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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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본제국
大日本帝國
1868년 ~ 1947년
Merchant flag of Japan (1870).svg Imperial Seal of Japan.svg
국기 국장
국가 기미가요
Japanese Empire (orthographic projection).svg
수도 도쿄 북위 35° 41′ 동경 139° 46′  / 북위 35.683° 동경 139.767° / 35.683; 139.767
정치
공용어 일본어
정부 형태 절대왕정 (1868년 ~ 1890년)
내각 혼합형 입헌군주국 (1890년 ~ 1940년)
일왕일당 익찬 체제 (1940년 ~ 1945년)
연합군의 군사 통치 (1945년 - 1947년)
일본 천황


내각총리대신
메이지 천황(1868년 ~ 1912년)
다이쇼 천황(1912년 ~ 1926년)
쇼와 천황(1927년 ~ 1947년)
이토 히로부미(1885년 ~ 1888년)
고노에 후미마로(1937년 ~ 1939년)
도조 히데키(1941년 ~ 1944년)
역사
 • 메이지 유신
 • 헌법 제정
 • 포츠담 선언
 • 일본국 헌법 발효
1868년 1월 3일
1890년 11월 29일
1945년 9월 2일
1947년 5월 3일
지리
1942년 어림 면적 675,000km²
내수면 비율 1.3%
인구
1935년 어림 97,770,000명
인구 밀도 144.8명/km²
기타
통화 (¥) (JPY)
이전 국가
다음 국가
에도 막부
류큐국
에조 공화국
타이완 민주국
대한제국
청나라
연합군 최고사령부
류큐 열도 미국군정부
중국 국민정부
미군정청
소련군정
신탁통치령

1.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사실상 군사통치 기간이었다.

대일본제국(일본어: 구자체: 大日本帝國, 신자체: 大日本帝国 (だいにっぽんていこく 다이닛폰테이코쿠[*] / だいにほんていこく 다이니혼테이코쿠[*]))은 1868년 1월 3일부터 1947년 5월 3일 사이의 일본과 그 점령지를 의미한다.

1868년 1월 3일 왕정 복고의 큰 호령에 의해 메이지 정부가 설립되고 1947년 5월 3일 일본국 헌법이 발효되기 전까지의 79년간을 가리키며 일본 천황을 국가 원수로 받드는 제국주의 시대였다. 급속한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는 개방 정책을 통해 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군사적으로 강한 나라로 만들자는 부국강병의 기치 아래 근대화와 발전을 이룩하였다.

1895년 4월 17일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타이완을 합병했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했고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을 병합했다. 1930년대 만주중화민국을 침략하였으며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과 함께 추축국의 일원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베트남, 싱가포르, 필리핀동남아시아 지역과 오세아니아의 여러 섬들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에서 전세가 바뀌어 결국 1945년 8월 초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비에트 연방이 만주를 침공하게 되자 8월 14일 포츠담 선언 수락을 선언했다. 8월 15일 연합국에 공식적인 항복 선언을 했고 9월 2일 포츠담 선언을 체결했다. 연합군으로서 일본을 점령한 미군이 연합군 최고사령부를 설립한 뒤 군정을 실시함으로써 일본 제국은 사실상 패망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47년 5월 3일일본국 헌법이 시행되고 공식적으로 소멸했다.

역사[편집]

1868년 1월 3일 왕정 복고의 큰 호령에 의해 메이지 정부가 설립되고 1947년 5월 3일 일본국 헌법이 발효되기 전까지의 79년간을 가리키며 일본 천황을 국가 원수로 받드는 제국주의 시대였다. 급속한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는 개방 정책을 통해 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군사적으로 강한 나라로 만들자는 부국강병의 기치 아래 근대화와 발전을 이룩하였다.

1895년 4월 17일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타이완을 합병했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했고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을 병합했다. 1930년대 만주중화민국을 침략하였으며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과 함께 추축국의 일원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베트남, 싱가포르, 필리핀동남아시아 지역과 오세아니아의 여러 섬들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에서 전세가 바뀌어 결국 1945년 8월 초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비에트 연방이 만주를 침공하게 되자 8월 14일 포츠담 선언 수락을 선언했다. 8월 15일 연합국에 공식적인 항복 선언을 했고 9월 2일 포츠담 선언을 체결했다. 연합군으로서 일본을 점령한 미군이 연합군 최고사령부를 설립한 뒤 군정을 실시함으로써 일본 제국은 사실상 패망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47년 5월 3일일본국 헌법이 시행되고 공식적으로 소멸했다.

