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빈 박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근빈 박씨
謹嬪 朴氏
조선 세조의 후궁
이름
별호 숙의 박씨, 귀인 박씨
신상정보
출생일 1425년
사망일 미상 (1504년 이후)
배우자 조선 세조
자녀 2남
덕원군, 창원군

근빈 박씨(謹嬪 朴氏, 1425년[1] ~ ?)는 조선 제7대 왕 세조후궁이다.

생애[편집]

남편 세조

본관은 선산이며,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맞아들인 후궁이다. 그녀의 출신과 가계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그녀가 박팽년의 누이라는 말이 있는데, 근빈과 박팽년은 서로 본관이 달라 남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2]

초봉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나 세조 재위년간에 숙의(내명부 종2품)로 있었으며, 세조의 후궁 중 유일하게 서자녀를 출산하여 두 왕자를 두었다. 이 공으로 예종 즉위 후 종1품 귀인으로 특진됐으며 세조의 지문과 애책문에 후궁 중 유일하게 수록됐다. 성종 14년(1483년)에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가 사망하자 장례 후 정1품 빈으로 진봉되어 근빈이 됐다. 성종 14년은 성종이 세 대비를 모시기 위해 건설한 창경궁이 완성된 해이기도 한데 정희왕후가 사망하여 국상을 마친 뒤인 성종 16년이 되어서야 남은 두 대비의 이처(처소의 이동)가 시작될 수 있었다. 이때 선왕들의 후궁들 역시 처소가 재이속되었는데, 근빈 박씨는 자수궁(慈壽宮)에 이속되어 장남 덕원군 이서가 숙원 이씨(예종의 후궁)와 귀인 윤씨(의경세자의 후궁)는 사제에서 지내도록 해준 것을 들어 박씨는 늙고 병까지 있으니 아들인 자신이 돌볼 수 있도록 사제에서 지내게 해주길 청원했으나 거절당했다.[3]

두 아들 중 차남 창원군 이성(李晟)은 술을 매우 좋아하고 음란하였으며, 여종을 함부로 죽이는 등 세간의 평이 매우 좋지 않았다. 이 때문에 1484년(성종 15년) 창원군이 죽고난 후 그에게는 여도(戾悼)라는 시호가 붙여졌는데, 이 중 여(戾)라는 글자에 좋지 않은 의미가 있다[4]하여 근빈이 직접 아들의 시호를 고쳐달라고 청한 적이 있다.

1504년 나이 80세에 이르러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항상 자수궁에서 거처하다가 이 무렵 입궐하였는데, 왕이 나놀려면, 근빈에게 교자(轎子)를 타도록 하고, 궁인이 메게 하므로 궁인들이 항시 승혜(繩鞋)를 신고 갔다. 연산군이 술이 취하면 스스로 일어나 춤을 추고, 또한 근빈도 일어나 춤추게 하였는데, 근빈은 늙어서 할 수 없었으나, 모진 학대가 두려워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박씨가 언제 죽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녀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광사동에 있으며, 그녀의 아들인 덕원군의 후손이 그녀에게 제를 올리고 있다.

가족 관계[편집]

관련 작품[편집]

연극[편집]

  • 《제8회 여성연출가전 - 자수궁》(2012, 서미영) : 근빈이 박팽년의 누이라는 내용을 모티브로 한 퓨전 사극[5]

각주[편집]

  1. 《조선왕조실록》연산 55권, 10년(1504년 갑자 / 명 홍치(弘治) 17년) 9월 4일(신묘) 5번째기사.
  2. 전주이씨대동종약원 - 덕원군 Archived 2005년 2월 25일 - 웨이백 머신 외, 근빈 박씨의 본관은 선산이고 박팽년의 본관은 순천이다.
  3. 성종실록 179권, 성종 16년 5월 5일 갑인 1번째기사
  4. '여(戾)'에는 '예전의 허물을 뉘우치지 않는다.'라는 의미가 있다.
  5. 제8회 여성연출가전 - 실력 있는 여성 연출가가 만드는 참신한 무대 Archived 2016년 3월 5일 - 웨이백 머신 《여성신문》, 2012년 3월 30일

참고 문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