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진
녹진
祿眞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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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집사부시랑 | |
국왕 | 신라 헌덕왕 |
신상정보 | |
출생일 | 미상 |
출생지 | 미상 |
사망일 | 미상 |
사망지 | 미상 |
국적 | 신라 |
성별 | 남성 |
부친 | 수봉 |
군사 경력 | |
주요 참전 | 김헌창의 난 |
생애[편집]
일길찬 수봉(秀奉)의 아들로, 23세에 벼슬하여 내외관(內外官)을 여러 번 지내고 헌덕왕 10년에 집사시랑(執事侍郞)에 이르렀다. 동왕 14년에 각간 충공(忠恭)이 심화가 괴로워 병을 칭탁하고 쉬고 있을 때 그는 찾아가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로 충공을 설득시켜 병을 고쳐 주었다고 한다.[1]
- 집을 짓는 원리나 정치의 원리나 다름이 없다.
- 조정에 빈 자리가 없고, 벼슬아치가 저마다 인품을 갖추며, 상하가 고루 정하게 되고, 현·불초(賢不肖)의 분별이 선 후에야 왕정(王政)이 이룩된다.
- 공사(公私)의 분별, 공평무사, 뇌물의 근원 봉쇄, 인사 정책의 공정성, 업무의 경중(輕重) 파악 등이 특히 중요하니, 이를 지키지 못하면 국사는 혼탁해진다.
- 공직에 있는 자가 정사(政事)를 폐하고 누워 있음은 부당하다.
그는 결국 왕과 세자를 일깨워주고, 김헌창(金憲昌)의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워 대아찬 벼슬이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1] 즉 그는 유교적인 왕도 정치 사상을 깊이 이해하고 문란한 현실 정치를 비판하여 경계시켰던 것이다.[2]
전기 자료[편집]
- 『삼국사기』 권45, 「열전」5, 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