국호의 제정[편집]

일본 제국 헌법 원본에 명시된 국호

정식 국호인 “대일본제국”은 1889년 2월 11일에 발포(發布)된 “일본 제국 헌법”에서 “대일본제국”이라고 칭하고 있는 것에 유래한다. 영어로는 ‘The Empire of Japan’(직역하면 ‘일본 제국’)을 사용했으며 ‘Great Japan’(직역하면 ‘일본’)으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제국(구자체: 帝國, 신자체: 帝国 (ていこく) 또는 황국(구자체: 皇國, 신자체: 皇国 (こうこく))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당초 일본 제국 정부는 국호에 그리 연연하지 않았고 법률이나 공문서 등에서 일본(구자체: 日本, 신자체: 日本 (にほん)), 일본국(구자체: 日本國, 신자체: 日本国 (にほんこく)), 일본 제국(구자체: 日本帝國, 신자체: 日本帝国 (にっぽんていこく)), 일본국(구자체: 大日本國, 신자체: 大日本国 (だいにっぽんこく)) 등으로 표기했지만 1936년 일본 외무성은 외교 문서에 사용되는 자국의 국명 표기를 “대일본제국”으로 통일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한 뒤에도 “대일본제국”이라는 호칭은 계속 사용되었지만 1946년 2월 13일 연합군 최고사령부일본 제국 헌법 개정 초안을 제시한 뒤부터 헌법 초안에서의 국명은 ‘일본국’(구자체: 日本國, 신자체: 日本国 (にほんこく))이 되었다. 1947년 5월 3일에 시행된 일본국 헌법에서는 주권 재민을 명시했으므로 이후에는 일본 제국이 공식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수립 배경[편집]

매슈 페리의 2차 일본 파견 함대 (1854년)

1833년부터 1839년까지 이어진 덴포기근을 거치면서 신뢰를 잃은 막부는 조슈, 사쓰마 등지 출신의 하급 무사들이 개혁을 추진하면서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편 같은 시기 중국으로의 진출을 위해 태평양의 중간 기착지를 필요로 했던 미국1853년 매슈 페리 동인도 함대 사령관을 제독으로 일본에 파견해 개방을 강요하였다. 결국 1854년 '미일 화친 조약'을 체결한 것을 시작으로 막부는 쇄국 체제를 풀고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결국 이에 대한 조슈와 사쓰마를 비롯한 여러 번들의 막부에 대한 공격으로 인하여 막부의 권위가 붕괴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 하급 무사들은 최종적으로 막부 자체를 없앨 것을 주장하며 '도바쿠'(討幕,토막) 운동을 전개하였다. 1866년에는 도사(土佐) 출신의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사쓰마와 조슈 간의 비밀 군사 동맹이 성립하고, 막부에 우호적인 고메이 천황의 뒤를 이어 도바쿠 세력에 의해 메이지 천황이 즉위하면서 막부를 크게 압박하자 결국 1867년 10월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모든 권력을 일본 천황에게 되돌리게 되며, 메이지 천황은 같은 해 12월 9일 '친정'(親政)을 선포한다.

메이지 유신[편집]

1868년 왕정 복고를 표방한 메이지 천황은 왕권 선양을 위한 혁신을 꾀했는데 교토조정의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구케(公家)와 제후(諸侯), 그리고 하급 무사들을 중심으로 구 바쿠후 세력을 타도하고 [1]1868년 7월 에도 막부가 위치한 에도(江戶)를 도쿄로 바꾸고 이듬해에는 교토의 고쇼에서 도쿄의 고쿄로 천도(遷都)했으며, 다양한 이유로 쉽게 연호가 바뀌던 것을 메이지 천황 대에 이르러서는 한 대에 한 연호만 쓸 수 있도록 한 일세일원제가 채택되는 등 [2]:286 모든 체제를 일신하여 중앙집권제를 강화했다. 정부는 부국강병책에 의해 식산흥업정책(殖産興業政策)을 추진하고 군대·경찰을 비롯한 전신·철도·각종 공장 등 관영사업을 개시했다. [1]기도 다카요시오쿠보 도시미치 등의 주도로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 등 서남웅번(西南雄藩) 세력들이 우선 판적봉환을 단행하였고, 1869년 6월에는 전국의 번들이 판적을 봉환하게 되었다.[2]:287 1871년에는 이에 대한 반발 세력을 제압하고 더 강력한 중앙 집권제의 확립을 위해 서남웅번의 병력 약 1만 명을 중앙군으로 편성하여 군사력을 확보하고, 같은 해 7월 폐번치현을 단행하여 행정 구역을 부현제(府県制 부켄세이[*])로 바꾸고 부지사와 현령(県領)은 중앙에서 임명해 파견하도록 하였다.[2]:287~288 이어서 형식적으로나마 신분제를 철폐하여 높은 왕족(상경), 다이묘, 사무라이 계층은 귀족층으로 통일되고, 그 이하 사농공상 순의 신분층은 평민(平民 헤이민[*])으로 삼는다고 발표하여 불완전한 사민평등(四民平等 시민뵤도[*]) 조치를 단행하였다.[2]:289~290 [3] 1877년의 서남전쟁(西南戰爭)을 최후로 종래의 불평 사족(不平士族)들의 반란을 종식시켰다. [1]

자유민권운동과 국회 개설[편집]

