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우왕
| 고려의 제32대 국왕 | |
| 본명 | 왕우(王禑) |
|---|---|
| 재위 | 1374년 ~ 1388년 |
| 종교 | 불교 |
| 왕비 | 근비 이씨 |
| 부왕 | 공민왕 |
| 모후 | 반야 |
| 이전 왕 | 공민왕 |
| 다음 왕 | 창왕 |
우왕(禑王, 1365년 7월 25일 (음력 7월 7일) ~ 1389년 12월 31일 (음력 12월 14일)은 고려 제32대 국왕(재위: 1374년 ~ 1388년)이다. 우왕은 휘인 우(禑)에, 임금을 뜻하는 왕(王)을 붙여 부른 명칭으로, 당대의 시호는 없다. 고려사에는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며 "가짜를 내쫓고 진짜를 세운다(廢假立眞)"고 주장하여 신돈의 후손으로 기록되었으나 이는 모략으로 간주된다.
1374년부터 1388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374년부터 1383년까지 이인임(李仁任)이 섭정을 하였고 1383년부터 1388년 퇴위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여주로 유배된 뒤 강릉으로 이배되었다가 살해된다. 고려 멸망 후 태종 때에 그를 여흥왕(驪興王)이라고 부르기도 했다.[1] 이는 그의 귀양지가 경기도 여흥인 것에서 기인한다.[2]
목차 |
생애 [편집]
잠저(潛邸) [편집]
우왕의 아명은 모니노(牟尼奴)이다. 부왕은 공민왕이고, 모친은 신돈의 시녀였던 반야이다.
공민왕이 신돈의 집에 미행하여 반야와 관계하여 낳았다고 하며 신돈이 처형된 다음인 1371년(공민왕 20년)에 비로소 입궐하여 '우(禑)'라는 이름을 하사받았고, 강령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작되었다. 왕실에서는 그의 혈통이 미천하여 등위에서 대신들의 방해를 받을까하여 이미 사망한 궁인 한씨의 소생이라고 포고했다.
궁에서 출생하지 않은 데다가 가뜩이나 불명확한 출생에 대해서도 처음에 거짓으로 발표되었던 이유로 좋지 않은 풍문이 많았다. 이는 나중에 이성계 일파가 그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빌미가 되었다.
1374년에 공민왕이 시해당하자, 10세의 나이로 훗날 이성계의 정적이 되는 이인임의 후원을 받고 등위하게 되었다. 이인임이 섭정을 하였으며 즉위한 우왕은 궁인 한씨의 3대를 추증하였다.
치세(治世) [편집]
처음에는 경연(經筵)을 열어 학문을 닦기에 힘썼고, 명덕태후의 훈계를 받아 몸가짐을 바로하여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태후가 승하한 다음 주색잡기에 빠져 고려의 국력과 명운을 쇠진하게 된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말기 기록의 사실성은 논란이 많다. 1383년 친정(親政)을 실시하였다.
우왕의 근신(近臣)인 이인임이 국왕의 총애를 바탕으로 횡행하다가 당시, 고려의 최고 실력자였던, 최영과 이성계의 눈밖에 나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우왕은 조정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결국 1388년(우왕 14년) 6월에 위화도 회군으로 권신이 된 이성계는 우왕을 퇴위시키고, 아들인 창(昌)을 왕위에 올렸다.
요동 정벌과 축출 [편집]
1388년 2월 명나라는 철령(강원도 안변) 이북의 땅을 점령하겠다는 통고를 해 왔다.[3] 본래는 원나라의 쌍성총관부가 있던 지역이니, 이제는 명나라의 땅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철령위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했다.[3] 최영은 반발했고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명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이자고 하였다.
그해 4월, 최영과 우왕은 이 기회에 명의 만주 기지인 요동을 공격해서 명나라의 야심을 꺾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반대하면서 그 이유로 4가지를 들었다.[3]
| “ | 소로서 대를 거역하는 것이 첫째 불가하고, 여름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둘째 불가하고, 온나라 군대를 동원하여 원정하러 가면 왜적이 그 틈을 노릴 것이니 셋째 불가하고, 지금은 여름철이라 비가 자주 내리므로 아교가 녹아 활이 눅고 군사들은 질병을 앓을 것이니 넷째 불가합니다.[3] | ” |
이것이 이른바 '4불가론'이다. 그러나 요동정벌은 단행되었다.[3] 그러나 이성계 등은 대국을 건드릴수 없다 하며 위화도에서 회군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최영을 처형한 뒤 우왕을 신돈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폐위시켰던 것이다.
복위운동과 최후 [편집]
우왕은 얼마 뒤 왕씨가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라는 누명을 쓴 채 쫓겨났다.[4] 1388년 창왕은 전왕인 우왕을 강화도에서 여흥군(驪興郡, 현재의 여주군)으로 옮겼으며, 최영을 충주로 귀양보냈다가 이성계 일파가 최영의 사형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마지못해 승인하게 된다. 그러나 우왕을 이배하는 과정에서 그가 부왕인 우왕과 자주 내통하는 것과, 부왕 우왕을 다시 복위시키려는 계획에 가담한 것이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탄로나게 된다.
