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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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우왕
高麗 禑王
고려의 제32대 국왕
본명 왕우(王禑)
재위 1374년 10월 ~ 1388년 6월
종교 불교
출생일 1365년 7월 25일(1365-07-25)
사망일 1389년 12월 31일 (24세)
왕비 근비 이씨
부왕 공민왕
모후 반야
이전 왕 공민왕
다음 왕 창왕

우왕(禑王, 1365년 7월 25일 (음력 7월 7일) ~ 1389년 12월 31일 (음력 12월 14일))은 고려 제32대 국왕(재위: 1374년 ~ 1388년)이다. 우왕(禑王)은 휘(諱)인 (禑)에, 임금을 뜻하는 (王)을 붙여 부른 명칭으로, 시호는 받지 못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우왕신돈(辛旽)의 아들이라며 "가짜를 내쫓고 진짜를 세운다(廢假立眞)"고 주장하여 신돈의 후손으로 기록되었으나 이는 모략으로 간주된다.

1374년 10월부터 1388년 6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1374년 10월부터 1383년까지 이인임(李仁任)이 섭정을 하였고 한때 1374년 10월 고려 왕가 혈통의 후예이자 북원(北元) 제국귀족 출신인 심왕 탈탈불화(瀋王 脫脫不花)가 북원 제국의 사주를 받고 고려 군왕을 참칭한 바 있었으나 이인임(李仁任)이 추대한 우왕(禑王)의 즉위로 심왕 탈탈불화(瀋王 脫脫不花)는 끝내 고려 군왕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그 후 이인임(李仁任)이 섭정을 거둔 1383년부터 1388년 5월까지 우왕(禑王)은 친정을 하였다가 위화도 회군(威化島 回軍) 사건을 일으키고 도모한 이성계(李成桂)에 의하여 1388년 5월부터 한 달 후 1388년 6월 폐위될 때까지 이성계(李成桂)가 실권하였다.

이성계위화도 회군 이후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여주로 이배된 뒤 강릉으로 다시 이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사약을 받고 처형된다. 고려 멸망 후 조선 태종(朝鮮 太宗) 때에 그를 여흥왕(驪興王)이라고 부르기도 했다.[1] 이는 그의 귀양지가 경기도 여흥(지금의 경기도 여주시)인 것에서 기인한다.[2]

생애[편집]

초기[편집]

우왕의 아명(兒名)은 모니노(牟尼奴)로, 공민왕의 외아들이다. 그의 생모는 훗날(우왕 즉위년) 순정왕후(順靜王后)로 추존된 궁인 한씨로 포고되었다.[3][4][5]

1371년(공민왕 20년)에 7세의 나이로 비로소 입궐하여 태후전에서 지냈다.[6] 1373년(공민왕 22년) '우(禑)'라는 이름(名號·諱)을 하사받았고, 강령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작되었다.[7] 1374년(공민왕 23년)에 공민왕이 시해당하자, 10세의 나이로 훗날 이성계의 정적이 되는 이인임의 후원을 받고 등위하여 이인임의 섭정을 받았으며, 생모로 포고한 궁인 한씨를 순정왕후(順靜王后)로 추존했다.[8]

우왕 2년에 신돈의 비첩(婢妾)이었던 반야[9]라는 여성이 우왕의 생모임을 주장하는 사건이 발생해[10] 그렇지 않아도 궁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던 점에 의해 의혹이 있었던 그의 출생에 대한 논란이 상당했다. 비록 반야는 처형되었으나 이는 나중에 이성계 일파가 그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빌미가 되었으며[11], 조선 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엔 우왕을 신돈과 반야의 자식으로 규정하고 있다.[12][13]

치세(治世)[편집]

처음에는 경연(經筵)을 열어 학문을 닦기에 힘썼고, 명덕태후(공원왕후)의 훈계를 받아 몸가짐을 바로하여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태후가 승하한 다음 주색잡기에 빠져 고려의 국력과 명운을 쇠진하게 된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 말기 기록의 사실성은 논란이 많다. 1383년 친정(親政)을 실시하였다.

우왕의 근신(近臣)인 이인임이 국왕의 총애를 바탕으로 횡행하다가 당시, 고려의 최고 실력자였던, 최영이성계의 눈밖에 나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우왕은 조정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결국 1388년(우왕 14년) 5월에 위화도 회군으로 권신이 된 이성계는 자신에게 실권이 박탈된 우왕을 한 달 후 1388년 6월에 퇴위시키고, 우왕의 외아들인 (昌)을 왕위에 올렸다.

요동 정벌과 축출[편집]

1388년 2월 명나라철령(강원도 안변) 이북의 땅을 점령하겠다는 통고를 해 왔다.[14] 본래는 원나라쌍성총관부가 있던 지역이니, 이제는 명나라의 땅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철령위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했다.[14] 최영은 반발했고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명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이자고 하였다.

