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벌 (국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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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 (국민당)
 국민혁명군병사들의 허베이 진군
Republic of China Army Flag.svg 국민혁명군병사들의 허베이 진군
날짜 1926년 - 1928년
장소 중국 북부
결과 중국 국민당 국민당의 승리
교전국
중국 국민당 중국 국민당
Flag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svg 중국 공산당
Republic of China Army Flag.svg 국민혁명군
중화민국 중화민국 북양 정부
Flag of Fengtian clique.png 봉천파 군벌
Beiyang star.svg 직예파 군벌
지휘관
중화민국 장제스
중화민국 리쭝런
중화민국 펑위샹
중화민국 옌시산
Flag of Fengtian clique.png 장쭤린
Beiyang star.svg 우페이푸
Beiyang star.svg 쑨촨팡


북벌(Northern Expedition, 중국어: 北伐, 병음: běi fá)은 1926년부터 1928년까지 중국 국민당중국 공산당협력하면서 중국에 있던 군벌을 타도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말한다. 이는 신해혁명 이후 지지 부진하던 중국 혁명을 가속화하고 봉건제와 전제군주정을 타도하기 위해 이루어졌고 결국 북양군벌(북양 정부)을 몰아내고 국민당이 중국을 재통일하게 되었다.

배경[편집]

1924년 1월 쑨원의 중국 국민당은 제1차 국공합작의 일환으로 공산당원을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시키고 모든 혁명역량을 반(反)제국주의, 반(反)봉건주의, 반(反)군벌에 맞추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혁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군사력의 강화는 필수적인 것으로 보고 광저우에서 황푸군관학교가 창설되었고, 이듬해에는 국민혁명군이 설립되었다.

쑨원의 사후 국민당의 지도권은 장제스에게 돌아갔고 그는 2차례에 걸져 광둥 성광시 성에 출병하여 국민당의 세력으로 통합시켰다. 이로써 국민당의 배후가 탄탄해지자 북양군벌을 몰아내기 위한 본격적인 군사행동을 단행하기로 했다. 이 북벌의 주요 목표는 북양정부의 두 파벌인데 다음과 같다.

5·30 운동[편집]

쑨원이 사망한 뒤 정세가 북양 정부에 불리해졌고, 국민당이 중국 민중의 유일한 희망이 되어갔다. 1925년 5.30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반제국주의 및 반군벌 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대사건이었다.[1]

1925년 5월 15일 상하이에 있는 일본인 소유의 방적공장에서 노동쟁의가 진행되던 도중에 일본인 감독이 노동조합 지도자 한 명을 사살하고 10여 명에게 부상을 입힌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 격분한 상해의 학생들이 노동자 지원과 희생자 구제를 외치며 가두선전을 시작했다. 청두에서도 봉천파 군벌의 보안대가 일본인 소유의 방적공장에서 쟁의 중이던 노동자 8명을 사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1]

이에 따라 5월 30일 상해에서 약 2천 명의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노동자 사살에 항의하고 "조계 회수","체포된 학생 석방" 등을 외쳤다. 이때 영국 경찰이 100여 명을 체포했고, 이에 항의해 남경로에 모인 1만여 학생, 시민에게 발포해 13명이 사망했다.[1]

이 사건을 계기로 반제국주의 운동이 상해 전역에서 일어났으며 영국,일본,미국,이탈리아는 상해에 군인들을 상륙시켰다. 이후 6월 10일까지 9차례의 발포 사건이 발생해 32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반제국주의 운동은 전국의 주요도시들로 퍼져갔다. 반제국주의 운동이 반군벌 운동으로 전환될 것을 두려워한 북양 정부는 열강에 대해 불평등조약의 개정과 관세지주권의 보장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는 선전용에 불과한 것이었다.[1]

국민정부의 성립[편집]

쑨원의 사망으로 구심점이 사라진 국민당은 1925년 7월 1일 집단지도체제의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8월 20일 광동에서 국민당 좌파이자 재정부장인 랴오중카이가 암살됐는데, 이사건은 국민당 집단지도체제가 붕괴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랴오중카이 암살사건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국민당에는 왕징웨이-장제스 연합지도체제가 형성됐다. 이어 국민혁명군을 편성한 국민정부는 9월 28일 광동성 전역을 장악하기 위해 제2차 동정을 개시해, 12월 초에는 광동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1]

