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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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
종파 대한불교조계종
소재지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神勒寺)는 경기도 여주시 봉미산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서 신라 시대 때 창건되었다고 여겨진다.[1]

일반적으로 한국의 절은 산 속에 짓는 경우가 많은데 반하여 신륵사는 남한강이 보이는 강변에 세워져 있다. 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의 말사이다.

역사[편집]

신라 때 처음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원효가 아홉 마리의 이 승천한 연못을 메우고 창건했다. "신륵(神勒)"이라는 절 이름의 유래로는 세 가지 이야기가 있다. 첫 번째는 신이한 미륵(彌勒)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이다.[1]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신륵사의 륵(勒)자는 말을 다스린다는 뜻이 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2] 두 번째는 고려 우왕왕사 나옹(王寺懶翁)이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용마를 신비한 굴레를 씌워 얌전하게 다스렸다는 이야기이다.[1][2] 세 번째는 고려 고종 때 건너마을에 사나운 용마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히자 승려 인당(印塘)이 나타나 고삐를 잡아채자 순해졌다는 이야기이다.[2] 설화에 나타난 신력과 굴레에서 신륵(神勒)이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신륵사에서는 고려의 고승인 나옹이 머물러 절이 크게 확장되었다. 나옹은 1376년(우왕 2)에 신륵사에서 사망하여[1] 이색이 이곳에 대장각을 짓고 《대장경》을 봉안했다. 지금은 나옹과 나옹의 제자인 무학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3] 1379년(우왕 5)에 각신(覺信)·각주(覺珠) 등이 이 절을 크게 짓고, 나옹의 부도(浮屠)를 세웠다.

조선 시대에는 1440년(세종 22)에 중수하였으며,[1] 1473년(성종 4)에 세종의 능인 영릉을 여주로 이장하면서 영릉의 원찰로 신륵사가 지정되었다.[1] 이때 국가에서 확장하여 크게 중수되어 사찰명은 보은사(報恩寺)로 바뀌었다.[1] 1671년(현종 12)에는 계헌(戒軒),[1] 1702년(숙종 28)에는 위학(偉學) · 천심(天心) 등이 중수하였다.[1]

원찰로서의 의미가 약해진 뒤 신륵사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문화재[편집]

신륵사 다층전탑
(神勒寺多層塼塔)
대한민국보물
Brick pagoda silleuk.jpg
지정번호 보물 제226호
비고 1963년 1월 21일 지정
신륵사 다층석탑
(神勒寺多層石塔)
대한민국보물
Stone Pagoda of Silleuksa-temple.JPG
Low relief on Silleuksa Stone Pagoda.JPG
신륵사 다층석탑과 탑신에 새겨진 용무늬 부조
지정번호 보물 제225호
비고 1963년 1월 21일 지정
신륵사 조사당
(神勒寺多祖師堂)
대한민국보물
Josadang of Silleuksa-temple.JPG
지정번호 보물 제180호
비고 1963년 1월 21일 지정

이 절에는 다층석탑(보물 225호) · 다층전탑(보물 226호) ·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보물 228호) ·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보물 229호) ·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230호)·보제존자석등(보물 231호) · 조사당(組師堂: 보물 180호) 등의 문화재가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2]

이명박 정부한반도 대운하 계획이 추진되면 신륵사가 수몰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으로 관심이 높다.[4]

다층전탑[편집]

신륵사 다층전탑(神勒寺多層塼塔)은 보물 제226호로,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벽돌탑이다.[5] 진흙을 구워 만든 전탑은 대한민국에서는 드문 양식으로 신륵사의 것 외에는 경상북도에 몇 기가 있을 뿐이다.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는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6]

높이는 9.4m이며, 재료는 기단부(基壇部)가 화강석, 탑신부(塔身部)가 벽돌이다.[5] 일반 석탑의 기단과 비슷한 2중 기단 위에 다시 3단의 석단(石段)이 있고, 그 위에 탑신부를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1단이 있어 7층으로 보인다.[5]

다층석탑[편집]

신륵사 다층석탑(神勒寺多層石塔)은 보물 제225호로, 신륵사에 있는 석탑이다.[7] 높이는 3m, 건립 연대는 15세기 후반쯤으로 추측되는 8층 대리석제 탑이다.[7]

신륵사 다층석탑은 2층기단 위에 세워졌고 기단부의 면석(面石)에는 용문(龍文)을, 위와 아래의 갑석(甲石)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갑석이나 조각의 기법은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통한다.[7] 탑신은 낮고 평평하며 옥개석은 두터운 판석으로 되었다.[7] 전반적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세부적인 조형 방법은 전혀 달라서,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8층 위에도 일부 탑신과 지붕이 남아 있어 전체 층수는 더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8]

조사당[편집]

신륵사 조사당(神勒寺祖師堂)은 보물 제180호로,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목조건물이다.[9] 정면 1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의 다포계(多包系) 건물이다.[9] 내부에는 마루를 깔고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만들었으며, 불단(佛壇) 뒷벽에는 중앙에 나옹(懶翁)과 그 좌우에 지공(指空) 및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영정(影幀)이 모셔져 있다.[9] 그래서 태조무학대사를 위해 지었다는 설이 전해 온다.[9] 기록에 의하면 신륵사가 조선 예종(睿宗, 재위 1468∼1469) 때 중수되었다고 하므로 이 건물도 그 당시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9]

조선전기 목조 조각 수법을 보이며 전체적으로 작고 아담한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10]

문화재[편집]

같이 보기[편집]

참고자료[편집]

주석[편집]

  1. 한국사 > 고대사회의 발전 > 삼국의 성립과 발전 > 고대문화의 발전 > 신륵사,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2. 사회 I·문화재 > 문 화 재 > 중요 문화재 > 경기도 > 신륵사,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3. 최장문. "여주 신륵사에서 만난 세 스승 - 나옹 선사·무학 대사·목은 이색... "산처럼 물처럼 살라 하네"", 《오마이뉴스》, 2006년 8월 21일 작성. 2008년 5월 21일 확인.
  4. "대운하, 문화를 보라 - 2008. 01. 27 대운하 예정지-신륵사와 미사리를 가다", 《참세상》, 2008년 2월 5일 작성. 2008년 5월 21일 확인.
  5. 사회 I·문화재 > 문 화 재 > 중요 문화재 > 경기도 > 신륵사 다층전탑,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6. 신륵사다층전탑, 문화유산정보, 문화재청
  7. 사회 I·문화재 > 문 화 재 > 중요 문화재 > 경기도 > 신륵사 다층석탑,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8. 신륵사 다층석탑, 문화유산정보, 문화재청.
  9. 사회 I·문화재 > 문 화 재 > 중요 문화재 > 경기도 > 신륵사 조사당,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10. 신륵사조사당, 문화유산정보, 문화재청

참고 문헌[편집]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