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파울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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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파울루스

프리드리히 빌헬름 에른스트 파울루스 (독일어: Friedrich Wilhelm Ernst Paulus ,1890년 9월 23일 - 1957년 2월 1일)는 세계대전[1]에서 활약한 독일의 장군이다.

중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구주대전[2]에 종군했고 종전 후에도 군에 남아 주로 참모로서 일했다. 세계대전이 개시되자 참모본부에서 참모차장으로서 일하면서 독일군의 각종 작전을 입안했고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발터 폰 라이헤나우가 지휘한 제6군의 참모장으로서 복무했다. 라이헤나우가 남방집단군 최고사령관이 되자(그러나 그 직후 죽는다), 그 사람의 뒤를 이어 제6군의 사령관이 되었고 이는 그가 최초이자 최후로 맡은 야전 부대 지휘관이었다. 1942년 여름의 청색 작전에서 스텝 평원을 지나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군대을 격파하고 볼가강 유역의 스탈린그라드까지 도달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군대의 완강한 저항으로 시가전을 벌이던 중 천왕성작전, 고리작전 등에 의하여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군대에 역포위되어 2개월간 극한의 상황에서 처절하게 저항하였으나 제6군을 구원하고자 만슈타인이 계획한 겨울의 폭풍작전 이 결국 실패한 후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군대의 소토성 작전에 의한 대규모 공세에 밀려 결국 항복하였다. 항복하기 직전 히틀러에 의해 원수로서 승진하였다. 이는 자살하라는 무언의 암시였다[출처 필요](독일의 원수가 항복한 전례는 그때까지 없었다). 그 후에 비겁하게 포로가 되느니 자결해야 했다는 히틀러의 말을 전해듣고 그는 “보헤미아의 상병(히틀러의 최종 군계급이 상병이었다)을 위해서 죽을 수는 없지”라고 응수했다고 한다.[출처 필요]

항복 후 소련에서 포로로서 생활하다가 1944년 히틀러 암살미수사건이 터지자 소련이 지원하는 자유독일국가위원회의 회장이 되어 소련군의 선무공작[3]에 앞장섰다.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증인으로서 활동했다. 1953년 포로 생활에서 석방된 후 동독드레스덴에서 살다가 1957년 죽었다. 이 시기 경찰로서 근무했다고 전고됐으나 실제는 민간인 신분으로 동독 군사역사연구소장으로서 일했다.

각주[편집]

  1. 세계 경제공황 후, 전체주의 체제에 있던 독일ㆍ이탈리아ㆍ일본 등 군국주의 국가와 미국ㆍ영국ㆍ프랑스 등 사이에 일어난 세계성 규모의 전쟁. 1939년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여 시작돼 독일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간 전쟁,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었다. 1943년 9월에 이탈리아, 1945년 5월에 독일, 1945년 8월에 일본이 항복하면서 종전됐다. [유의어] 제이차세계대전·제이차대전.
  2. 독일ㆍ오스트리아ㆍ이탈리아의 삼국 동맹과 영국ㆍ프랑스ㆍ제정 러시아의 삼국 협상이 대립하여 일어난 세계적 규모의 전쟁. 1914년 7월에 사라예보 사건을 도화선으로 하여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오스트리아를 후원하는 독일이 세르비아를 후원하는 제정 러시아ㆍ프랑스ㆍ영국과 개전하여 시작되었다. 일본ㆍ루마니아ㆍ그리스ㆍ이탈리아가 삼국 협상 측에, 오스만 제국ㆍ불가리아가 삼국 동맹 측에 참전하여 전쟁이 확대되었는데 1918년에 독일이 항복하고 이듬해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어 끝났다. [유의어] 제일차대전·제일차세계대전·세계대전
  3. 전시나 사변으로 군대가 출병하여 적국의 영토를 점령하였을 때 그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을 군에 협력하게끔 하거나 최소한 적대하지 않게 하고자 행하는 선전ㆍ원조 따위 활동. 지방이나 점령지 주민의 민심을 안정하게 하고 국가의 정책을 이해하게 하려는 제반 활동을 운위한다.

가고문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