한편 국민당 우파의 이론적 지도자인 대계도는 "계급투쟁은 삼민주의와 상용할 수 없다"면서 공산당을 국민당에서 배제하자고 주장했다. 국민당의 반공적 간부들은 1925년 11월 23일 베이징 교외의 서산에서 회의를 열어 공공연히 광동의 당 중앙과 대립했다. 이들은 '서산회의파'라 불렸다.[1]

1926년 1월 1일부터 19일까지 광저우에서 개최된 국민당 2전대회는 '서산회의 관계자들을 징계하고 소련과 연합한다'는 방침을 표명했다. 2전 대회 이후에는 국민혁명군의 각 군과 장제스 사이의 대립이 심화됐다. 장제스가 군사권을 통일시키고 장악해가는 것에 대해 각 군을 불만을 갖고 있었고, 장제스 직계의 제1군에서도 장제스의 친소, 친공적 입장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다.[1]

중산함 사건과 북벌의 시작[편집]

이러한 가운데 1926년 3월 20일 중산함 사건이 발생했다. 3월 18일 중국 공산당원이자 해군국 대리대표인 이지룡이 국민당의 군함인 중산함을 황포로 회앙시키자 장제스는 이를 자신에 대한 쿠테타로 간주해 3월 20일 이지룡을 비롯한 공산당원과 소련인 고문을 체포하고 연금시키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 사건으로 이어 왕징웨이가 정치일선에 물러나 잠적했다.[1]

중산함 사건 이후에 장제스는 국공합작을 고수하는 범위 안에서 당내 지도력을 강화해갔다. 6월 5일 국민혁명군 총사령으로 선출된 장제스는 7월 4일 광주에서 열린 국민당 제1계 임시중앙집행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중앙상무위원회 주석 겸 군인부장으로도 선출됐다. 이로써 당과 군을 실질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른 그는 북벌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1]

경과[편집]

1926년[편집]

북벌계획은 1926년 1월부터 활발히 논의됐는데, 이에는 막대한 군비가 소요되므로 소련의 군사적 지원이 긴요했다. 소련 대표로 국민당 정치고문을 맡고 있었던 미하일 보로딘은 북벌을 승인했다. 국민혁명군은 15만 명의 병력이 8개 군으로 편성된 형태로 구성돼 있었지만, 북벌 초기에 실제로 가용한 병력은 6만 5천 명 정도였다.[2]

1926년 7월 9일에 국민혁명군 총사령 장제스는 전군에 동원령을 내리고 "제국주의와 매국 군벌을 타도하여 인민의 통일정부를 건설"하기 위한 북벌 전쟁을 개시했다. 북벌의 1차 목표는 우한(武漢)을 점령하는 것과 펑위샹의 국민군과 합류하는 것이었다. 당시 양자강 일대에는 직예파인 오패부와 쑨촨팡 등이 할거하고 있었고, 북양 정부에서는 봉천파의 장쭤린이 장악하고 있었다.[2]

북벌군은 순조로이 북진했다. 부패한데다 서로 분열, 대립하고 있었던 북양 군벌군은 각개격파됐다. 먼저 호남으로 진격한 북벌군의 주력은 7월 11일에 장사(長沙)를 점령한데 이어 9월 6일과 7일에는 한양(漢陽)과 한구(漢口), 10월 10일에는 우한을 잇달아 점령해서 호남, 호북의 오패부 군대를 일소했다.[2]

장제스가 지휘한 중로군(中路軍)은 쑨촨팡의 주력군을 분쇄하면서 11월 8일 난창을 점령하고 강서성을 장악했다. 국민당의 북벌에는 많은 한국인 청년들이 혁명군으로 참여했는데[3], 난창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그들 가운데서 희생자가 많이 생겨나 한국인 희생자 추도회가 대대적으로 열리기도 했다. 12월 9일에는 장제스의 심복 하응흠이 지휘한 동로군이 복주를 점령했다.[2]

