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브라운 (19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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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 있는 오토 브라운의 묘비

오토 브라운(1900년 9월 28일 - 1974년 8월 15일)은 코민테른에 의해 중국 공산당을 지도하기 위해 파견된 독일 출신 고문이었다. 중국 공산당에서의 조직명은 리더(李德, 이덕)였다.

1900년 남부 독일 바이에른 이스마닝에서 태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나 공산당으로 전향 모스크바에서 다시 군사훈련을 받았다. 1926년 그는 독일에서 체포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탈주에 성공하여 모스크바로 도망쳤다.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의 지시로 중국으로 파견되었다.

1932년 상하이에 도착하여 지하에서 공산당을 지도하다가 거룻배를 타고 장시 소비에트로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코민테른의 대표로서 혁명군사위원회에서 특별한 지위에 있었다. 그는 총서기 보구와 함께 당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1933년에서 34년까지 홍군의 군사행동을 지휘하였다.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혁명군은 소비에트를 타도하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한 제5차 토벌전을 벌였으며 이때 오토 브라운 마오쩌둥의 유격전술 대신 정규전으로 이에 맞설 것을 주장하여 홍군의 괴멸적 타격을 입혔다. 결국 장시 소비에트가 무너지고 장정에 나섰을 때 쭌이 회의에서 영향력을 많이 상실하고 마오의 보좌역으로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그는 장정에 참가한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오토 브라운은 1939년까지 옌안에서 중국 공산당을 도왔으며 그해에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1945년 소련군과 함께 베를린에 입성하였다. 그 후 동독에서 지냈으며 중국전문가로 활동했고 죽기 1년전인 1973년《중국의 기록Chinesische Aufzeichnungen(1932-1939),》이란 책을 발표했는데 이는 옌안 시절 왕밍의 "국제파"와 마오쩌둥의 대립에 관한 기록으로 초기 중국 공산당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저작으로 인용된다.

1974년 죽었고 베를린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