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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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무황제
(太祖 武皇帝)
Cao Cao scth.jpg
왕제
재위 216년 ~ 220년
후임자 조비
조위 황제(추존)
후임자 세조 문황제
시호 무황제(武皇帝)
배우자 정부인, 유부인, 무선황후 변씨, 환부인 외 9명
자녀 조앙, 조삭, 조비, 조창 외 아들 20명, 딸 6명
본명 조조(중국어: 曹操, 병음: Cáo Cāo 차오차오[*])
부친 조숭
친척 조인, 조흥 ,조순, 조안민, 조진, 하후돈, 하후연
출생 155년 6월 3일 (음력)
155년 7월 18일 (양력)
사망 220년 1월 23일 (음력)
220년 3월 15일 (양력)
능묘 고릉(高陵)

조위 태조 무황제 조조(曹魏 太祖 武皇帝 曹操, 155년 음력 6월 3일 ~ 220년 음력 1월 23일)는 중국 후한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인이며 시인이다. 는 맹덕(孟德)이며, 훗날 가 건국된 이후 추증된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이다. 후한이 그 힘을 잃어가던 시기에 비상하고 탁월한 재능으로 두각을 드러내, 여러 제후들을 연달아 격파하고 중국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하여, 위나라가 세워질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 조조는 삼국지의 영웅들 가운데 패자(覇者)로 우뚝 솟은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는 평가와, 후한을 멸망시킨 난세의 간웅(奸雄)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삼국지연의》에 의해 권모술수에 능한 악인으로 저평가되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비록 환관의 자손이지만 신분의 벽을 넘어 오로지 자신의 실력으로 시대를 선도한 풍운아라는 재평가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다.

생애[편집]

출생[편집]

사실 조조는 처음부터 환관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가신인 하후돈, 하후연과 함께 패국 초현 사람으로 환관인 중상시 조등(曹騰)의 양자인 조숭(曹嵩)의 아들이다. 《삼국지》〈무제기〉에 따르면, 전한 시대 유방(劉邦)의 심복으로 재상을 지낸 조참(曹參)의 후손인 조등환제중상시를 맡았다. 이에 대해 《후한서 》〈조등전〉에 조참의 후예라는 기록이 없다는 점을 들어 조참 후예설을 위의 선양을 윤색하고 조씨 가문을 격상시키려는 데에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1] 조등이 환관이라 아들이 없었으므로 조숭을 양자로 삼았다(《삼국지》〈무제기〉에 인용된 〈조만전〉의 일설에 따르면, 조숭이 본래 하후씨이며 하후돈(夏侯惇)의 숙부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 환관의 손자라는 콤플렉스가 나중에 조조의 인물상이나 생활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된다.

어린 시절[편집]

조조의 어릴 적 이름은 길리(吉利), 또다른 이름으로 아만(阿瞞)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교묘한 꾀와 기지를 발휘하는 일화가 많이 남아 있다. 소년 시절 날리기와 사냥과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 조조를 보고, 숙부가 종종 조조의 아버지인 조숭에게 충고하곤 했다. 어느 날 조조가 숙부를 만나자 입이 마비된 듯한 시늉을 했다. 숙부가 조조에게 묻자 “마비 증상이 갑자기 왔습니다.”라고 답했고 숙부는 이 일을 조숭에게 알렸다. 조숭이 이를 놀라 듣고 조조를 불렀는데, 조조는 태연하게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면서

원래부터 마비증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숙부께서 저를 싫어하셔서 없는 말을 지어내는가 봅니다.

라고 답하였다. 이후 아버지는 숙부의 말을 신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세설신어에 의하면 조조는 원소(袁紹)와 어린 시절부터 장난꾸러기 친구 사이였다. 언젠가 이 두 사람은 갓 결혼한 신부를 훔치러 갔다. 일이 실패하여 추적자를 따돌리면서 도망하던 도중, 원소는 그만 가시덤불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원소가 가시에 찔려 통증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자, 조조는 대뜸 범인이 여기 있다고 큰소리로 외쳤다. 원소가 기겁하여 통증도 잊고 얼른 가시덤불 속에서 나와 도망가기에 바빴다고 한다.