북벌군은 가는 곳마다 민중의 환영을 받았다. 민중은 적정파악, 길안내, 물자수송 등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북벌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봉기해 군벌군을 축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군벌이 무너진 지역에서는 노동자 농민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농민협회 회원이 급증했고, 노동자들은 무장규찰대를 결성했다. 북벌이 진행되는 동안 장제스는 투항하고 귀순하는 군벌 군대를 흡수해 20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게 됐고, 이에 따라 그의 개인적인 역량과 위상이 더욱 강화됐다.[2]

국민정부의 점령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그 지배권을 둘러싸고 국민혁명군 안에서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12월 13일 당정의 최고 정책결정기구로 성립된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와 국민정부위원회 임시연석회의'는 중앙당부와 국민정부를 무창에 둘 것을 결의했다. 이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반(反)장제스 성향의 인사와 중국 공산당 당원들이었다. 이 결정으로 성립된 우한 국민정부는 정권기반을 강화하는 노력을 기울였다.[2]

1927년[편집]

장제스는 우한 국민정부에 대항해 1927년 1월 3일 난창에서 '임시중앙정치회의'를 구성했고, 이 기구는 중앙당부와 국민정부를 남창에 둘 것을 결의했다. 우한 국민정부는 장제스의 군권이 당권을 제한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대중운동을 벌였고, 중국공산당도 2월에 들어서면서 공개적으로 '장제스는 연소(聯蘇), 용공(容共), 노농부조(勞農扶助)라는 손문의 3대 정책을 위반했다'고 공격했다.[4]

이러는 중에도 북벌은 계속되어 동로군이 1927년 2월 18일 항저우를 점령했다.[4]

장제스군이 상해에 육박하자 저우언라이 등의 지도를 받은 상하이 노동자들이 3월 21일 총파업과 함께 무장봉기를 일으켜 30시간의 시가전 끝에 상하이를 장악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이때의 노동자 무장봉기는 절강(浙江) 재벌을 중심으로 한 상해 자본가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절강재벌로부터 막대한 군자금을 지원받고 있던 장제스는 모종의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4]

3월 24일에는 중로군이 쑨촨팡의 본거지인 난징을 함락시켰는데 그 와중에 외국인이 거주하는 영사관, 주택, 교회에 대한 습격이 일어나 영국인, 프랑스인, 미국인 등 외국인 6명이 살해됐다. 이 사건이 국민혁명군의 소행인지, 패주하던 쑨촨팡 군의 소행인지 불분명했지만, 영국과 미국의 군함들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양자강에서 시내로 포격해서 중국인 군관과 민간인 2천 명이 죽거나 다쳤다.[4]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등 5개국 공사들은 국민혁명군에 대해 사죄, 배상,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한편 이 문제가 기한 내에 해결되지 않으면 무력으로 개입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일본의 외무상인 시데하라 기주로는 '외교적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시데하라의 태도는 일본 국내에서 "연약외교"라는 맹비난을 받았고, 결국 일본에서는 4월 17일 내각이 총사직하고 군부출신인 다나카 기이치가 임명되면서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들어섰다.[4]

우한 정부와의 대립이 심화되자 장제스4월 12일 쿠테타를 결행하고 상해의 노동자들에 대한 대규모 학살을 시작했다. 이날 새벽 상하이의 암흑가를 지배하는 폭력조직인 청방(靑幇)과 홍방(紅幇)이 노동자 규찰대를 습격한 것을 계기로 장제스의 명령을 받은 바이충시의 병력이 상해 시내로 진입해 규찰대를 무장해제 시키고 저항하는 자를 사살했다. 20만 명의 항의시위대에 기관총 사격이 가해졌고, 시내 곳곳에서 공산당원과 노동자가 체포되거나 총살됐다. 규찰대를 지휘하던 저우언라이는 간신히 탈출했다. 이어 4월 15일에는 광저우에서도 비슷한 대학살이 일어났다.

