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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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1904년 3월 7일 ~ 1942년 6월 4일
Bundesarchiv Bild 146-1969-054-16, Reinhard Heydrich.jpg
태어난 곳 나치 독일 나치 독일 라이프치히
죽은 곳 체코 체코 프라하 부근 베를린-프라하 고속도로
별명 피에 젖은 사형집행인,
프라하의 도살자,
금발의 짐승,
교수형 집행인
복무 나치 독일 나치 독일
최종 계급 SS-Obergruppenführer Collar Rank.svg 상급집단지도자
근무 Flag Schutzstaffel.svg 친위대 제국보안본부
보헤미아 총독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서명
Reinhard Heydrich signatures.svg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독일어: Reinhard Heydrich, 1904년 3월 7일 ~ 1942년 6월 4일)는 게슈타포SS 보안방첩부의 수장으로서 나치 독일 치하에서 제국보안본부의 수장 및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의 총독대리를 지낸 인물로서 1942년 6월 4일, 영국에서 훈련받은 체코슬로바키아 레지스탕스의 공격을 받고 사망했다. 하이드리히 사후 제국보안본부는 에른스트 칼텐브루너가 후임으로 취임했다. 생전에 하이드리히는 ‘프라하의 도살자’, ‘피에 젖은 사형집행인’ 등의 별명으로 불렸다.

또한 하이드리히는 유대인 대학살의 주요 계획자였으며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 방안"을 모색한 1942년 반제 회의를 주관했다.

초기 생애[편집]

라이프치히 근처에서 태어난 하이드리히는 아버지가 음악학교장이라서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하이드리히는 국가보안본부장이 되어서도 일과를 마치고서는 음악으로 피로를 풀곤했다.

나이가 너무 어려 제일차세계대전에 참가할 수 없었던 하이드리히는 1922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24년 사관후보생이 되었고 1926년에는 소위, 1928년 중위에 임관되었다. 사관후보생이 되자 하이드리히는 발트함대 정치부에 지원했다. 이때 경험은 나중에 크게 유익하다.

일찍 정치에 관심한 젊은 하이드리히는 1918년독일 국민청년연맹에 가입했다. 그러나 연맹의 온건성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곧 탈퇴하고 독일 민족공수연맹에 새롭게 가입하면서 당시 우익계 군인으로 창설된 우익계 준군사 조직 중 하나인 할레 의용대에 가담하기도 했다. 해군적을 가지고 해군 장교로서 복무하면서 우익계 군사 조직에 가입한다.

촉망받는 젊은 해군 장교였던 하이드리히는 사생활 문제로 군복을 벗고서 SS로 옮겨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이때 사건은 정확한 진상은 알려져 있지 않다. 나중에 국가보안본부장이 되면서 관련 기록을 하이드리히가 없앴기 때문이다(비단, 그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처녀를 강간했다는 설, 돈을 훔쳤다는 설, 약혼녀와 파혼하려 했다는 설이 제기되었으나 확실한 사실은 없지만, 당시 해군 군법회의가 모종 사건으로 하이드리히를 재판했고 장교로서 있을 수 없는 행위했다는 이유로 사직을 권고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이때 재판관은 에리히 레더로서 후일 독일 해군 총사령관이 된 사람이다.

해군에서 나온 하이드리히는 한동안은 실직자로 거리를 누비던 중 나치당 행사장 경비를 맡았던 사람들과 어울렸고 평소 견지하던 정치 신념과 유사한 나치당에 가입했다. 나치당에서는 하이드리히의 경력과 경험을 평가했고 곧 하인리히 히믈러의 눈에 띄어 1931년 가을, SS 소령으로 임명하고서 뮌헨으로 불러들였다. 1932년 7월, 히믈러는 기존 SS부대별로 2명에서 3명씩 배치되던 정보 임무 담당자를 모아 SS보안방첩부를 조직하고 하이드리히를 SS 대령으로 승진하게끔 하여 방첩부장으로 앉혔다. 하이드리히가 이제 본격으로 전면에 등장한다.

