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이의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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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의 입구(일본어: 刀伊の入寇)란 1019년경 만주지역에 할거해 있던 여진족의 해적집단이 일본의 이키, 쓰시마 섬지쿠젠 등을 침략한 사건이다. 도이의 내구(刀伊の来寇)라고도 한다. 입구(入寇)나 내구(來寇) 등은 외국의 침입을 일컫는 일본의 역사용어로, 여진해적의 일본 침공 또는 여진의 일본 침공 등으로 풀이할 수 있다. 여진족은 이후 금나라를 건국하고, 17세기에는 청을 건국한다. "도이"란 한국어로 북방민족을 경멸적으로 일컫는 "되"에서 온 말로, 이들에게 이키, 쓰시마 등지에서 잡혀간 일본인 포로들은 나중에 고려수군에게 구출되어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경위[편집]

1019년 3월 27일 도이는 배 약 50척 인원수 3000명인 선단을 이끌고 쓰시마를 습격하여 섬 각지에서 살인, 약탈, 방화를 일삼았다. 이때 쓰시마의 국사(國司)는 가까스로 섬을 탈출하여 규슈 지쿠젠 국의 다자이후(大宰府)로 피신하였다. 해적들은 쓰시마에 이어 이키를 습격하여 노인, 어린이는 살해하고, 성인 남녀는 배에 끌고가 노예로 삼았으며, 가옥을 불태우고 가축을 잡아먹었다. 해적집단의 습격을 들은 이키의 국사 후지와라노 마사타다(藤原 理忠)는 즉시 군을 통솔하여 이를 진압하려 하나 중과부적하여 전투 중 전원 전사하였다. 마사타다의 군을 쳐부순 해적들은 이키의 절인 도분지(嶋分寺)를 불태우려고 하나, 도분지측은 절 주지 조카쿠(常覚)의 지휘 하에 승려들과 지역 주민들이 격렬하게 응전하여 세 차례 격퇴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도이의 맹공이 이어져 주지 조카쿠는 혼자 섬을 탈출하여 다자이후에 보고하러 떠났고 남겨진 승려들과 지역 주민들은 끝까지 싸우나 중과부적하여 도분지도 함락된다. 이때 이 절이 전소된다. 이후 지쿠젠 국으로 상륙하여 4월 8일부터 12일까지 현재의 후쿠오카 부근인 하카다 주변을 약탈하였다. 이에 대해 규슈를 다스리는 다자이노곤노소치(大宰權帥)인 후지와라노 다카이에가 규슈의 호족과 무사집단을 소집, 인솔하여 이들을 겨우 격퇴하였다.

일본측이 입은 피해는 사망 365명, 납치 1289명, 소와 말 380마리, 가옥 45채이상파손등이었다. 여자와 어린이의 피해가 특히 심하여 이키섬에서는 잔존 주민이 35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유명한 쓰시마 은광도 불에 타버렸다.

일본측은 해적집단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는데 포로로 잡은 3명은 모두 자신들이 고려를 습격한 도이에게 잡힌 고려인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신라말기에 신라해적이 규슈를 습격한 전래가 있었기 때문에 다자이후와 일본조정측은 반신반의하였다. 결국 해적들의 정체가 고려인이 아니라고 판명된 것은, 도이에게 잡혔다 탈출하여 고려에 피해 있었던 쓰시마의 지방관 나가미네노 모로치카가 7월 7일 귀국하여 고려에 얻은 정보를 보고하면서 알게 되었다. 9월에는 고려 노인송사(虜人送使)로 파견된 정자량이 보호하고 있던 일본인 270명을 송환해 왔다. 고려사자는 이듬해 2월, 다자이후에서 고려정부의 기관인 안동호부(安東護府)로 보내는 답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후지와라노 다카이에는 고려사신 정자량의 노고를 치하하여 황금 300량을 선물로 보냈다고 한다.

도이의 주력은 만주민족의 전신인 여진족으로 여겨진다. 당시 여진은 농경민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농경민족을 납치하여 자기 세력권내에서 농사일을 시켜 식량을 확보하는 약탈경제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본침공의 목적인 단순한 해적행위 외에 일꾼의 확보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조정이 이 사건에 대해 접한 것은 다카이에가 도이를 격퇴하여 사건이 일단락된 다음이었으나 해안 방비의 병사인 사키모리(防人)와 노(弩)등을 부활시켜 대규모 방위태세에 들어간 신라해적의 침공때와 비해, 재발방지를 위한 방어태세에 들어간 흔적은 없다. 또한 격퇴에 공을 세운 후지와라노 다카이에에게 포상이 내려지지도 않았다.

다카이에게 격퇴된 도이의 해적선단은 고려연안도 침략했으나 이때도 고려수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때 납치된 일본인들이 고려수군에게 구출되어 일본에 송환되었다. 이때 일본은 송을 포함하여 주변국과 관계가 양호한 편이었기 때문에 외국의 위협에 대한 방비는 허술했던 것 같다. 일본과 거란사이에는 공식교류가 거의 없고 밀항자는 엄격하게 처벌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소우기(小右記), 조야군재(朝野群載) 등이 자세하고 고려사에는 기록이 적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