그해 4월, 최영우왕은 이 기회에 명의 만주 기지인 요동을 공격해서 명나라의 야심을 꺾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성계요동 정벌을 반대하면서 그 이유로 4가지를 들었다.[14]

소로서 대를 거역하는 것이 첫째 불가하고, 여름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둘째 불가하고, 온나라 군대를 동원하여 원정하러 가면 왜적이 그 틈을 노릴 것이니 셋째 불가하고, 지금은 여름철이라 비가 자주 내리므로 아교가 녹아 활이 눅고 군사들은 질병을 앓을 것이니 넷째 불가합니다.[14]

이것이 이른바 '4불가론'이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요동 정벌의 강행을 명령했으며[14], 이성계는 명령에 불복하고 위화도 회군을 단행해 개경을 전복, 최영을 고양으로 유배하고 우왕을 폐위해 강화도로 유배한 뒤 우왕의 외아들인 창을 왕위에 올렸다.

복위운동과 최후[편집]

1388년 창왕은 전왕인 우왕을 강화도에서 여흥군(驪興郡, 현재의 경기도 여주시)으로 옮겼으며, 최영을 충주로 귀양보냈다가 이성계 일파가 최영의 사형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마지못해 승인하게 된다. 그러나 우왕을 이배하는 과정에서 그가 부왕인 우왕과 자주 내통하는 것과, 부왕 우왕을 다시 복위시키려는 계획에 가담한 것이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탄로나게 된다.

1389년 이성계 일파는 우왕과 그의 아들 창왕신돈의 아들과 손자로 몰아붙여 폐위시키고 고려 왕실의 먼 종친인 공양왕을 왕으로 옹립했다.

1389년(공양왕 원년) 11월에 김저(金佇)와 모의하여 이성계를 제거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강릉으로 다시 옮겨졌으며, 다음달에 그곳에서 사약을 받고 처형을 당하였다.

가계[편집]

우왕은 적후를 두지 않고 9명의 왕비와 3명의 옹주(九妃三翁主)등 12명을 비빈을 두었다. 이는 조모인 명덕태후 홍씨가 죽은 뒤 대부분 강제로 차출한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가 폐가입진을 내세워 우왕이 축출된 뒤 창왕의 생모인 근비와 현비, 그리고 앞서 우왕의 유배행을 동행한 영비 최씨와 명순옹주[15]를 제외한 나머지 비빈들은 폐출 되었으며[16] 우왕과 창왕은 신돈(辛旽)의 후손이라 하여 위조(僞朝: 가짜 왕)로 폄하됨에 따라 우왕은 반역열전에 수록되고 비빈들은 《고려사》 후비전에 입전되지 못하였다.

부모(父母)[편집]

  • 부왕: 공민왕 (恭愍王, 1330~1374 재위 1351~1374)
  • 모후: 순정왕후 한씨 (順靜王后 韓氏, ? ~ 1374년 이전)
  • 생모: 반야(般若, ? ~ 1376)

후비(后妃)[편집]

  • 근비 이씨 (謹妃 李氏) - 고성 이림의 딸
    • 아들: 창왕 (昌王, 1380년~1389년,재위 1388년~1389년) - 고려 제33대 왕.
  • 영비 최씨 (寧妃 崔氏) - 철원 최영의 딸
  • 의비 노씨 (毅妃 盧氏) - 노영수의 딸. 근비 이씨의 궁녀 출신.[17]
  • 숙비 최씨 (淑妃 崔氏) - 최천검의 딸. 의비 노씨의 궁녀 출신.
  • 안비 강씨 (安妃 姜氏) - 강인유의 딸
  • 정비 신씨 (正妃 申氏) - 평산 신아의 딸
  • 덕비 조씨 (德妃 趙氏) - 조영길의 딸. 노비 출신
  • 선비 왕씨 (善妃 王氏) - 왕흥의 딸
  • 현비 안씨 (賢妃 安氏) - 죽성 안숙로의 딸이며 공민왕의 비인 정비 안씨의 조카.
  • 화순옹주 (和順翁主) - 기생 출신이며 본명은 소매향(小梅香)
  • 명순옹주 (明順翁主) - 기생 출신이며 본명은 연쌍비(燕雙飛)
  • 영선옹주 (寧善翁主, ?~1420) - 기생 출신이며 본명은 칠점선(七點仙), 원래는 밀직(密直) 남질(南秩)의 첩(妾)이었다.

