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신미양요
전멸한 광성보의 조선군.
전멸한 광성보의 조선군.
날짜 1871년 6월 1일 ~ 1871년 6월 11일
장소 강화도 일대
결과 미국의 전술적 승리
미국의 목표인 조선의 개방을 이루지 못해 전략적 패배
미국의 외교 실패
조선의 통상수교거부정책 강화
교전국
Flag of the king of Joseon.svg
조선
US Naval Jack 37 stars.svg
미국
지휘관
수자기.png 어재연
정기원
이현학
김현경
박치성
유예준
US Naval Jack 37 stars.svg 존 로저스
US Naval Jack 37 stars.svg 윈필드 스콧 슐레이
병력
불명 군함 5척, 대포 90문, 병력 800명
피해 규모
243명 전사, 100명 익사, 20명 포로 3명 전사, 10명 부상
USS콜로라도호에서 신미양요 참전 기념 사진을 찍는 장교들

신미양요(辛未洋擾)는 1871년 6월 10일(고종 8년 음력 4월 23일)에 발생한 조선미국 간 전쟁으로, 전술적으로는 미국이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전략적으로 결국 목적한 통상조약 체결은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고, 조선은 이를 계기로 쇄국정책을 더욱 고수하게 되었다.

배경[편집]

제너럴 셔먼호 사건 발생 뒤 미국은 두 차례 탐문항행(探問航行)을 실시하면서 셔먼호 사건을 응징하고 이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동시에 조선과 통상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두 차례나 조선 원정계획을 수립하였지만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

결국 1871년 미국은 일본과 류큐에서 그랬던 것처럼 전통적인 포함외교에 따라 조선을 개항하기 위하여 마침내 조선원정을 결행하기로 결정하고 주청 미국 공사 로 (Low)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동시에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John Rodgers)에게 해군 함대를 동원, 조선 원정을 명했다. 미국은 지금의 인천국제공항 근처까지 온 다음, 강화도로 진격하였다.

미군 원정대의 구성[편집]

신미양요에 참가한 1370톤급 USS Monocacy의 모습
신미양요에서 전사한 어재연 장군의 장군기가 미해군 콜로라도함에 실려있다. 어재연 장군기는 136년이 지난 2007년에 대한민국에 임대되는 형식으로 돌아왔다.
  • 사령관: 해군 제독(Admiral) 존 로저스
  • 탑승자: 주중국 대사 프레데릭 로우
  • 군함
    • USS Colorado
      • 함대 기함
      • 증기 스크루 프리깃
      • 배수량: 3,425 톤
      • 길이: 80.3m(263 피트 8 인치)
      • 선폭: 16m(52 피트 6 인치)
      • 흘수: 6.7m(22 피트 1 인치)
      • 승무원수: 646 명 (장교와 병사)
      • 속도: 시속 9노트
      • 함포:
        • 10인치(254 mm)포 2문
        • 9인치(229 mm)포 28문
        • 8인치포 14문
      • 콜로라도 프리깃함은 1861년에서 1865년까지 치러진 남북전쟁에 참가하였다.
    • USS Alaska
      • screw sloop
    • USS Monocacy
      • 외륜식 포함
      • 배수량: 1370 톤
      • 길이: 109 피트 9 인치
      • 선폭: 29 피트 8 인치
      • 흘수: 9 피트
      • 무장:
        • 13" 박격포 1문
        • 2 X 32-pdr
    • USS Benicia
      • screw sloop
      • 배수량: 2400 톤
      • 길이: 250 피트 6 인치
      • 선폭: 38 피트
      • 흘수: 18 피트
      • 속도: 11.5 노트
      • 승무원수: 291 명
      • 무장:
        • 1 x 11" S. B.
        • 10 x 9" S. B.
        • 1 x 60-pdr. R.
        • 2 x 20-pdr. BLR.
    • USS Palos
      • iron screw tug
      • 배수량: 420 톤
      • 길이: 137 피트
      • 선폭: 26 피트
      • 흘수: 9 피트 10 인치
      • 속도: 10.35 노트
      • 무장: 대포 2문

명예훈장[편집]

미국은 신미양요에서 공로가 큰 15명에게 미국 최고의 무공훈장인 명예 훈장(Medals of Honor)을 수여하였다.

  1. 존 앤드류스: 해군 3등수병
  2. 앨릭샌더 매켄지: 해군 갑판수부
  3. 새뮤얼 F. 로저스: 해군 병참장교
  4. 윌리엄 트로이: 해군 3등수병
  5. 찰스 브라운: 해병대 상병
  6. 휴 퍼비스: 해병대 이등병
  7. 사이러스 헤이든: 해군 공병
  8. 프레드릭 H. 프랭클린: 해군 병참장교
  9. 존 콜맨: 해병대 이등병
  10. 제임스 도허티: 해병대 이등병
  11. 패트릭 헨리 그레이스: 해군 선임 병참장교
  12. 윌리엄 F. 루크: 해군 수습 선원
  13. 마이클 맥너머라: 해병대 이등병
  14. 제임스 F. 머튼: 해군 수습 선원
  15. 마이클 오언스: 해병대 이등병

경과[편집]

앞서 1866년(고종 3년) 음력 7월 평양 대동강에서 발생한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의 사과 및 책임 추궁, 그리고 통상조약을 무력으로라도 체결할 목적으로 함대가 발진하였다.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제독이 이끄는 미국 군함 5척(기함은 프리깃함인 콜로라도호, 순양함 2척, 전함 2척)은 청나라 주재 공사 프레드릭 로우와 90문의 화포, 800명의 병력을 대동하고 5월 16일(음력 3월 27일) 일본나가사키 를 출발하여 원정에 나섰다.

