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슈페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알베르트 슈페어

베르톨트 콘라트 헤르만 알베르트 슈페어 (Berthold Konrad Hermann Albert Speer, 1905년 3월 19일 ~ 1981년 9월 1일)은 독일의 정치가이자 건축가이다. 슈페어는 히틀러의 측근으로서 나치 독일의 군수장관을 지냈으며, 후에 뉘른베르크 재판에 전범으로 회부되었고, 20년의 복역후 석방되었다. 슈페어는 한스 프랑크와 함께 자신의 과오와 책임을 시인하고 사죄한 단 두 명의 나치 고위직이다.

초기 이력[편집]

독일 만하임의 부유한 중류계급의 건축가 가정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수학자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아버지의 강권으로 가업인 건축가로서의 길을 택하였다. 1923년 독일을 덮친 초인플레이션으로 아버지의 재정사정이 악화되어 보통대학인 칼스휴 대학에서 건축공부를 시작하였으나, 아버지의 사업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명문인 뮌헨 기술대학으로 편입하였다. 1925년 다시 베를린 기술대학으로 편입하여 유명한 건축가였던 하인리히 테세노프 (Heinrich Tessenow) 밑에서 공부하였다. 슈페어는 학업에 두각을 나타내어 졸업시험을 통과한후 22살의 나이로 테세노프의 조수가 되었다. 이는 상당한 영예였다. 슈페어는 테세노프의 강의를 대신맡기도 하였다. 1928년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가레테 베버와 결혼했다.

나치 건축가[편집]

슈페어는 젊었을때는 정치에 관심 없었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1930년 12월 자신의 학생들의 부탁으로 베를린의 나치 집회에 참가하였다. 여기서 히틀러의 연설에 강한 인상을 받아 그의 카리스마에 빠져들고 히틀러의 이념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31년 3월 1일 나치 당에 가입하였다.

슈페어는 처음에 나치당 내 지역 자동차 운전자 연합의 회장으로 나치당의 당직을 시작하였다. 여기서 베를린 나치 당의 책임자인 카를 한케 (Karl Hanke)를 알게 되었고, 한케가 살고 있던 자택의 리모델링을 보수없이 해주었다. 한케는 이일을 매우 고마워했다.

1931년 슈페어는 테세노프의 조수직을 사임하고, 아버지의 인맥을 이용하여 건축가로 취직하려고 고향인 만하임으로 갔다. 그러나 슈페어는 형의 재산관리인의 자리밖에 구할 수 없었다. 1932년 7월 슈페어는 베를린으로 가서 나치 당의 국회의원 선거운동에 자원봉사하였다. 이 와중에서 한케의 소개로 괴벨스와 안면을 트게 되었고, 괴벨스는 이 젊은 건축가에게 나치 당 베를린 당사의 리모델링을 맡겼다. 슈페어는 이를 마치고 만하임으로 돌아왔고, 나치 당은 선거에 승리하여 1933년 1월 히틀러는 수상으로 취임했다.

나치 당이 승리한 후 한케는 슈페어를 베를린으로 불렀고, 새로 선전장관에 임명된 괴벨스는 슈페어에게 선전부의 재단장을 맡겼다. 또한 1933년 5월 1일 노동절의 행사도 슈페어가 꾸미게 되었다. 히틀러는 슈페어의 작업에 대해 매우 마음에 들어했고, 이 작업때문에 슈페어는 히틀러와 만나게 되었다. 히틀러에게 슈페어의 첫 인상은 매우 좋았고, 당장에 "당 집회의 예술 및 기술적 공연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슈페어는 다시 수상 관저의 리모델링을 맡았으며, 히틀러는 매일 슈페어로부터 일의 진척상황을 보고받았다. 히틀러는 슈페어의 성실성과 재능에 감동받아 슈페어를 총애하게 되었으며, 자신의 측근인사로 두게 되었다. 어렸을때부터 건축에 관심이 많았던 히틀러는 슈페어를 불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히틀러는 항상 슈페어를 저녁식사에 초대할 정도였다.

히틀러와 나치 당은 슈페어에게 계속 정부에 관련된 건축 작업을 맡겼고, 슈페어는 이를 훌륭하게 완수하였다. 이와 동시에 슈페어는 빠르게 승진하여 일약 나치 당의 최고위 인사 중 한명이 되었다.

1934년-1939년[편집]

1934년 히틀러는 슈페어를 건축부의 수장으로 임명하였다. 이 직위에서 슈페어의 첫 번째 일은 전임자 트로스트(Troost)가 사망하여 마치지 못한 체펠린펠트 스타디움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이 스타디움은 나치 집회를 개최를 목적으로 뉘른베르크에 지어졌으며 34만명의 군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 슈페어는 이를 수많은 조명을 설치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여 많은 찬사를 들었다.