신분 개혁 이후에 일본에서는 입헌 정치에 대한 요구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874년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이 애국공당을 결성해 민선 의원 설립 건백서를 제출한 것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자유 민권 운동이 일어났다. 이에는 서양의 문물이 유입되면서 같이 전래된 민주주의 정치 방식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이 확산된 것과 너무 강력한 중앙 정부에 의해 자치권마저 부정당한 전통적인 향촌 사회의 반발심도 작용하였다.[2]:303 1878년 정부는 삼신법(三神法)을 제정해 부분적으로 지방제를 개편하여 이들의 반발심을 잠시 무마시키고자 하였으나 같은 해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정부 요직자들이 사망함으로써 정치권의 중심이 공백에 빠지자[2]:304 1881년 10월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서남웅번 출신의 무사들이 정부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점진적인 국회의 개설과 독일식의 강력한 군주권을 골자로 한 헌법 제정 방침을 정하고 1890년까지 국회를 개설시킨다는 '국회 개설의 칙유'(勅諭)를 발표하여 민권파의 강력한 주장을 무마시켰다. 그리고 1889년 2월 11일에 초안을 몇 번 손질한 일본 제국 헌법(메이지 헌법)을 반포하여 근대기 일본은 비록 거의 형식적이었지만 입헌 국가로 도약하였다.[2]:305~308 1890년에 의회 개설에 의해 천황제의 지배체제가 완성되었다. [1]

제국주의화와 조선 침략[편집]

국회 개설과 더불어 공업의 발흥으로 경제적으로 큰 발전을 본 일본은 한국중국으로의 정치·경제적 침투를 통해 점차 제국주의를 형성해 나갔다. [4]청일 전쟁에서 청나라를 이김으로써 일본은 타이완을 점령했고, 그 배상금을 기초로 하여 금본위제(金本位制)를 수립,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정비하였다. [1]또한 이 전쟁으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확보한 일본은 조선 자체에 대한 종속화를 꾀했지만 번번이 조선의 대규모 민족 저항과 부동항(不凍港)을 얻기 위해 조선에 진출하고자 했던 러시아와의 충돌로 인하여 실패했다. [5]조선 왕실도 박영효친일 세력을 추방하는 등 일본의 일방적인 조선 침략에 대한 항의를 표시하자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1896년 경복궁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도록 하였는데 [6]조선 의병(義兵)의 대규모 저항과 고종이 시위의 의미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환궁을 거부하였고, 오히려 일본은 조선에서 입지를 상실하며 국제적인 비난 속에 '경쟁국'이었던 러시아의 입지를 강하게 만들었다.

을미사변아관파천을 계기로 한국에서 입지를 굳힌 러시아는 만주(滿洲)의 러시아령에서 병력을 증강시켜 한반도에의 침투를 강화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러시아와 한반도와 만주의 권익을 둘러싸고 교섭을 진행하였지만 타협을 보지 못하자 1904년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해 러일 전쟁을 치렀고,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영국·미국의 지지와 쓰시마 해협에서의 결정적 승리로 러시아를 축출하고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해 다시금 정치·경제적 침투를 감행하였다. [7]러일 전쟁 승리 후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은 더욱 노골화하였고,[1] 영국과 미국 간의 밀약으로 조선 지배를 강대국으로부터 인정받은 일본은 대한제국과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 보호국화하여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어서 1907년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면서 한일신협약을 체결해 내정권을 박탈, 군대 또한 강제 해산시켰다. [8]그리고 1910년 8월 23일 통감부를 '총독부'(總督府)로 바꾸고 육군 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초대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이후의 일본의 조선 지배에 관해서는 일제 강점기·한반도 지배 문단을 참고하라)[9] :235

다이쇼 시대와 쇼와 초기[편집]

