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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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 정부
大韓民國臨時政府

 

1919 ~ 1948
Flag of Korea (1882-1910).svg Seal of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png
국기 국장
표어 대한독립만세
(大韓獨立萬歲)
국가 애국가
수도

서울(정식 수도)
•임시정부 소재지•
상하이 1919-1932
항저우 1932-1935
자싱 1935
난징 1935-1937
창사 1937-1938
광저우 1936-1939
치장 1939-1940
충칭 1940-1945

서울 1945-1948
정치
공용어 한국어
정부 형태 민주공화정
-대통령제 (1919-25)
-내각책임제 (1925-27)
-집단지도체제 (1927-40)
-주석제 (1940-48)
대통령
국무령
주석

부주석
이승만 (1919-25)
이동녕 (1927-33)
김구 (1940-47),
이승만(1947-48)
김규식(1940-47)
역사
 • 독립선언
• 임시헌장공포
• 임정수립선포
• 통합임정수립
윤봉길의거
광복군창설
• 대일선전포고
광복
정부수립선포
1919년 3월 1일
1919년 4월 11일
1919년 4월 13일
1919년 9월 11일
1932년 4월 29일
1940년 9월 17일
1941년 12월 10일
1945년 8월 15일
1948년 8월 15일
지리
면적 220,951km²
인구
1919년 어림 약 20,000,000(3월 1일 기준)
기타
통화 원(圓)
  • 조선 내에 거주하는 한국인만의 인구이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한자大韓民國臨時政府, 영어: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1919년 ~ 1948년)는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선포된 3·1독립선언에 기초하여 일본 제국대한제국 침탈과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1919년 4월 13일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설립된 망명 정부 형태의 독립운동 단체(임시 정부)였다. 같은 해 9월 11일에는 각지에 설립된 임시정부들을 흡수·통합하여 통합임시정부로 발전하였다. 줄여서 임정(臨政)이라고도 부른다. 임시정부가 건설되면서 대한민국의 역사가 시작된다.

설립 과정[편집]

설립의 준비[편집]

상하이는 교통이 편리하고 쑨원이 이끄는 광동정부의 지원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또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의 조계가 있어서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조건도 갖추고 있었다. 독립지사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우호적인 프랑스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조계에 살면서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런 까닭에 독립지사들이 상하이로 몰려들었다. 1918년 조직된 신한청년당은 1919년 1월 파리 강화 회의김규식을 파견하여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상하이는 3·1 운동의 진원지이기도 하였다.

상하이의 독립지사들은 1919년 여름부터 더욱 민활하게 움직였다. 신규식을 비롯하여 서병호, 여운형, 조동호, 박찬익, 선우혁 등은 한국과 만주, 연해주, 미주에서 몰려드는 지사를 맞이하기에 바빴다. 상하이의 독립지사들은 프랑스 조계를 중심으로 외지에서 온 사람들의 숙소를 마련해 주고 고려교민친목회를 조직하여 교민 상호간의 긴밀한 연락망을 만들었다. 이 무렵 만주와 연해주의 이동녕, 이시영, 김동삼, 신채호, 조성환, 조소앙 등 명망 높은 독립지사가 상하이로 와서 자리를 잡았고, 한국에서 현순, 손정도 등이 이곳으로 파견되었다. [1]

상하이시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자취

신한청년당은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약속받을 것을 결의하고 김규식 등을 대표단으로 파견한다. 프랑스에 도착한 김규식신한청년당전파통신으로 교신하였고, 신한청년당은 로비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여 송금해주었다.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파견은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를 마련한다.[2]

출국 전 김규식은 신한청년당 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독립 시위를 벌일 것을 주문하였다.

파리에 파견되더라도 서구인들이 내가 누군지 알리가 없다.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해야 된다. 파견되는 사람은 희생당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사건이 발생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다.[3]

그의 주장에 고무되어 신한청년당은 국내에 사람을 파견하여, 함태영, 조만식 등의 민족지도자를 만나기도 했다.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는 배를 타고 국내에 잠입하여 애국부인회 결성을 추진하였다. 함태영을 만나 국내 독립운동 방법을 의논하였으나 체포되어 투옥될 경우 해외에서 활동하는 남편의 활동에 타격을 줄수 있다는 함태영의 설득으로 김순애는 다시 상하이로 귀환하였다. 그의 독립 시위 주문은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4]

3·1 운동 직후 국민의 의사를 대표할 의결 기관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국내외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널리 확산되었다. 그러나 고종과 순종이 건재하고 있어서 망설이는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1919년 3·1 운동 후 독립운동을 계속 확대해 나가기 위해 국내외에서 정부수립계획이 진행되었다. 당시 상하이에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결집되어 있었다.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한 이들은 독립운동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거듭했다. 먼저 임시정부 수립론이 대두되었는데 조선총독부에 맞서 민족의 망명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그러나 여운형 등은 정부를 조직하기에는 시기가 이르다고 보고 당 조직을 제대로 갖추고 난 뒤에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이것은 먼저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에 묻혔다. [5]

