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충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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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정왕
高麗 忠定王
고려의 제30대 국왕
본명 왕저(王㫝[1])
재위 1348년 ~ 1351년
종교 불교
부왕 충혜왕
모후 희비 윤씨
이전 왕 충목왕
다음 왕 공민왕

충정왕(忠定王, 1338년 [2] ~ 1352년 3월 23일 (음력 3월 7일) )은 고려 제30대 국왕(재위: 1348년 ~ 1351년)이다. 휘는 저(胝), 첫 봉작은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이고, 원에서 내린 시호충정왕(忠定王)이며, 몽골 이름은 미스젠도르지(迷思監朶兒只)이다. 외척인 윤시우와 배전 등의 발호로 정사가 문란해졌고, 왜구의 계속된 침입을 막지 못하여 숙부 공민왕의 정변으로 폐위, 유배되었으며 배소에서 사약을 받고 처형되었다. 충혜왕의 서자로, 충혜왕과 고려 출신 희비 윤씨의 아들이다.

1348년부터 1351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적모(嫡母) 덕녕공주(德寧公主)가 섭정을 하였다.

생애[편집]

왕자 시절[편집]

어머니 희비 윤씨파평 윤씨 찬성(贊成) 윤계종의 딸로 고려 여인이었다. 2세 때인 1339년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에 봉군되었고, 7세에 부왕의 죽음을 본다. 1348년(충목왕 4)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에 봉작되었다.[3]

그러나 이복 형 충목왕이 후사없이 죽게 되자 이복 형 충목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의 뒤는 아들 왕제[4] 대신 그의 숙부 공민왕이 차지하였다.

즉위와 폐위[편집]

즉위 초반 원나라의 공주인 덕녕공주가 배후에서 섭정을 하려 하였으나 그의 생모인 희비 윤씨윤계종의 친족들이 반발하였다.

외가 친척인 윤시우와 배전 등이 세도를 형성하여 정치가 문란해지고, 1350년에는 고려 국내에서 처음으로 왜구의 습격이 있었다. 왜구의 침입이 잦아 3년만에 1351년, 어린 군주가 계속 되는 고려의 상황에서 불만을 품어, 이때 충정왕과 함께 충목왕의 후계자로 물망에 올랐던 강릉대군(江陵大君: 恭愍王)에게로 민심이 쏠리자, 1351년 윤택(尹澤)·이승로(李承老) 등은 원나라에 투서를 보내 "충정왕은 나이 어려 국정을 감당할 수 없으니 폐위시켜 달라"고 원나라에 요청하였다. 이후 공민왕 옹립을 도모하는 원나라의 의해서 강화도에 옮겨졌다.

공민왕이 고려에 귀국한 후 그는 강화도로 추방되었다. 1352년에 유배지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후[편집]

후궁에게서 얻은 서자 1명인 왕제는 혈통을 이어 개성왕씨 시중공파의 파조가 된다. 능은 개성(開城)의 총릉(聰陵)에 안장되었다.

가계[편집]

충정왕이 등장하는 작품[편집]

주석[편집]

  1. 高麗史 卷三十七 世家 卷第三十七 - 忠定王 卽位年 12월
  2. <<고려사절요>> 충숙왕(忠肅王) 7년 무인년(1338년)에 출생하였다. 재위 3년, 수는 15세였다.
  3. 충정왕
  4. '왕' - 네이트 백과사전
  5. 고려사, 고려사절요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오직 개성 왕씨 족보에만 보인다.

관련 항목[편집]

바깥 고리[편집]

전 임
충목왕
제30대 고려왕
1348년 - 1351년
후 임
공민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