1389년 이성계 일파는 그가 신돈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며 우왕과 그의 아들 창왕을 신돈의 아들과 손자로 몰아붙여 폐위시켰다.
결국 1389년(공양왕 1년) 11월에 김저(金佇)와 모의하여 이성계를 제거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강릉으로 다시 옮겨졌으며, 다음달에 그곳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가계 [편집]
우왕은 구비삼옹주 (九妃三翁主)라는 12명의 비빈을 두었다. 이는 조모인 명덕태후 홍씨가 죽은 뒤 주색잡기로 인한 결과이며 대부분 약탈하여 책봉하였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가 폐가입진을 내세워 우왕이 축출된 뒤 현비를 제외한 나머지 비빈들은 폐출 되었으며 우왕과 창왕은 신돈(辛旽)의 후손이라 하여 위조(僞朝)로 폄하됨에 따라 우왕은 반역열전에 수록되고 왕비들은 《고려사》 후비전에 입전되지 못하였다.
- 근비 이씨(謹妃 李氏, 생몰년 미상) - 고성 이림의 딸
- 아들: 창왕(昌王, 1380년~1389년,재위 1388년~1389년) - 고려 제33대 왕
- 영비 최씨(寧妃 崔氏, 생몰년 미상) - 철원 최영의 딸
- 의비 노씨(毅妃 魯氏, 생몰년 미상) - 노영수의 딸
- 숙비 최씨(淑妃 崔氏, 생몰년 미상) - 최천검의 딸
- 안비 강씨(安妃 姜氏, 생몰년 미상) - 강인유의 딸
- 정비 신씨(正妃 申氏, 생몰년 미상) - 평산 신아의 딸
- 덕비 조씨(德妃 趙氏, 생몰년 미상) - 조영길의 딸이며 노비 출신
- 선비 왕씨(善妃 王氏, 생몰년 미상) - 왕흥의 딸
- 현비 안씨(賢妃 安氏, 생몰년 미상) - 죽성 안숙로의 딸이며 공민왕의 비인 정비 안씨의 조카.
- 화순옹주(和順翁主, 생몰년 미상) - 기생 출신이며 본명은 소매향(小梅香)
- 명순옹주(明順翁主, 생몰년 미상) - 기생 출신이며 본명은 연쌍비(燕雙飛)
- 영선옹주(寧善翁主, ?~1420년) - 기생 출신이며 본명은 칠점선(七點仙), 원래는 밀직(密直) 남질(南秩)의 첩(妾)이었다.
관련 작품 [편집]
드라마 [편집]
- 《개국》(KBS, 1983년~1983년, 배우:이두섭)
- 《용의 눈물》(KBS, 1996년~1998년, 배우:권오성)
- 《신돈》(MBC, 2005년~2006년, 배우:최수한, 이디엘)
- 《대풍수》(SBS, 2012년~2013년, 배우:이민호)
논란과 의혹 [편집]
'왕우(王禑)'와 '신우(辛禑)' [편집]
왕위에 오를 때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폐위 당할 때 그 이유 중 하나로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고 신돈의 아들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때문에 당대에 시호를 받지 못하였으며 고려사(高麗史)에서는 그를 이름으로만 적고 있고, 그마저도 왕우(王禑)가 아닌 신우(辛禑)로 적고있다. 그가 실제로는 공민왕의 아들이 맞다는 학계의 유력한 주장이 있으나[출처 필요] 현재로서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정몽주의 폐가입진 동조 [편집]
이때 그의 폐위와 우왕, 창왕 신씨설을 동조한 인물 중에는 정몽주도 있었다. 정몽주는 1392년의 고려 멸망과 역성혁명에는 반대하였으나 이성계, 정도전, 조준 등이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폐위하는 데 가담하였다. 이성계 일파의 주장은 고려사, 고려사절요에도 등재되어 신우, 신창으로 등재되었으나 근거가 희박하다.[출처 필요]
이성계는 정몽주 등과 이른바 폐가입진,즉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는 논리로 창왕을 폐위시키고, 제20대 왕인 신종의 7세손 정창군 요를 등극시킨다.[5]
우왕 복위 사건은 주모자로 거론된 사람과 처리 과정 등을 볼 때 다소 의문이 남기는 하지만, 정몽주는 이성계와 뜻을 같이하여 공양왕을 세운 것은 물론이고,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내세우면서 우왕과 창왕을 왕씨가 아닌 신돈의 자손으로 모는 작업에도 동참하였다.[6] 우왕과 창왕이 왕위에 오를 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치적 필요에 의하여 그들을 신돈의 자손으로 내몰아 결국 죽였는데, 자신들이 이전에 인정하였던 왕들을 죽인 작업에 정몽주 역시 동의하였던 것이다.[6] 정몽주 역시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자손이라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아니라는 반론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더 알아보기 [편집]
주석 [편집]
- ↑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권제32, 태종 16년(1416년) 7월 5일(갑오)
- ↑ 여말충의열전(사단법인 고려숭의회, 1994) 참조
- ↑ 가 나 다 라 마 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53페이지
- ↑ 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54페이지
-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닷컴, 2004) 24페이지
- ↑ 가 나 서해문집 편집부,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2003) 126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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