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찾기
夏朝
국가 하나라
수도 도읍지 불명
군주
 -건국군주
 -멸망군주
17왕
,
성립 기원전 2070년
건국.
멸망 기원전 1600년
탕왕하나라를 멸함.
Region of xia.svg
 하나라의 위치
중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
신화와 고대
선사 시대
신화·삼황오제
황하장강 문명
기원전 2070?~기원전 1600?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기원전 1046~기원전 256
  서주 기원전 1046~기원전 771
  동주 기원전 771~기원전 256
    춘추 시대 기원전 770~403
    전국 시대 기원전 403~221
제국의 시대
기원전 221~기원전 206

기원전 206~서기 264
  전한 기원전 206~서기 8
  8~25
  후한 25~220

삼국 시대 220~280
  220~265
  촉한 221~264
  229~280
265~420
  서진 265~317
  동진 317~420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남북조 시대 420~589
581~618

618~907
무주 690~705

오대십국
시대

907~960

916~1125

960~1279
  북송
 960~1127
서하
1038~1227
  남송
 1127~1279

1115~1234
1271~1368

1368~1644


1616~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 (북양 정부, 국민정부) 1911~1949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중화민국
(타이완)
1949~현재

v  d  e  h

(夏 , 기원전 2070년경 ~ 기원전 1600년경)나라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상나라 이전 수백 년간 존재했다고 기록된 나라이다. 그 연대는 하상주단대공정에 의해 기원전 2070년경에서 기원전 1600년까지로 추정되었다.

사기》, 《죽서기년》 등 중국의 사서에는 초대의 로부터 후세의 까지 14세 17대, 471년간 계속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목차

개요 [편집]

중국 전설상의 왕조이다. 오제(五帝)의 한 사람인 요임금의 말년, 홍수가 일어나 우임금(禹)이 치수 사업에 성공했다. 그 공으로 순임금(舜)이 죽은 후, 제후(諸侯)들이 받들어 왕위에 오르고 하 왕조를 열어 이후 17대에 이어졌다. 우는 제위를 민간의 현자에게 양도하려 했으나, 제후들이 우의 아들 (啓)를 추대하여 이때부터 선양제(禪讓制)가 없어지고 상속제에 의한 왕조가 출현했다. 17대의 걸왕 때에는 정치가 포악해지고 민심을 잃어 은나라의 탕왕(湯王)에 의해 멸망하였다. 하(夏)의 소재지를 산시(山西)·산둥·허난 등으로 추측하는 학설이 있으나, 전설에 의거한 것이기 때문에 확증은 하나도 없다.[1]

역사 [편집]

우의 창업 [편집]

하왕조의 시조가 되는 오제의 손자 중 한 명이다. 의 시대에 우는 치수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에게 추천 받는 형태로 황하의 치수 사업을 맡았고 공적을 이루어 크게 인정받았다.

순은 덕망이 높았던 우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순이 사망한 후 3년 상을 치른 우는 순의 아들인 상균을 제위에 앉히려고 했지만 제후들이 상균을 순의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가 제위에 즉위하였다. 양성을 도성으로 정했다. 우의 성은 사(姒)였지만 왕조 창시 후에 하후(夏后)로 바꾸었다.

우는 즉위 후 잠시 동안 무기 생산을 그만두고 궁전의 대증축을 한동안 재고하였으며 관문과 시장에 걸려있는 여러 세금을 면제했다. 또한 지방에 도시를 만들었고 번잡한 제도를 폐지해 행정을 간략화했다. 이 결과 중국 안에서는 물론 밖에서도 조공을 청하러 오게 되었다. 또한 우는 여러 하천을 정비했고 주변의 토지를 경작해 초목을 육성하였으며 중앙과 동서남북의 차이를 기(旗)로써 사람들에게 나타냈고 옛 방식도 답습해 전국을 나누고 9주를 두었다. 우는 검약 정책을 취했고 스스로 솔선수범하였다.

죽서기년에 의하면 45년 동안 재위에 있었다고 한다.

즉위 후 고도(皋陶)가 정치를 보좌하도록 했지만 고도의 사망으로 익(伯益)이 조정을 보좌하였다.

최초의 세습왕조 [편집]

우가 사망한 후 익이 후계자가 되었지만 익이 집정에 익숙하지 않아서 제후들은 우의 아들인 를 제위에 앉혔다. 이것이 중국 역사상 최초의 왕위의 세습으로 여겨진다. 제위에 오른 계는 유호씨가 복종하지 않자 이를 토벌하였다.

