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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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 내전
ChineseCivilWarCollage.PNG
날짜 제1차 : 1927년 - 1936년
제2차 : 1946년 -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사실상 승리했다고 평가되나
중화민국 정부는 여전히 타이베이에서 존속
1979년 1월 1일 미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교 이후
사실상의 정전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정전협정이 정식으로 체결된 것은 아님)[1]
장소 중국 대륙과 부속 도서
결과 중국 대륙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중화민국 정부는 난징에서 타이베이로 천도.(국부천대)
교전국
중화민국측 :
중화민국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기 국민혁명군
국민당 기 중국 국민당
분단 이후
중화민국 중화민국
공산당측 :
중국 공산당 기 중국 공산당
중국 인민해방군기 중국 인민해방군
분단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지휘관
중화민국 장제스
중화민국 천청
중화민국 리쭝런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바이충시
중화민국 옌시산
중화민국 허잉친
중국 공산당 기 마오쩌둥
중국 공산당 기 주더
중국 공산당 기 저우언라이
중국 공산당 기 펑더화이
중국 공산당 기 리리싼
중국 공산당 기 린뱌오
중국 공산당 기 허룽
중국 공산당 기 엽전
중국 공산당 기 서해동
병력
430만 (1946년 7월)
365만 (1948년)
149만 (1949년)
120만 (1946년 6월)
280만 (1948년)
400만 (1949년)
피해 규모
약 150만 명 사상 및 실종 약 25만 명 사상 및 실종

국공 내전(중국어 정체: 國共内戰, 간체: 国共内战, 병음: guógòng neìzhàn, 영어: Chinese Civil War)은 1927년 이후 중국 국민당중국 공산당 사이에 일어난 두 차례의 내전을 말한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해방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전쟁의 결과로 본토에는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난징에 있던 중화민국 정부를 타이베이이전하였다.

보통 1927년에서 1936년까지를 제1차 국공 내전, 1946년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1949년까지를 제2차 국공 내전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종전 또는 휴전에 대한 합의가 없었고, 분단 이후로도 군사적인 충돌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는 점에서 제2차 국공 내전은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

배경[편집]

1911년 청조가 무너진 이후 중국은 위안스카이로 대표되는 군벌의 시대로 돌입하게 된다. 군웅 할거하는 군벌의 지배로부터 중국 북부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해 쑨원은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서방 국가들은 별다른 관심은 돌리지 않았고 이에 쑨원은 이제 공산주의 혁명이 완수된 신생 공산 국가인 소련으로 눈을 돌려 1921년 소련에 도움을 요청한다. 이 요구에 응한 블라디미르 레닌1923년 소련의 대표단을 상하이에 파견했고, 서로 교류하면서 이제 막 탄생한 중국 공산당중국 국민당은 군벌 세력으로 분열된 중국을 재통일하고 외세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제1차 국공 합작을 이루게 된다.

쑨원이 군벌과 대항하기 위해서는 군사력이 절실히 요구되었는데 쑨원은 장제스를 비롯한 몇몇 군인을 소련으로 파견하여 군사 기술을 배워 오도록 하는 한편 광저우 교외에 황푸군관학교를 세우고 자체적으로 현대적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시기에는 공산주의자국민당에 입당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국민당 내 공산당의 영향력이 매우 크게 작용하였다. 이 시기 저우언라이황푸군관학교의 정치부 교관이었고 마오쩌둥도 국민당의 요직을 맡고 있었다. 요컨대 공산당은 국민당 내에서 “정당 안의 또 다른 정당”으로 활동하고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북벌(北伐, 1926~1927)과 국민-공산당 분열[편집]

1925년 쑨원이 죽자 장제스는 국민당의 군대인 국민혁명군의 총사령관이 되었고, 군벌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중국 북부를 국민당의 영향 아래 두기 위해 북벌을 준비한다. 이 무렵 국민당은 우파좌파로 분열되었고 공산당은 계속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1926년 3월 중산함 사건으로 국민혁명군 내의 공산당원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국민당 내 우파(장제스 계열)와 좌파(공산당 계열)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 와중에도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은 민중의 지지로 후난 성, 후베이 성, 푸젠 성, 저장 성, 장시 성, 안후이 성의 6성을 국민당의 세력 안에 편입시켰으며, 우페이푸(吳佩孚), 쑨추안팡(孫傳芳) 등의 군벌을 격파하고 만주 군벌 장쭤린과 대치하였다.