우왕이 등장하는 작품[편집]

혈통 논란[편집]

왕위에 오를 때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폐위 당할 때 그 이유 중 하나로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고 신돈의 아들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이 때문에 당대에 시호를 받지 못하였으며 조선에서 편찬한 《고려사》(高麗史)는 우왕의 치세를 왕의 기록을 수록하는 편목인 세가(世家)에 넣지 않고 인물의 기록을 수록하는 열전(烈傳)에 넣었다. 또한 성도 신돈을 따라 신우(辛禑)라 적고 있다. 우왕 및 창왕이 공민왕의 혈통인가 신돈의 혈통인가에 대한 진위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데, 다만 신돈의 혈통이라 기정사실화되고 역사에 기록된 것은 조선 건국 세력이 우·창왕을 폐위를 정당화하려는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18]

이때 그의 폐위와 우왕, 창왕 신씨설을 동조한 인물 중에는 정몽주도 있었다. 정몽주1392년고려 멸망과 역성혁명에는 반대하였으나 이성계, 정도전, 조준 등이 우왕과 창왕신돈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폐위하는 데 가담하였다. 우왕 복위 사건은 주모자로 거론된 사람과 처리 과정 등을 볼 때 다소 의문이 남기는 하지만, 정몽주는 이성계와 뜻을 같이하여 공양왕을 세운 것은 물론이고,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내세우면서 우왕과 창왕을 왕씨가 아닌 신돈의 후손으로 모는 작업에도 동참하였다.[19] 우왕과 창왕이 왕위에 오를 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치적 필요에 의하여 그들을 신돈의 후손으로 내몰아 결국 죽였는데, 자신들이 이전에 인정하였던 왕들을 죽인 작업에 정몽주 역시 동의하였던 것이다.[19] 정몽주 역시 우왕창왕신돈의 후손이라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아니라는 반론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더 알아보기[편집]

주석[편집]

  1.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권제32, 태종 16년(1416년) 7월 5일(갑오)
  2. 여말충의열전(사단법인 고려숭의회, 1994) 참조
  3. 《高麗史》 卷四十四 世家 卷第四十四 - 恭愍王 23年 9월 15일 中 "丁丑 追贈故宮人韓氏考俊·祖平·曾祖通, 沔陽府院大君, 外祖韓良沔城府院大君. 王以江寧大君冒稱韓氏出也."
  4. 《高麗史》 卷一百三十三 列傳 卷第四十六 - 우왕 총서 中 "二十三 年九月 王冒稱禑故宮人韓氏出, 追贈韓氏三代及其外祖."
  5. 《高麗史》 卷一百三十三 列傳 卷第四十六 - 禑王 2年 윤9월 27일 中 "戊申 葬順靜王后韓氏于懿陵. 時明經及第韓略言, “我韓氏宗人也, 初韓氏卒, 我與韓氏族故僧能祐, 火其屍收骨, 厝于奉恩寺松林.”"
  6. 高麗史 卷四十三 世家 卷第四十三 - 恭愍王 20年 7월 18일 中 "召牟尼奴, 納太后殿."
  7. 《高麗史》 卷四十四 世家 卷第四十四 - 恭愍王 22年 7월 6일 中 "賜牟尼奴名禑, 封爲江寧府院大君"
  8. 《高麗史》 卷一百三十三 列傳 卷第四十六 - 禑王 卽位年 11월
  9. 《高麗史》 卷四十一 世家 卷第四十一 - 恭愍王 17年 9월 中 "始賜辛旽妾般若, 米月三十石."
  10. 《高麗史》 卷一百三十三 列傳 卷第四十六 - 禑王 2年 3월 中 "般若夜潛入太后宮, 啼號曰, “我實生主上, 何母韓氏耶?” 太后黜之. 仁任下般若獄, 臺諫巡衛府雜治之, 般若指新創中門, 號曰, “天若知吾寃, 此門必頹!” 司議 許時纔入門, 門自頹, 時僅免. 人頗異之, 竟投般若于臨津, 斬其族判事 龍居實."
  11. 《조선왕조실록》태조 1권 총서 100번째기사
  12. 《高麗史》 卷一百三十三 列傳 卷第四十六 - 우왕 총서 中 "(공민)二十三年九月 王冒稱禑故宮人韓氏出: (공민)23년 9월 (공민)왕이 우를 죽은 궁인 한씨의 아들이라 사칭(원문엔 모칭)했다."
  13. 《高麗史》 卷一百三十三 列傳 卷第四十六 - 우왕 총서 中 "辛禑小字牟尼奴, 旽婢妾般若之出也: 신우(註: 신돈의 아들이라 해서 신우)의 어릴 적 자는 모니노로, (신)돈의 비첩 반야가 낳았다."
  14. 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53페이지
  15. 《高麗史》 卷一百三十七 列傳 卷第五十 - 禑王 14年 6월 8일 中 "諸將請出寧妃, 禑曰, “若出此妃, 我當偕出.” (중략) 遂與寧妃及燕雙飛,"
  16. 《高麗史》 卷一百三十七 列傳 卷第五十 昌王 卽位年 6월 中 "是日, 尊母謹妃李氏, 爲王大妃, 毅·淑·安·正·善·德六妃, 寧善·和惠兩翁主, 皆歸私第, 絶其供上."
  17. 《高麗史》 卷一百三十四 列傳 卷第四十七 禑王 7年 12월 中 "禑納謹妃宮人釋婢, 寵愛之, 書雲副正 盧英壽之女也."
  18.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우왕 항목
  19. 서해문집 편집부,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2003) 126페이지
전 임
공민왕
제32대 고려왕
1374년 - 1388년
후 임
창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