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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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3월1일 미국 워싱턴에서 3·1절 1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 임정 구미위원부 간부들.(앞줄 가운데가 이승만 박사, 그 오른쪽이 김규식 박사)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구미외교위원회)는 1919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미국 워싱턴 D.C.에 설치한 미국, 유럽 각국을 대상으로 한 외교행정업무를 주관하는 부서였다. 1919년 8월에 설치되어 외교업무를 주관하다가 1948년 9월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미국유럽 각국에 대사, 영사가 파견되면서 폐지되었다. 워싱턴시 16번가의 마운트플레이선트 언덕에 위치한 2백평의 대지 위에 세워진 건평 약 60평의 2층집이었다. 아래층을 구미위원부 사무실로, 2층을 이승만의 살림집으로 사용했다. [1]

구미위원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미국, 유럽 측의 대표 기관이자 임시정부의 미국 주재 대사관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주미, 유럽 동포와 한인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 홍보와 모금 활동, 한국의 독립 승인 외교 활동 등을 하였다.

목차

[편집] 활동

1919년 8월 워싱턴 D.C.에서 워싱턴한국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출범, 발족되었고 9월 파리위원부를 병합하여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로 이름이 개편되었다.

미국 외에도 프랑스 파리 시에 설치된 파리대표부 등을 관할하여 미국, 유럽에 대한 외교업무와 임시정부의 대변 활동을 하였다. 1919년 8월 초대 위원장에 김규식이 선출되었으며[2] 9월 구미외교위원부로 개칭하면서 이승만이 위원장에 선출되었다.[3] 1921년 11월 워싱턴 군축회의, 1933년 스위스 제네바 국제연합회의 등에 임시정부와 한국민의 입장을 알리고 홍보하는 활동을 하였다. 1945년 10월 이승만 귀국후, 이승만의 비서이며 임시정부 광복군의 대령에 임명된 임병직이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에 선출됐다.

구미외교위원부 시절 김규식과 이승만

이후 서재필, 조병옥, 허정, 윤치영 등은 구미위원부의 위원이자 구미위원부의 측면 지원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한다.

1925년 2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이 된 이승만임시의정원에 의해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하면서 이승만의 측면 지원세력으로 분류되던 구미위원부에 대한 철폐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이승만 등은 구미위원부 폐지 포고령을 수용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였으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후 독자적으로 활동하다가 1934년 이승만이 외교위원에 선출됨으로써 다시 임시정부와 연계 활동하게 되었다.

[편집] 의의

구미외교위원부의 성격은 임시정부가 파견한 외교사절기관의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업무범위나 대상에서는 구미(유럽과 미국)라는 이름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주미대사관, 주한미대사관 등의 범위보다는 넓은 유럽과 미국을 대상으로 한 외교기관이라는 점에서 그 성격이나 활동무대가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며 성격상 정식 대사관은 아니다. 이후 1948년 9월 미국대사로 임명된 장면 등 이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각국의 정식 대사와 영사로 부임할 때까지 워싱턴에 체재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미국간 중계 연락업무와 국내와 미국, 유럽을 대상으로 하는 외교업무활동을 전담하였다.

[편집] 역대 위원장

<이후 미국과 유럽각국에 대사·영사관이 설치되면서 폐지>

[편집] 함께 보기

[편집] 주석

  1. 秘錄 韓國外交<1> : 건국前夜①”, 《경향신문》, 1975년 1월 15일 작성, p. 4.
  2. http://narasarang.mpva.go.kr/person_search/merit_search_view.asp?idx=671&page=1&search_1=&search_2=김규식&search_3=&search_4=&search_5=출생지&search_6=내용&orderByName=&orderBy=
  3. http://www.syngmanrhee.or.kr/sub/blank1.html?bid=report
  4. 이승만이 1945년 10월 귀국 후, 구미위원부 업무를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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