1927년 3월 상하이노동자가 무장봉기하여 장제스 군대를 맞아들였지만, 공산주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싫어하는 상공인과 부유층 및 외세 의존 세력은 장제스에게 중국 공산당과 관계를 끊을 것을 강요하였다. 그해 4월 12일 장제스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처형을 벌여(4·12 사건) 중국 공산당은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지하로 숨어들었다. 이로써 제1차 국공 합작은 결렬되었고, 국민당과 공산당은 분열되어 내전 상태에 들어갔다.

반공산당 토벌전[편집]

장제스는 농촌 지역에서 끊임없이 세력을 키우고 자치 정부(소비에트)를 구성하는 공산군을 토벌하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대규모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이를 ‘토공전’(討共戰)이라 한다. 공산당의 군사 조직인 홍군은 종종 홍비(紅匪) 또는 공비(共匪)로 불렸다.

이러한 대규모 토벌 작전에도 불구하고 장제스의 국민혁명군홍군을 완전히 분쇄하지 못했는데 이는 인력과 물자가 부족한 홍군이 철저한 게릴라식 유격 전술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대규모 토벌전에서 국민혁명군은 종전의 토벌 방식을 바꾸어 대규모 진지, 토치카를 짓고 지구전적인 진지전을 펼쳤는데, 홍군은 이 전술에 말려들어 주요 근거지인 장시 성 해방구를 잃게 될 위험에 처하였다.

이때 홍군은 필사적인 후퇴 전술을 택해 중국 대륙을 돌아서 산시 성에 이르는 이른바 장정을 감행하고 국민혁명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새로운 근거지를 찾게 된다. 홍군의 주력은 무사히 옌안에 도착하고 그곳을 새로운 수도로 정하고 군벌 출신장쉐량과 대치했는데, 장쉐량은 공산당에 동조적이고 공산당이 주장하는 항일 정신에 경도되었다. 마침내 1936년 12월 장쉐량은 시안 사건을 일으켜 장제스를 설득,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 통일 전선이 성립하게 된다.

중일 전쟁[편집]

1937년 이후 일본 제국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공산당과 국민당은 제2차 국공 합작을 결성, 공동으로 일본군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홍군은 제8로군신사군으로 개편되어 국민혁명군에 소속되지만 사실상 장제스의 통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항일전을 벌였다.

이 항일 전쟁 기간 동안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은 일본군에 패하여 세력이 점점 약해져 갔고 홍군(팔로군, 신사군)은 세력이 점차 커졌다.

제2차 국공 내전[편집]

전쟁 승리 후 축배를 든 마오쩌둥장제스

일본이 패망한 직후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일본군의 무장 해제와 점령지 정리 등을 둘러싸고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오랜 전쟁에 지쳐 있던 양측은 내전을 피하기 위해 협상을 개시했다. 1945년 8월부터 약 한 달 반 정도 충칭에서 장제스마오쩌둥이 직접 만나 회담을 가졌고 10월에 양측의 협정이 맺어져서 내전을 피하고 정치의 민주화에 대한 합의를 도출했다.

