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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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녕

감녕(甘寧, ? ~ ?)은 중국 후한 말 ~ 삼국시대 (吳)나라의 무장으로, 흥패(興覇)이며 익주(益州) 파군(巴郡) 임강현(臨江縣) 사람이다.[1] 임강현은 오늘날 충칭 시 중 현 지역이다.

생애[편집]

익주의 토호[편집]

선조는 원래 남양군 사람인데 파군으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계연, 군승을 지냈으나 곧 관직을 버렸다.[2] 젊은 시절부터 호협하여, 동네 무뢰한들을 이끌고 지역 자경단과 같은 행동을 해 범죄 사건 등이 일어나면 범인 체포와 처벌을 행했다. 또한 조정의 관리라도 자신들을 존중하고 후하게 대접하는 자와는 함께 즐기고, 그렇지 않는 자에게는 부하들을 시켜 혼내주는 등 방약무인으로 날뛰었다. 이런 행위를 20여 년간 지속했다. 물소 꼬리로 만든 깃발을 등에 지고, 손에는 활 등을 들고, 허리에는 방울을 달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방울 소리만 듣고도 그들이 찾아온 것을 알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성격이 포악하여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했다.[1]

익주를 떠나다[편집]

이후 익주를 떠나 형주목 유표(劉表)를 따른다. 삼국지의 본전에서는 '공격하여 탈취하기를 그만두고 제자백가의 책을 읽었으며 유표에게 가 의탁했다.'라고 익주를 떠나 유표에게 간 경위를 서술했다. 그러나 《영웅기》에서는 감녕이 형주로 간 원인을 다르게 말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처음에 감녕은 익주목 유언이 죽은 후 익주의 토호 출신 조위가 옹립하여 유언을 대신해 자사가 된 유언의 아들 유장(劉璋)을 섬겼다. 그러나 조정에서 호모를 유장 대신 자사로 삼아 내려보내자, 동료 심미(沈彌)·누발(婁發) 및 형주별가(荊州別駕) 유합(劉闔) 등과 함께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켜 유장을 공격했고, 패하여 형주로 달아났다.[3] 남양에 주둔하다가 유표에게 중용되지 않아 황조에게로 갔다. 《오서》에서는 유표가 유학자라 군사에 익숙하지 못해 감녕이 이를 보고 주변의 영향으로 갑자기 무너질 것이라 염려하여 유표를 떠났고, 원래 오나라로 오려 했으나 황조가 하구를 막고 있어서 황조를 섬겼다고 한다. 그런데 황조도 감녕을 예우해주지 않았다. 손권(孫權)이 공격해오고 황조의 군사가 패주할 때, 감녕이 손권의 부하 능조(凌操)를 사살해 황조를 사로잡힐 위기에서 구해냈음에도 황조의 대우는 바뀌지 않았다. 황조의 부하 소비(蘇飛)는 자주 황조에게 감녕을 중용하도록 진언했지만 황조는 오히려 감녕이 거느린 객들을 유인해 흩어지게 했다. 감녕은 소비에게 불우한 처지를 한탄했고, 소비는 황조에게 말해 감녕을 주(邾)[4]의 현장으로 삼아 원하거든 다른 곳으로 가도록 했다.[5]

오나라에 등용되다[편집]

감녕은 소비가 제공한 기회를 이용하여 손권의 밑으로 들어갔고, 주유(周瑜)와 여몽(呂蒙)의 추천으로 손권의 기존 신하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감녕은 손권에게 먼저 노쇠한 황조를 치고, 더 나아가서 유표의 후사가 될 아들들의 유약함을 틈타 형주를 아우르며, 나아가 익주까지 엿보자고 진언했다. 손권은 이 말을 받아들였고, 장소가 반대하자 반박했다. 마침내 손권이 황조를 토벌하여 원수를 갚음과 함께 강하 지역을 손아귀에 넣자, 감녕에게 병사를 주어 당구에 주둔하게 했다.[1] 그런데 소비가 체포되어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자 감녕이 손권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마루에 머리를 쳐서 피를 흘리며 소비의 구명을 호소해 옛 은덕에 보답했다.[6]

그 후로도 감녕은 담력과 기지를 이용해 뛰어난 군사 능력을 발휘하였다. 적벽 전투가 끝나고 주유가 남군의 조인(曹仁)과 싸웠지만 아직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 감녕은 이릉성을 탈취하지만 곧바로 조인이 보낸 몇 배나 되는 적군에게 포위당하게 되었다. 병사들이 모두들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데 감녕만은 태연자약하게 있으면서 주유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주유가 와 포위를 풀었다.[1]