이처럼 젊은 시절의 조조는 품행이 불량했으며, 거칠고 학업을 쌓기를 게을리했다고 한다. 양나라교현(橋玄)과 남양의 하옹(何顒)은 조조를 남다른 인물로 평가했다. 교현은 조조에게 “천하를 안정시키는 일은 아마도 그대에게 달려있다”라고 말했다. 조조는 교현의 권유로 허소(許昭)와 깊은 친교를 갖는다. 어느 날 허소에게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물었는데, 허소는 조조를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子治世之能臣, 亂世之姦雄也)’(《삼국지배송지주)으로 평가했다(한편, 후한서 허소전에는 조조를 ‘태평시대의 도적, 난세의 영웅(君淸平之奸賊, 亂世之英雄)’으로 평가한다). 이 말을 들은 조조는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조조는 20살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낭관(郎官)이 되고 낙양의 북문을 수비하는 북부위에 임명된다. 그는 권세를 휘두르고 있었던 십상시건석(蹇碩)이라는 환관의 숙부가 금지된 야간 외출을 하자, 형틀에 묶어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법을 어긴 자는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가차없이 처벌했다.[2] 이로 인해 그는 환관들에게는 공적이 된 반면 청의와 백성들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되고 돈구(頓丘)의 현령으로 승진하나, 중앙에서는 멀어지게 된다.

황건적의 난[편집]

184년 조조가 30살 때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다. 이때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어 영천(潁川)에서 황건적을 토벌하고, 이 공적으로 제남(濟南)의 상(相)으로 승진, 거기에서 그는 역시 강력한 법을 세워 뇌물과 향락에 물든 상급 관리 8할을 파면하고, 당시 유행하던 사이비 종교나 미신 부류를 모두 금지시킨다. 그 후 동군태수로 임명되지만 부임하지 않고 돌연 사퇴했다. 그리고 고향에서 사냥과 독서를 즐기며 은거 활동에 들어갔다.

금성의 한수(韓遂)와 변장(邊章)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수도 방위를 위해 전군교위(典軍校尉)로 임명된다. 그 무렵 영제가 죽고 대장군 하진(何進)과 원소는 환관 주살을 계획한다. 그런데 황태후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동탁(董卓) 등 각지의 제후를 소집하여 황태후에게 압력을 행사하려고 했다. 조조는 이 소식을 듣고 “일부러 제후들을 부르지 않더라도 환관의 우두머리만 처형하면 될 뿐, 그들을 모두 죽이려고 한다면 일이 탄로나 실패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조조가 예상한 대로 동탁이 아직 도착하지 않는 사이에 하진은 환관들에게 주살되고 만다. 또한 환관들도 원소에게 모두 주멸되고, 이 와중에 실권은 동탁의 수중으로 떨어진다. 권력을 장악한 동탁은 조조에게 협조를 구하지만 조조는 거절하고 성을 탈출했다.

189년(중평 6년) 12월, 조조는 사비를 털어 군사를 모으고 원소를 맹주로 하는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하여 분무장군을 맡는다. 그런데 동탁군이 워낙 강력했으므로 산조(酸棗)에 집결해 있던 여러 제후들 중 누구도 선뜻 선두에 나서지 못했다. 조조는 장막(張邈)과 힘을 합쳐 형양에서 동탁군과 싸웠고 적장 서영의 부대를 물리는 데 성공했다. 산조로 돌아온 조조는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 있는 제후들에게 동탁을 격파할 전략을 제시했지만 이는 연합군의 모든 제후들이 유기적으로 협력한다는 점이 전제되어야 했고, 단지 유력자들의 이합집산일 뿐이었으며 심지어는 맹주인 원소조차 연합군 내부의 견제로 수송로가 차단당해 꼼짝할 수 없었을 정도였던 연합군에게 이런 작전을 수행할 능력은 없었다. 한편 연합군의 맹주 원소는 손쉬운 방법으로 동탁을 견제하고자 했다. 바로 기존 황제를 시해하고 동탁에게 옹립되었다는 명분적 약점을 가지고 있는 당시 황실의 정통성에 도전하여 명망 높은 유우(劉虞)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려던 것이었는데, 원술(袁術) 등이 중심이 되어 이와 대립했고 이때 조조도 원소와 일시적으로 대립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 계책은 유우 본인의 거절로 실패하게 되었고 이후 구심점을 잃은 연합군은 사실상 해산되고 만다.

