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불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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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불훼석(일본어: 廃仏毀釈)은 당시 막 성립되었던 메이지 정부(일본 제국)가 불교 사원승려들이 받고 있던 특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사원, 불경, 불상 등을 훼손한 사건이다.

특징[편집]

파괴된 불상
불경을 태우는 민중

1868년 1월 3일에 수립된 일본제국1868년 4월 5일 발표한 태정관 포고 "신불 분리령"(神仏分離令)과 1870년 2월 3일에 발행된 조서 "대교선포"(大教宣布)등의 정책을 통해 불교 사원과 불상, 불경 등을 파괴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일본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정부이지만, 설립 당시에는 메이지 천황은 단지 16살이고, 조슈 번사쓰마 번의 번주가 실권을 잡고 있었다. 조슈 번이나 사쓰마 번에서는 개항 이래로 무분별하게 범람하는 근대 사조(思潮)에 대해 천황제를 방위한다는 취지에서 민중으로부터 위정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천황의 충신"으로 만드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도쿠가와 시대까지 보급하고 있던 "하나님, 부처님"이라는 애니미즘인 신도와 불교를 대청소하는 풍조를 일소하려고했다. 이때 만들어진 국가 종교가 "천황교"라고도 별칭되는 "국가신도"이다.[1].

"폐불훼석" 운동은 도쿠가와 왕조사찰 집정관사원 법도에 의해 보호되어 온 불교 사원에 대한 공격이 격렬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도쿠가와 바쿠후에 대한 민중의 불만을 "폐불훼석"을 내세워 피하려고 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육식과 유부남을 자유롭게 하라"고 트집을 잡아 스님을 공격했다.

또한 폐불훼석의 추진에 바탕이 된 이데올로기로 "국학"(영어 직역 : study of nationality)이 있었다. 일본의 국가 정체성을 추구한 국학의 학자들이 "일본의 국가 정체성은 천황이다."라는 이념을 고취하면서 불교 배척을 촉진했다. 메이지 정부는 신도를 국가 통합의 발판으로 삼고자 했다. 일부 국학자의 주도 아래, 불교는 외래의 종교이다고 하여, 그때까지 다양한 특권을 가지고 있던 불교 세력의 재산이나 지위를 박탈했다. 에도 시대까지는 사원법도에 의해서 금지되고 있던 승려의 육식과 결혼을, 메이지 정부는 「육식이건 결혼이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라고 하여, 승려들을 파계시켜 환속시키려 했다. 메이지 정부를 수립했던 사쓰마 번에서는 도쿠가와 왕조가 붕괴하기 전부터 이미 폐불훼석이 철저하게 이루어졌으며, 1616개의 사원이 강제 폐업했다. 당시 2966명에 달했던 승려 중 약 1000명은 군속되었다.

영향[편집]

폐불훼석으로 인하여 일본의 불교는 "장례업자"로 몰락하였다.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의 교리도 깨지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에 불교 사원들은 "야마토 영혼"을 강조하고 전쟁을 고취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불교계의 무저항 분위기도 없지 않았으며, 미야자와 겐지 등 몇몇 저명한 사람들은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었다.

핵폭탄 2발이후 일본제국이 패망하고 나서도 "장례업자 불교"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1960년대 후반에 일어난 베트남 전쟁에 반대 운동도, 지도자에 선 사람들은 종교 관계자가 아니라, 학생 운동을 비롯한 대중이었다.

도쿠가와 시대 이전에도 신도는 존재했지만, 제국 시대가 되면서 신도 형식의 결혼식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도쿠가와 시대까지, 결혼식 종파가 일부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러나 제국 시대 이후는 다이쇼 천황의 결혼식 (1900년)에서 처음 신도 형식의 결혼식이 실시되고 난 뒤, 이것이 대중으로 퍼져나갔다.

또한 폐불훼석 이후 "문명개화"라는 이름 아래에 육식이 보급되었다. 다른 나라들에 소개되는 일본 요리 중 하나인 "스키야키"는 폐불훼석의 부산물인 것이다.

해외 불교 배척 운동[편집]

각주[편집]

  1. 국가신도의 밑에 보호된 신사 안에는, 이세 신궁 등의 도쿠가와 바쿠후 이전 (1868년 이전)의 시대에 있던 신사도 있지만, 이것은 약간이다.

관련 항목[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