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슈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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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슈페어

베르톨트 콘라트 헤르만 알베르트 슈페어 (Berthold Konrad Hermann Albert Speer, 1905년 3월 19일 ~ 1981년 9월 1일)은 독일의 정치가이자 건축가이다. 슈페어는 히틀러의 측근으로서 나치 독일의 군수 장관을 지냈고 후에 뉘른베르크 재판에 전범으로 회부됐으며, 20년 복역 후 석방되었다. 슈페어는 한스 프랑크와 함께 자신의 과오와 책임을 시인하고 사죄한 단 두 명의 나치 고위직이다.

초기 이력[편집]

독일 만하임의 부유한 중류계급 건축가 가정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수학자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아버지의 강권으로 가업인 건축가로서 길을 택하였다. 1923년 독일을 덮친 超인플레이션 탓에 아버지의 재정 사정이 악화해 보통 대학인 칼스휴 대학에서 건축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아버지의 사업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명문인 뮌헨기술대학으로 편입하였다. 1925년 베를린기술대학으로 재편입해 유명한 건축가였던 하인리히 테세노프[1] 밑에서 공부하였다. 슈페어는 학업에 두각을 나타내 졸업 시험을 통과한 후 22살에 테세노프의 조수가 되었다. 이것은 상당한 영예였다. 슈페어는 테세노프 대신 강의하기도 했다. 1928년 집안 사람들이 반대하는데도 마가레테 베버와 혼인했다.

나치 건축가[편집]

슈페어는 젊었을 때는 정치에 무관심했다고 술회했으나 1930년 12월 자신의 학생들의 부탁으로 참가한, 베를린의 나치 집회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에 강한 인상을 받아 그 사람의 카리스마에 빠져들고 아돌프 히틀러의 이념에 동조하기 시작하여 1931년 3월 1일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에 가입했다.

슈페어는 처음에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내 지역 자동차 운전자 연합회장으로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직을 시작했다. 여기서 베를린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을 책임진 카를 한케 (Karl Hanke)를 알게 되었고 한케가 살던 자택을 무보수로 리모델링해 주었다. 한케는 이 일을 매우 고마워했다.

1931년 슈페어는 테세노프의 조수직을 사임하고 아버지의 인맥을 이용해 건축가로서 취직하려고 만하임으로 귀향했으나 슈페어는 형의 재산관리인의 자리밖에 구할 수 없었다. 1932년 7월 슈페어는 베를린으로 가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의 국회의원 선거운동에 자원봉사하는 도중에서 한케의 소개로 괴벨스와 안사했고 괴벨스는 이 젊은 건축가에게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베를린 당사 리모델링을 맡겼다. 슈페어는 이 일를 마치고 만하임으로 돌아왔고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은 선거에 승리해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는 수상으로서 취임했다.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이 승리한 후 한케는 슈페어를 베를린으로 불렀고 새로 선전 장관에 임명된 괴벨스는 슈페어에게 선전부 재단장을 맡겼다. 1933년 5월 1일 노동절 행사도 슈페어가 꾸미게 되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슈페어의 작업에 매우 흡족했고 이 작업 덕분에 슈페어는 아돌프 히틀러와 만났다. 아돌프 히틀러에게 슈페어의 첫 인상은 매우 좋았고 당장 "당 집회의 예술上·기술上 공연 책임자"로서 임명했다.

슈페어는 수상 관저 리모델링을 맡았고 매일 슈페어에게서 공사 진척 상황을 보고받은 아돌프 히틀러는 어렸을 때부터 건축에 많이 관심했으므로 슈페어를 불러 많이 대화하고 만찬에 늘 초대할 정도로 슈페어의 성실성과 재능에 감동해 슈페어를 총애해 자신의 측근으로 두었다.

아돌프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은 슈페어에게 행정부에 관련된 건축 작업을 계속 맡겼고 슈페어는 이 작업을 훌륭하게 완수하면서 빠르게 승진해 일약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고위 인사 중 한 명이 되었다.

1934년에서 1939년[편집]

1934년 아돌프 히틀러는 슈페어를 건축부 수장으로 임명했다. 이 직위에서 슈페어의 첫 번째 일은 전임자 트로스트(Troost)가 죽은 탓에 마치지 못한 체펠린펠트 스타디움을 마무리였다. 이 스타디움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집회를 개최를 목적으로 뉘른베르크에 건설됐고 군중 34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슈페어는 이것을 수많은 조명 설치로써 준공해 많이 찬사받았다.

슈페어는 고대 희랍이나 로마의 유적처럼 수천 년 후 폐허가 되더라도 아름다운 가치가 남아 있는 건물을 건축하려고 했고 아돌프 히틀러는 여기에 동조해 제삼제국의 모든 중요한 건물이 이 개념으로 건축돼야 한다고 명령했다. 아돌프 히틀러와 슈페어는 여러 가지 대규모 건축을 구상했고 이런 것 중에는 4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게르만 스타디움"도 있었으나 이것은 구상에 그치고 만다.