1911년에 성립된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은 행정 및 재정의 정리와 감세를 추진하는 긴축(緊縮)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중국신해혁명에 위협을 느낀 제국 육군한반도에 주둔시킬 제국 육군 제2사단의 증설을 정부에 강하게 요구하였고, 정부는 내각회의를 거쳐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대하여 제국육군대신 우에하라 유사쿠가 사표를 내는 사건이 벌어져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이 총사직하고, 뒤를 이은 제3차 가쓰라 내각일본 천황을 앞세워 의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의회를 경시한다는 비난을 받았다.[9] :244~245 그러자 미노베 다쓰키치, 입헌국민당이누카이 쓰요시, 입헌정우회오자키 유키오 등이 중심이 되어 족벌(族閥)의 타파와 헌정옹호를 내건 호헌 운동(일본어: 護憲運動 (ごけんうんどう) 고켄운도[*])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가쓰라 다로와 이하 내각이 성립 50일만에 퇴진하는 다이쇼 정변이 발생하였다.[9] :245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1918년)이 발발하자 일본은 영일 동맹을 이유로 연합국측에 가담하여 참전했다. [10] 그 진의는 동아시아 지역에 있어서의 일본의 지위를 더 높이고 국제적인 발언권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10][9] :246 일본은 독일선전포고하고, 독일령이었던 중국 산둥반도의 교주만과 독일령 남양군도를 점령하였다. [10][9] :246 이 지역에서의 이권을 할양받는 것을 영국프랑스가 승인하는 조건으로 지중해에 소규모 함대만을 파견하는 등 독일과의 직접적인 전투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9] :246 산둥 반도를 점령하고 나서, 일본은 중국에 대해 만주와 산동반도 등에 대한 일본의 이권을 반영구화하고, 남만주내몽골 일부를 일본에 조차하는 것을 요지로 하는 등 21가지 특혜조건을 요구(1915년 1월)하였고, 중국은 이를 수용(5월)할 수 밖에 없었다. (→21개조 요구) 이와 같이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5·4 운동(1919년)과 같은 격렬한 배일(排日) 여론에 밀려 실패하였다. [9] :246~247 일본이 이와 같이 아시아의 독보적 강대국으로 인식되면서 급부상하게 되는데, 이 무렵 일본제국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1911~25년)로 경제호황을 누렸다. 한편, 러시아 혁명(1917년)에 뒤이어 일어난 러시아 내전(1917~22년)에서 일본은 러시아 백군을 도와 7만 2천여명의 병력을 시베리아에 파견하였으나 패배하였다. [10][9] :246 이와 같이 다이쇼 시기의 중국과 시베리아 지역에 대한 침략 활동은 번번히 실패하였다.[9] :246~247

이러한 침략 활동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의 자본주의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미국·영국에 이은 강국으로 상승, 베르사유 조약에서는 대전중 획득한 일본의 이권이 인정되었다.[10] 이로써, 일본은 경제 불황과 재정 위기를 모두 극복하고 값싼 공장제 상품을 아시아 지역으로 수출하여 막대한 무역 이익을 취했지만 오래지 않아 유럽 국가들의 생산력 회복으로 인하여 수출이 축소되면서 무역이 적자로 전환하고 1923년 9월 1일에 일어난 간토 대지진으로 인해 게이힌 지역의 상공업 지대가 초토화되면서 다시 불황이 찾아온다.[9] :251~252 1929년에 발생한 세계 대공황으로 일본 자본주의의 결함은 최대한으로 드러나는 등 [1]불황이 한층 더 심화되자, 극우 보수 세력과 청년 장교층은 국민들의 불만 감정을 앞세워 암살 및 쿠테타를 일으키게 되었고, 일본의 민간 의회 정부는 전복되었다. 일례로 1930년 11월, 만주 침략에 반대 입장을 가졌던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는 우파 청년 사고야 도메오(佐郷屋留雄)의 총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11]중국에 대한 제국주의 무력침략이 시작되어, [1] 1931년 9월에 관동군의 주도로 만주사변을 일으켜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1931년 4월 14일 ~ 1931년 12월 13일)의 제어를 무시하고 만주 전역을 점령하여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 푸이를 꼭두각시로 앞세워, 만주국을 건국하였다.[9] :258~259

그러나 만주국에 대한 중화민국을 비롯한 세계 여론이 부정적으로 흐르자 군부는 국제연맹을 탈퇴하도록 정부를 압박, 일본은 사실 상 고립 외교로 나아가게 되었다.[9] :260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1931년 12월 13일 ~ 1932년 5월 16일)이 만주에서 일본군을 철수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1932년 5월 15일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를 암살, 후임으로 군인 출신의 사이토 마코토가 수상(1932년 5월 26일 ~ 1934년 7월 8일)이 되어 '군·정·관에 타협을 통한 거국일치'를 표방함으로써 정당내각은 단절되고, 군부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9] :260

군국주의와 중일 전쟁, 그리고 태평양 전쟁[편집]

그러나 사이토 마코토 내각 이후에도 육군 내의 여러 계파의 도전은 계속되어 급기야 1936년 2월 26일 청년 장교들이 내대신, 대장대신 등을 암살한 2·26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서 군부의 영향력은 막강해져 히로타 고키 내각 때 군부대신의 현역제가 부활, 사실상 군부가 내각을 좌우하게 되었다.[9] :261 1936년에는 독일과의 군사 동맹을 체결했다. [1] 또 히로타 고키 내각은 화베이(hua2 bei2 중국어 간체: 华北, 정체: 華北)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을 일으켜 그 구실로 중화민국을 선전포고 없이 공격하는 중일 전쟁을 일으켰다. 처음에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전쟁의 범위를 확대시키지 않고자 하였지만 곧 전쟁은 화중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1937년 12월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여 난징과 그 주변에서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였다. 한편 국내에서는 전시 체제의 장기화에 대비하여 1938년에 국가총동원법을 제정, 일본 열도 내 뿐만이 아니라 한반도 식민지에서의 군부의 경제적 수탈에 기여하였다.[9] :262~263