설립[편집]

한국의 역사
韓國史
Geunjeongjeon.jpg
선사 시대
고조선 시대
  • 단군조선 (기원전 2333년? ~ 기원전 194년)
  • 위만조선 (기원전 194년 ~ 기원전 108년)
  • 진국 (기원전 4세기 ~ 기원전 2세기)
원삼국 시대
삼국 시대
남북국 시대
후삼국 시대
통일 왕조기
식민지 시대
  • 일제 강점기 (1910년 ~ 1945년)
  • 대한민국 임시 정부 (1919년 ~ 1948년)
분단 한국
v  d  e  h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1919년 10월 11일).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수반 이승만

1919년 4월 10일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에서 각 지역의 교포 1천여 명과 신한청년당이 주축이 되어 29인의 임시의정원 제헌의원이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 후 22일엔 2차의정원 의원 57인이 참석하여 국내의 8도 대표와 러시아, 중국, 미주 등 3개 지방대표가 각각 지방선거회를 통해 의정원 의원을 선출했다. 의장에는 이동녕, 부의장에는 손정도를 선출했다. 의정원은 법률안 의결, 임시대통령 선출 등 국회와 같은 기능을 했다. 1919년 4월10일 의정원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골간으로 한 임시헌장을 채택한 뒤 선거를 통해 국무원을 구성했다. 행정수반인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추대하고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에 김규식, 군무총장에 이동휘, 재무총장에 최재형, 법무총장에 이시영, 교통총장에 문창범 등 6부의 총장을 임명한 뒤 4월 13일 정부수립을 선포했다. [6](그러나 4월 11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는 주장도 있다.[7][8])

같은 시기에 경성(서울)에서는 한성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연해주에서도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자연스레 상하이의 임시정부는 통합문제를 제기하였다. 통합교섭은 대한국민의회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현실적으로 국내와는 연락을 할 수 없었고 미국에 있는 이승만과도 상의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대한국민의회의 대표로 선정된 원세훈상하이로 와서 교섭을 벌였다. 양쪽 모두 정부의 위치를 자기 지역에 두되 산하의 부서만 양쪽에 배치하자는 주장을 폈다. 두 주장이 팽팽히 맞섰지만 그에 못지않게 단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열망도 높았다. [9] 결국은 상하이 임시정부에 통합되었다.

설립 참여자[편집]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당시의 참여자는 여운형[10], 손정도[10], 조소앙[10], 김철[10], 선우혁[10], 한진교[10], 신석우[10], 현순, 신익희, 조성환, 이광, 최근우, 백남칠, 김대지, 남형우, 이시영, 이동녕, 조완구, 신채호, 진희창, 신철, 이영근, 조동진, 김동삼, 김규식[11] 등 30인이었다.

그 밖에 김구, 이동녕, 신규식 등이 설립에 참여하였고, 안창호, 이동휘, 이승만 등이 1919년 4월에서 9월 사이에 임정의 영수로 임명되어 상하이로 출입하였다.

정치 활동과 독립운동[편집]

초기 활동[편집]

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 기념 사진.

초기 임시정부는 내무총장 안창호의 주도로 연통제(국내의 비밀행정조직망)와 교통국(임시정부 통신 기관)을 조직하는 한편 독립신문을 발행하였으며, 각종 외교 선전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또한, 애국공채 발행과 국민 의연금을 통해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승만과 안창호가 독립운동의 방략상으로 대립하였으며, 이념적으로도 국무총리인 이동휘는 사회주의 혁명을 부르짖었고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여 서로 충돌하였다. 임시정부 내의 사회주의자들은 안병찬, 여운형을 중심으로하는 이르쿠츠크파이동휘를 중심으로하는 상하이파, 그리고 김준연을 중심으로 하는 엠엘파(ML)로 나뉘어 갈등을 빚었다.

1920년 12월 8일 이승만이 대통령 취임을 위해 상하이로 들어오자 독립운동가들은 이승만의 독단적인 구미 위원부 설치 건과 국제연맹 위임 통치 건에 반대하였는데, 특히 러시아 연해주 거류 동포사회에서 조직된 대한국민의회가 임시정부에 통합되며 그들의 대표로 국무총리가 된 이동휘는 미국교포의 독립자금을 축내며 외교운동으로 신탁통치를 주장하는 이승만이 대통령을 맡는 것에 대하여 반대한다며 국무총리직을 사임하였다.

이동휘가 사임하고, 이승만에 반대하는 신채호 등이 이탈하자 임시정부는 혼란에 빠졌다. 안창호는 코민테른 자금을 임시정부에서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이동휘는 고려공산당을 만드는데 이 자금을 사용하여 이승만을 견제하였다. 이승만은 혼란을 수습하는 것이 불가해지자 다시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반임시정부적인 군사통일 촉성회의 국민대표회의 개최 주장이 호응을 얻자 임시정부는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할 계획을 세웠고, 이를 위하여 안창호와 김규식이 내각에서 사퇴하였다.

