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효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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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황후 (순정효황후)
純貞皇后 (純貞孝皇后)
Empress Sunjeong of the Korean Empire.jpg
황태자비
재위 1906년 ~ 1907년
전임자 황태자비 민씨(순명효황후)
후임자 의민황태자비
황후
재위 1907년 ~ 1910년
전임자 명성황후
후임자 황조 멸망
(명목상 의민황태자비)
별명 황태자비, 윤비
배우자 순종
본명 윤증순
부모 윤택영 / 경흥부부인 유씨
출생 고종 31년(1894) 음력 8월 20일
조선 조선 양근 서종면 문호리(汶湖里) 외가
사망 1966년 2월 3일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덕궁 낙선재(樂善齋)
능묘 유릉

순정효황후 윤씨(純貞孝皇后 尹氏, 1894년 양력 9월 19일(음력 8월 20일) ~ 1966년 양력 2월 3일)는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계후(繼后)로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박영효, 이재각 등과 함께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던 친일 인사인 윤택영의 딸이다. 정식 시호는 헌의자인순정효황후(獻儀慈仁純貞孝皇后)이며, 순종과 사이에 자녀는 없다.

생애[편집]

궁중 생활[편집]

1894년 음력 8월 20일/양력 9월 19일 (水) 한성부에서 출생하였다. 1904년에 당시 황태자비였던 순명효황후 민씨가 사망하자 1906년에 13살의 어린 나이에 동궁계비(東宮繼妃)로 책봉되었고, 이때 아버지 윤택영과 시서모 순헌황귀비 엄씨 사이에 거액의 뇌물이 오갔다는 풍설이 돌았다. 이듬해인 1907년에 부군 순종 임금이 황제로 즉위함에 따라 그녀는 황후가 되었다.

순정효황후는 1910년 병풍 뒤에서 어전 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 성향의 대신들이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의 날인을 강요하자, 옥새(玉璽)를 자신의 치마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았는데, 결국 큰아버지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겼고, 이후 대한제국의 국권은 일제에 의해 피탈되어 멸망을 맞게 되었다.

순종의 지위가 이왕(李王)으로 격하됐으므로 그녀도 이왕비(李王妃)가 되어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에 머물렀으며 1926년 4월, 순종이 붕어하자 대비(大妃)로 불리며 창덕궁(昌德宮)의 낙선재(樂善齋)로 거처를 옮겼다[1].

광복 이후[편집]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창덕궁에 남아 황실을 지키고자 하였으며 궁궐에 들이닥쳐 행패를 부리는 조선인민군을 당시 56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크게 호통을 쳐서 내보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순정효황후는 두려움을 모르는 여걸(女傑)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51년 대한민국의 전세가 급박해지자 미군에 의해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고, 궁핍한 생활을 전전하던 끝에 1953년 휴전 협정을 맞아 환궁하려 하였으나, 제1공화국이승만이 순정효황후에 대한 민심을 두려워하여 환궁을 방해하였기 때문에, 정릉의 수인제(修仁齊)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1960년, 전(前) 구황실사무총국장 오재경(吳在璟)의 노력으로 환궁에 성공하였고, 이후 일본에서 귀국한 덕혜옹주의민태자 일가와 함께 창덕궁 낙선재에서 지내며 독서피아노 연주로 소일하였다. 죽는 그 순간까지 온화한 성정과 기품을 잃지 않았던 순정효황후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로서, 당당함과 냉철함으로 황실을 이끌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평생 영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그 실력은 타임지를 읽어낼 정도였다고 전한다. 1966년 2월 3일, 창덕궁 석복헌(錫福軒)에서 심장마비로 73살의 나이에 불우한 일생을 마감하였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유릉(裕陵)에 순종과 합장되었다.

순정효황후를 연기한 배우[편집]

사진[편집]

주석[편집]

  1. 1926. 5. 27.자 동아일보 기사 "윤대비전하(尹大妃殿下)는 낙선재(樂善齋)로 이어(移御),(…)"


전 임
명성황후
조선 역대 왕후
1907년 ~ 1910년
후 임
의민황태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