이렇게 중·일 전쟁이 장기화 될 무렵 나치 독일이탈리아, 일본과 추축 동맹을 체결하고, 1939년폴란드를 공격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처음에 일본은 유럽의 전쟁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방하였으나, 프랑스·네덜란드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하던 1940년에 독일·이탈리아·일본은 군사동맹을 맺고, [1] 1940년에는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가지고 있던 동남아시아의 식민지들을 빼앗기로 하는 남진 정책을 취하기로 결정하였다.[9] :264~265 미국·영국·중화민국·네덜란드 등 4개국은 이에 대하여 이른바 ABCD 포위망(America·British·China·Dutch)을 형성하여 석유 등 중요한 전쟁물자에 대해 수출을 금지하여 일본을 경제적으로 압박하기로 결의하였다. 일본은 처음에 미국과의 원만한 교섭을 통하여 이를 해결코자 하였으나 협상이 제대로 진전되지 못하자 고노에 후미마로제2차 내각은 퇴진하고 대신 통제파도조 히데키 내각이 조직되어 1941년엔 일·소 중립조약을 체결하고, [1] 1941년 12월 1일 개전을 결의하고 같은 해 12월 8일 미국 해군이 주둔하던 하와이 진주만을 급습하고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군에 선전포고하여 태평양 전쟁을 시작하였다.[9] :265~266

일본제국의 패망[편집]

일본은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표방하며 처음에 말레이 반도, 버마타이,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필리핀 등을 점령하는 등 연합군에게 타격을 가했다. 그러나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습격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된 전쟁은 결국 전세가 역전되어 해군이 전멸하고 오키나와 섬까지 점령됨으로써 막판으로 몰렸다. 하지만 일본 제국 정부와 군부는 불리한 전세에도 불구하고 결사적인 항전을 결심했다. 결국 미국이 원자폭탄히로시마나가사키에 투하하고 소련이 만주를 침공함에 따라 쇼와 천황1945년 8월 15일 라디오 담화를 통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1945년 9월 2일 도쿄 만에서 연합군 측의 대표와 일본 천황 측의 대표가 공식으로 항복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일본 제국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였다. 이후 강점하던 식민지와 점령지가 해방되었으며, 연합군의 군정을 거쳐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일본국으로 재탄생 되었다.

일본의 전쟁 범죄[편집]

일본 제국은 20세기 초반 한국을 강제 병합하는 등 이웃 나라에 대한 침략을 일삼아 식민지로 삼았으며, 결국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미국을 도발한 뒤 패망하였다. 이러한 전쟁 기간 중 일본군은 일본 자국, 식민지, 점령지를 포함한 아시아 지역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의 동맹국인 나치 독일과 비슷한 조직적인 반인륜적 전쟁 범죄를 자행하였다. 1937년에서 1945년까지 일본군이 학살한 사람은 약 3백만 명에서 1천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연합군 포로에 대한 학대나 학살 등은 전후에 도쿄에서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폭로되었지만, 피고용인으로 포로소장이나 포로소 직원으로 근무한 조선 사람들까지 B급 전범으로 몰려 처형되거나 징역형을 받는 일도 있었다. 다음은 대표적인 일본 제국의 대규모 전쟁 범죄이다.

731 부대[편집]

일본 제국 관동군 소속의 731부대생화학 무기 개발과 연구 과정에서 1만 명에 가까운 중국인한국인을 비롯한 식민지 주민과 전쟁 포로를 반인륜적인 생체 실험을 통해 살해하였다. 이외에도 중국동남아시아 지역의 여러 일본군 특수 부대에서도 비슷한 생체 실험이 이루어졌다. 731부대에서 개발한 무기로 수십만의 중국인이 학살되었다. 전후의 일본제약 산업 기술의 원동력이 되었다.

난징 대학살[편집]

난징 대학살중일 전쟁 도중 난징을 점령한 일본제국 육군중국인을 대량 학살하고 부녀자 강간 등을 자행한 사건이다. 약 5만 명에서 30만 명의 중국인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숙칭 대학살[편집]

숙칭 대학살1942년싱가포르를 점령한 일본군이 2월 18일에서 3월 4일 사이에 싱가포르에 거주하던 중국인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사건이다. 이후에는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으로 확대되었다. 약 2만5천 명에서 5만 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베트남 대량 아사[편집]

1944년 가을부터 1945년 봄에 걸쳐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 일대에서 기아가 덮쳤다. 이 때 일본 제국 군대와 프랑스 총독부가 베트남인들이 보유하고 있던 음식들을 대량으로 강탈했으며 그로 인해 200만 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도쿄 대공습 다음날인 1945년 3월 11일 프랑스 총독은 일본 제국 군대에 항복했고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바오다이가 일본 제국의 괴뢰 정권인 베트남 제국을 세웠다. 그러나 8월 9일 일본 제국이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받은 데에 이어서 8월 13일 호찌민의 주도로 베트남 8월 혁명이 발발했고 9월 2일에는 일본 제국이 공식적으로 항복하면서 바오다이가 이끌던 베트남 제국도 소멸된다.

