳곳에서 우려의 눈길을 받고 있다.

[편집] 성격, 취미, 저작

그는 아버지처럼 시와 노래를 짓는 것도 좋아했지만, 영화를 좋아해서 영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민족과 운명", "조선의 별" 등 영화를 만들기도 했으며, 신상옥 감독을 통해서 "불가사리"를 제작했다.

그는 《주체사상에 대하여》, 《건축예술론》, 《문화예술론》, 《미술론》, 《김정일저작선집》을 비롯한 200여 편이 넘는 저작들을 집필하였다. 기타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특별히 신앙을 가졌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편집] 기타

남북 정상 회담 시 누가 나올까 하는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추측 속에서 대한민국김대중대통령을 영접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공항까지 마중을 나왔고 김 대통령과 반갑게 포옹했다. 또한 2002년에는 박근혜의 예방을 직접 받기도 하였고[18] 2007년 남북 정상 회담에는 육로로 방북하는 대한민국노무현대통령 역시 자신이 직접 영접하였다.

[편집] 관련 서적

  • 미국
    • Michael Breen, Kim Jong-Il: North Korea's Dear Leader, John Wiley and Sons (January, 2004), hardcover, 228 pages, ISBN 0-470-82131-0
    • Bradley Martin, Under The Loving Care Of The Fatherly Leader: North Korea And The Kim Dynasty, St. Martins (October, 2004), hardcover, 868 pages, ISBN 0-312-32221-6

[편집] 가상 출연작

[편집] 관련 인물

[편집] 주석

  1. 서방 언어권에 알려진 로마자 표기는 Kim Jong-il이며, 러시아어 표기는 Ким Чен Ир로, 현재 러시아에서도 한국어 김정일 발음에 근거한 표기를 하고 있다. 소련에 있을 시절에는 Юрий Ирсенович Ким라는 러시아식 이름을 쓴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네이트 뉴스
  3. http://www.amnesty.org/en/library/info/ASA24/003/2004
  4. 김정일 9.9절 불참...중병설 분분
  5. 3주전부터 이상징후… 정부 “계산된 행보 아닌듯”
  6. 심상찮은 ‘김정일 건강이상설’
  7. 정부 핵심관계자 "김정일 신변이상 확실"(종합)
  8. 김정일 뇌졸중-반신불수說의 파장
  9. 정부 관계자 "김정일 양치질할 수 있는 상태"
  10. 日총리 "김정일 입원 정보…상황 좋지 않은듯"(종합)
  11. 김정일 잠행 지속..건강상태 해석 분분
  12. 北 김정일 '80일만의 외출'
  13. "美, 김정일 건강 예상보다 훨씬 나빠…실각 및 사망 전제 대책 착수"…日언론
  14. 김정일 사진정치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브레이크뉴스 2008/12/25
  15. 김정일 "한반도정세 긴장 원치 않아"(종합)
  16. 수척해진 김정일 세계일보, 2009.3.20.
  17. 조선일보 북한 정보, 북한의 식량난
  18. 박근혜 의원, 북한방문 마치고 서울로 귀환 - 2002-05-14
  19. 내연녀라는 설이 있다.

[편집]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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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임
김일성
제5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국가원수
1998년 -
후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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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국방위원장
199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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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199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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