슈페어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유적들처럼 수천년 후 폐허가 되더라도 미적 가치가 남아있는 건물을 건축 하려고 했고, 히틀러는 여기에 동조하여 모든 제3제국의 중요한 건물들이 이 개념으로 지어져야 한다고 명령하였다. 히틀러와 슈페어는 여러가지 대규모 건축의 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 중에는 4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게르만 스타디움" 같은 것도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이는 구상에 그치고 만다.

슈페어는 집권 직후부터 시작된 나치의 여러 가지 만행과 유혈극을 목격했으나, 그냥 방관하는 태도를 보였고, 후에 회고록에서도 그런 일들이 자신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썼다.

슈페어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주경기장도 디자인 했으며, 1937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박람회의 독일관도 디자인했다. 슈페어는 독일관이 소련관 맞은편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소련관을 압도하게 보이는 것처럼 설계했다. 독일관과 소련관은 공동으로 박람회에서 금상을 차지했다.

1937년 히틀러는 슈페어를 "제국수도 총건축 감독관"으로 임명하였으며, 이자리는 히틀러를 직속 상관으로 둔 고위직이었다. 또한 이 자리는 제국의회의 의원을 자동으로 겸임하게 되어 있었다.

히틀러는 세계를 정복하려는 야심에 가득차 있었으며 세계를 정복한 후 베를린을 '게르마니아'라는 이름의 세계 수도로 구상했다. 그리하여 베를린을 세계의 수도에 걸맞게 꾸미려고 하였으며, 세부적인 계획을 슈페어에게 맡겼다. 슈페어는 히틀러가 만족할만한 웅장한 도시계획을 만들어냈다. 이들 중에는 18만명의 군중을 수용할 수 있는 290m의 돔구조물과 120m의 개선문이 있었다. 이런 것들은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모두 건설이 중단되었다.

1939년 히틀러는 슈페어에게 현재 수상관저가 있는 자리에 새로운 수상관저를 건립해달라고 요구했고, 슈페어는 옛 건물이 철거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건립을 시작하여 9달 만에 인상적인 건축물을 남겼다. 히틀러가 건물이 완공된 것을 보고 그 웅장함에 압도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 건물은 1945년 베를린 공방전에서 크게 손상을 입었고, 소련군이 남은 건물마저 파괴하였다. 이 건물의 남은 석재들은 전쟁기념관으로 쓰이게 되었다.

슈페어는 이런 작업 중의 와중에서 크리스탈의 밤과 같은 나치의 유대인 탄압 운동을 알고 있었지만 별다른 느낌없이 방관만 하고 있었다.

1939년-1942년[편집]

슈페어는 전쟁이 발발하면 자신의 건축 프로젝트의 연기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고도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이어 벌어진 전쟁을 지지하였다.

전쟁이 발발하자 슈페어는 자신의 부서를 독일 국방군의 지휘를 받도록 하였다. 슈페어는 파괴된 도로수선이나 폭격 후의 잔해처리를 담당하는 신속대응팀을 만들어 전쟁물자의 원할한 수송을 도왔다. 독일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슈페어는 계속 베를린과 뉘른베르크의 건설 프로젝트에 매달릴 수 있었다. 또한 독일 육군과 공군을 위한 건설일도 슈페어의 감독 아래 진행되었다.

이러한 슈페어의 명성은 다른 나라에까지 알려져 1940년 소련의 스탈린은 슈페어를 모스크바로 초청하였다. 그러나 슈페어가 웅장하고 새로운 모스크바를 설계해 줄지도 모른다는 히틀러의 반대로 이 방문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슈페어는 소련 정복의 실현 가능성에 의문을 품었으나, 히틀러는 베를린 프로젝트는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하여 슈페어를 안심시켰다.

군수장관[편집]

1942년 2월 8일 군수장관인 프리츠 토트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고, 히틀러는 그 후임으로 슈페어를 임명했다. 슈페어는 이러한 행정직을 맡는 것을 주저했으나, 히틀러의 강권으로 맡게 되었다.

당시 독일의 경제는 영국과는 달리 아직 전시 체제로 들어가지 않았고, 전쟁물자의 생산은 지지부진했으며, 일반소비재는 전쟁 전과 마찬가지로 생산되고 있었다. 슈페어는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히틀러는 슈페어의 가장 큰 후원자였으며, 슈페어는 이런 히틀러를 등에 업은 큰 권력을 가지고 여러가지 조직개편과 행정조치로 독일의 전쟁물자 생산력을 크게 늘렸다. 이는 독일군 최고 지도부도 찬사를 보낼 정도였다. 1943년 괴벨스는 자신의 일기에 "슈페어는 조직능력의 천재이다"라고 쓰기도 하였다. 슈페어의 능력과 업적이 두각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1943년 말부터는 슈페어를 잠재적인 히틀러의 후계군의 한명으로 보는 사람이 늘어났다.