위안부[편집]

일본군 위안부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군이 자신들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하여, 강제·집단적으로 수용시켜 성적인 행위를 강요받은 여성을 말한다. 위안부는 초창기에 일본의 매춘부로 구성되었으나, 그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되자, 조선인대만인, 그밖에도 중국인 (당시 중화민국), 필리핀, 타이,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일본제국이 점령한 국가 출신의 여성도 일본군에게 희생되었다. 극소수이긴 하지만 자바의 네덜란드인을 비롯한 서양인들도 일부 희생되었다. [12]

강제 징용과 징병[편집]

일본 제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인력 확보를 위해 많은 한국인과 중국인 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노예처럼 부려먹었다. 미쓰비시 중공업은 징용 인력으로 군수 물자를 생산 하기도 하였는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한국전쟁 당시에도 군수물자 생산으로 높은 소득을 올렸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고 한국에서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징용 제도로서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였다. 징병된 인력 외에 전쟁을 위한 노동자로 강제로 징용된 이들은 탄광에서 강제 노역을 하거나 군속으로 차출되어 동남아시아 지역의 군사 기지 건설에 동원되었다. 그들은 임금 없는 강제 노역에 시달렸으며, 많은 징용자는 일본군이 후퇴하면서 징용 지역에 내버리고 돌아갔기 때문에 결국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포로가 되거나 그전에 굶주림, 질병, 가혹한 사형(私刑)으로 별세하였고, 일부만이 탈출하여 귀국하였다. 현재 사할린 섬에 남아있는 한국인사할린 한민족으로 현재 약 3만 2천 5명으로 추정된다.

한편 전투력 약화를 보충하기 위해 조선인 학생을 대상으로 강제 징병을 실시하여 학도병이란 이름으로 전쟁에 동원하였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당시 한국 정부에 따르면 노동자, 군인, 군속으로 강제 동원되었던 한국인 피해자는 2012년 6월 현재 104만 9475명이라고 하였지만, 위안부 등이 포함되지 않아 실제는 이보다 훨씬 많다. 현재도 징용 보상 책임 문제가 한일 양국간 현안 중 하나이다.

일본 제국의 영역[편집]

일본 제국의 영토 범위(쇼와 시대 초기): ① 내지, ② 타이완, ③ 가라후토, ④ 조선 (이상 정식 영토), ⑤ 관동주, ⑥ 남만주 철도 부속지, ⑦ 남양 군도

일본 제국은 유럽이나 미국의 식민지 정책과 유사하게, 군비를 확충하여 아시아 지역으로 영토나 식민지 침략을 하였다. 이러한 제국의 확장에는 대한제국의 강제합병 경우처럼 군사력에 바탕을 둔 강압적 방법으로 실행한 경우도 있고, 만주와 같이 전면전을 통한 경우도 있었다. 침략한 지역에는 식민지 정책으로 현지 주민들을 제국 본토인과 동화시키려는 정책을 실시했지만, 차별 정책도 병행했다.

제국이 확대되면서 일본 본토는 내지(內地, 나이지)로, 식민지는 외지(外地, 가이지)로 구분했다. 내지는 정부가 관할하지만, 외지는 총독부(總督府)와 같은 식민통치기관이 정책을 수행했다. 사할린 섬 이외의 식민지에서는 총 인구에서 내지인(제국 본토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절반 이하였다. 그밖에 여러 이유로 가라후토 청 이외의 식민통치기관은 독자적인 입법권을 수행했으며, 관동주남양 군도는 형식적으로는 제국의 영토가 아니었으므로 일본 제국 헌법의 효력이 미치지는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팽창한 국토는 제국이 패망하면서 급격히 줄어든다. 쇼와 시대에 확장된 영토의 대부분과 이전에 확장한 영토의 일부가 독립하거나, 미국, 중화민국 등에 의해 점령되었고, 일부는 이전의 국가로 흡수되었다.

내지 (본토)[편집]

내지의 범위는, 쿠릴 열도가라후토 청을 제외하면, 현재의 일본의 실제 주권을 행사하는 영토와 비슷하다.

이름 편입시기 비고
오야시마(大八洲) 고대 고사기에 기재되어 있는 8개의 섬. 혼슈에는 제국의 수도 도쿄 부가 존재했다.
홋카이도 1855년 1855년이투루프 섬우루프 섬의 사이에 일간 국경이 확정되었다.
류큐 제도 1879년 류큐국의 영토. 1872년에 류큐를 침공하여 국왕을 일본의 다이묘로 독단으로 격하시키고(제1차 류큐 처분), 그 뒤 1879년 그 영토를 일본 영토로 독단으로 흡수하였다(제2차 류큐 처분).
쿠릴 열도(지시마 열도) 185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으로 우루프 섬 이북의 섬들을 영토에 편입하였다. 다만 그 땅이 러시아의 관할이었는지는 다른 의견이 있다[13].
가라후토 청 1942년 원래 국제 연맹 위임통치령.
오가사와라 제도 1876년 1876년 실효 지배를 선언.
미나미토리 섬 1898년 도쿄 부의 관할 구역으로 편입하였다.
오키노토리 섬 1931년 도쿄 부의 관할 구역으로 편입했다.
아래 영토는 실효 지배 사실에 의혹이 제기되었거나 영토 분쟁이 있는 지역이다.
센카쿠 열도 (댜오위다오) 1895년 1895년 오키나와 현의 관할 구역으로 편입했다고 주장한다. 현재 일본이 실효 지배 중이나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이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독도 1905년 1905년 시마네 현의 관할 구역으로 편입했다고 주장한다. 현재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중이며, 대한민국이 실효 지배 중이다.