창조론, 개조론 논쟁[편집]

1921년 임시정부는 소련의 레닌으로부터 혁명자금 200만 루블을 지원받았는데, 그가 보내온 40만 루블과 20만 루블을 수령한뒤[12][13], 자금분배 과정에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동휘한형권, 김립을 보내 60만루블을 수령해 오게 하였다. 그러나 이동휘 등은 임시정부에 지원금을 납부하지 않았고, 이에 김구이동휘 일파를 추격하여 김립을 암살하고 이동휘, 한형권 등을 비롯한 임시정부 내 사회주의자들을 모두 추방하였다.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5개월 동안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각지의 200여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다. 국민대표회의는 임시정부의 해체와 재건을 주장하는 창조파와 임시정부의 개혁을 주장하는 개조파로 분열되어 결국 아무런 결실을 얻어내지 못하였으며 내무총장 김구는 유명무실해진 국민대표회의에 대해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이후 재중국청년동맹, 주중국청년동맹 두 공산계열 단체가 경쟁했으며, 좌우 통일을 위하여 안창호 등에 의해 유일독립당촉성회가 결성되었으나 사회주의 계열과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산되는 등 양자의 분열을 거듭하였다.

일본측 문건 빼돌리기[편집]

임시정부에서 심어둔 공작원들은 여러 번 일본 영사관이나 조선총독부의 문건을 빼돌리기도 했다. 이들 공작원들은 목숨을 걸고 적지에 침투하여 조선총독부의 자료들을 빼돌렸고, 총독부나 일본 영사관 내에 근무하는 친일파들을 설득, 포섭하여 문건을 빼돌렸다.

청산리 전투 직후 일본군의 문건 내용을 청취한 박은식은 이러한 사실을 자신의 저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남겼다. '우리 사령부의 조사 보고에 의하면 적군(일본군)의 사상자가 천6백여 명이었고, 중국 관청의 조사에 의하면 일본군의 사상자는 천 3백여 명이었다.[출처 필요] 일본 영사관 비밀 보고서에 의하면 이도구 전투들에서 카노 연대장, 대대장 2명, 소대장 9명, 하사 이하 군병 사망자가 9백여 명이라고 하였다.[출처 필요]'라고 기록했다. 이범석 역시 일본군의 기밀을 훔쳐낸 사실을 자신의 회고록 우둥불에 기록하였다.

도전이 말등에 실고 있던 마대 속에 드른 쇠통 속에서 우리는 휘황찬란한 빛나는 금쪼각 같은 귀중한 물건을 찾아냈으니, 그것은 도전이가 쓴 지 얼마 안되는 보고서로 봉투에 부친 풀이 아직도 채 말으지 않은 채로 있었다. 이것은 가납 연대장에게 보고하는 문건이었으나 도리혀 우리에게 적정을 알게 하는 좋은 보고가 되었다.[14]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제에 의해 많은 임정 파견원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집단지도체제로의 개편과 임시정부의 위기[편집]

1925년 이승만이 임시의정원을 통해 대통령직에서 탄핵되고, 뒤이어 취임한 박은식은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고친 뒤 사임하였으며, 초대 국무령 이상룡이 서간도에서 상하이로 왔지만 내각 조직에 실패하여 다시 서간도로 돌아갔다. 그 뒤, 1925년 2월 양기탁을 국무령에 천거하였으나 사퇴하였고 5월 안창호를 국무령으로 천거하였으나 사양하여 의정원의장 이동녕이 국무령을 맡게 되었다. 홍진이 제3대 국무령으로 뽑혀 진강으로부터 상하이에 와서 취임하였으나 역시 내각 조직에 실패하였다.

1927년 12월 이동녕의 권유로 김구가 국무령에 선출되었으며, 김구는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하였다. 1928년 이동녕을 국무령으로 추대하고 김구는 내무부를 맡아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지도권을 행사하였다.

1921년 이후 임시정부는 연통제, 교통국과 같은 국내 비밀행정조직망의 파괴와 외교 선전활동의 무성과, 심각한 재정난 등으로 오랜 침체기를 겪었다. 인원도 줄어들어 초창기에 천여 명에 달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수십 명으로 감소하였다. 조선총독부는 밀정을 파견하여 임정 요인에 대한 체포, 납치, 암살 공작을 단행하였고, 김희선, 이광수, 정인과 같은 자들은 친일파로 변절하여 국내로 돌아가버렸다.

한인애국단과 임정의 극복노력[편집]

김구는 국내, 만주와 연락이 되지 않자 미주 동포들에게 편지를 써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였다. 시카고의 김경이 이끄는 공동회, 하와이의 안창호를 비롯한 여럿, 미주에서는 국민회를 중심으로 김호 등, 멕시코의 김기창이종오, 쿠바의 임천택 등, 동지회의 이승만을 비롯한 여럿이 모금에 참여해 주었다. 이러한 미주 동포들의 호응을 바탕으로 1931년 김구는 보다 직접적인 항일 투쟁을 추진하기 위해 특무 조직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다.