SS보안방첩부와 하이드리히[편집]

1931년 하이드리히는 하인리히 힘러에 의해 발탁되어 SS 내의 정보부대인 SS 보안방첩부(독일어: Sicherhitsdienst, '보안방첩대' 또는 '보안대'로도 번역, 약칭 : SD)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비록 하이드리히는 당의 다른 고참 투사들과 달리 신입에 불과했으나 해군에서 익힌 전문 지식과 기술, 능력을 히믈러가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때까지 각 SS연대에 소규모로 흩어져 있던 SD요원들은 하이드리히의 지휘 아래 강력한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죽을 때까지 SD 부장이었던 하이드리히는 이 조직을 유일한 국가 정보 기관으로 인정받고 싶어했으나 히믈러의 견제와 히틀러 특유의 리더쉽으로 인해 제3제국이 종말하는 날까지 당 소속 기관으로 남게 된다.

하이드리히는 SD 부장으로 임명된 이래, 아마추어적이고 초보 수준이던 SS의 정보업무를 해군 복무 시절에 배웠던 수준으로 향상시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SD를 군대식으로 조직하고 업무도 해군 정보기관에서 익혔던 내용을 전수하여 조직을 강화/발전시켜 나갔다. 비전문인력이라도 확고한 이념과 당에 대한 봉사정신만 있다면 누구라도 자원을 허락하여, 어느종류라도 상관없이 방대하고도 막대한 양의 정보수집에 성공한다. 이는 주로 비전문 인력으로 구성되어 있던 친위대의 정보부서에 비하여 해군 장교 출신인 하이드리히의 전문성에 기인한 바가 크다. 폴란드 침공시에도 폴란드 쪽에 전쟁책임을 떠넘기기 위해 보안대가 정보조작 및 사건 조작에 큰 기여를 한다.

힘러는 그의 성과에 만족했고 1933년 바이에른 주 부경찰청장으로 임명한 데 이어 1934년에는 헤르만 괴링으로부터 인수한 게슈타포를 맡기고 베를린의 프란츠 알브레히트 8번가(게슈타포 본부 주소)로 불러들인다. 하이드리히는 이제 게슈타포와 SD 모두를 지휘하게 된 것이다. 게슈타포가 괴링의 사설 경찰같은 조직에서 SS와 융합하여 비밀경찰로서 악명을 떨치게 된 것은 하이드리히가 조직을 맡게 되면서부터이다. 후에 SD와 게슈타포는 통합되어 국가보안본부(RSHA)[1]로 명명되며 하이드리히가 초대 수장으로 임명된다.

제국안의 모든 기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지만 해군 제독 빌헬름 카나리스를 필두로한 국방군 휘하 정보부 아프베어(Abwehr)엔 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이는 유대인 조상설에 관한 확실한 정보를 카나리스가 가지고 있다는 풍문을 더욱 입증시켜주는 듯한 한 분위기를 풍겼다.

보안방첩부는 제국 내 수 많은 기밀, 반체제 인사, 정보, 유력인사들의 부정행위 등을 수집하고 있었고 이는 정치인, 유력 당원을 넘어 국방군, 친위대의 장군들의 정보까지도 포함했다.

역설적으로 이들은 자신들의 수장에 대한 암살 작전에 대해서는 정보를 수집하지 못하여 아래 하이드리히 암살사건이 발생하여 그들의 수장을 잃어버리게 된다.

막강하고 전방위적 보안, 정보 관련 부서의 수장의 암살사건을 예측조차 하지 못한 것은 수많은 추측과 음모론을 일으키게 되어 몇몇 학자들은 하급 정보원들에게서 암살사건 정보 자체가 누락이 되었다고 의문을 제기 하고 있다.

이는 하이드리히를 견제한 힘러의 손길이 닿았다는 설이 있는데 하이드리히의 암살 기도 이후 파견된 의사가 힘러의 사주를 받고 되려 하이드리히의 상태를 악화 시켜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고 보는 이들 역시 많다.

룀 숙청 사건[편집]

장검의 밤(The Night Of the Long Knives)으로 명명된 이 사건은 나치당이 권력을 잡은 시점에서도 '아직도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고 부르짖던 SA의 수장 에른스트 룀을 헤르만 괴링과 히믈러등이 견제하여 숙청한 사건으로 장검의 밤에서 하이드리히 역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당시 보안대의 최고실권자로서 제국내 보안과 정보를 총괄하던 하이드리히로서는 증거 조작 따윈 손쉬운 일이었고 SD가 앞서서 룀에 대한 불리한 증거들을 히틀러에게 보고하기에 이른다.

