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 정벌
요동 정벌(遼東 征伐)은 명나라가 철령 이북 지역에 철령위를 설치하려는 것에 반발하여 고려가 요동을 경략(經略)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다. 그러나, 이는 위화도 회군으로 이어져 고려를 멸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 역시 요동 정벌을 계획하였으나,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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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편집]
요동 문제 [편집]
요동은 남만주(南滿州) 요하(遼河)의 동쪽 지방으로, 요동반도(랴오둥 반도)를 중심으로 한 이 일대는 한민족(韓民族)과 한족(漢族), 북방 민족 사이의 쟁탈 지역이 되어 왔다.
본래 고조선의 영역이었으나, 고조선이 전쟁에 패해 서쪽 경계가 수천리 동쪽으로 이동함으로써 고조선의 판도에서 벗어났다.
전국시대 말엽에는 연나라가 동호(東胡)를 물리치고 이 지방을 점령하였으며,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진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한나라 때는 여기에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고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었는데, 고구려가 일어나 한사군을 몰아내고 요동을 점령함으로써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고구려는 요양 지방에 요동성을 쌓고 한족(漢族)과 북방 민족을 방어하는 요새지로 삼았다. 612년, 수 양제가 대군을 이끌고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갔다. 645년에는 당 태종이 요동성을 함락시켰으나, 안시성(安市城)에서 격퇴되어 물러났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 요동은 당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698년에 건국된 발해가 요동을 경략하여 200여년간 발해의 영토로 들어갔다. 926년 발해가 멸망하면서 요나라의 영토가 되었으며, 이후 금나라, 원나라가 지배하였다.
철령위 문제 [편집]
원·명 교체기에 명나라는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를 두어 요동을 포함한 만주 경략을 꾀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고려와 여러 가지 알력이 생기게 되었다.
당시 고려는 1356년(공민왕 5년)에 철령을 넘어 쌍성총관부를 수복하고, 관서 지방(關西地方)와 관북 지방(關北地方) 북쪽으로 영토를 넓혀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고려는 외교적으로 반원친명 정책을 폈다. 그러나, 명나라가 감당키 어려운 세공(歲貢)을 요구하면서 관계가 틀어졌다. 1387년(우왕 13), 명나라가 고려 사신의 입국을 거부하였고, 이에 따라 1388년 음력 2월 귀국한 설장수(楔長壽)는 '명(明)이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한다'고 전하였다.
1388년(우왕 14) 음력 3월, 명나라가 철령위 설치에 착수했다는 보고를 받은 우왕은 8도의 정예 병사 징발을 명령하고, 스스로 평안도로 행차하겠다고 나서면서 요동 공격 준비를 본격화하였다.[1]
조정은 막강한 신흥 세력인 명나라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다고 하는 친명파(親明派)와 명나라의 지나친 요구에 반감을 품고 원나라와 다시 손을 잡고 요동(遼東)을 먼저 장악하여 명나라의 동진을 막자고 주장하는 친원파(親元派)로 국론이 갈리기 시작했다.
경과 [편집]
농사철을 앞둔 군사 징발에 왜구의 침탈 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백성들의 원성(怨聲)은 이인임·임견미·염흥방 일파의 전횡시대보다 더 컸다. 그러나, 시중(侍中) 최영(崔瑩)은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음력 4월에 주전론(主戰論)을 지지하는 우왕과 더불어 평양으로 떠났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하여 좌우군 3만8천8백여명(10만명이라는 설도 있음)에게 요동으로 떠나게 하였다.
우왕이 봉산에 가서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처음 요동 정벌 계획을 알렸을 때(음력 4월 1일), 이미 이성계는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이를 반대했으나 우왕은 묵살했다.
이때 이성계 일파의 4불가론(四不可論)은 다음과 같다.
-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하는 것 (以小逆大)
- (농번기인) 여름에 출병하는 것 (夏月發兵)
- 원정군이 나가면 왜구가 그 빈틈을 노릴 염려가 있는 것 (擧國遠征, 倭乘其虛)
- 장마철에는 활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전염병 발생의 우려가 있는 것 (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우왕과 최영은 반대여론을 억누르고 출병을 강행하였다. 1388년 음력 4월 18일, 고려는 전국에서 좌우군 3만 8830명, 수송대 1만 1634명, 말 2만 1682필을 동원해 요동 정벌에 나섰고, 우왕이 직접 평양까지 나가 격려하였다. 그러나, 총사령관인 팔도도통사 최영은 국내에서의 역모를 걱정한 우왕의 고집으로 전선에 나서지 않고 평양에 남게 되었다.
1388년 음력 5월 22일,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우군도통사였던 이성계가 좌군도통사인 조민수를 회유하여 전군(全軍)을 회군시켰다.(위화도 회군) 돌연한 회군에 우왕과 최영은 평양에서 개경으로 급히 귀경하여 반란군에 대항하였으나, 이성계의 반란군은 최영을 체포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최영은 고봉현(高峰縣: 현재의 고양시)으로 유배되었다가 개경에서 참형되었으며, 우왕도 폐위되었다.
의의 [편집]
이 사건은 고려의 테두리 안에서 개혁을 통해 나라를 재건하려던 최영을 대표로 하는 보수 세력(권문세족, 문벌 귀족, 불교)과 근본적으로 새로운 나라를 꿈꾸는 신흥 세력(신흥 무인, 신흥 사대부, 유교)의 충돌이 빚은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군권(軍權)을 장악한 이성계는 4년 뒤 조선을 건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