김구는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을 시켜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암살에는 실패하였다. 또한 이덕주유진식을 국내로 파견하여 조선총독 암살을 지시하였으며, 유상근최흥식을 만주로 파견하여 관동군 사령관, 관동청 총재 등의 암살을 지시하였다. 이어 상하이사변이 터지고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승전기념 및 천장절 행사가 열리자 윤봉길로 하여금 폭탄을 던지게 하여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비롯한 일본군 고관들을 암살하였다.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의 주모자로 수배된 김구는 상하이를 떠나서 숨어지내야 했으나 남경으로 옮긴 중화민국 정부는 이를 계기로 김구와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게 되었다. 피신한 김구는 1933년 중화민국장제스를 만나 항일 전선 협력에 합의한다.

이 무렵에 양기탁이 1933년 국무령에 선출되어 1935년까지 재직한다. 1933년 3월 6일 제25회 의정원 회의에서 국무 위원의 사표 제출 문제는 조소앙 (외무)·조완구(내무)·김철(재무) 3 명의 경우 수리 하고 이동녕 (법무)·김구 (군사)는 반려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 따라서 집단 지도 체제 에 따라 국무위원을 11명으로 증원 하였다. 유임된 이동녕·김구 외에 이유필 (면직) ·조성환 (무임소)·이승만 (무임소)·윤기섭(군사, 김구 후임)·김규식(외무, 신익희 후임 6. 21)·차이석(내무)·최동오 (법무)·신익희 (외무)·송병조 (주석) 9명이 국무위원으로 추가 보궐 선임되었다.[15]

1934년 1월 3일 국무위원 개선에 앞서 송병조 주석의 정무와 예산 관계의 정무 보고가 있었다. 여기서 신익희와 윤기섭의 사표가 수리 되어 국무위원이 11명에서 9명으로 축소 결정 되었다. 후보 12명을 선거한 결과 양기탁 (주석)·송 병조 (재무)·조소앙 (내무)·김규식 (외무)·윤기섭 (군무)·최동오 (법무)·김철 (무임소)·조성환 (무임소)·성주식 (무임소) 등 9명이 당선되었다.[16]

그러나 중일 전쟁의 발발로 임시정부는 항주와 진강, 장사, 광주 등을 거쳐 1940년 충칭으로 본거지를 옮기게 된다. 충칭에 자리잡은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의 도움을 받아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1941년 연합군에 가담하여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일본에 선전포고하지만 한국 광복군이 미처 국내로 들어가기 직전에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통합 운동[편집]

김구

1935년 민족혁명당을 중심으로 통합 운동이 전개되었으나 노선의 갈등으로 두 달 만에 분열되었다. 이후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중국의 독립운동 진영은 둘로 나뉘게 되었는데, 하나는 김규식김원봉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었고 다른 하나는 임시정부의 김구조소앙이 이끄는 한국독립당이었다. 임시정부는 가흥남호에서 임시 국무회의를 가져 민족혁명당의 통합운동으로 해체 위기까지 갔었던 임시정부의 조직을 회복하는 것을 결의하였다.

1939년 8월 좌익 진영인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조선청년전위동맹과 민족주의진영인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대표들이 기강의 영산호텔에 모여 통일 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개인을 중심으로 하는 통합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조선청년전위동맹조선민족해방동맹이 이탈하였고, 9월에 나머지 5 당 대회가 속개되었지만 의견을 일치를 보지 못하고 조선민족혁명당이 이탈하였다. 결국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을 비롯하여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정 요인들이 결집함으로써 한국독립당으로 통합이 이루어졌다. 1940년 임시정부는 국무위원제를 주석제로 개편한 뒤 한국독립당의 김구를 주석으로 추대하였다. 1942년 조선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되면서 김규식이 부주석에, 김원봉이 군무부장 겸 한국 광복군 부사령에 선임되었다.

외교 노력[편집]

김규식

1919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이승만미국에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김규식프랑스 파리에서 전승국의 추인하 독립을 추진하였다. 임시정부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 중국과 폴란드로부터 승인을 얻어내었다.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미국·영국·소련은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인정하였지만, 그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도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17] 단, 미국 정부에서는 승인하지 않았지만 미국 의회에서는 임정을 승인하였다. [18] 1945년 4월 임시정부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은 충칭 주재 프랑스 대사를 만나 임정을 비공식적으로, 그리고 사실상(De facto) 승인한다는 말을 전달받았다.[19]

한국 광복군 창설[편집]