우한 정부는 4월 17일 장제스의 당적을 박탈하고 그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장제스는 4월 18일 국민당의 최고원로인 후한민, 오치휘 등과 손을 잡고 난징에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했다. 같은 날 우한에서는 국공 양당의 연석회의가 열렸고, 양당은 4월 21일 장제스를 "쑨원을 배반한 인민의 적"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우한 정부는 장제스 세력을 토벌하기에 앞서 북벌을 먼저 단행하기로 결정을 내렸다.[4]

원래 우한(武漢)의 경제력은 상하이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열강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북벌의 진로가 우한으로 정해졌던 것이다. 장제스가 상해와 광동을 장악해서 경제교류가 단절되자 우한의 국민당 정부는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맞았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도 우한의 국민당 정부는 어느 방향으로든 진출해야 했다. 북벌 결정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왔다.[5]

2차 북벌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우한 정부의 북벌군은 5월 하순까지 누하, 언성, 임영, 허창 등지를 점령했다. 이에 호응한 펑위샹의 국민군도 하남으로 진격해 5월 말 낙양을 점령했다. 장제스도 5월에 북벌 진군령을 내려 북벌군이 난징으로부터 3로로 북진하였다. '적극 외교'를 표방한 일본의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중국의 통일에 위협을 느끼고 5월 28일 산둥 성관동군을 파병했다.(1차 산둥 출병) 그러나 북벌군이 서주에서 되돌아가자, 일본군과의 충돌은 없었다.[5]

이 무렵 중국 공산당은 지극히 괴로운 입장에 놓였다. 노동대중의 투쟁에 의거해 국민혁명을 수행하느냐, 아니면 지주와 자본가에게 양보해서 민중운동을 억제함으로써 국공합작을 유지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4월 27일 우한에서 열린 제5회 전국대회에서 논쟁 끝에 국공합작을 유지하라는 코민테른의 방침을 따르기로 했다.[5]

그런데, 우한 국민 정부가 급속히 반공 노선으로 기울었다. 우선 군 지휘관들이 반공으로 돌아섰다. 이어 왕징웨이 등 국민당 좌파도 민중운동을 억압하자는 입장으로 기울어져 갔다. 이에 따라 노동자 규찰대의 활동이 제한 당하게 되고 토지개혁이 엄금됐다.[5]

이러한 가운데 6월 1일 중국 주재 코민테른 대표인 '마나벤트라 나트 로이'(인도 출신 혁명가)와 국민당 정치고문 미하일 보로딘 앞으로 스탈린의 새로운 훈령이 도착했다.[5]

"혁명군 장교의 토지를 제외하고 토지혁명을 수행하라. 신뢰할 수 없는 장군들을 일소하고, 2만 명의 공산당원을 무장시키고, 5만 명의 노농분자를 선발해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라. 국민당 중앙위원회를 개조하여 그 위원을 노농분자로 교체하라. 저명한 국민당원을 우두머리로 하는 혁명법정을 조직하고 반동적인 장교를 재판에 회부하라."[5]

로이는 이 훈령을 왕징웨이에게 보여주었으나 왕징웨이는 이에 따르기를 단호히 반대했다.[5]

우한 정부의 북벌군이 펑위샹 군과 함께 정주를 점령한 뒤에 우한 정부의 중앙정치위원회 주석단 일행이 6월 9일 정저우에 가서 펑위샹과 협상했다. 왕징웨이는 펑위샹에게 주석직을 제의하며 그의 지지를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펑위샹은 우한 정부와 난징 정부의 대립을 해소하고 북벌에 공동으로 연합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조정자로서의 입지를 마련해 2차 북벌의 성과를 독점하려는 것이었다. 6월 19일에는 난징 정부의 장제스, 리쭝런, 후한민 등이 서주로 가서 펑위샹과 회담했는데, 양측은 봉천파의 장쭤린 군대에 대한 북벌에서 공동작전을 펴고 풍옥상이 우한 정부에 전보를 보내 반공을 독촉하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우한 정부는 난징 정부에 대립할 독자적 군사기반을 구축하는 데 절대 필요한 펑위샹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했다.[5]

펑위샹과의 회담이 성과 없이 끝난 우한에서 국공간 갈등은 더욱 심해져 6월 17일 우한의 국민당 정부는 미하일 보로딘을 비롯한 소련 고문들의 직위를 해제했고, 23일에는 국민혁명의 영도권은 국민당에 있다고 선언했다.[5]

7월 13일 중국 공산당 중앙 지도부는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국민정부에 참가하고 있던 공산당의 철수를 선언했고, 7월 15일 왕징웨이는 중앙상무위확대회의를 소집하고 한 달 이내에 4중전회(中全會)를 열어 분공(分共) 문제를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것이 실질적인 분공 결정적인 것이 분명했다. 이로써 제1차 국공합작은 3년 7개월만에 붕괴됐다.[5]