룀의 동성애적 취향과 돌격대의 사조직화, 사회주의적인 성향등은 곧 룀의 큰 결점으로 보였고 괴링과 히믈러 등의 끝없는 설득으로 인해 히틀러는 자신의 최대의 동지 중 한 명이었던 룀의 숙청을 결심한다.

1934년 6월 30일에 실행 된 본 사건은 히믈러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쿠르트 다루게, 발터 쉐렌베르크 등 믿을 만한 친위대 인사들에게 룀을 비롯한 룀의 측근 및 눈여겨 보았었던 SA의 주요 간부들을 '처리'할 것을 명령하여 이후로 SA와 SS의 입지는 뒤바뀌게 된다.

하이드리히 암살사건[편집]

1942년 5월 27일,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총독대리 하이드리히가 체코슬로바키아 레지스탕스의 공격을 받았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발표가 나왔다. 이 사건은 영국의 지원을 받은 얀 쿠비츠요제프 가베크가 시도한 암살 사건이었다.

아침 출근길에 베를린-프라하 간 고속도로에서 권총과 폭탄 공격을 당한 하이드리히는 즉시 시립병원으로 옮겨졌고, 당시 프라하에서 가장 솜씨 좋은 외과의사인 호올 바흠이 수술했다. 폐와 복부에 파편이 꽂혀 있었고, 중상이었다. 수술 후 하이드리히는 회복 조짐을 보였으나 6월 3일 위독상태에 빠졌다. 힘러가 2명의 전속 의사를 급히 파견했지만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6월 4일 아침에 하이드리히는 사망했다. 검시 해부 결과 비장 절제 때문에 일어난 화학 현상으로 발병한 가슴 중앙부의 염증이 사인이라고 공식 기록되었다.

다만, 히믈러가 파견한 의사들의 노력이 나중에 오히려 하이드리히의 죽음을 재촉했다는 설도 있다. 하이드리히를 발탁한 것은 히믈러였지만, 이 무렵 히믈러와 하이드리히의 관계는 극악의 라이벌 관계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 하이드리히를 최초로 수술한 바흠은 전후에 나치 협력자로 체포되어 강제 노동형에 처해졌다. 이 자는 지뢰 제거 작업에 투입되었으나, 지뢰가 폭파하여 중상을 입었고, 아무도 치료하려 하지 않으려 하여 라이프치히로 옮겨졌으나, 그 곳에서 죽었다.
  • 레지스탕스들은 성 카를 보르메우스 교회에 숨어있었는데, SS와 게슈타포가 습격하여 모두 죽여버렸다.
  • 하이드리히가 죽은 날, 152명의 유대인이 처형되었다.
  • 6월 9일, 복수를 이유로 7 SS의용산악사단 프린츠오이겐의 일부 병력이 차출되어 한낱 농촌에 불과했던 마을 리디체를 완전히 파괴했다. 마을 주민 중 남자들 172명이 처형되었고, 여자들은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아이들은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로 입양보내졌다. 이 아이들 중 일부는 나중에 다시 발견되었다.
  • 하이드리히 사후 국가보안본부장에는 힘러에 충직한 에른스트 칼텐브루너가 임명되었고, 1943년 1월 말에 정식 취임했다.
  • 영화 《새벽의 7인 (원제 : Operation Daybreak)》는 이 사건을 다룬 영화다.

유대인 조상설[편집]

하이드리히의 할머니가 유대인이라는 소문은 그가 살아있을때 끊임없이 제기된 문제였다. 당시 하이드리히가 이끄는 SS보안방첩부 및 게슈타포, 나중에는 국가보안본부까지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이 이끄는 군정보부-Abwehr와 치열한 경합을 벌이면서 다른 모든 분야에는 SS의 영향력을 침투시키면서도 군정보부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이 이러한 소문을 증폭시켰다. 카나리스가 하이드리히의 유대인 가계설에 대한 확실한 물증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던 것이다. 뉘른베르크 법 뿐만 아니라, 인종적 순수성의 모범 사례가 되어야 할 나치 친위대 고급 지휘관이 유대인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치명적인 모순이었던 것이다.

1932년 나치당 의원 그레고리 슈트라우스가 가계도를 조사하지만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다.

이 소문에 대해 하인리히 힘러는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라 일갈했고 이후 소문은 잠잠해졌다.

주석[편집]

  1. 하이드리히가 암살 된 후 에른스트 칼텐브루너가 2대 총장으로 취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