동탁 제거와 서주 공략까지[편집]

이때 조조가 동탁을 친 것이 계산된 행동으로 '자신이 패할 것을 뻔히 알고도 불구하고 오직 황제를 구출하기 위해 홀로 뛰어들었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인망이라는 무형의 자산을 얻었다. 원술손견(孫堅) 등을 앞세워 화웅(華雄)을 쓰러뜨리는 무훈을 세우고 있었다. 물론 순욱(荀彧)이 그를 그토록 예우하던 원소를 따르지 않고 굳이 조조를 따른 예의 경우 당시 황실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등 노골적인 패권주의를 보여온 원소와 달리 조조가 황실의 권위를 회복시킬 것이란 기대를 가졌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이 무렵의 조조의 행보를 지나치게 미화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보는 부류가 있었으나 중원재사와 형주-서주-양주에 걸쳐 둔피하였던 유생 중의 다수가 조조의 근거 있는 야망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더군다나 `양-패 사이에서 진인이 나타난다`는 참설까지 유행하였다)

이후 원소와 제휴한 조조는 191년(초평 2년) 동군에 침공한 흑산적을 연주 전투에서 토벌하고 원소의 대리 교서(통감 등에서는 矯制라고 하여 비난하였다)에 의하여 동군 태수로 임명된다. 192년 4월, 동탁여포(呂布)에게 살해된다. 같은 해 청주의 황건적 100만 명이 연주에 침공해 왔다. 당시 연주목이었던 유대(劉岱)는 이를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고 만다. 평소 조조와 가까웠던 제북상 포신(鮑信)은 조조를 연주목으로 추대했다(구주춘추 등 기타 주석서에서 진궁). 조조는 황건적과 싸워 포신이 전사하고 오른손에 화상을 입어 동료 누이(婁異)에 의해 말에 올라타 구조되는 등 상당히 박전했다. 직후 사기가 땅에 떨어지자 조조가 친히 상벌에 대하여 확언을 주며 적의 퇴로를 예상하여 기병(奇兵)을 풀어 상하로 대파하였다(본기의 원문에 의하면 적의 둔영까지 다다랐다고 하니 하늘을 찌르는 기세였을 것이다). 이후 조조는 이들과 협상해 자기의 세력으로 영입하고, 그 가운데 정예 병력을 선발해 ‘청주병’으로 불렀다. 황건이었던 백성 백만 구(口)와 병사 30만을 흡수해 기반을 얻은 조조는 이때부터 반동탁의 영수로 기주에서 군림했던 원소에 대하여 자신의 치소 연주에 할거하며 중원 구출의 야심을 드러내었다.

같은 시기 원소원술의 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원소는 형주의 유표(劉表)와 연합했고, 원술은 유주의 공손찬(公孫瓚)과 서주의 도겸(陶謙)과 손잡아 서로를 견제했다. 이때부터 다른 모든 세력과 마찬가지로원소의 영향 아래 있던 조조는 인접해 있던 도겸과 싸우기 시작했던 듯하다. 또 조조는 원소와 연대해 각지에서 원술연합군을 격파하자마자 스스로 용병하여 마침내 원술이 본거지를 버리고 양주로 도망가게 하였다(5차례 싸워 모두 추격하였다). 이 직후에 도겸은 재차 연주 동쪽 태산군에 침공했고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살해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조조는 193년부터 194년(흥평 원년)에 걸쳐 2차례 도겸 정벌에 나서 서주 땅에서 지나가는 족족 적의 대항 의지를 말살시켜갔다.

후한서》에는 “주민 수십만 명을 살해하고 개와 닭 등 가축도 가차없이 도살하였다. 이 때문에 사수(泗水)는 흐름을 멈추고 말았다.”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는 사이에 친우였던 장막과 연주를 지키던 진궁은 조조에게 반기를 들고 여포를 연주목으로 내세웠다. 조조는 복양에서 궁지에 빠지고 어이없으리만치 전국을 휩쓴 메뚜기의 피해로 갑병까지 타격을 입지만 2년에 걸친 공방 끝에 마침내 연주를 평정하는 데 성공한다. 실제로 둔전병을 데리고 다니던 중 흉년을 만나 먹을 것을 찾으러 가고 남은 병사는 고작 1천도 셀 수가 없었다고 하니 피해가 극심하였다. 그러나 이 부대로 여포가 이끄는 진궁의 구원군 1만을 대타격하고 치중을 획득하였다. 손자병법 주석에 따르면 논밭 근처 제방에서 적을 도발하여 역격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196년(건안 원년)에는 헌제를 옹립하여 대장군으로 임명되고, 수도를 낙양에서 허창으로 옮긴다. 그와 함께 여러 개혁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같은 해에 조지와 한호(《진서》 선제기에서는 사마의)의 건의를 받아들여 둔전제를 실시해 농경을 전문으로 하는 농민을 널리 모집하여, 허도(허창) 주변에서 농업에 종사시켜 곡물 100만 석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리하여 전쟁에 없어서는 안될 식량을 충실히 마련하여 천하를 장악할 수 있는 기반을 쌓는다.

이때 유비(劉備)가 여포에게 하비를 빼앗겨 조조 밑으로 도망온다. 참모 정욱은 “유비는 끝내 남의 밑에 남아있을 인물이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제거할 것을 진언하지만, 조조는 다만 유비에게 먹을 것을 하사하였다.