그러나 양측의 긴장은 계속 고조되었고 미국의 마샬 장군이 중재하여 내전을 피하기 위해 양측을 조율하고 공동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협상이 1946년 1월부터 시작하였고 어느 정도 합의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를 인준하는 과정에서 국민당은 다시 합의안을 번복하고 공산당은 이에 항의하여 결국 합의안은 실패로 돌아갔다. 1946년 6월 국민혁명군은 본격적으로 공산당 지구를 침공하여 전면적인 내전을 개시하였다. 초기에 국민혁명군은 병력, 장비, 보급 등 모든 면에서 중국 인민해방군(홍군)보다 우세했고, 특히 미국의 지원을 받아 무장하고 있어서 내전은 곧 종식될 듯이 보였다. 특히 1947년 3월에는 후쫑난이 지휘한 20만의 병력이 중국 공산당의 본부가 있던 옌안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리하게 점령지를 늘린 국민혁명군은 병력을 지나치게 분산시키는 전략적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게다가 국민당 정부의 총체적 부패, 인플레로 인한 경제 붕괴, 그리고 이미 떠난 민심이 어우러져 1948년부터는 공산당 측에 유리하게 내전이 전개되었다. 1948년 가을 린뱌오가 지휘한 동북 인민해방군이 만주에서 국부군을 격파하는 것을 시작(요심전투)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힘의 균형이 깨졌다.

인민해방군1949년 1월 31일 베이징에 입성하였고, 파죽지세로 창 강(양쯔강)을 건너 4월 23일에는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을 함락시키고, 5월 27일 중국대륙 최대 도시 상하이까지 손에 넣었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국가주석에 취임하였다.

중국 인민해방군1949년 10월 14일에는 광저우를 접수하고, 11월 30일에는 중화민국 정부의 임시수도였던 충칭(重慶)마저 함락시켰다. 12월 10일 장제스는 국민당 정부의 대륙 최후 거점인 청두(成都)에서 타이완(臺灣, 대만)으로 탈출했고, 12월 27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청두에 입성함으로써 중화민국은 대륙에서 완전히 쫓겨났다.

1949년 10월 인민해방군은 중국대륙과 타이완 섬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인 진먼 섬(金門島)을 공격하여 고령두(古寧頭) 전투(1949.10.24 - 10.26)를 벌였으나 중화민국 국군에 대패하여 타이완 섬과 이 섬에 대한 중화민국 정부의 지배가 굳어졌다. 이 후에도 1958년 8월 23일부터 10월 5일까지 중국 인민해방군은 무려 47만발에 이르는 포탄을 이 섬에 쏟아부었으나 중화민국 국군에 패하였고(진먼 포격전), 중공군의 진먼 섬에 대한 포격은 1978년까지 20년간 계속되었다.

1950년 하이난 섬(海南島) 전투(1950.3.5 - 4.30) 및 홍콩 근해의 완샨군도(萬山群島) 전투(1950.5.25 - 6.27)에서 중화민국 국군중국 인민해방군에 잇따라 패퇴하고, 상하이 근해의 저우산(舟山)군도(1950.5.16)와 다천(大陳) 섬(1955.2.11)에서 중화민국 국군이 철수함으로써 양안(兩岸) 사이에 현재와 같은 경계가 만들어졌다.

조선인의 활약[편집]

1945년 이후 국공내전 시기에 동북삼성에서 중공군(중국 인민해방군) 측으로 참전한 조선인의 수는 6만 3천여명으로 연변에서만 3만 5천여명이 참전하였다. 이는 연변 총참군의 85%에 달하는 숫자로 국공 내전시 조선족은 항일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동북삼성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혁명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직접 병력을 파견하여 전투에 참여시키고 만포진, 청진, 정주 등에는 중국 인민해방군의 후방기지를 세워 훈련기지와 병원 등을 제공했다. 이 곳에 주둔했던 중국 인민해방군의 숫자는 1947년 당시 5만 ~ 7만 5천에 달하였다. 이러한 도움이 없었다면 중국 인민해방군국민혁명군에 포위되어 큰 위기에 처했을 것이라고 추정될 정도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착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2] 이후 한국 전쟁 직전, 중공군에 속했던 조선인들은 대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군대인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었다.

관련 항목[편집]

주석[편집]

  1. BBC NEWS: China's stance
  2.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242쪽, 나남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