충칭 임시정부 청사.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여 지청천을 총사령으로, 이범석을 참모장으로 임명하였다. 1942년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한국 광복군에 합류하였으며, 충칭에 조선의용대를 포함한 1지대를 두고 서안부양에 각각 2지대와 3지대를 설치하였다.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 그리고 한국 광복군의 일체 비용은 미주, 멕시코,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이 부담하였으며, 장제스의 부인인 쑹메이링이 이끄는 부녀위로총회에서 중국돈 10만원을 기부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하였다. 한국 광복군은 조선의용대와 마찬가지로 창설 이래 군 통수권이 한동안 중국 국민당이 집권한 중화민국 정부 아래에 있었으나, 김구의 노력으로 1945년 회복할 수 있었다. 1943년 한국 광복군의 일부 대원이 영국군에 파견되어 인도·버마 전선에서 연합 작전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는 미국 OSS(미국 전략 사무국)의 도노반 소장과 교섭하여 한국 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비밀리에 국내에 침투하여 미군과 함께 공동 작전을 수행하는 '독수리 작전'을 계획하였다. 작전에 따라 사전트 소령이 이범석과 함께 서안 2지대에서 광복군에게 비밀 특수훈련을 실시하였으며, 윔쓰 중위는 김학규와 함께 부양 3지대에서 훈련을 실시하였다. 훈련은 3개월 동안 실시되었으며, 1945년 8월 마침내 이범석을 총지휘관으로 편성된 국내정진군의 선발대가 국내의 요소 파괴 및 일본군 교란의 공작 임무를 받아 서해안으로 침투할 준비를 마쳤으나 안타깝게도 침투 직전 일본이 항복하면서 시행되기도 전에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300명정도의 병력으로 무었을 할수 있었는지에 대한 회의적인 분위기도 늘고 있다. 당장 한국 내부의 관동군만 2만명인데, 침투를 했어도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고 진압당했을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귀국 직전[편집]

김구, 이승만의 소개로 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와 면담 (1945년 11월)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

1945년 8월 16일 충칭에서 해방 소식을 전해들은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환국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반도의 남부에 진주한 미군정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개인 자격으로의 귀국과 미군정의 질서 확립에 협력한다는 조건 하에 환국을 허용하였다.[20] 이에 따라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환국하였다.

임시정부의 법통에 대해선 이견이 존재했다. 1945년말 임정 환국 직전 조선공산당은 임시정부의 공헌은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일제하에서 악전고투하며 구사일생해 온 것은 노농 대중이며, 이들이 민족해방의 주체라고 주장하였다. 즉, 국내 혁명세력을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에 두고 인공이 그것을 이어받았다는 이유를 들어 임정을 추대하는 데 반대하였다.[21] 임시정부 내에서도 임정의 유지 문제를 놓고 우파와 좌파 간에 격렬한 대립이 있었다. 1945년 8월 15일부터 좌파는 국내외 단체와 민중의 기초 위에 임시정부를 다시 세우자는 취지에서 임시정부의 총사직을 요구한 반면, 한독당 측은 임시정부를 가지고 귀국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8월 30일 충칭의 임정 대표들은 미국 대사관을 방문하여 미국식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기독교 신자가 많은 자신들이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입국 때문에 희망을 잃고 있으며, 미국의 도움으로 입국한다면 미 점령군이나 혹은 국무성의 의사에 반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망록을 남기기도 했다.[22][23]

1945년 9월 3일 김구는 임정 국무회의의 명의로 발표된 ‘당면정책 14개조’를 발표하였다. 당면과제에 의하면 ‘임정 환국→각계각층 대표자회의 소집→과도정부 수립→전국적 보통선거 실시→정식정부 수립’등 임시정부에서 정규 정부수립 방안을 제시하였다. 김구는 정부 자격으로 귀국을 원하였으나 미군정존 하지 사령관은 이를 거부하고 개인 자격으로의 귀국을 요구하였다.

귀국하기 전 중국 공산당저우언라이(周恩來), 둥비우(董必武)가 임정 국무위원을 초청해 송별연을 하였고, 김구 일행이 충칭을 떠나기 하루 전인 11월 4일 중화민국 정부에서는 장제스(蔣介石)와 그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이 임정 국무위원과 한국독립당 간부와 각계 요인 2백 명을 초청하여 환송회를 열어주었다. 장제스는 격려연설을 하는 가운데 "조선이 독립하지 못하면 중국의 독립도 완성하지 못하게 되고 동아시아와 세계 평화도 확보하지 못할 것이므로... 국민당은 조선독립에 전력을 다해 원조하겠다"고 말해 한국 독립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장제스의 이러한 한국 독립 지지태도는 미국으로 하여금 중국이 만주와 한반도에 대한 역사적 지위의 회복을 바라고 있다는 판단을 갖게 함으로써 후일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철저히 냉대하게 만든 요인이 되기도 했다. [24] (→ 장제스 참조)

귀국 이후[편집]

광복과 귀국[편집]

11월 3일 상하이 비행장에 도착한 뒤 임시정부 환국 제1진과 함께 개인자격으로 중국을 출국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귀국을 놓고 서로 먼저 가겠다고 하였으나 민족혁명당김원봉의 양보로 김구와 한국독립당 계열이 먼저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시 민족혁명당의 당수였던 김규식도 한국독립당계와 함께 귀국했다.