관도대전과 적벽대전[편집]

197년 조조는 완(宛)에 출진하여 장수(張繡)를 항복시키지만 나중에 그는 조조를 배신한다. 이 싸움에서 조조가 패하고 맏아들 조앙(曹昻)과 조카 조안민, 부하 전위(典韋)가 전사한다. 이때 조조는 맏아들 조앙의 죽음보다도 전위의 죽음을 더 슬퍼했기 때문에 아내와 이혼하게 된다. 198년 조조는 장수, 유표의 연합군을 안중에서 격파하고, 하비에서는 여포를 사로잡아 처형한다. 다음해에는 원술을 토벌하고 장수를 다시 굴복시켜 그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원술 토벌에 유비를 파견한 일이 문제가 된다. 역시 서주자사 차주(車胄)가 유비의 반란군에 습격을 당하고 만다. 별일 없었다는 듯이 조조가 친히 출진하여 유비를 격파하고 버림받은 처자식를 붙잡음과 동시에 관우(關羽)를 항복시켰다. 원소가 발밑으로 도망쳐온 유비에게 잠자리를 하나 내어주었고 마침내 원소와 천하를 놓고 자웅을 겨루게 된다.

원소와 천하 패권을 다투는 전초전은 먼저 백마에서 치러졌다. 여기에서 조조는 원소의 부하인 맹장 안량(顔良)과 문추(文醜)를 죽이는 등 활약했지만, 점차 전황이 불리해지고 아군의 군량이 고갈되어 그 대담한 조조도 마음이 약해진다. 그래서 순욱에게 허도로 귀환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 상담을 구했는데, 순욱은 격려의 답장을 보내와 그곳에서 버티게 한다. 마침내 원소의 모사인 옛 친구 허유가 투항하고 고시와 오소에 있는 원소의 심장부인 병참사령부를 습격하기를 진언, 조조는 오소 기습전에 앞서 원소의 본진 습격에 대비해 방비를 단단히 한 다음 원소군으로 위장한 5천의 특공대를 이끌고 잠입, 오소의 식량과 군수물자들을 모조리 불살라버림으로서 형세는 역전, 원소군은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이때 몰수한 전리품 중에서 원소와 내통하고 있었던 조조의 부하의 편지가 무더기로 나왔다. 조조는

원소의 대군을 상대로 해서 나 자신조차도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 어떠했겠는가?

라고 말하면서 편지를 읽지 않고 모두 소각, 내통한 자들은 용서해주고 대신 그 일은 전부 불문에 부쳤다고 한다. 그 후에도 북진을 계속하여 원씨 잔당 세력을 철저히 격파했다.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이때 조조는 군사를 몰아 장성을 넘어 모돈(冒頓 또는 묵돌)을 죽였다고 한다. 모돈기원전 209년부터 기원전 174년까지 흉노의 선우(대족장)를 지냈던 사람으로 조조와는 4백년 가까이 시차가 있는 인물이다. 조조의 모돈 살해는 나관중이 삼국지연의에서 꾸며낸 이야기다.

원소 토벌 이후 중국 대륙의 최강자로 자리매김한 조조는 208년 승상(丞相)의 지위에 오르고 3공의 지위를 없앴으며 이미 대장군이 되어 있었기에 '대장군 대승상'(大將軍 大丞相)으로서 공식적으로 후한 조정의 정권과 군권을 모두 장악하였고, 형주의 유종(劉琮)을 항복시켜 적벽대전에서 유비손권(孫權)의 연합군과 대치하다가 군을 물리게 되었다.

적벽대전이 일어나기 전 아들인 조비가 미리 화용도를 정비하고 오림에 도착하여 조조가 수월하게 퇴각하였다고 한다. 주유는 적벽에서 지나치게 거대해진 조조의 세력에게 큰 타격을 주고 수월하게 형주와 촉을 병합하려 하였지만, 조비의 길 정비로 인해 기대한 것의 10분의 1만큼의 성과도 얻지 못했다고 한다. 손권과 유비 연합군이 때려부순 조조의 병선은 거의 대부분 형주의 병선들이고, 불길에 놀라 도망친 병사들은 원래 조조의 청주병이 아닌 유표의 수군이었을 뿐이다. 이후 중국 대륙은 , , 삼국의 삼국 시대에 접어들어 완전한 통일의 꿈이 멀어지지만 조조의 우세한 세력 기반은 변하지 않았다.