슈페어는 집권 직후 시작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의 여러 가지 만행과 유혈극을 목격했으나 방관했고 후에 회고록에서도 그런 일이 자신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썼다.

슈페어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주경기장도 디자인 했고 1937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박람회의 독일관도 디자인했다. 슈페어는 독일館이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련방館 맞은편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소비에트연방館을 압도하듯이 설계했다. 나치 독일館과 소비에트연방館은 공동으로 박람회에서 금상을 차지했다.

1937년 아돌프 히틀러는 슈페어를 "제국 수도 총 건축 감독관"으로서 임명했고 이 자리는 아돌프 히틀러를 직속 상관으로 둔 고위직이었으며, 제국의회 의원을 자동으로 겸임하게 되어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세계를 정복하려는 야심에 가득 차 있었고 세계를 정복한 후 베를린을 '게르마니아'라는 이름의 세계 수도로 구상했다. 그리하여 베를린을 세계의 수도에 걸맞게 꾸미려고 했고 세부 계획을 슈페어에게 맡겼다. 슈페어는 아돌프 히틀러가 만족할 만한 웅장한 도시계획을 만들어냈다. 이런 것 중에는 군중 18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290m 돔 구조물과 120m 개선문이 있었다. 이런 것은 세계대전 발발로 모두 건설이 중단됐다.

1939년 아돌프 히틀러는 슈페어에게 현재 수상 관저가 있는 자리에 새로운 수상 관저를 건립해 달라고 요구했고 슈페어는 舊건물이 철거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건립을 시작해 구개월 만에 인상 깊은 건축물을 남겼다. 아돌프 히틀러가 완공된 건물의 위용에 압도될 정도였으나 이 웅장한 건물은 1945년 베를린 공방전에서 크게 손상을 입었고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련방 군대가 남은 건물마저 파괴했다. 이 건물의 남은 석재는 전쟁기념관 건축 재로로써 소용됐다.

슈페어는 이런 작업 도중에 크리스탈의 밤 같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의 유대인 탄압 운동을 알았지만 별다른 느낌 없이 방관했다.

1939년에서 1942년[편집]

슈페어는 전쟁이 발발하면 불가피하게 자신의 건축 프로젝트를 연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이어 벌어진 전쟁을 지지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자신의 부서를 독일 국방군에 지휘받게끔 한 슈페어는 파괴된 도로 수선이나 폭격 후 잔해 처리를 담당하는 신속 대응팀을 만들어 전쟁 물자의 원할한 수송을 도왔다. 독일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슈페어는 베를린과 뉘른베르크의 건설 프로젝트에 계속 매달릴 수 있었고 독일 육군과 공군을 배려한 건설도 슈페어의 감독 아래 진행됐다.

이런 슈페어의 명성은 타국에까지 알려져 1940년 소비에트연방의 스탈린은 슈페어를 모스크바로 초청했으나 슈페어가 웅장하고 새로운 모스크바를 설계해 줄지도 모른다는 아돌프 히틀러의 반대로 이 방문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슈페어는 소비에트연방 정복 실현 가능성을 懷疑했으나 아돌프 히틀러는 베를린 프로젝트는 반드시 실현된다면서 슈페어를 안심하게 했다.

군수 장관[편집]

1942년 2월 8일 군수 장관인 프리츠 토트가 비행기 사고로 죽고 아돌프 히틀러는 그의 후임으로 슈페어를 임명했다. 슈페어는 이런 행정직을 맡기를 주저했으나 아들포 히틀러가 강권해서 맡았다.

당시 독일 경제는 영국과 달리 아직 전시 체제로 들어가지 않았고 전쟁 물자 생산은 지지부진했으며, 일반 소비재는 전쟁 전처럼 생산되고 있었다. 슈페어는 이런 상황을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슈페어의 최대 후원자였고 슈페어는 이런 아돌프 히틀러를 등에 업은 큰 권력을 이용해 여러 가지 조직 개편과 행정 조치로 독일의 전쟁 물자 생산력을 크게 늘렸다. 이것은 독일군 최고 지도부도 찬사할 정도였다. 1943년 괴벨스는 자신의 일기에 "슈페어는 조직 능력의 천재이다"라고 쓰기도 하였다. 슈페어의 능력과 업적이 두각을 나타내서 1943년 말부터는 슈페어를 잠재성을띤 아돌프 히틀러의 후계군 중 한 명으로 간주하는 사람이 늘었다.