슈페어는 노동 부분 담당자로 한케를 임명하려고 했지만, 마르틴 보르만의 입김으로 프리츠 자우켈이 임명되었다. 슈페어는 여성 노동과 생산 효율을 늘리는 조치를 통해 공업생산을 증대시키려고 한 반면, 자우켈은 점령된 나라에서 인력을 끌어다가 강제노역을 시키는 정책을 실시했다. 슈페어는 1943년 노예노동으로 가동되는 로켓무기 V2 제조공장을 방문하여 그 열악한 현장에 충격을 받고 개선조치를 취하도록 명령했으나, 이것은 그다지 지켜지지 않았고, 그 공장의 노동자는 반이 죽었다.

1943년까지 연합국은 제공권을 장악하여 독일의 도시와 산업시설에 전략폭격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슈페어는 탁월한 관리 수완으로 폭격으로 줄어든 손실분을 거의 보충하여 전쟁물자의 생산량은 도리어 늘어날 정도였다. 1943년에 독일의 탱크와 항공기 생산량은 전해의 두 배에 달했다. 또한 잠수함을 건조하는 기간은 1년에서 두달로 축소되었다. 독일의 생산량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1944년 후반기부터였다.

1944년 1월 슈페어는 무릎 염증의 합병증때문에 직무를 떠나 와병하게 되었다. 슈페어가 없는 동안 슈페어의 잠재적 경쟁자인 괴링과 마르틴 보르만은 슈페어를 영원히 밀어내려고 했다. 반면 SS 총수인 하인리히 힘러는 SS소속 의사에게 명령해 슈페어를 돌보는 척하면서 외부와 격리시켜 감시하였다. 4월에 이들은 슈페어를 건축담당에서 해임하는 데 성공했다.

슈페어는 이에 항의하여 히틀러에 나머지 자리에서도 사임을 하겠다는 의사를 담은 편지를 보냈다. 슈페어의 능력은 군수생산에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공군 원수였던 에르하르트 밀히는 히틀러에게 사임을 말리라고 요청하였다. 히틀러는 슈페어를 좋은말로 달래는 편지를 밀히를 통해 보냈고, 슈페어는 이에 감동하여 자리를 계속 맡게 되었다. 4월 23일 히틀러는 슈페어를 만나서 건축부문도 계속 슈페어가 맡을 것임을 약속했다.

제3제국의 몰락[편집]

1944년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주모자들도 슈페어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히틀러 사후 구성할 내각의 명단에 그의 이름을 올려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름 옆에 물음표와 함께 "끌어들일 예정임"이라고 표시되어 있어서 슈페어는 무사할 수 있었다.

전국은 계속 악화되어 1945년 2월, 슈페어는 "전쟁은 패배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패전 후 사용될 식량과 물자를 모아두는 작업에 착수했다. 1945년 3월 19일 히틀러는 독일과 점령지에서의 초토화 명령(소위 "네로 명령")을 내렸다. 히틀러의 명령으로 슈페어의 노력은 무력화 되었다. 슈페어는 히틀러를 찾아가 전쟁은 졌다고 말했으나 히틀러는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슈페어는 히틀러에게 "네로 명령"의 집행을 위한 배타적인 행정권을 달라고 했고, 히틀러는 이를 승인했다. 슈페어는 이 행정권으로 장군들이나 행정관리를 설득하여 전후에 필요하게 될 사회인프라와 산업기반을 네로 명령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슈페어는 함부르크의 안전지대에 있었으나, 베를린의 함락이 임박하자 히틀러를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방문했다. 1945년 4월 22일 슈페어는 총통 방공호에 도착했다. 히틀러는 슈페어와 독대하여 오랜 시간 이야기 했고, 자살의사를 밝혔다. 슈페어의 회상록에 의하면 이 자리에서 슈페어는 자신이 "네로 명령"을 실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그러나 자신은 히틀러에게 끝까지 변함없는 충성을 바칠 것이라고 말하자, 히틀러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다음날 슈페어는 히틀러에게 작별인사를 한 후 총통 방공호를 떠나 함부르크로 돌아왔다. 히틀러는 자살했고, 히틀러는 남긴 유언장에서 슈페어를 해임할 것을 명령했다.

뉘른베르크 재판[편집]

독일과 같이 진보되고 문명화된 국가에서 히틀러의 악마적 통치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 답은 현대 기술에 있다. 라디오와 같은 기술 발전과 보급으로 더 이상 멀리 지방관을 파견할 필요 없다. 그런 기술을 장악한 히틀러는 직접적, 개별적 통치를 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개인의 자유가 근본이 된다. 과연 앞으로도 그럴 것인가?