훗날, 손권이 장사, 영릉, 계양 3군을 탈취한 일로 노숙(魯肅)이 관우(關羽)와 익양에서 대치하게 되었을 때 이를 수행했다. 당시 관우가 호왈 3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그중 정예 5천을 가려내어 밤을 틈타 냇물을 건너겠다고 했다. 감녕은 당시 병사 3백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노숙에게 병사 5백을 요청하여 관우에게 대항하겠다고 말해 노숙이 가려 뽑은 병사 1천을 받아 그 날 밤 가니 관우는 강을 건너지 못했다. 감녕은 관우가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이며 건너면 반드시 사로잡는다고 자신했는데, 과연 관우는 함부로 강을 건너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땔나무로 진영을 만들었으니 그 이름이 관우뢰(關羽瀨)라고 한다.[1]

유수에서 조조의 40만 대군과 대치할 때에는 부하 가운데 용감한 병사 100명 정도를 선발해 조조군에 기습을 가해 혼란을 일으킨 후 크게 승리하는데, 전투 전에 병사들을 격려하고 일일이 술잔을 따라 돌렸다. 이처럼 그는 유능한 인물을 존중하고 병사들을 아꼈기 때문에 모두들 그를 위해 기꺼이 싸웠다고 한다. 손권은 “조조에게는 장료(張遼)가 있지만, 나에게는 감녕이 있다” 고 그를 칭찬하였다.

감녕은 동료인 능통(凌統)과 자주 불화를 일으켰는데, 그 이유는 능통의 아버지인 능조를 감녕이 전사시켰기 때문이었다. 감녕에 대한 능통의 증오심 때문에 두 사람은 전장에서 공로 다툼을 벌였고 손권이 이를 중재해 화해시키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하지만 합비전투에서 능통이 손권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악진(樂進)을 만나 고전하여 죽게 될 위기에 몰리자 감녕이 악진을 물리치고 능통을 구출해주어 능통은 감녕과 화해한다.

《삼국지연의》 속 감녕[편집]

감녕은 머리에 촉한사마가(沙摩柯)가 쏜 화살에 맞고 부지구의 큰 나무 밑에서 죽고, 이때 나무에 있던 수백 마리의 까마귀가 그의 시신을 에워싸고 지켜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각색일 뿐 정사에는 사마가가 감녕을 죽였다는 내용은 없다.

그 뒤 감녕을 기리는 사당이 세워지고, 바닷길의 안전을 기원하며 고깃덩어리를 던지면 까마귀가 공중에서 받아먹는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가계[편집]

감녕.png

주석[편집]

  1. 진수: 《삼국지》 권55 오서 제10 정황한장주진동감능서반정전(程黄韓蔣周陳董甘凌徐潘丁傳) 중 감녕전
  2. 위요 등: 《오서》, 배송지의 삼국지주에서 재인용 - 寧本南陽人,其先客於巴郡。寧為吏舉計掾,補蜀郡丞,頃之,棄官歸家。
  3. 왕찬: 《영웅기(英雄記)》 (진수의 삼국지 권31 촉서 유2목전의 배송지 주석에서 재인용)
  4. 강하군의 속현인데, 손권의 지배하에 있는 예장군과 바로 맞닿았다.
  5. 위요 등, 전게서 - 寧將僮客八百人就劉表。表儒人,不習軍事。時諸英豪各各起兵,寧觀表事勢,終必無成,恐一朝土崩,并受其禍,欲東入吳。黃祖在夏口,軍不得過,乃留依祖,三年不禮之。權討祖,祖軍敗奔走,追兵急,寧以善射,將兵在後,射殺校尉凌操。祖旣得免,軍罷還營,待寧如初。祖都督蘇飛數薦寧,祖不用,令人化誘其客,客稍亡。寧欲去,恐不獲免,獨憂悶不知所出。飛知其意,乃要寧,為之置酒,謂曰:「吾薦子者數矣,主不能用。日月逾邁,人生幾何,宜自遠圖,庶遇知己。」寧良乆乃曰:「雖有其志,未知所由。」飛曰:「吾欲白子為邾長,於是去就,孰與臨阪轉丸乎?」寧曰:「幸甚。」飛白祖,聽寧之縣。招懷亡客并義從者,得數百人。
  6. 위요 등, 전게서 - 初,權破祖,先作兩函,欲以盛祖及蘇飛首。飛令人告急於寧,寧曰:「飛若不言,吾豈忘之?」權為諸將置酒,寧下席叩頭,血涕交流,為權言:「飛疇昔舊恩,寧不值飛,固已損骸於溝壑,不得致命於麾下。今飛罪當夷戮,特從將軍乞其首領。」權感其言,謂曰:「今為君致之,若走去何?」寧曰:「飛免分裂之禍,受更生之恩,逐之尚必不走,豈當圖亡哉!若爾,寧頭當代入函。」權乃赦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