행정 구역[편집]

일본제국의 행정구역

내지의 도도부현(都道府縣)은 메이지 천황의 치세에 형성되었으며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외지 (식민지)[편집]

외지는 통치 형태에 따라 4종류로 나뉜다.

식민 통치 기관이 설치되었던 지역[편집]

이름 편입시기 독립시기 이전 통치국 내지편입 비고
타이완 1895년 4월 17일 1945년 10월 25일 청나라 청나라 아니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뒤,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나라 청나라에게서 타이완 성 관할 지역을 할양받아 획득하였다. 1938년 스프래틀리 군도를 편입하였고, 통치 조직은 타이완 총독부이다. 패망 후 중화민국 중화민국에 반환되었다. 수도는 다이호쿠(지금의 타이베이) 였다.
사할린 섬 남부
미나미가라후토 (南樺太)
1905년 9월 5일 1945년 8월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뒤,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시아 제국에 사할린 섬 북위 50 이남 지역을 할양 받아 획득하였다. 1907년 이후 가라후토 청이 통치했지만, 1942년에 내지로 편입하였다.
한반도·조선반도 1910년 8월 29일 1945년 8월 15일 대한제국 대한제국 아니오 1905년 대한제국제2차 한일 협약(일명 을사조약/을사늑약)의 체결을 강요하여 외교권을 강탈한 후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에 간섭하였다. 1910년한일 병합 조약을 통해 강제 병합하여 식민지로 삼고 ‘조선(朝鮮)’으로 국호를 고쳤다[14]. 통치 기관은 일본군 현역 대장이 총독으로 지배하는 조선총독부였다. 패망 후 미국 미국, 소련 소비에트 연방을 비롯한 연합군에 의해 분할점령 되었으며 군정기를 거쳐 1948년 대한민국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수도는 경성부(지금의 서울특별시) 였다.
행정 구역[편집]
조선[편집]

일제 강점기 조선의 행정 구역대한제국13도제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최상위 행정 구역은 도(道)이며, 조선총독부가 관할하였다.

한국어 일본어 당시에 사용했던 로마자 이름
경기도 京畿道 Keikido
강원도 江原道 Kogendo
충청북도 忠清北道 Chusei-hokudo
충청남도 忠清南道 Chusei-nando
전라북도 全羅北道 Zenra-hokudo
전라남도 全羅南道 Zenra-nando
평안북도 平安北道 Heian-hokudo
평안남도 平安南道 Heian-nando
황해도 黄海道 Kokaido
함경북도 咸鏡北道 Kankyo-hokudo
함경남도 咸鏡南道 Kankyo-nando
타이완[편집]
한국어 일본어 당시에 썼던 로마자 이름
대북주 臺北州 Taihoku Prefecture
신죽주 新竹州 Shinchiku Prefecture
고웅주 高雄州 Takao Prefecture
화련항청 花蓮港廳 Karenko Prefecture
대중주 臺中州 Taichu Prefecture
대동주 臺東廳 Taito Prefecture
대남주 臺南州 Tainan Prefecture
팽호청 澎湖廳 Hoko Prefecture

괴뢰 국가[편집]

‘-’옆에 있는 국가는 일제 패망 이후 해당 영토를 접수한 국가이다.

이름 수립 해체 접수 국가 비고
만주국 만주국 1939년 1945년 8월 18일 중화민국 중화민국 국공 내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Flag of the Mengjiang.svg 몽강국 1936년 1945년 중화민국 중화민국 국공 내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Flag of the Empire of Vietnam (1945).svg 베트남 제국 1945년 3월 11일 1945년 8월 30일 프랑스 프랑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베트남 민주 공화국 베트남 민주 공화국, 베트남 공화국 베트남 공화국, 라오스 라오스, 캄보디아 캄보디아 순으로 연방에서 이탈함.
왕징웨이 정권 중화민국 난징국민정부
(왕징웨이 정권)
1940년 1945년 중화민국 중화민국 국공 내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Flag of Cambodia under Japanese occupation.svg 캄보디아 왕국 1945년 8월 30일 프랑스 프랑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이후 독립.
필리핀 필리핀 제2공화국 1941년 1943년 미국 미국 이후 독립.

조차지[편집]

이름 통치 시작 통치 중단 비고
관동주 1905년 9월 5일 1945년 8월 19일 러일 전쟁에 승리함에 따라, 러시아 제국이 가지고 있던 랴오둥 반도조차지를 계승하였다.[15] 통치 기관은 관동청(關東廳)으로, 관동군이 상주하였다.

