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도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황도파(일본어: 皇道派 (こうどうは))는 1920년대 ~ 1930년대전체주의, 국가주의, 팽창주의를 모토로 이에 입각한 정치 체제를 수립하려던 일본제국 육군보수적 파벌을 말한다.

배경[편집]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은 매우 큰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나, 1920년대 초반 경제위기에 봉착하였다. 양극화와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고, 노동조합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의 영향을 받아 과격화된 반면, 금융계와 산업계는 관료제와 결탁하여 더 커다란 부를 축적하였다. 이에 비해 군부는 "청렴"하다고 간주되고 있었으며, 육군의 일부 세력은 자본주의적 입헌군주제의 취약성과 정치적 부패를 근절하기 위해 행동을 취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기원[편집]

황도파의 초기 주창자들은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와 추종자였던 마사키 진자부로(眞崎甚三郎)이다. 아라키는 주목받는 육군내의 정치 이론가였으며, 그는 일본 전통의 무사도와 서구의 나치즘을 결합하여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의 이론은 천황, 국민, 국가, 국토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었다.

황도파는 산업화 이전, 서구화 이전의 일본을 이상화하여 이로의 복귀를 목표로 했다. 특히 부패한 관료, 기회주의적인 정치가, 그리고 탐욕스러운 재벌들이 일본을 타락시키는 주범으로 지목되어 일거에 숙청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관료를 배제하고, 천황이 일본을 직접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메이지 유신에 빗대 "쇼와 유신"이라고 불렀다. 대외적으로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과의 전투는 피할 수 없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1932년 아라키는 자신들을 "황도파(皇道派, 일본어 발음으로는 코도하)" 라고 칭했고, 이것이 이들을 지칭하는 공식적인 이름이 되었다.

1931년 아라키는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내각에서 육군대신으로 입각하였고, 마사키는 육군 참모 부총장이 되었다. 그들은 육군내에서 자신들의 대척점에 서 있던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대장의 추종자들을 주요 보직에서 거세하기 시작했다. 우가키는 병력감축을 통해 군의 전력을 현대화시키려고 한 반면, 아라키는 기술보다는 정신력을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몰락[편집]

만주사변 이후 두 세력은 군부의 지배권을 놓고 사사건건 대립하였다. 황도파는 처음에 우세했으나, 1934년 아라키가 병으로 사임한 이후 영향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아라키의 후임인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는 통제파의 동조자였다.

1934년 11월 황도파의 청년 장교가 주요 정계인사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었다. 통제파는 이를 기화로 삼아 마사키를 육군서열 제3위의 자리인 육군 교육총감에서 사임하도록 하였다. 또한 3,000여 명의 황도파 장교를 강등시켰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황도파 장교 아이자와 사부로통제파의 지도자인 나가타 데쓰잔(永田鉄山)을 암살하였다. 아이자와에 대한 군법회의는 도쿄에 있는 제1사단의 군사법정에서 열렸는데, 제1사단장인 야나가와 헤이스케(柳川平助)는 황도파로서 아라키의 동조자였다. 이 재판은 야나가와의 영향력 아래에서 도리어 통제파에 대한 성토장으로 변하여 아이자와는 자기희생적인 애국자로, 나가타는 원칙없는 권력지향적인 인물로 그려졌다.

아이자와의 재판이 고조에 이르러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자, 일본 군부는 이를 위험시하여 제1사단을 만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것은 도리어 상황을 악화시켜 황도파의 일부 장교들은 이를 직접 행동의 계기로 삼았다. 그리하여 제1사단의 황도파 장교들은 1936년 2월 쿠데타를 기도하였다(2.26사건). 이는 실패로 끝나서 아라키 사다오는 사임하고, 많은 황도파 장교들은 거의 예편처분 되었다.

2.26 사건 이후, 황도파의 존재는 유명무실해졌고, 황도파가 사라진 이상 통제파의 존재 이유는 사라졌다. 통제파의 주요 인사가 육군을 지배하게 되었지만, 황도파의 이념과 정신력 강조, 신비주의적 국수주의는 육군에 그대로 남았고, 과격한 초급장교들의 독단, 불복종 행위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러한 것들은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수면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