슈페어는 노동 부분 담당자로 한케를 임명하려고 했지만, 마르틴 보르만의 입김으로 프리츠 자우켈이 임명됐다. 슈페어는 여성 노동과 생산 효율을 늘리는 조치를 이용해 공업 생산을 증대하게 하려고 한 일변, 자우켈은 점령국에서 인력을 끌어다가 강제로 노역하게 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슈페어는 1943년 노예 노동으로 가동되는 로켓무기 V2 제조 공장을 방문해 그 열악한 현장에 충격받고 개선하라고 명령했으나 이것은 그다지 지켜지지 않았고 그 공장의 노동자는 반이 죽었다.

1943년까지 연합국은 제공권을 장악해 독일의 여자와 어린아이를 포함한 민간인이 거주하는 도시와 산업 시설에 전략상 무차별로 폭격하기 시작했다. 슈페어는 탁월한 관리 수완으로 폭격으로 줄어든 손실분을 거의 보충해 전쟁 물자 생산량은 도리어 늘어날 정도였다. 1943년에 독일의 탱크와 항공기 생산량은 전년보다 배에 달했으며, 잠수함을 건조하는 기간은 1년에서 2개월로 축소됐다. 독일의 생산량은 1944년 후반기부터 점감하기 시작한다.

1944년 1월 무릎 염증 합병증 탓에 직무를 떠나 와병한 슈페어가 없는 동안 슈페어의 잠재된 경쟁자인 괴링과 마르틴 보르만은 슈페어를 영원히 밀어내려고 했는데 SS 총수인 하인리히 힘러는 SS 소속 의사에게 명령해 슈페어를 돌보는 척하면서 외부와 격리해 감시했다. 4월에 이 사람들은 슈페어를 건축 담당에서 해임했다.

슈페어는 이에 항의해 아돌프 히틀러에 나머지 자리에서도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담은 편지를 보냈다. 슈페어의 능력은 군수 생산에 필수라서 공군 원수였던 에르하르트 밀히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사임을 말리라고 요청했다. 히틀러는 슈페어를 좋은 말로 달래는 편지를 밀히 便에 보냈고 슈페어는 이에 감동해 자리를 계속 맡았다. 4월 23일 아돌프 히틀러는 슈페어를 만나서 건축 부문도 계속 슈페어가 맡기겠다고 약속했다.

제삼제국 몰락[편집]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을 주모한 사람들도 슈페어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아돌프 히틀러 사후 구성할 내각 명단에 슈페어의 이름을 올리기도 했으나 그 사람의 이름 옆에 물음표와 "끌어들일 예정"이라고 표시돼서 슈페어는 무사할 수 있었다.

戰局은 계속 악화해 1945년 2월, 슈페어는 "패전했다."라고 결론하고 패전 후 사용될 식량과 물자를 모으는 작업에 착수했다. 1945년 3월 19일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과 점령지 초토화를 명령[2]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한 명령으로 말미암아 슈페어가 한 노력은 무력화했다. 슈페어는 아돌프 히틀러를 찾아가 패전했고 말했으나 아돌프 히틀러는 슈페어가 한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슈페어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네로 명령" 집행을 목적한 배타성 행정권을 달라고 했고 아돌프 히틀러는 이것을 승인했다. 슈페어는 이 행정권을 이용해 장군들이나 행정관리를 설득해 전후에 필요하게 될 사회 인프라와 산업 기반을 네로 명령에서 벗어나게 했다.

슈페어는 함부르크의 안전지대에 있었으나 베를린의 함락이 임박하자 아돌프 히틀러를 마지막으로 보려고 방문했다. 1945년 4월 22일 슈페어는 총통 방공호에 도착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슈페어와 독대해 오랜 시간 대화했고 자결 의사를 밝혔다. 슈페어의 회상록을 보면, 이 자리에서 슈페어는 자신이 "네로 명령"을 실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백했으나 자신은 아돌프 히틀러에게 끝까지 불변하는 충성을 다 바치겠다고 말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다음날 슈페어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고별하고서 총통 방공호를 떠나 함부르크로 돌아왔다. 자결한 아돌프 히틀러는는 유언장에서 슈페어 해임을 명령했다.

뉘른베르크 재판[편집]

독일처럼 진보하고 문명이 발달한 국가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악마 같은 통치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 답은 현대 기술에 있다. 라디오 같은 기술 발전과 보급으로 더는 멀리 지방관을 파견할 필요 없다. 그런 기술을 장악한 아돌프 히틀러는 직접·개별 통치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개인의 자유가 근본이 된다. 과연 앞으로도 그럴까?