  • 5월 16일 - 나가사키 출항
  • 5월 19일(음력 4월 1일) - 미군, 경기도 남양만에 도착. 이후 해로를 탐사하면서 북상 돌입
  • 5월 26일(음력 4월 8일) - 강화도 해역까지 북상, 강화 해협 물치도 앞바다를 함대의 정박지로 결정
  • 6월 1일(음력 4월 14일) - 미군은 조선에 탐측을 일방적으로 통고. 서울로 진입할 수 있는 강화도 해협 수로의 측량과 정찰을 목적으로 두 척의 군함을 파견. 한강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손돌목을 지나려다 강화도 포대로부터 포격을 받고 퇴각. 이후 미국은 포격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함. 조선 정부는 미국 함대가 허락 없이 해협을 항해하는 것은 영토침략 행위이므로 협상이나 사죄를 할 수 없다고 요구를 거절, 협상 결렬.

전투[편집]

점령당한 덕진진.
  • 6월 10일(음력 4월 23일) - 미군 상륙부대는 포함 2척을 앞세우고 육전대(해병대) 644명을 강화도 초지진(草芝鎭)에 상륙시키고, 덕진진(德津鎭)을 점령하였다.
  • 6월 11일(음력 4월 24일) - 광성진(廣城鎭), 광성보를 차례로 점령하였다. 진무중군 어재연 이하 600명의 조선군이 지키고 있던 광성진 전투에서 조선군은 병력과 무기에서 우세한 미군과 맞서 싸웠다. 미군은 상륙에 앞서 함포사격을 실시했는데, 이 와중에 광성진의 화약고가 폭파되었다. 조선군은 개인지참 분량의 총탄만으로 전투에 돌입했다. 전투 끝에 어재연 장군 이하 조선군 243명이 장렬하게 전사했다. 전투는 15분 동안 지속되었다. 미군이 진채를 장악하자 20명은 포로로 잡혔다. 그중에 지휘관도 있었다.

다섯 개의 진이 함락되었다. 미군은 전사 3명, 부상자 10명의 피해를 입었다. 미군은 포로 석방을 조건으로 통상을 협상하려 하였으나 조선은 이를 거부하였다.

조선 정부는 통상 교섭 자체를 거부하는 자세를 유지했다. 미군은 조선군의 결사항전과 정부의 통상거부로 당연히 더 이상 오래 머물 수 없었던 미군은 조선과 통상이라는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고, 7월 3일(음력 5월 16일)에 중국으로 철수하였다.

전사자[편집]

조선군 주요 전사자는 다음과 같다.[1]

  • 어재연(魚在淵) (중군)
  • 어재순(魚在淳) (어재연의 친동생)
  • 이현학(李玄鶴) (대솔군관)
  • 임지팽(林之彭) (겸종)
  • 김현경(金鉉暻) (천총)
  • 박치성(朴致誠) (광성진 별장)
  • 유예준(劉禮俊)

영향[편집]

이 기간에 미군 함대가 물치도를 근거지로 충청·전라·경상도의 물자가 서울(당시 한성부)로 수송되는 수로인 강화 수로를 봉쇄함으로써 서울(당시 한성부)에서는 식량난이 생기고 물가가 올라 서양인에 대한 거부감이 더욱 높아졌다. 또한 척화비가 전국 각지에 세워지고 쇄국정책이 더욱 강화되었다.

평가[편집]

이 전쟁은 미군의 명백히 실패한 침략이다. 비록 처음부터 군사적으로 조선을 정복, 지배하여 영토분할이나 식민지에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포함외교 정책에 입각하여 조선을 무력으로 굴복시켜 개방과 함께 통상조약을 체결하려는 목적이었지만, 프랑스(병인양요)에 이어 미국도 조선에 대한 포함외교도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일부에서는 이런 점 때문에 미국의 신미양요는 다른 일반적인 제국주의 침략과 성격이 다르다고 하는 주장도 있으나,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 및 식민지배의 시작은 모두 포함외교에서 시작되었음을 생각하면 그런 평가는 문제가 있다. 프랑스 및 일본(운요호 사건)과 다른 기준의 해석이 되므로 문제의 소지가 다분한 것이다. 병인양요 - 신미양요 - 운요호 사건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은 기존 서구 제국주의 침략 수단의 답습이었다.

더 읽어보기[편집]

참고 자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