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고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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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箕子, 기원전 1175년? ~ 기원전 1083년?)는 중국 상나라의 왕족이자 기자조선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 전설상의 인물이다. 성씨는 자(子), 이름은 서여(胥餘) 또는 수유(須臾)이며, 기자는 작위명인 동시에 별칭이다. 상나라 말기에 왕족으로 태어나 주왕 시기를 살았으며, 상나라가 주나라에게 멸망당하자 조선으로 망명하였다고 전해진다. 조선으로 망명한 후에는 조선의 군주가 되어 그의 후손이 1천여 년 동안 고조선을 다스렸다고 전해지나, 사실 여부는 논란이 많다.

목차

[편집] 생애

기자에 대한 전설은 ‘상나라의 왕족 기자’와 ‘기자동래설’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기자는 상나라의 왕족으로 폭군 주왕의 친척이었다. 상나라의 태사(太師)로 관직에 있을 무렵 주왕이 폭정을 행하는 것을 보고 이를 그만둘 것을 간언하였다가 감옥에 갇혔다. 이에 기자는 거짓으로 미친 척하여 주왕은 그를 노비로 삼았다고 한다. 기원전 1122년에 상나라가 주나라 무왕에게 멸망[1]하고 기자를 석방하여 신하로 삼고자 하였으나 기자는 이를 거부하고 은둔하였다. 기자는 주나라의 무왕이 천도(天道)를 묻자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진술하기도 하였다고 하며 기원전 1119년에 주나라 왕실에 조빙(朝聘)하였다고 한다.

한편, 기자동래설은 위의 기자 전설과 약간 다르다. 상나라가 멸망하자 기자는 주나라의 신하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으로 망명하였으며 이에 주나라 무왕은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한다. 기자는 5천여 명의 무리와 함께 조선으로 와서 조선의 백성들에게 문명을 가르쳤다고 한다. 일부 기록에서는 기자가 건너오자 원래 조선의 군주였던 단군이 기자를 피해 장당경으로 옮겨 갔다고 나타난다. 기자는 평양에 도읍을 두고 8조의 법금을 베풀어 나라를 다스렸다. 또한 정전제(井田制)를 실시하고 농사짓는 법과 누에치는 법을 가르쳐 백성들이 기뻐했다고 한다.

기자의 사망한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홍만종의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에는 《진조통기(震朝通紀)》라는 작자 미상의 서적을 인용하여 기원전 1083년(무오년)에 93세로 사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편집] 기자동래설

기자동래설이란 기자가 상나라가 멸망한 이후 동쪽으로 망명해와 고조선의 왕이 되어 1000여 년 동안 다스렸다는 전설이다. 기자동래설은 대체로 한나라(기원전 2세기) 이후의 문헌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한나라 이전의 문헌(선진문헌{先秦文獻})에는 기자가 주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은둔하였던 사실만 기록하고 있으며, 그 이후 기자의 삶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편집] 생성과 발전

기자동래설이 나타나는 최초의 문헌은 《상서대전(尙書大典)》과 《사기》이다. 《상서대전》은 중국 최초의 역사서로 평가되는 《상서》에 주석과 본문을 추가한 유교 경전으로 한나라 이전의 《상서》에는 나타나지 않는 기자동래설이 추가되어 있다. 《상서대전》에 따르면 기자는 주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조선으로 망명하였다고 하며 주나라 무왕은 이를 듣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한다. 한편 《사기》 〈송미자세가〉에도 기자가 조선의 군주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상서대전》과 반대로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여 기자가 조선에 가서 나라를 일으켰다고 한다. 이러한 두 문헌의 차이는 이후 기자가 스스로의 힘으로 조선을 세웠는지, 아니면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조선을 세웠는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이후 《한서》와 《삼국지》에서 계속해서 기자동래설을 기록하는 한편 기자 이후의 고조선 역사에 대해서도 기자와 연관시켜 기록하였다.