계가 사망한 후 아들 태강이 제위를 계승했지만 사기에 의하면 '나라를 잃었다'라고 기록되는 등 국세의 쇠퇴를 볼 수 있다. 태강이 사망한 후 남동생 중강이 뒤를 이었다. 중강 때에 제후인 희씨와 화씨가 음락에 빠져 있었으므로 윤(胤)에게 명해 희씨와 화씨를 토벌하였다.

사기에 중강 이후의 왕들의 사건에 대해서는 특별히 전하고 있지 않다.

하나라의 쇠퇴와 멸망 [편집]

하의 14대 왕인 공갑은 성격이 음란하고 귀신을 흉내내는 것을 좋아해 인심은 하왕조부터 멀어져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은 인덕이 부족해 무력으로 제후와 민중을 억압해 인심의 배반을 불렀다. 또 상나라의 을 불러내 투옥시켰다. 탕은 덕으로써 나라를 다스려서, 제후들이 그의 밑에 모였으며 마침내는 걸을 넘어뜨렸다. 걸은 명조로 도망쳤지만 객사했다. 이 걸에 관한 전설은 상나라의 와 지나치게 비슷해서 후세에 만들어진 전설이라는 주장도 있다.

상나라의 탕왕은 제위에 즉위하면서 하나라의 혈통을 받은 사람들을 하정(夏亭)에 봉했다. 주나라 때에는 기나라의 제후로 봉해졌다.

역대 군주 [편집]

  • (禹) : 하나라의 개국 군주로, 요순임금의 하나인 순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고, 부자상속제를 확립하였다.
  • (啓)
  • 태강(太康) : 고분죽서기본에 의하면, 짐심으로 도읍을 정했다고 한다. 우왕의 손자이지만, 우왕과는 달리 사치에만 힘을 써 백성의 신망을 잃었다. 태강이 부하들과 사냥을 나간 사이, 하나라의 제후였던 유궁(有窮)의 후예라는 자가 반역하여 도성을 점령하였다. 태강은 몸을 피하여 주변의 제후들에게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하고 쫓기는 인생을 살다가 죽는다.
  • 중강(中康) : 태강의 동생으로, 후예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다. 그러나 후예와의 권력다툼 끝에 왕위에서 쫓겨난다.
  • (相) : 태강의 아들로 태강이 죽은 후, 제구(帝邱)에서 하나라의 유신들에게 왕으로 옹립된다. 그러나 후예의 토벌로 성이 포위되었을 때 자살한다.
  • (후예(后羿)) : 원래는 하나라의 제후로 궁술의 명인이었다. 태강이 민심을 잃자, 그가 사냥을 나간 틈을 타 도성을 점령하고 태강의 동생 중강을 옹립하였다. 그러나 중강은 후예의 부하인 희화를 쫓아내고, 백봉(伯封)이라는 제후를 이용해 후예를 견제하려 했다. 이렇게 중강이 자신의 손을 벗어나 자립할 움직임을 보이자 후예는 중강을 쫓아내고 직접 왕위에 올랐으며, 백봉 등 중강을 지지했던 제후들을 탄압하였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백봉의 어머니이자 천하의 미인인 현처(玄妻)를 왕비로 삼았다. 현처는 아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야심가인 한착을 끌여들였다. 현처는 한착과 정을 통해 계획을 세웠고, 자신의 세상이라고 넋을 놓고 있던 후예를 죽이고 한착을 왕으로 세웠다.
  • (한착(寒浞)) : 원래는 후예의 부하이나, 후예가 왕이 된 후 정사를 돌보지 않고 문란한 생활에 빠져있는 것을 보고 현처와 공모하여 후예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20여 년을 다스렸으나, 상의 아들인 소강에게 살해당한다.
  • 소강(小康) : 상이 죽었을 때 임신한 상태였던 상의 왕비는 자신의 친정인 유잉(有仍)으로 피신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가 바로 소강이다. 소강은 아직도 남아 있던 하나라의 유신들에게 보살핌을 받았으며, 성인이 되고나서 군사를 일으켜 한착을 죽이고 하나라의 왕실을 복구한다.
  • (杼)
  • (槐)
  • (芒)
  • (泄)
  • 불강(不降)
  • (扃)
  • (厪)
  • 공갑(孔甲)
  • (皐)
  • (發)
  • (桀) : 포악하고 사치를 즐기던 하나라의 마지막 군주. 상나라주왕과 함께 최악의 폭군으로 부른다. 이윤의 간언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국정하다가 상나라의 시조인 탕왕에게 패하여 목숨을 잃는다.
하나라의 왕
대수 일명 성명 재위기간 비고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
-
태강(太康)
중강(中康)
-