우한의 국민당 정부는 이제 반공으로 돌아섰으므로 장제스와 타협하는 것이 가능하게 됐다. 양측의 통합 교섭이 성공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8월 13일 장제스가 돌연 사태한 것이었다. 9월 11일부터 13일까지 열린 양측의 협상 회의에는 반공우파 그룹인 서산회의파도 참여해 3파간 통합을 위한 방안이 논의됐다.[6]

국공합작이 깨진 후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무장봉기 노선으로 급선회했다. 이 무장봉기 노선은 국민당 군의 압도적인 무력에 부닥쳐 실패했으며, 광저우 코뮌에서 가장 비참한 피해를 입었다. 12월 11일 섭검영이 지휘하는 부대와 노동자 적위대 수천 명이 광저우에서 봉기하여 '광저우 노농민주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국민당 군의 포위 공격을 받고 3일간 전투를 치른 끝에 극소수만 탈출하고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내며 전멸했다. 희생자 중에는 약 150명의 한국인 청년도 포함돼 있었다.[6]

1928년[편집]

일시 하야했던 장제스는 1928년 1월에 국민혁명군 총사령에 복직했다. 이어 2월 2일 난징에서 열린 사중전회에서는 국민정부를 개조하고, 공산당에 대해 제재 조치를 취하며, 혁명세력의 역량을 집중시켜 북벌을 완수한다는 등의 결의안이 채택됐다. 또한 담연개가 국민정부 주석으로, 장제스가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됐다. 사중전회 이후 장제스는 펑위샹과의 회담을 통해 공동 북벌의 방안을 구체화하는 한편 2월 말에 열린 군사위원회에서 군대를 전면 개편해 4개의 집단군으로 편성했다. 이에 따라 장제스 직속군이 제1군, 펑위샹군이 제2군, 옌시산군이 제3군, 리쭝런의 신계군이 제4군이 됐고, 총사령에는 장제스, 참모장에는 하응흠이 각각 취임했다. 장제스는 3월 초에는 중앙정치회의 주석에 선임되어 그의 군사적, 정치적 주도권이 확립됐다.[6]

4월 4일에 총 70여만 명의 북벌연합군이 북벌을 재개했다. 북방에는 봉천파의 장쭤린을 중심으로 직예파의 오패부, 쑨촨팡, 장종창 등의 부대가 잔존하고 있었으나 이미 전의를 잃은 상태였다. 이들은 북벌군의 공격을 받자마자 모든 전선에서 패주했다.[6]

중국에서 북벌군이 빠른 속도로 북진하자 4월 19일 일본의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거류민 보호'를 명목으로 '2차 산둥 성 출병'을 선언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중국의 통일을 방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제6사단 주력으로 한 일본군이 4월 20일부터 파견되어 속속 산둥 성의 수도인 제남(濟南)으로 진입했다. 이에 대응해 5월 1일 국민혁명군이 제남에 입성했고, 5월 3일에는 대규모 시가전이 벌어졌다. 중국 민간인에 대한 일본군의 잔혹행위가 매우 극심했다. 거류 일본인의 시체 11구가 발견되자 일본군은 이를 악용했다. 5월 5일 일본군 통신대는 "일본 거류민이 280명이나 학살당함,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폭거"라는 전문을 일본정부에 발송했고, 5월 7일 일본 정부는 '3차 산둥 성 출병'을 결정했다. 8일부터 일본군의 맹렬한 공격이 시작됐고, 9일에는 제3사단 1만 5천 명의 병력이 산둥 성의 청도에 파병됐다. 국민혁명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제남에서 퇴각했다.[6]

5월 9일 봉천파 군벌 장쭤린은 장제스에게 정전을 제안하면서 '국내정치 문제(통일)에 대해서는 국민의 여론에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장제스는 일본을 국제연맹에 제소하는 한편 일본군과의 전투를 피하기 위해 제남을 우회해 북벌을 속행했다.[6]