이 전쟁은 원격 조정 로켓이 나오면서 끝났다. 10년 후면 대륙 간을 날 수 있는 로켓이 개발되리라. 무서울 정도로 정확히 발달한다. 원자폭탄도 개발되었다. 뉴욕의 백만 명을 몇 초 만에 죽일 수 있으리라. 대규모 전쟁이 인류가 이룩한 문화와 문명을 파괴하리라. 그래서 이 재판이 그런 재앙을 막아야 한다. 신이여 우리 독일과 인류 문화를 보존하소서!

—슈페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의 최후 변론

아돌프 히틀러 서거 후, 슈페어는 아돌프 히틀러의 유언에 따라 칼 되니츠가 대통령이 된 소위 플렌스부르크 정부에 참여했다. 5월 15일 미합중국 군대는 슈페어에게 항공전 관련 정보를 제공하라고 요구했고 슈페어는 수락해 많은 사안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다. 5월 23일 연합국은 플렌스부르크 행정부 각료들을 모조리 체포하고서 해체했다. 이것으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이 집권한 독일은 공식으로 종말을 맞았다.

슈페어도 체포·구금됐고 9월에 뉘른베르크에서 열리는 전범 재판에서 전범으로 기소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슈페어는 이 재판에서 기소할 수 있는 혐의 4개에 모두 해당됐다.

  1. 전쟁 음모
  2. 전쟁 개시
  3. 전쟁범죄
  4. 반인륜적 범죄

이 재판을 목격한 미합중국 언론인 윌리엄 샤이러는 후에 자신이 펴낸 저서 《"제3제국의 흥망"》에서 주요한 피고인들의 재판 태도를 기록해 슈페어가 "피고인들 중에서 가장 솔직했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지 않았다."라는 인상을 기록했다. 슈페어는 이 재판에서 1945년 초에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을 망친다고 결론하고 자신이 직접 총통 방공호에 독가스를 주입해 아돌프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환기구가 높은 굴뚝으로 보호돼 실패했다고 진술하기도 하였다.

슈페어는 위 네 가지 혐의 중 전쟁범죄와 반인륜적 범죄에 유죄로 판결받았고 나머지 혐의는 무죄로 판결됐다. 1946년 10월 슈페어는 징역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슈페어가 아돌프 히틀러에게 솔직하게 패전했다고 직언할 용기가 있다는 사실과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아돌프 히틀러의 네로 명령 실행을 저지했다는 점을 명시해서 이런 행위가 이 슈페어가 사형을 면한 이유가 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 재판에서 슈페어를 제외하면 폴란드 총독을 지낸 한스 프랑크만이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치하 행위를 반성했었으나 한스 프랑크에게는 사형이 선고됐다.

전범 재판에서, 행방불명돼 궐석재판이 된 보르만 포함한 12명은 사형이 선고돼 집행됐고 3명은 무죄로 판결로 석방됐다. 슈페어를 위시해 7명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복역[편집]

1947년 7월 18일 슈페어는 이감된, 독일 베를린에 소재한 슈판다우 교도소에서 복역을 시작했다. 독서로 복역 기간을 보냈고 회고록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1954년 슈페어는 회고록 《회상》[3]을 탈고했다. 슈페어의 예술상 재능을 높이 평가한 여러 외국의 저명한 인사들[4]이 슈페어의 조기 석방을 청원했으나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련방이 감형을 반대해서 그 사람은 1966년 10월에 형기 20년을 모두 마치고서 석방됐다.

석방 후[편집]

슈페어의 석방은 전 세계의 화제가 되었다. 1966년 11월 슈페어는 슈피겔의 긴 인터뷰에 응했다. 여기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의 범죄행위에 개인상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힌 슈페어가 펴낸,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이 집권한 시대를 다룬 다른 책 두 편은 역사가들에게 좋은 자료가 된다. 슈페어는 책으로 펴낸 인세 상당액을 유대인 자선단체에 기부했는데 혹시 거절당하거나 위선자라는 말을 들을까 봐 익명으로 기부했다. 회고록에 "자신은 아돌프 히틀러에게 끝까지 불변하는 충성을 다 바치겠다고 말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라고 썼던 슈페어는 석방 후에 자신이 쓴 저서에서 아돌프 히틀러를 "범죄자"라고 한 묘사로 말미암아 전직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친구들과 멀어졌다. 슈페어는 역사가들과 언론들의 인터뷰 요청에 자주 응했다. 1973년 10월에는 적국이었던 영국을 방문했다. 영국 행정부는 처음에 슈페어를 공항에서 억류했으나 후에 그 사람에게 48시간 체제하라고 허가했다. 이 체제 시간 BBC와 인터뷰한 슈페어는 1981년 9월 1일 중풍으로 죽었다.

바깥고리[편집]


  1. Heinrich Tessenow
  2. '네로 명령'
  3. Erinnerungen, 영문 제목은 《Inside the Third Reich》
  4. 이 사람들 중에는 프랑스의 대통령 샤를 드골도 포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