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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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응모(方應謨, 1890년 ~ 1950년 8월)는 일제 강점기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언론인이며 조선일보의 사주를 역임하였다. 아호는 계초(啓礎)이다. 별호로 춘해(春海)라는 호도 있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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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방응모는 평안북도 정주군 출생이다. 1923년 동아일보 정주지국을 경영하다가, 광산업에 뛰어들어 금맥을 찾아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는 이 재력을 바탕으로 1933년 조만식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초대 사주로 활동했다. 초대 부사장은 이광수, 주필은 서춘이었다.

1933년 무렵 방응모가 조선일보 인수에 나서기 전부터 그는 한용운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성북동 222번지 언덕에 만해를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이 그것이다. 그 외에도 방응모는 만해·벽초 등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2]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조선일보동아일보를 강제로 폐간조치 했다. 광산을 팔아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절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한용운은 ‘신문이 폐간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시작하는 시를 지어 방응모를 위로했다.[3]

광복 후에는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의 재정부장 등을 맡기도 했으며, 한국 전쟁 당시 납북되어 끌려가다 1950년 8월 개성 송악산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에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한 폭격으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묘도 만들지 못했다고 전해진다.[4]

[편집] 친일 행적

일제 강점기 말기 언론인으로서 친일 행위를 한 기록이 있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朝光)》을 창간하였고,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외희(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는 이런 행적으로 인해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편집] 논란

방응모를 친일파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일부 논란이 있다. 조선일보 경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납북된 뒤 소식이 끊겨버린 까닭에 본인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의 행적만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후손들이 영향력 있는 언론사의 사주를 맡았기에 그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 발간된 그의 전기 《계초 방응모》(조선일보사) 등에는 그가 민족주의적 선각자로 묘사되고 있다. 방응모가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측은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논거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5][6]

[편집] 가족

친형 방응곤으로부터 입양한 양아들 방재윤과 친아들 방재선을 두었으며, 이후 조선일보 경영을 맡았던 방일영, 방우영 형제는 방재윤의 아들이다.

[편집] 지인

임꺽정의 저자인 홍명희가 방응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그와 깊은 친분을 맺었다는 주장이 있다. 《조광》 1938년 11월호엔 홍명희가 병중에 있는 방응모를 위로하며 지은 한시가 방응모의 답시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7] 또한 안창호의 비서실장을 지낸 독립유공자 구익균은 방응모와 안창호가 친밀했다는 주장을 했다.[8]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참고자료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4년 3월 1일). 〈방응모 : 언론 내세워 일제에 아부한 교화 정책의 하수인 (문영숙)〉, 《청산하지 못한 역사 2》. 서울: 청년사. ISBN 9788972783138.

[편집] 주석

  1.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16/2008031600800.html
  2.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8/07/2007080700002.html
  3.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8/07/2007080700002.html
  4. 신준영. “"누워서도 남쪽하늘만 보십니다" - 평양시 신미리 재북통협 특설묘지”, 《민족21》, (2002년 7월 1일). 2008년 5월 15일에 읽어봄.
  5. 유석재, 계간 《유심》 (2004년 봄호) 삭풍 속에 피어난 금란지교(金蘭之交) - 만해와 계초 방응모
  6. "일제 말기 계초는 시국강연에 나설 것과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묵묵부답으로 거부하며 소신을 지켰다." 《조선일보》 (2001.3) 조선일보 사장열전 - 계초 방응모편, 《한겨레》 (2001.3.30) 조선일보, 일장기를 신문제호 위에에서 재인용.
  7. ‘임꺽정’으로 되살아난 독립운동의 魂! 주간조선 1827호 2004.11.04
  8. "공산주의자들, 도산 비판하다가도 하숙비 떨어지면 찾아와" 조선일보, 2008-03-10 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