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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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金憲昌, ? ~ 822년)은 신라의 왕족이다. 태종 무열왕의 차남 김인문(혹은 3남 문왕)의 4대 손인 명주군왕 김주원(金周元)의 아들이다. 관등은 이찬이었으며 시중(侍中)을 역임하기도 했다. 웅천주(熊川州,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 도독으로 있으면서 신라 조정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한 달만에 진압되었다. 그가 일으킨 반란은 오늘날 하대신라의 왕위 계승을 두고 그때껏 숨겨져 있던 모순이 폭발한 사건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경력[편집]

《삼국사기》에는 김헌창을 김주원의 아들이라고 했다. 김주원은 태종 무열왕의 5대손으로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였지만, 선덕왕 사후 왕위를 놓고 대립하던 김경신에게 밀려 명주(冥州, 지금의 강원도 강릉)로 물러났다. 이후 명주군왕(冥州郡王)이라 불리며 그의 자손들은 현지에 토착해 호족으로 성장했다. 주원의 아들인 헌창은 이후 신라 조정에 신하로서 출사해, 헌덕왕 무렵에는 이미 이찬의 관등을 가지고 있었다.

헌덕왕 5년(813년)에 그는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광주광역시)의 도독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다시 서라벌로 복귀해 시중으로 임명되었으나, 2년 뒤인 헌덕왕 8년(816년)에 다시 청주(菁州,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시) 도독으로 임명되어 서라벌을 떠나게 되었다. 헌덕왕 13년(821년)에는 웅천주 도독으로 옮겨졌는데, 헌덕왕 14년(822년) 신라 조정에 대항하여 거기서 거병한다.

거병한 헌창은 스스로 왕을 자처하며 새로운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으로 정하고 자신이 거병한 해를 경운 원년으로 선포했다. 헌창의 세력 범위는 무진주·완산주(完山州)·청주·사벌주(沙伐州)의 4개 주와 국원경(國原京)·서원경(西原京)·금관경(金官京)의 3개 소경(小京) 등 옛 백제 지역에 걸쳐 있었다.

신라 조정은 3월 18일에 이 반란 소식을 접하고, 일길찬 장웅(張雄)과 잡찬 위공(衛恭)·파진찬 제릉(悌凌)이 지휘하는 1진(북쪽)과 이찬 김균정(金均貞)·대아찬 김우징(金祐徵) 부자, 잡찬 웅원(雄元) 등이 통솔한 2진(남쪽)을 차례대로 파견해 헌창을 치게 했으며, 서라벌의 각 방위마다 장수를 배치해 지키게 하는 한편 각간 충공(忠恭)과 잡찬 윤응(允膺)에게는 서라벌로 들어오는 주요 관문인 문화관문(蚊火關門)을 지키게 했다. 이후 장웅 등이 이끄는 1진이 북쪽으로 도동현(道冬峴)과 삼년산성(三年山城), 속리산에서 헌창의 군사를 섬멸하고, 균정 등 2진은 남쪽으로 성산(星山)에서 헌창의 군사를 쳐부수며 남북으로 나아가 마침내 웅진에서 헌창의 군사와 전투를 벌였다. 이 싸움에서 패한 헌창은 가까스로 웅진성(熊津城)에 들어가 조정군에 맞서 농성했으나, 열흘만에 성이 함락되려 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결한 헌창의 시신은 그를 따르던 부하가 목을 따로 베어 몸과 나누어 묻었는데, 성이 함락된 뒤 신라 조정군은 오래된 무덤에 숨겨져 있던 그의 몸을 찾아내어 다시 베었다. 이때 웅진의 백성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지만, 헌창의 종족(宗族)과 도당(徒黨)으로 몰려 죽은 자가 239명이었다고 한다. 이때 살아남은 아들 김범문이 훗날 북한산주(北漢山州)에서 반란을 시도했지만 진압되었다.

계보[편집]

  • 아버지 : 김주원
  • 어머니 : 미상(생모: 미상)
  • 아내 : 불명
    • 아들 : 김범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