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왕후 (조선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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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
왕비
재위 1759년 ~ 1776년
전임자 정성왕후
후임자 효의왕후
왕대비
재위 1776년 ~ 1800년
전임자 선의왕후(경순왕대비)
후임자 효의왕후(왕대비 김씨)
대왕대비
재위 1800년 ~ 1805년
전임자 인원왕후(혜순자경대왕대비)
후임자 순원왕후(명경대왕대비)
별명 예순왕대비, 예순대왕대비
배우자 영조
자녀 없음
부모 김한구 / 원풍부부인 원씨
출생 영조 21년(1745) 음력 11월 10일
여주(驪州) 사저
사망 순조 5년(1805) 음력 1월 12일
창덕궁 경복전(景福殿)
능묘 원릉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1745년 12월 2일 (음력 11월 10일) ~ 1805년 2월 11일 (음력 1월 12일)는 조선의 21대왕인 영조(英祖)의 계비이다. 정식시호는 예순성철장희혜휘익렬명선수경광헌융인정현소숙정헌정순왕후(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光獻隆仁正顯昭肅靖憲貞純王后)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오흥부원군 김한구(金漢耉)와 원풍부부인 원씨의 딸이다.

생애[편집]

영조 시대[편집]

강빈(姜嬪)의 신원을 주청하다 장살당한 김홍욱(金弘郁)의 현손인 김한구와 원풍부부인 원씨의 딸로 1745년, 현재의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1757년, 정비인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승하하자 영조는 부왕인 숙종의 유지에 따라 후궁들 중에서 새 왕비를 책봉하지 않고 1759년 6월 9일, 김한구의 딸인 정순왕후를 왕비로 간택하여 같은 해 6월 22일, 창경궁에서 혼례를 올렸다. 당시 영조의 나이는 66세, 정순왕후는 15세로 조선 개국 이후 가장 나이 차가 큰 혼인이었고 그가 왕비에 책봉될 때 부모 내외는 물론 조부 김선경도 생존하고 있었다. 심지어 1735년에 태어난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보다 10살이 어렸다.

간택 당시의 일화로 영조는 간택 규수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인지 물었는데 다른 규수들은 ‘산이 깊다’, ‘물이 깊다’는 답을 했지만 유독 정순왕후는‘인심이 가장 깊다’고 답하여 영조의 눈길을 사로 잡았으며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목화꽃은 비록 멋과 향기는 빼어나지 않으나 실을 짜 백성들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꽃이니 가장 아름답다.'라는 말로 영조를 감탄시켰다고 한다. 왕비 책봉 이후에도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해 잠시 돌아서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고 추상같이 답하여 어린 나이에도 왕비의 체통을 중시하였던 그의 면모를 알 수 있다.[1]

정조 시대[편집]

영조기 영조의 양대 척신 가문인 정순왕후의 친정 오라비 김귀주 및 경주 김씨(慶州金氏)측과 혜경궁 홍씨 친정 풍산홍씨측은 영조 말년에 계속적으로 대립했다. 정조는 즉위하자 홍인한, 정후겸 등 영조 척신 일파의 숙청을 단행했다. 정순왕후의 동기인 김귀주는 영조 시기에 후일 정조가 중용하는 청명당과 함께 행동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정조가 즉위하자 한성판윤을 제수받고 홍인한-정후겸 탄핵에 동참했다. 그런데 정조는 홍인한-정후겸에 대한 처분이 마무리되자마자 김귀주가 혜경궁에게 문안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흑산도로 귀양보냈다. 이 날 연석에서 정조는 김귀주를 귀양보낸 실제 이유는 영조때 김귀주가 외조부 홍봉한을 탄핵한 데 있음을 밝혔다. 이로 인해 정조와 정순왕후 사이에 어떤 긴장 관계가 생겼는지 여부는 현재로선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듬해 홍인한-정후겸 처분에 관련된 자신의 입장을 홍보하기 위한 책《명의록》을 편찬하였을 때, 이 책 속에서 '세손이 위기에 처했을 때 내전이 안에서 세손을 도와 세손이 무사하게 되었다'라는 내용을 수록하여, 그가 정조 즉위에 공이 있음을 공식적으로 대내외에 밝혔다. 이 부분은 정조 사후 간행된 《정종대왕행장》과 정순왕후 사후에 간행된 그 자신의 《행장》등에서 재확인되는 내용이다.[2]

나의 자전(慈殿)이 과인의 몸을 보우(保佑)하였음은 인원성후(仁元聖后, 인원왕후)가 선대왕(영조)을 보우함과 같았습니다.
정조어제 오흥부원군 김한구(정순왕후 부) 치제문 중

흔히 세간에는 정순왕후와 정조가 극심한 대립관계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일득록》에는 정순왕후를 향해 친밀한 감정을 나타내는 기록이 전하고, 정순왕후는 정조의 행록을 쓰며 정조가 자신을 극진히 공양했음을 과시하고 있다.