소강(少康)
-
-
-
-
-
-
윤갑(胤甲)
공갑(孔甲)
-
-
이계(履癸)

(禹)
(啟)
 ??
 ??
(相)
한착(寒浞)
 ??
(杼)
(槐)
(芒)
(泄)
(降)
(扃)
(廑)
 ??
(皐)
(發)
(桀)

45년
10년
29년
13년
28년
40년
21년
17년
26년
18년
16년
59년
21년
21년
31년
11년
11년
52년

곤(鯀)의 아들, 건국왕
우(禹)의 아들
계(啟)의 아들 ,반란에 의해 쫒겨남
태강(太康)의 동생
중강(中康)의 아들
왕위를 찬탈
상(相)의 아들
소강(少康)의 아들, 중흥함
저(杼)의 아들
괴(槐)의 아들
망(芒)의 아들
설(泄)의 아들
강(降)의 동생
경(扃)의 아들
강(降)의 아들, 근(廑)의 종형제
공갑(孔甲)의 아들
고(皐)의 아들
발(發)의 아들

연구 및 논란 [편집]

예전에는 하나라의 실재성을 확실히 보여주는 고고학상의 발견이 없고 전설상의 왕조로 여겨져 왔지만 사기 등을 비롯한 중국의 사서에서 이유없이 기재한 것이 아니고, 또 최근의 고고학의 실적도 하왕조가 실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현대의 중국 역사·고고학 학계에서는 실재했다고 보고 있다.

탄소 14연대 측정법에 의해 허난 성 옌스 시 얼리터우 촌의 얼리터우 유적이나 허난 성 신미 시의 신자이 유적 등에 흔적이 있는 얼리터우 문화가 하나라가 있었다고 생각되는 연대와 거의 일치하는 등, 문헌 사료가 말하는 하나라는 얼리터우 문화에 비정 된다. 그러나 문헌 사료에 적혀있는 하나라에는 전국시대 이후의 사상이 적지 않게 섞여 있어 하나라가 실제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점이 많다.

하왕조가 실재하였다는 구체적 증거들이 발견되지 않았다. 하나라를 창업하였다는 우임금의 묘지가 얼리터우 문화가 존재하였던 하남성이 아닌 중국 동남부 항저우 인근 저장성 사오싱에 위치하여 있는데,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사기에 따르면 황제는 기원전 2500년경에 살았는데, 황제에서 소호 · 전욱 · 제곡 · 제요 · 제순, 5대를 거쳐 하왕조로 이어진다. 5대는 많이 잡아도 200년이 채 되지 않으므로 300년 정도의 역사가 비어 있다. 맹자는 제순을 헌원의 자손이 아닌 것으로 정의하기도 하여, 오제를 거쳐 하나라로 넘어왔다는 관념도 명확하지 않고, 실존성도 모호하다.

중국 고고학회는 얼리터우 문화 1기부터 3기까지는 확대기에, 4기는 쇠퇴기로 정의하여, 1기부터 2기까지가 하 왕조, 3기 이후에는 상나라로 접어든다고 추정했다. 중국 학자들은 하나라가 얼리터우 문화와 연관되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가운데 어떤 것이 하나라 유적인지 현재까지도 판별하지 못하고 있다. 얼리터우 문화의 연대를 나누어 하나라라고 추정하기 이전에 하왕조가 허난성에 있었는가를 먼저 검증해야 하는데, 그런 과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나라 시대에는 갑골 문자도 존재하지 않았다. 문자가 없으므로 성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사마천은 하왕조 창시자 우임금을 사(姒)씨로 기록하고 있다. 구전으로 전해진 성명을 사마천이 찾아내 적어 놓았다고 믿기에는 무리가 있다.

참고로 이와 관련된 국내 서적으로는 《中國 夏王朝에 대한 簡略한 理解》[2]가 있다.

주석 [편집]

  1. '하 왕조', 《글로벌 세계 대백과》
  2.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289966

같이 보기 [편집]

참고문헌 및 링크 [편집]

Wikisource-logo.svg
위키문헌에 이 글과 관련된 자료가 있습니다.
Heckert GNU white.svgCc.logo.circle.svg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