이러한 기자동래설에 대한 기본 문헌들이 성립되자 이후부터 기자동래설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기자를 조선의 군주로 숭상하는 경향이 많아졌다. 삼국시대에도 고구려가 기자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신라최치원도 기자동래설을 긍정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유교가 통치 이념으로 점차 굳어져 가면서 한국 유교문화의 시원적 존재로 기자에 대한 숭배가 강화되었다. 그 결과 1102년에는 평양에 기자사당이 세워져 국가의 제사를 받았으며 기자의 묘까지 만들어졌다. 이후 조선 초기에는 단군과 기자가 나란히 국조로 숭상되었으며 《동국사략》에서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삼조선으로 이어지는 체계를 정립하면서 기자조선이라는 왕조가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성리학이 발달하면서 사림에 의해 기자 존숭 의식은 더욱 발전하였고, 이이의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같은 기자를 존숭하는 서적까지 편찬되었다. 개항기 이후에도 기자에 대한 존숭 의식은 계속되었으나 자주성을 강조하기 위해 기자가 무왕에 의해 조선의 군주로 책봉된 것이 아니라 기자가 조선의 군주가 되고 난 후에 무왕이 책봉하였다는 해석이 지배적이 되었다.

[편집] 기자동래설에 대한 비판

기자동래설은 삼국시대 이래 오랫동안 사실로 여겨져왔으나 현대에 들어서는 많은 비판을 받아 사실이 아닌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특히 기자에 대한 문헌을 분석해 본 결과 한나라 이전의 문헌에서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내용이 없고,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킬 무렵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점이 중요한 근거가 된다. 또한 고고학적으로도 고조선과 상나라·주나라의 문화가 명백하게 차이를 보이는 점도 중요한 근거이다. 평양에는 기자와 관련된 유적들이 존재하는데, 실제 고고학적으로 평양의 유적들은 고려·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도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기자가 주나라의 지배를 받기를 거부하고 조선에 들어가 살았다는 이야기는, 기자가 주나라 무왕을 위하여 홍범구주을 교시했다는 내용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상서대전(尙書大典)에는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제후국의 이름이 없다. 기자가 주나라 초기 제후에 봉해졌다면 진, 초, 제, 노와 같은 국호가 있어야 하는데, 춘추시대 역사에 연나라 동쪽 지방에 제후국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단지, 연나라 장수 진개가 요하을 점령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요서에 국가가 성립한 것은 한나라 무제 때 위만조선이다. 사마천 사기에 따르면 조선은 위만조선이 첫 국가이고 개국자는 위만이다.

기자동래설이 등장하게 된 배경으로는 보통 중국 특유의 중화의식이 지적된다. 고대 중국은 주변 이민족들에 대하여 기록할 때 항상 중국의 고대 인물의 후손이라 기록하였다.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조선의 시조를 기자로 간주하는 시각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중국 측 시각에 편승하여 주변 이민족들이 자신들의 시조를 중국의 고대 인물이라 주장하는 모화(慕華) 의식이 많이 나타나는데, 삼국시대 이후로 나타난 기자 존숭 의식도 이와 같은 것이라고 해석한다.

한편 기자동래설에 대하여 일부분 긍정하는 주장도 존재한다. 중국 허베이 성 동부 및 랴오닝 성 서부에 해당하는 요서 지방에는 기(箕)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기가 많이 발견된다. 고고학적으로 이들을 기자와 관련된 종족으로 보는데 이들이 점차 동쪽으로 이주하면서 고조선의 지배계층을 대체하거나 합쳐졌다는 견해이다.[2] 기자 혹은 기자족이 동쪽으로 이동한 사실을 긍정하면서 기자에 의해 기자조선이라는 국가가 성립된 것은 아니지만 후에 기자와 관련된 인물이 조선의 지배층이 되면서 기자조선 전설로 발전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요서에서 기(箕)라고 쓰여진 기와가 발견되었으나 기자조선의 증거로는 충분하지 않다. 은나라 말기에 문자가 있었으나, 그 시대의 문자는 갑골문에 사용하던 것으로 모양이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다. 춘추시대에는 지역 마다 글자가 모두 달랐으며, 오늘날의 한자는 진나라 재상 이사의 주도로 통일되었고, 한나라가 개량하여 사용한 것이 시초이다. 그러므로 (箕)라고 쓰여진 기와는 기원전 11세기 것이 아니며, 한자가 완성되어 통합된 시기의 것이다. 기원 전 · 후에 기자에 대한 야사들이 생성되고 이것을 믿는 호족이 있었다면 이러한 기와는 기자와 무관하게 만들어 질 수 있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기자 또는 기자의 후손이 고조선의 일부인 번조선의 왕이 되었고, 이 때문에 기자조선 전설이 생겨났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대부분 《환단고기》와 같은 위서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사학계에서는 인정되지 않는다.