수렴청정(순조 시대)[편집]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아들인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정순왕후는 대왕대비로서 4년 동안 수렴청정을 행하였다. 이 시기에 정순왕후가 여군(女君), 여주(女主)를 자칭하는 것을 두고 본인이 여자국왕/여자임금임을 자처한 것이라는 해석이 한동안 주류를 이뤘으나 이는 완전한 오류이다. 여군/여주는 모두 동양권에서 왕후 등이 사용하였던 용어이며[3], 정순왕후 외 조선의 다른 대비들이 사용한 기록이 다수 존재한다.[4] 정순왕후는 정조 생전에도 여군(女君)을 자칭한 기록(정조10년 12월 1일)이 있으니 이것이 '여자 임금'이라는 의미일 수는 없는 것인데, 전술한 통설은 이러한 점을 완전히 간과한 오류를 범하였다[5].

정순왕후는 자신과 대립되는 소론 시파들을 대거 숙청하였으며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혜경궁 홍씨의 동생인 홍낙임(洪樂任)을 처형시켰고 정조가 설치한 장용영을 폐지하였으며 정조가 묵인하던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여 남인과 소론 시파들을 축출하였다. 또한 정조가 내쳤던 김관주(金觀柱)와 김용주(金龍柱)등의 노론 벽파 관료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1802년, 정조의 유지에 따라 소론 시파인 김조순의 딸을 순조의 왕비로 책봉하고 김조순을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하고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1803년 12월 수렴청정을 거두고 순조의 친정이 선포되자 정조의 친위세력이었던 김조순에 의해 대부분의 벽파관료가 숙청되고 자신의 영향력도 약화되어 허망한 말년을 보냈고 1년 뒤인 1805년 1월 12일, 창덕궁 경복전에서 승하하였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위치한 원릉(元陵)으로 영조와 함께 묻혀있다.

신유박해[편집]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종식될 것이라고 ’며 천주교를 묵인한 정조와는 달리 천주교를 강경하게 탄압하였으며 급기야는 1801년 음력 1월 10일, 사학(邪學, 천주교)의 엄금을 하교하여 세계 천주교 역사에서 가장 큰 교회박해인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일으켰다.

아래는 1801년 음력 1월 10일, 천주교 엄금에 관해 정순왕후가 하교한 내용이다.

“선왕(先王)께서는 매번 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종식될 것이라고 하셨다. 지금 듣건대, 이른바 사학이 옛날과 다름이 없어서 서울에서부터 기호(畿湖)에 이르기까지 날로 더욱 치성(熾盛)해지고 있다고 한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나라가 나라 꼴이 되는 것은 교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른바 사학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지경에 돌아가고 있는데,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물들고 어그러져서 마치 어린 아기가 우물에 빠져들어가는 것 같으니, 이 어찌 측은하게 여겨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감사와 수령은 자세히 효유하여 사학을 하는 자들로 하여금 번연히 깨우쳐 마음을 돌이켜 개혁하게 하고, 사학을 하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두려워하며 징계하여 우리 선왕께서 위육(位育)하시는 풍성한 공렬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와 같이 엄금한 후에도 개전하지 않는 무리가 있으면, 마땅히 역률(逆律)로 종사(從事)할 것이다. 수령은 각기 그 지경 안에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닦아 밝히고, 그 통내(統內)에서 만일 사학을 하는 무리가 있으면 통수(統首)가 관가에 고하여 징계하여 다스리되, 마땅히 의벌(劓罰)을 시행하여 진멸함으로써 유종(遺種)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이 하교를 가지고 묘당(廟堂)에서는 거듭 밝혀서 경외(京外)에 지위(知委)하도록 하라.”[6]


이러한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정책은 천주교를 묵인하던 정조의 천주교 해법론을 오히려 천주교를 확산시키는 무능한 해법으로 규정하여 정조의 천주교 해법론을 부정하는 것이었으며 노론 벽파의 정적인 남인과 시파(時派)의 제거를 목적으로 한 숙청이었다. 이로 인해 남인 출신인 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과 이승훈이 처형되었으며 이미 배교한 이가환도 장살당하였으며 정약용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신유박해 이후 정약현(丁若鉉, 정약용의 맏형)의 사위인 황사영(黃嗣永)에 의해 황사영 백서 사건이 벌어짐으로써 조선 내에서의 천주교 탄압은 더욱 거세어졌다.

