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트 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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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트 요들

알프레트 요들(Alfred Jodl, 1890년 5월 10일 ~ 1946년 10월 16일)은 독일군인이다.

뮌헨의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1903년부터 포병 장교로 임관했고, 1차대전 중에는 서부전선에서 전투에 참가했다. 1917년에는 잠시 동부전선에 배속되었고, 이후 다시 서부전선에서 참모 장교로 근무했다.

종전 후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도 계속 군직을 유지했고, 공화국 말기에는 루트비히 베크 장군의 후원으로 소령이 되었다. 1938년에는 독일 국방군 총사령부의 작전 과장을 맡았고, 2차대전 직전에 소장으로 승진했다. 전쟁 초기에는 덴마크노르웨이 침공 계획을 입안했고, 해당 작전들의 성공으로 대장이 되었다.

1941년 독소전쟁 개전 후에는 히틀러의 불합리한 작전 지시와 명령에 대해 반대 입장을 들어 격론을 벌이기도 했으나, 상관인 빌헬름 카이텔과 함께 소련군 정치위원에 대한 무차별 사살을 용인하는 정치위원 명령과 연합군 특공대의 포로 자격 박탈을 골자로 하는 특공대 명령 등 교전 수칙을 위반하는 명령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1944년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 때는 현장에서 가벼운 부상을 입었고, 반란군에 대한 신속한 초동 조치를 취해 히틀러로부터 특별 상이 기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베를린 공방전 때도 베를린에 남아 작전을 지휘했으나, 패전 직전 플렌스부르크되니츠 내각으로 피신했다.

이후 되니츠의 특명을 받아 동부전선의 잔류 부대가 서부 연합군에 항복할 시간을 벌도록 휴전을 지연시키는 역할을 맡았으나, 연합군에 의해 간파되어 5월 7일프랑스 의 연합군 사령부에서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이 서명문은 소련 정부의 공식 허가를 얻지 않았다는 이유로 임시 항복 문서로 취급되었고, 다음날 베를린에서 빌헬름 카이텔이 서명한 문서가 정식 항복 문서로 채택되었다.

항복 후 플렌스부르크의 되니츠 내각에 잔류해 있었으나, 5월 23일에 연합군에 의해 내각 구성원 전체가 체포되면서 전쟁범죄자로 구속되었다. 이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모든 기소 항목에 대한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요들은 상관이었던 카이텔과 마찬가지로 총살형을 요구했으나, 결국 교수형으로 집행되었다.

사후 1953년에는 뮌헨 법정에서 요들의 미망인이 제기한 명예 회복 소송의 결과 모든 기소 항목에 대한 무죄가 선언되었으나, 며칠 뒤 미국 정부의 반대에 부딪혀 번복되었다. 이를 두고 미국의 월권 행위인지 서독의 오심인지를 놓고 논란이 빚어졌으나, 결국 무죄 선언을 번복한 재판부의 결정이 뒤집히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