5월 17일 봉천군이 만주로 철수하기 시작했는데, 일본 정부는 장쭤린이 만주로 돌아갈 경우 북벌군이 만주로 추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국민당 정부로부터 받았놓았다. 일본 관동군은 장쭤린이 만주로 귀환할 경우 그의 부대를 무장해제시킬 계획이었지만, 일본 외무성은 그렇게 하지 말라는 훈령을 내렸다.[6]

6월 3일 장쭤린이 열차 편으로 베이징을 떠났다. 장쭤린을 태운 특별 열차는 봉천(심양)에 도착하기 직전인 4일 오전 5시에 폭파됐다. 장쭤린은 식당차의 흡연실에 있다가 중상을 입고 곧 죽었다. 일본 관동군의 소행이었다. 이는 만주철도 연장증설 문제 등에서 일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장쭤린을 제거하여 일거에 만주 지역을 관동군의 통제 아래 두려고 저지른 일이었다. 관동군은 장쭤린이 사망하면 만주 전역에 큰 혼란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군사행동의 명분을 얻을 수 있게 되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사태는 이런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다.[6]

북벌 후의 중화민국의 정세. 지도에서 남색 부분은 장제스가 이끄는 난징국민정부의 지배가 강한 영역. 핑크색 부분은 지방 군벌의 지배가 강한 영역이다.

북벌군은 6월 8일 전투도 없이 베이징에 무혈입성했고, 12일에는 톈진을 점령했다. 15일 베이징에 들어온 장제스는 베이징 교외의 벽운사에 있는 쑨원의 무덤 앞에서 '북벌의 완성'을 선포했다. 그리고, 직예성은 하북성으로, 베이징은 베이핑으로 개칭됐다.[6]

장쭤린의 아들로 그의 뒤를 이어 봉천파 군벌의 총수가 된 장쉐량7월 1일 '평화적인 통일을 희망한다'고 발표했다. 장제스,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등은 7월 중순에 군사회의를 열어 동북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데 합의했다. 장쉐량은 일본의 노골적인 협박에도 불구하고 12월 29일 그의 지배 아래 있는 봉천,길림, 흑룡강 등 동북 3성에 청천백일깃발을 내걸었다. 장쉐량은 국민당으로부터 동북변방 총사령관에 임명됐다. 이리하여 중국은 장제스를 중심으로 일단 '표면적'으로나마 통일을 실현했다.[6]

평가[편집]

북벌은 중국 역사에서 남부에서 북쪽으로 진군하여 중국을 통일한 두 번째 사건이다. (첫 번째는 명나라원나라 북벌이다)

외형상으로 중국을 통일시킨 국민당 정부는 내면적으로는 '혁명적 장령'또는 '국민정부위원 겸 각 성의 주석'이라는 직함을 가진 군벌들의 불안정한 연합이었다. 재정부장 송자문은 1929년 1월 "중앙의 재정권은 겨우 강서, 절강, 안휘, 강소에만 미칠 뿐이고 그 가운데 안휘, 강서의 조세수입은 중앙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라고 보고했다. 나머지 각 성의 조세수입은 장쉐량, 옌시산, 펑위샹, 리쭝런, 백숭희, 이제심 등 지방 군벌들의 직접 사병양성 등에 사용하고 있었다. 국민당 내부에도 왕징웨이 등 개조파, 후한민 등의 원로파, 추로 등의 서산파를 비롯해 장제스에 대립하는 파벌이 다수 있었다.[6]

주석[편집]

  1. 《객관적 20세기 전반기》,이윤섭 저. 필맥. p85~p87
  2. 《객관적 20세기 전반기》,이윤섭 저. 필맥. p87~p89
  3. 예를 들어, 의열단을 이끌어 활약했던 김원봉1926년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하고 졸업한 뒤 국민당 장교 신분으로 국민당의 북벌에 참여했다.
  4. 《객관적 20세기 전반기》,이윤섭 저. 필맥. p89~p91
  5. 《객관적 20세기 전반기》,이윤섭 저. 필맥. p91~p93
  6. 《객관적 20세기 전반기》,이윤섭 저. 필맥. p92~p98

참고 서적[편집]

  • 박한제,김형종,김병준,이근명,이준갑 공저 (2007년 7월 20일). 《아틀라스 중국사》. 사계절. ISBN 978-89-5828-2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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