위임통치구역[편집]

국제 연맹에게서 통치를 위탁 받은 위임통치구역(委任統治區域)은 다음과 같다.

이름 통치 시작 통치 중단 비고
남양 군도 1920년 1월 10일 1945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면서, 옛 독일 제국식민지였던 태평양 섬들의 일부(미크로네시아) 섬을, 국제연맹 위임 통치령으로서 영유하였고, 통치 기관은 남양청(南洋廳)이다. 다만 전쟁 중이었던 1914년부터 독일군을 패퇴시키고 사실상 점령하여 통치하고 있었다.

기타 전쟁 중 점령한 지역[편집]

이름 점령시기 해방시기 이전 통치국 현재 통치국 비고
중국 대륙의 일부 1937년 7월 7일 1945년 9월 9일 중화민국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일부 지역은 왕징웨이 정권 왕징웨이 정권등의 괴뢰 정권이 세워졌다. 국공 내전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홍콩 영국령 홍콩 1945년 9월 9일 영국 영국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홍콩 홍콩특별행정구)
1997년을 기해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에 편입됨. 홍콩 기본법에 의해 2047년까지 고도의 자치가 보장되어 있다.
Flag of British Burma (1937-1948).svg 영국령 버마 1945년 9월 9일 영국 영국 미얀마 미얀마 후에 미얀마 미얀마로 독립함.
말레이시아 영국령 말레이 연방 1945년 9월 9일 영국 영국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싱가포르 싱가포르로 독립함.
네덜란드 네덜란드령 동인도 1945년 9월 9일 네덜란드 네덜란드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로 독립함. 인도네시아티모르 섬 동부를 포르투갈로부터 점령하였으나 2001년 동티모르 동티모르로 분리 독립함.
Flag of Papua New Guinea 1965.svg 오스트레일리아령 뉴기니 1945년 9월 9일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파푸아 뉴기니 파푸아 뉴기니 파푸아 뉴기니 파푸아 뉴기니로 독립함.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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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그러나 전근대적인 피차별 부락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까지 존재하는 등 여전히 사회적 차별이 잔류하였으며, 사민평등의 조치가 조세 대상의 확대와 국민개병(國民皆兵)에 근거한 징병제를 실시하기 위한 방법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4.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231쪽. ISBN 89-86142-81-3 “일본도 열강과 나란히 조선 · 중국에의 침략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점차 제국주의를 형성해 나갔다.”
  5.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231쪽. ISBN 89-86142-81-3 “청일전쟁 후 일본은 조선의 종속화를 획책하였는데 그것은 항상 조선의 민족적인 저항과 러시아의 조선진출과 충돌하였다.”
  6.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231쪽. ISBN 89-86142-81-3 “1895년 민비(閔妃) 일파는 박영효 등 친일세력을 추방하여 반일적인 정권을 수립했지만, 이에 대해 미우라 고로(三浦梧楼) 공사는 일본수비병 · 경찰 · 민간인을 왕궁에 난입시켜서 민비를 시해하였다(閔妃殺害事件)”
  7.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232~233쪽. ISBN 89-86142-81-3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그 후도 변하지 않고 만주에 병력을 증강시켜 점차 한반도에도 뻗쳐나갔다. 러일양국은 한국·만주에서 제각기 권익을 둘러싸고 교섭을 진행하였지만 타협을 보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개전론이 높아지고 정부도 개전의 결의를 굳혀 1904년(明治37) 2월에 드디어 선전포고를 하여 러일전쟁은 시작되었다.”
  8.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234~235쪽. ISBN 89-86142-81-3 “그러나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하기 위해서는 구미열강의 승인이 필요하였다. 거기에서 일본수상인 가쓰라(桂)와 미국 육군장군인 테프트 간에 밀약이 맺어져(가쓰라·테프트 밀약, 1905.7),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에 미국은 일본의 한국지배를 인정시켰다. 이리하여 일본은 1905년 11월 제2차 한일협약(乙巳保護條約)을 맺어 한국의 자주외교권을 박탁하고 보호국화 하였다. 그 결과 한양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 이 사건 이후 일본은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제3차 한일협약을 맺어 한국의 내정을 통감의 지도·감독하에 놓고 비밀협정에서 한국군대를 해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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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하마구치는 1931년 8월에 사망하였다.
  12.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위안부관련 사진 게시판
  13. 당시 영국 지도에는 청나라의 영토(오늘날 연해주의 일부)였다. 러시아가 연해주를 획득한 때는 1858년 이후이다.
  14. 칙령 제318호 “한국의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는 건
  15. 관동주, ja:関東州

참고자료 및 링크[편집]

일본의 역사
이전 시대 일본 제국
일본 제국
1868년 ~ 1947년
다음 시대
에도 시대
(에도 막부)
일본 현대 일본
(일본의 군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