가족관계[편집]

경주 김씨(慶州金氏)

  • 할아버지 : 증 의정부 영의정 김선경(金選慶, 1699 ~ 1760)
  • 할머니 : 미정
    • 아버지 : 의정부 영의정 오흥부원군 김한구 (鰲興府院君 金漢耉, 1723 ~ 1769)
    • 어머니 : 원풍부부인 원씨 (原豊府夫人,元氏)
      • 오빠 : 이조판서 김귀주(金龜柱, 1740 ~ 1786)
      • 올케 : 정경부인 이씨(李氏)
        • 조카 : 김노충(金魯忠)
    • 숙부 : 김한기(金漢耆)
    • (종숙) : 김한록
    • (재종숙) : 김한신 - 영조의 부마, 화순옹주의 남편


왕가(王家 : 전주 이씨)

  • 시증조부 : 제17대 효종(孝宗大王, 1619~1659)
  • 시증조모 :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 張氏, 1619~ 1674)
    • 시조부 : 제18대 현종(顯宗大王, 1641~1674)
    • 시조모 :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 金氏, 1642~1683)
      • 시아버지 : 제19대 숙종(肅宗大王, 1661~1720)
      • (법적) 시어머니 :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 1667~1701)
      • (법적) 시어머니 :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 1687~1757)
      • (사친) 시어머니 : 화경숙빈 최씨(和敬淑嬪 崔氏, 1670~1718)
        • 시숙 : 제 20대 경종(1688 ~ 1724, 재위 : 1720 ~ 1724)
        • 윗동서 : 단의왕후 심씨(端懿王后 沈氏, 1686 ~ 1718)
        • 윗동서 : 선의왕후 어씨(宣懿王后 魚氏, 1705 ~ 1730)
          • 남편 : 제21대 영조(英祖大王, 1694~1776)
            • (법적)아들 : 추존 장조의황제 (莊祖懿皇帝, 1735~1762)
            • (법적)며느리 : 헌경의황후 홍씨 (獻敬王后 洪氏; 혜경궁(惠慶宮) 홍씨, 1735 - 1815)
              • (법적) 손자 : 의소세자 정(懿昭世子 琔, 1750 - 1752)
              • (법적) 손자 : 제 22대 정조 산(正祖 祘, 1752 - 1800)
              • (법적) 손주며느리 : 효의왕후 김씨(孝懿王后 金氏, 1789~1857)

관련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65세 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
  2. 김귀주와 관련한 《명의록》의 기록. 홍인한-정후겸이 부언을 일삼아 세손을 괴롭혔는데, 이들이 김귀주가 세손에게 독을 쓰거나 자객을 쓸 것이라는 등의 말로 참소하였다 한다. 이에 세손은 '김귀주는 나에게 본래 은덕으로 여기는 것도 원망하는 것도 없으며 저도 조선의 신하인데 어찌 이와 같이 할 염려가 있겠는가.'라고 김귀주를 변호하고 있다. 김귀주를 참소한 것 역시 명의록 죄인들의 죄목으로 거론된다.
  3. 국립국어연구원의 '여군(女君)항목 참조- 1)'황후(皇后)’를 달리 이르는 말, 유의어는 '왕비(王妃)'(네이버 한자사전)
  4. 조선왕조실록에 인순왕후, 인목왕후, 정순왕후, 순원왕후, 효정왕후가 여군과 여주를 자칭하거나 또는 남에게 그렇게 불리는 기록이 보인다.
  5. 이 밖에도 여군(女君)이란 단어는 단순히 정실(正室)이란 의미도 있다. 국립국어연구원의 '여군(女君)항목- 2)첩(妾)이 ‘본처(本妻)’를 이르는 말
  6. 《조선왕조실록 순조대왕실록》2권, 1년(1801 신유 / 청 가경(嘉慶) 6년) 1월 10일(정해) 1번째기사


전 임
정성왕후
조선 역대 왕후
1759년 ~ 1776년
후 임
효의왕후
(효순왕후)
(헌경왕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