이 전쟁은 원격조정 로켓이 나오면서 끝났다. 10년 후면 대륙 간을 날 수 있는 로켓이 개발될 것이다. 무서울 정도로 정확히 발달하고 있다. 원자탄도 개발되었다. 뉴욕의 백만 명을 몇 초 만에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대규모 전쟁이 인간 문화와 문명을 파괴할 것이다. 그래서 이 재판이 그런 재앙을 막아야 한다. 신이여 우리 독일과 인간 문화를 보존하소서!

—슈페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의 최후 변론

히틀러의 죽음 이후, 슈페어는 히틀러의 유언에 따라 칼 되니츠가 대통령이 된 소위 플렌스부르크 정부에 참여하였다. 5월 15일 미군은 슈페어에게 항공전에 관련된 정보를 제공할 것을 요구했고, 슈페어는 수락하여 많은 사안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5월 23일 연합국은 플렌스부르크 정부의 각료들을 모조리 체포하고 이를 해체했다. 이것으로 나치 독일은 공식적으로 종말을 맞았다.

슈페어도 체포되어 구금되어 있었고 9월에 뉘른베르크에서 열리는 전범재판에서 전범으로 기소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슈페어는 이 재판에서 기소할 수 있는 4개의 혐의에 모두 해당되었다.

  1. 전쟁의 음모를 꾸민것
  2. 전쟁을 개시한 것
  3. 전쟁범죄
  4. 인간성에 반하는 범죄

이 재판을 목격한 미국 언론인 윌리엄 샤이러는 후에 자신이 펴낸 저서 "제3제국의 흥망"에서 주요 피고들의 재판태도를 기록하여, 슈페어가 "피고들 중에서 가장 솔직했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기록했다. 슈페어는 이 재판에서 1945년 초에 히틀러가 독일을 망치고 있다고 결론내리고 자신이 직접 총통 방공호에 독가스를 주입하여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환기구가 높은 굴뚝으로 보호되어 있어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였다.

슈페어는 위의 네 가지 혐의 중 전쟁범죄와 인간성에 반하는 범죄에 대해 유죄판결을 받았고 나머지 혐의는 무죄로 판결되었다. 1946년 10월 그는 징역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슈페어가 히틀러에게 솔직하게 전쟁이 패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졌음과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히틀러의 네로 명령의 실행을 저지했다는 점을 명시하였다. 그래서 이런 행위가 이 슈페어가 사형을 면한 이유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재판에서 슈페어를 제외하면 폴란드 총독을 지낸 한스 프랑크만이 나치 치하의 행위에 대해 반성했었다. 그러나 한스 프랑크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전범재판에서 12명(행방불명되어 궐석 재판이 된 보르만 포함)은 사형이 선고되어 집행되었고, 세명은 무죄판결로 풀려났다. 슈페어 등 7명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복역[편집]

1947년 7월 18일 슈페어는 독일 베를린의 슈판다우 교도소로 이감되었고, 그곳에서 복역생활을 시작하였다. 독서로 복역기간을 보냈고, 회고록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1954년 슈페어는 《회상》(Erinnerungen, 영어제목은 《Inside the Third Reich》) 이라는 제목이 붙은 회고록을 탈고하였다. 슈페어의 예술적 재능을 높이 평가한 여러 외국의 저명 인사들(이들 중에는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도 포함되어 있었다)이 슈페어의 조기석방을 청원하였으나, 소련의 감형 반대로 그는 결국 1966년 10월, 20년의 형기를 모두 마치고서야 석방될 수 있었다.

석방 이후[편집]

슈페어의 석방은 전 세계의 화제가 되었다. 1966년 11월 슈페어는 슈피겔의 긴 인터뷰에 응했다. 여기서 그는 나치의 범죄행위에 대해 개인적 책임을 통감함을 밝혔다. 그는 나치 시대를 다룬 다른 두 편의 책을 또 펴냈고, 이것은 역사가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슈페어는 책으로 펴낸 인세의 상당액을 유대인 자선단체에 기부했는데, 혹시 거절당하거나, 또는 위선자라는 말을 들을까봐 익명으로 기부했다. 슈페어는 자신의 저서에서 히틀러를 "범죄자"로 묘사했는데, 이런 묘사 때문에 전직 나치의 친구들과 멀어지게 되었다. 슈페어는 역사가들과 언론들의 인터뷰 요청에 자주 응했다. 1973년 10월에는 적국이었던 영국을 방문하였다. 영국정부는 처음에 그를 공항에서 억류하였으나, 후에 그에게 48시간 동안의 체제 허가를 내주었다. 슈페어는 이 짧은 체제 시간 동안 BBC와 인터뷰하기도 하였다. 슈페어는 1981년 9월 1일 중풍으로 사망하였다.

바깥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