귀국 직후 김구 일행은 미군의 보호를 받았으며 김구의 경호원들도 무기를 소지하도록 허용되었다.[25] 12월 1일 임시정부 봉영식이 서울에서 열렸다. 서울 그라운드에서 윤보선의 사회로 임시정부 봉영식이 시작되었으며, 이어 오세창의 개회사, 이인의 봉영문 낭독, 권동진의 만세삼창으로 이어졌다. 봉영문은 권동진, 김성수, 이인을 통해 주석 김구에게 전달되었다.[26] 한편 미군정에서도 1백만환의 자금이 지원되었다. 미군정으로부터 1백만원의 정치자금을 지원받았다. 그런데 이 중 일부는 일부 임정 요인들의 유흥비로도 쓰였는데, 장준하는 자신의 저서 돌베개에 귀국 후 임정요인들이 명월관, 국일관 등에서 주지육림 속에서 놀아나며 허송세월을 보낸다며 이를 지적하였다.

11월 4일 김구는 광산재벌 최창학이 제공한 경교장(京橋莊)에 머무르며 경교장을 김구 자신의 사저 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로 활용하였다.

귀국 직후[편집]

귀국 후 임시정부는 김구최창학에게서 제공받은 사저인 경교장을 청사로 활용하였다. 한편 친일파 배제 문제를 놓고 논란이 지속되자 김구는 환국 연설에서 "악질분자의 건국사업 참여 배제에는 찬성하나 이를 사전에 처리하고 갈 것인지, 통일 후에 처리할 것인지 결과적으로는 전후가 동일하다. 다만 아직 구체적 사정을 알 수 없으니, 추후 언급하겠다"며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였다. 그는 먼저 배제하고 건국하는 것과 건국 후에 배제하는 것의 결과가 전후가 동일하다고 하여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국내에 정치 기반이 없던 김구최창학, 강익하, 조선일보의 사주 방응모 등을 후견인으로 삼았다. 1945년 12월 1일 임시정부 환국 환영대회 후 송진우, 장택상 등이 임정을 방문 환국지사후원회가 모금한 9백만원을 임시정부 경비로 써달라고 전달받았다. 다음날 저녁 김구는 재정부장 조완구에게 전달하자, 조완구는 친일파의 돈이라고 거절하였다. 이에 김구송진우를 불러 자금을 되돌려주었고, 신익희는 친일파 척결을 주장하며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송진우는 국민이 정부에게 바치는 세금이라며 가난한자, 부자, 도둑, 범죄자 가릴것 없이 모든 국민의 돈을 세금으로 받는 것이 정부라며 설득했다. 임정은 헌납 형식으로 이 돈을 받았다.

1945년 12월부터는 한민당김구를 중심으로 임정법통론이 제기되었다.

임정의 해체 과정[편집]

1946년 1월 8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41년에 이미 채택, 공포된 대한민국 건국강령(建國綱領)을 발표하였다. 한편 임정은 내무부 산하에 국내의 행정권력을 장악하고자 일제하에서 대부분 고등문관시험을 합격하고 조선총독부 치하에서 관료를 지낸 인물들을 흡수하여 임정 산하조직인 행정연구위원회를 설치하여 임정의 집권에 대비하고자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하나의 독립운동 단체이며 조선인민공화국을 해산한 것처럼 임정 역시 해산하고 새로운 임시정부를 구성하자는 중도파와 좌파 진영의 반대에 부딛쳐 정권 접수는 어렵게 된다.

1946년 2월부터 북조선에서는 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정부 수립에 착수하였다. 북조선에서 별도의 정부수립 움직임이 감지되자 임시정부는 북조선조선공산당 고위 관리들을 제거하기 위해 임시정부 정치공작대와 비밀결사 백의사가 연계하여 1946년 3월 임정 정치공작대원 김정의·최기성 등을 파견해 최용건을 제거하기 위해 그의 집을 습격했으나 실패했다.[27] 1947년 3월 1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법통정부로 봉대할 것을 국민의회에 건의하였고, 같은 날 우익계 청년단체인 전국학생총연맹(全國學生總聯盟)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봉대(奉戴)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1947년 12월 장덕수의 암살 사건을 계기로 임정의 지도 세력은 분열, 임정의 지도 세력의 한 축이었던 김구대한민국 정부의 임정 법통 계승에 부정적이었으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제1대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함을 천명하고 연호를 민국 연호로 30년으로 기산하였다.