[편집] 기자지에 대한 비판

기자지(箕子志)는 1879년(고종 16)에 간행된 활자본이다. 윤두수(尹斗壽)와 이이(李珥)가 따로 쓴 기자 실기(實記)를, 조선 광해군 때 선비들이 재가공하여 편찬하였다. 정사가 아닌 야사이다. 조선 시대는 유교 국가이므로, 공자을 최고의 성인으로 삼았는데, 중국 기록에 의하면 공자가 존경한 사람 가운데 기자가 있었다. 그래서 조선의 학자들은 조선과 기자조선을 연동하는 관념이 생겨 났고, 북방 오랑캐가 아닌 한족의 정체성을 기자조선에 찿으려는 목적으로 기자 실기가 편찬되었다.

기자지(箕子志)에 경(景), 진(秦), 강(康), 남궁(南宮), 노(鲁), 한(韓), 선우(鮮于), 제(齊)씨가 기자의 후손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러나 진(秦)씨는 고조선을 침략한 진개(秦開), 노(鲁)씨는 전국시대 낭인 노구천(魯句踐)의 성씨로 나타났다. 제(齊)는 강(姜)성이며, 경(景)씨는 초나라 성씨, 진(秦)씨는 연나라 호족 진개(秦開), 진무양(秦舞陽)의 성씨, 강(康), 남궁(南宮), 노(鲁), 한(韓)씨는 주나라에 성씨에 해당한다. 주나라 성씨을 상나라 인물 기자의 후손으로 적어 놓은 기자지(箕子志)의 내용은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후대 야사에는 대부분의 성씨가 누락되거나 기자을 따라 왔다는 내용으로 바뀐다. 일제강점기에는 환단고기와 같은 야사가 유포되면서, 기존 한(韓)씨, 선우(鮮于)에 기라는 발음에 주목하여 기(奇)씨을 합하여 현재 유포되는 기자동래설이 만들어 졌다. 삼한시대, 통일 신라, 고려 시대에는 기자(箕子)라는 후손이라고 주장되는 성본은 없었다.

현재 한국에서 유포된 기자동래설은 기자조선의 후예 선우, 한, 기씨가 마한을 건국하고 원왕의 아들 우평(友平), 우량(友諒), 우성(友誠)이 있었는데, 우성이 백제에서 기(奇)씨가 되고, 우량이 신라에서 한(韓)씨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우평은 선우(鮮于)씨가 되어 고구려에 들어가 황룡국을 세웠다가 고구려에 멸망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기씨는 기자지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선우씨는 중국의 일부 선우씨의 연원을 차용하였으며, 한씨가 기자의 후손이라는 출처는 없다.

1979년 발견된 선우황(鮮于璜, AD 107~113년, 자- 백겸 伯謙) 비문에 기자을 후손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 비분은 선우황의 손자가 조부을 칭송하기 위하여 만든 후한 시대 유물이었다. 중국 학자들은 선우황 비문을 근거로 선우국(鮮虞部)이 조선의 선(鮮)과 봉지 우(于)를 딴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기자의 후예가 선우국(鮮虞國)을 지배했다는 이론을 만들기도 하였으나, 선우국(鮮虞國)의 명칭이 백적 선우부(鮮虞部)에서 왔다는 이론을 뒤집지 못하였다. 그래서 현재 중국의 공식 기록에는 선우황(鮮于璜)은 선우국과 무관한 사람이고, 선우국중산국백적이 세운 국가로 정의되고 있다. 선우황(鮮于璜)이 실제 기자의 후손인지 알수 없으나, 선우씨는 백적, 정령(철륵) 민족에 존재하는 성으로 대체로 우두머리을 뜻하는 말로 비정된다. 사마정(司馬貞)이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에 주석을 더한 사기색은(史記索隱)에는 “중산국(中山國)은 옛 선우국(鮮虞國)이며 성은 희성(姬姓)”이라 하였고, "춘추좌전" 소공 12년조의 두예(杜預) 주(注)는 “선우(鮮虞, 鮮于)는 백적(白狄)의 선우부(鮮虞部)의 별종”이라고 하였다.

