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슈트라이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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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슈트라이허

율리우스 슈트라이허(독일어: Julius Streicher, 1885년 2월 12일~1946년 10월 16일)는 나치당 소속의 독일 언론인 겸 정치가이다.

생애[편집]

1차대전에 참전해 철십자장을 받았고, 종전 후 잠시 사회주의 운동에 참가했다. 1921년 뮌헨에서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감화되어 나치당에 입당했고, 1923년에는 자신이 편집장을 맡아 반유대주의 보급을 위한 대중지 《돌격수》를 창간했다.[1]

뮌헨 폭동 때는 히틀러와 함께 대열의 선두에 서서 쿠데타를 주도했고, 이를 계기로 히틀러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어 나치당 프랑코니아 주 담당관에 임명되었다. 반유대주의의 확장과 함께 데어 슈튀르머의 발행 부수도 증가하면서 슈트라이허의 인지도도 높아졌고, 1929년에는 프랑코니아 대관구지휘자(Gauleiter)에 임명되었다.[2]

1933년 나치당 집권 후 유대인 사업가나 상인이 운영하는 회사와 상점 등에 대한 불매 운동을 지시했고, 뉘른베르크 소재 시나고그의 강제 철거를 명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평소 보여준 조야한 언동이나 성적인 기행, 권력 과용 등의 행위가 계속 문제가 되었고, 헤르만 괴링 등 나치당 지도부와 벌인 권력 투쟁에서도 계속 밀리면서 2차대전 초기에 사실상 권력을 잃게 되었다.[3]

종전 직전에는 오스트리아에서 화가로 행세하며 잠적하려 했으나, 미군에 의해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슈트라이허는 전쟁 초기에 권좌에서 밀려나면서 홀로코스트나 전쟁 계획에 직접 가담할 수 없었다는 점을 들어 무죄를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그가 반유대주의의 확장에 적극 이바지했다는 점을 들어 '인도주의에 대한 죄'를 인정하고 사형을 선고했다.[4]

형은 다른 사형수들과 마찬가지로 교수형으로 집행되었으며, 형 집행 직전 "하일 히틀러!"라고 소리지르며, 유대인들과 연합군에 대한 비난과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5] 처형 과정에서는 나치 독일이 일으킨 전쟁으로 고통을 받아온 소련 측에서 사형수 전원에게 추가적인 고통을 주면서 질식사로 집행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사형수 전원이 질식사로 처형해달라는 소련측의 요구에 맞게끔 줄길이를 조절하여, 다른 사형수들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고통받으며 질식사했다.[6]

각주[편집]

  1. Bytwerk 2001, 5쪽.
  2. Bytwerk 2001, 8쪽.
  3. Franz-Willing 1962, 89쪽.
  4. Rees 2017, 22쪽.
  5. Dolibois 2000, 114쪽.
  6. Rees 2017, 22–23쪽.

참고 문헌[편집]

전임
빌헬름 그림(미텔프랑켄 대관구)
제1대 프랑켄 대관구 대관구지휘자
1929년–1940년
후임
한스 치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