법통 논란[편집]

대한민국 임시정부-대한민국[편집]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는지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임시정부의 지도자 중 한사람이었던 김구이승만은 각각 적극적, 소극적으로 임정의 법통성을 주장하였지만, 광복 직후부터 임시정부가 정통성이 있는가, 독립운동단체를 대표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우는 임시정부를 부르주아 집단으로 간주하여 독립운동 단체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공산당은 임시정부의 공헌은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일제의 식민지 체제하에서 악전고투하며 구사일생해온 것은 노농대중이고, 이들이 민족해방의 주체라고 주장하였다. 즉, 국내 혁명세력을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에 두고 인공이 그것을 이어받았다는 이유를 들어 임정 추대에 반대하였다.[28][29] 박헌영1945년 11월 23일에 임시정부 주요 요인들이 귀국했을때 박헌영은 12월 12일자로 발표된 '망명정부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성명에서 임시정부를 '망국정부'라 지칭하고 임시정부요인들을 '망국인사'라 폄하하며 그들의 권력욕과 패권주의를 비난한다는 주요내용을 발표했다.[30]

여운형도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반대하였다. 임시정부의 공헌은 어느 정도 인정하는 조선공산당과 달리 여운형은 좀 다른 각도에서 중경 임정 추대에 반대하였다'

임시정부는 30년간 해외에서 지리멸렬하게 유야무야 중에 있던 조직이니 국내에 기초가 없어 군림이 불가하다는 점

연합국한테 승인되지도 될 수도 없다는 점
미주(美洲), 연안, 시베리아, 만주 등지의 혁명단체 중에는 임시정부보다 몇 배가 크고 실력 있고 맹활동한 혁명단체가 있으며 그네들 안중에는 임시정부가 없다는 점
국내에서 투옥되었던 혁명지사가 다수인데 , 안전지대에 있었고 객지고생만 한 해외 혁명가 정권만을 환영하는 것은 잘못된 점이라는 점
중경 임정을 환영하는 자들은 아무런 혁명 공적이 없는 자들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려는 것이고 건준의 정권수립권(權)을 방해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
중경 임정만을 환영하는 것은 해내해외의 혁명단체의 합동을 방해하고 혁명세력을 분열시키는 과오라는 점

등을 들었다.[31][29]

허헌은 '임시정부가 주최하는 비상국민회의를 염두에 두며 법통이라는 유행어가 있는데 이는 옳지 못하다. 무엇이 법통이며 법통을 주장하는 자가 누구며 김구 일파가 법통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32]

임정법통론을 받아들인 세력은 당시 대중의 지지가 약한 한민당 세력 등 보수세력이었다.[33]

2010년 현재, 대한민국 사학계에서 임시정부를 독립운동 단체의 하나로 규정해야 되느냐, 아니면 정부로 인정해야 되느냐에 대한 논란은 진행 중에 있다.

대한제국-대한민국 임시정부[편집]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이름은 1919년 4월 10일 임시정부의 첫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정해졌다. 국호를 정하기 위해 회의를 할 때 신석우 선생이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국호를 정하자고 하니 여운형 선생이 '대한'이라는 이름으로 나라가 망했는데 또 다시 '대한'을 쓸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 그러자 신석우 선생이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해보자"라고 부연 설명을 하자 다들 좋다고 만장일치로 결정이 되었다고 한다.[34]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제정한 대한민국 임시 헌장 제8조와 통합임시정부가 출범하면서 같은 해 9월 11일 위 임시헌장을 개정한 대한민국 임시헌법 제7조에 공히 “대한민국은 구 황실을 우대한다”고 밝힘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한제국을 계승함을 분명히 하였다.

역대 수반[편집]

대통령[편집]

국무총리[편집]

국무령[편집]

(1927년 국무령제를 폐지, 1930년 국무령제 부활)

(1940년 10월 9일 국무령 직위 폐지)

주석[편집]

  1. 이동녕 (1927년 8월 - 1930년 10월)
  2. 이동녕 (1930년 10월 - 1933년)
  3. 송병조(宋炳祚) 1933년 6월 24일 - 1933년 10월
  4. 이동녕 (1933년 10월 - 1935년 10월)
  5. 이동녕 (1935년 10월 - 1939년)
  6. 이동녕 (1939년 - 1940년)
  7. 김구 (1940년 - 1944년 4월)
  8. 김구 (1944년 4월 - 1947년 3월)
  9. 이승만 (1947년 3월 - 1947년 9월)
  10. 이승만 (1947년 9월 - 1948년 8월 15일)

부주석[편집]

  1. 김규식 1940년 - 1944년 4월
  2. 김규식 1944년 4월 - 1947년 3월
  3. 김구 1947년 3월 - 1947년 9월
  4. 김구 1947년 9월 - 1948년 8월 15일

임시정부 유적지[편집]

상하이 임시정부 유적지는 1919년부터 1932년까지 13년간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은 머물렀던 곳이다. 임정은 1932년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일어나자, 일본군을 피해 항저우를 비롯한 중국 6개의 도시를 유랑하다 일제 말기인 40년에는 충칭으로 이전하였다.