중국 학자의 선우씨 이론은 한국에 전해져 변질되었다. 중국 학자는 조선의 선(鮮)과 봉지 우(于)를 딴 것이라는 하였는데, 한국에서는 정체 불명의 장혜왕(莊惠王)이 조선의 선(鮮)자와 우산국의 우자을 딴것이라고 바뀌었다. 중국에는 우산국이 존재한 사실이 없다. 신라 시대 울릉도을 우산국으로 불렀고, 충청도에 우산성이 있었다. 북원 선우씨, 청주 한씨 세보에 따르면 본래 우(友)씨, 또는 한(韓)씨였다가 선우씨가 되었기 때문에 중국 학자가 주장한 선우씨 이론과 시간적 인과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선우(鮮于)는 특이한 복성이기 때문에 중국에서 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으나, 마한에는 사택, 사타등 특이한 성이 있었고, 그 외 박혁거세, 뇌실청예, 소벌도리, 흑치상지, 을지문덕 등 독특한 이름들이 고대 삼한에는 많았다. 그러므로 마한 선우씨는 복성이라고 하여도 중국 선우씨와는 별개이다.

1879년, 편찬된 기자지(箕子志)에 기(奇)씨가 실려 있지 않으며, 기(箕)자와 일치하지 않는다. 기(奇)는 고대에 의(奇)자로 발음되는 단어로써 현재 기(箕)자와 발음이 같을 뿐이다. 안정복의 동사강목에는 서(徐)씨가 기자의 후손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 내용은 기자의 이름이 서여(胥餘)라고 한국 야사을 인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서여(胥餘)는 한국 야사에 나오는 출자로 기자의 실제 이름은 아니다. 기자지(箕子志)에도 서여(胥餘), 서(徐)씨에 관한 내용은 없다. 이와같이 기자동래설은 문헌 마다 차이가 많으며, 일치되는 내용이 적다.

한국에는 일부 성씨들은 거짓 가계을 만드는 경우가 있었다. 고려 왕족들은 당나라 숙종의 후손으로 주장하다가, 원나라 대신들의 의문을 제기하자 당나라 선종의 후손으로 편년통록에 바뀌어 기록하였다. 조선 초기 멸문한 이후에는 당나라 후손설은 주장되지 않고, 중국 황제의 후손이 평양 일토산에 살다가 왕씨가 되었다는 식으로 바뀌었다. 이렇듯 한국의 야사들은 근거없는 창작과 재생산을 반복하고 상황에 따라 바뀌기도 하였다.

"기자지"는 1879년(고종 16)에 간행된 활자본으로, 19세기 책으로 고대에 만들어진 정사가 아닌 근현대에 만들어진 야사이다. 오늘날의 기자동래설은 19세기 야사 "기자지"을 기본으로 하였기 때문에 근거가 불충분하며, 이 마저도 일치되는 내용이 적고 후대에 각색되거나 내용이 모두 변질되어 있다.

[편집] 평가

기자동래설은 현재 한국사학계에서 사실이 아니라고 평가된다. 하지만 기자동래설이 삼국시대 이후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기 때문에 그 영향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대체로 이른 시기부터 한국이 중국의 문물을 수용하여 중국에 못지않게 문명국이었다는 것을 내세우려는 상징으로 기자 존숭이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편집] 기자 한민족(韓民族)설

이 주장은 기자가 조선을 건국한 것은 맞지만 기자는 중국인이 아니며 동이족(한민족)이라는 설이다. 이를 주장하는 학자로는 천관우, 이상시, 이병도 등이 있으며 그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중국 산서성 태곡현 일대에 동이족이 세운 기국이 이미 존재하였고, 주나라의 압력을 받아 동방으로 이동하였고, 동진을 계속하여 대동강 유역에 이르렀다는 주장(천관우).
  • 그 내용은 기존의 사서를 따르지만, 동래한 기자는 중국인이 아닌 동이족의 인물이라는 주장(이상시).
  • '한씨 조선설' - 고조선에 기원한 한후(韓候)가 요서로부터 아사달로 이동, 지배세력이 되었다는 주장(이병도).

[편집] 기타

  • 그는 한국 민간과 무속에서 군왕신(君王神)의 하나로 모셔지며 '기자신'(箕子神)이라 부른다. 평양황해도 지역의 무속신으로 주로 숭배되었다.
  • 1763년 윤치정의 지인에 의해 애민여자(愛民如子) 라고 쓴 기자의 친필 서신이 한 산사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일제 강점기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실전되었다.

[편집] 같이보기

[편집] 주석

  1. 중국에서는 최근의 고고학 연구에서 기원전 1046년에 상나라가 멸망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는 근대 역사학이 발달하기 이전까지 공인되었던 기원전 1122년(기묘년)과 차이가 있다.
  2. 이형구, 〈요서지방의 고조선:진개 동정 이전의 요서지방의 기자조선〉, 《단군학연구》18호, 단군학회, 2008년

[편집] 참고 문헌

  • 《기자실기》(箕子實記) : 율곡 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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