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찾기

신유박해(辛酉迫害)는 1801년(순조 1년)에 발생한 조선천주교회 박해 사건이다. 시파·벽파의 정치 투쟁에서 시파의 제거를 오랜 숙원으로 한 벽파가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일으킨 사건이다.

목차

원인 [편집]

1800년 6월 28일 신해박해 이래 “정도(正道)인 유학은 ‘사학’(邪學)인 천주교를 소멸시킬 것”이라면서, 천주교에 대해서 온화한 정책을 써 오던 정조가 승하하였다.[1]

1800년 7월 4일 순조가 11세로 왕위에 오르면서 정순왕후수렴청정을 하여[2]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벽파가 정순왕후를 움직이면서 조선 천주교회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박해의 진짜 이유는 남인·시파의 숙청이었다. 야당인 남인 중에서 천주교 신앙을 가진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결과 [편집]

이 사건으로 중국인 천주교 신부이자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주문모를 비롯하여 이승훈, 정약종(다산 정약용의 형), 여성 평신도 지도자인 강완숙 등이 사형당했고, 한때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지만 이념의 차이로 멀리한[3] 정약용 등은 귀양보내져 박해 피해자는 수백 명에 달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오가작통법을 통해 다섯 집 중 한 집에서 천주교 신자가 적발되면 모두 처벌하는 가혹한 연좌제를 실시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애꿎은 피해를 보았다. 이 옥사로 만 1년 내외에 박해 받아 죽은 신도만도 300명이 넘었다.

영향 [편집]

1801년 10월 5일 정약종의 조카 사위였던 천주교 신자 황사영(黃嗣永)이 조선에서는 천주교를 정치적 숙청에 이용한다면서 신유박해의 실상과 대응 방안을 적어 청국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던 밀서(密書)가 발각되었는데, 이를 황사영 백서 사건이라고 한다.[4] 당시 황사영은 청나라의 무력을 빌어 조선의 종교적 자유를 얻고자 했기 때문에, 조선 천주교회는 박해를 받게 되었다.

함께 보기 [편집]

주석 [편집]

  1. 순조실록 (1800년 6월 28일). 유시에 임금이 창경궁의 영춘헌에서 승하하다. 조선왕조실록. “24권”
  2. 순조실록 (1800년 7월 4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다. 조선왕조실록. “1권”
  3. 정약용을 비롯한 조선의 양반 계층 지식인들은 한때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으나, 교황청이 17세기 이후 100여 년간의 신학 논쟁 끝에 조상 제사는 로마 가톨릭 교리에 어긋난다면서 인정하지 않자, 천주교를 멀리하였다./《생활성서》2007년 8월호 기사.
  4. 순조실록 (1801년 10월 5일). 좌포장 임율이 세 조항이 기록된 황사영의 백서를 바치다. 조선왕조실록. “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