상하이 유적지는 마땅루 306농 4호에 자리 잡고 있으며, 신티엔디(新天地)와 가까워 이곳에서 걸어가면 된다. 오래된 건물이 붙어 있는 건물에서 1층과 2층에 유물을 전시하고, 비디오를 보며, 설명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있다. 내부에는 주요 인사들의 사진과, 태극기 등의 유물, 백범 김구의 집무실, 각 부처의 집무실 등이 있다.

임시정부는 일본의 중국 본토 침략에 따라 다음과 같이 이동을 하였다.

  • 상하이(上海, 상해): 1919년 4월~ 1932년 5월
  • 항저우(杭州, 항주): 1932년 5월 ~ 1932년 10월
  • 전장(鎭江, 진강): 1932년 10월 ~ 1932년 11월
  • 난징(南京, 남경): 1932년 11월~1937년 11월
  • (피난) 자싱(嘉興, 가흥): 1935년 10월~1936년 2월
  • 창사(長沙, 장사): 1937년 12월~1938년 7월
  • 광저우(廣州, 광주): 1938년 7월~1938년 11월
  • 류저우(柳州, 유주): 1938년 11월~1939년 5월
  • 치장(綦江, 기강): 1939년 5월~ 1940년 9월
  • 충칭(重慶, 중경): 1940년 9월 ~ 1945년 11월
  • (피난) 구이린(桂林,계림):

위의 유적지 중 임시정부 유적지가 복원된 곳은 상하이, 항저우, 충칭이다.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이이화,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 날이 오면》(한길사, 2004) 23쪽
  2. 《한국독립운동사사전,3-7 :운동·단체편(4),p 337~ p 339》,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저
  3.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69쪽 참조
  4. 《한국독립운동사사전,3-7 :운동·단체편(4),p 337~ p 339》,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저
  5. 같은 책, 23~24쪽
  6. 같은 책, 24~25쪽
  7. 4월 13일? 11일? 臨政 진짜 생일은
  8. 4월11일? 4월13일?…학계 임정수립 기념일 논란
  9. 같은 책, 27쪽
  10. 신한청년당원
  11. 김규식은 상하이 임정의 모태인 신한청년당의 대표이자, 1919년 3~4월 각지에서 상하이, 노령, 조선민국, 한성정부 등의 임시정부 수립의 시발점이 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중이었다.
  12. 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창작과비평사, 1994) 49쪽
  13. 김구, 《백범일지》(돌베개, 2003) 311쪽
  14.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1991 여름》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사, 2007) 401페이지
  15. 이현희, 《광복 전후사의 재인식》 (범우사, 1991) 214페이지
  16. 이현희, 《광복 전후사의 재인식》 (범우사, 1991) 215페이지
  17.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62페이지
  18. 43년 美의회에서 상해임정 승인결정
  19. 같은 책, 93페이지
  20. 김삼웅, 《한국현대사 뒷얘기》(가람기획, 1995) 121쪽.
  21.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119~121쪽.
  22. 같은 책, 122쪽.
  23.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역사비평사, 1991) 275쪽.
  24. "秘錄 韓國外交<5> : 건국전야 (4)", 《경향신문》, 1975년 1월 22일 작성. 및 여기서 인용한 손세일 저, 《이승만과 김구》
  25. 일월총서 71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 김자동옮김, 최옥자펴냄, 일월서각) 2001년판 253~254쪽
  26.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145
  27. 최용건 - Daum 백과사전
  28.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266페이지
  29. 강준만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119페이지
  30. <박헌영 평전>안재성 지음. p263
  31.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273페이지
  32.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226쪽.
  33. 이는 장준하의 회고에도 자세히 나온다. 장준하 회고에 의하면 '임정 요인들이 귀국하자 친일세력 및 한민당 세력에서 잘 부탁드린다.'며 요리집, 술집에서 온갖 융숭한 대접을 했다고 한다.
  34. 송승표, 《우리가 몰랐던 우리 역사: 나라 이름의 비밀을 찾아가는 역사 여행》, 학민사, 2013년 12월 10일.
  35. 1922년 임시정부 제3기 정부 구성에서 이승만은 대통령에 유임되었다.~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7 : 임시정부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179페이지
  36. 대한민국 임시정부 30년사(이연복 지음 | 국학자료원 | 2006) 39페이지
  37. 이연복, 《대한민국 임시정부 30년사》(이연복 지음, 국학자료원, 2006) 39페이지
  38. ::::: 평화 전문 인터넷 신문 [평화만들기] :::::
  39. http://www.kimgu.or.kr/menu_2/index.html
  40. http://narasarang.mpva.go.kr/person_search/merit_search_view.asp?idx=4348&page=1&search_1=&search_2=양기탁&search_3=&search_4=&search_5=출생지&search_6=내용&orderByName=&orderBy=

참고 자료[편집]

한국의 역사
이전 시대 대한민국 임시 정부
1919년 9월 ~ 1948년 8월 15일
(군정기 1945년 9월 ~ 1948년)
조선인민공화국(1945년 9월 ~ 1946년 2월)
다음 시대
대한제국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