역시 참전군 대부분(참모 장군 포함)이 역질에 감염되었으며 재정비를 위해 군을 물린 후 주유의 화공으로 서로 연결되어있는 선박이 화재를 입었다는 <<후한기>>의 서술이 그나마 틀린 곳이 적은 것으로 추정해야할 뿐이다.

삼국 정립과 죽음[편집]

210년에 조조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구현령과 술지령을 공포한다. “구현령”이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재능있는 사람이면 인재로 등용하는 것이다. “술지령”에서는 수여받은 4현 3만 호 가운데 3현 2만 호를 황제에게 반환하고, 제위 찬탈 등 야망이 없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제도다. 조조는 213년 위공(魏公)으로 책봉되었고, 조조는 자신이 저축한 어마어마한 재산들을 모두 기부한다. 그는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많은 재산을 기부함으로써 훌륭한 군주로 거듭났다. 그 영향을 받아 조조를 섬기고 있던 고위 관직층 신하들도 자신들이 저축한 재산을 모두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나누어주었다.

211년 마초(馬超)와 한수 등이 관중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조조가 토벌에 나섰다. 마초 등이 산과 요새에만 있을 뿐 견벽거수로 일관하자 서황의 진언을 옳게 여기고 진(津)을 건너는 척하며 대기중이던 병사로 그들을 습격하여 대파하였다. 또한 이때 흙을 쌓아올려 성벽을 만들고 물을 뿌려 하룻밤 사이에 얼음성을 완성시켰다고 한다.[3] 가후(賈詡)의 이간책으로 마초한수 사이가 벌어지게 하여 적을 물리치고 관중을 평정했다는 기록은 모두 사실이다. 212년 오나라 정벌에 나서고 다음해 유수구에서 격파한다. 이때 다시 군사를 일으킨 마초를 토벌, 215년에는 한중의 장로를 항복시키는 등 매년 지칠 줄 모르고 반란군을 상대로 무승부 없이 정벌(토벌)을 완수하였다.

216년 조조가 위나라 대국왕(魏大國王)에 봉해지면서 훗날 위나라의 건국이 이루어지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헌제는 사실상 허수아비였으며 이 무렵 후한의 실권자는 조조였으나 전 세계의 첫 번째 최고 계급인 대천황이 되지는 않고 주 문왕을 따른다는 고사를 이상하리만치 확고하게 지키며 위왕으로 붕거(추숭 전 훙거. 추숭 후 붕어)하였다.

217년에는 손권과 다시 싸우고 219년 한중에 숨은 유비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잠자코 있던사이, 동소의 헌책과 손권의 부탁을 응락하고 형주의 관우부대를 괴멸시킨다.

관우가 죽은 이듬해, 220년 1월 23일, 조조가 낙양에서 향년 66살의 나이로 서거했다.

조조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일화가 있다. 건시전을 지을 때 탁용사의 신목(神木)을 베자 나무에서 피가 흘러 이를 본 조조가 기절하고 말았다든가, 배나무를 옮겨심을 때 뿌리에 상처가 나 피가 흐르고, 이것을 본 후 병상에 눕게 되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다.

아들 조비(曹丕)가 위나라 대국왕에 오르자 조비는 아버지 조조를 무왕(武王)으로 추증하였다가, 헌제에게서 선위를 받고 위나라 대천황으로 즉위하자 다시 태조 무황제(太祖 武皇帝)로 추증하였다.

한편 문인으로서도 뛰어났던 조조는 훗날 아들 조비, 조식(曹植)과 함께 당대의 7문학계의 이름 있는 사람들이라 해서 삼조(三曹)라 불렸으며 부자 3인을 세명으로 묶는 이른바 삼소(三蘇)등은 여기에서 모티프를 따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삼국지 연의에서의 묘사[편집]

문학적 업적[편집]

조조는 정치와 군사 뿐만 아니라 문학 방면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손자병법 전문에 남기는 주석 작업을 끝마치고 난 그는 소박한 민요였던 악부(樂府)를 공식 문학의 한 장르로 정착시켰고, 꾸준히 당시의 최고 시인의 한명으로 꼽히고 있었다. 그의 작품에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단가행(短歌行)》, 《구수수(龜雖壽)》 등이나 주석으로 전해지는 동도가사 등 수십이 있다.

평가[편집]

인물평[편집]

능력에 따른 인재 채용[편집]

조조는 군사, 학문, 무예, 내정 모두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시문, 그림, 노래 등 풍류에도 매우 뛰어났다. 또한 통솔력도 굉장하고 수하를 감동시키는 방법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또한 인격면에서도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당시에는 파격적인 기준으로 인재를 선발하였는데 그 기준이 바로 '능력'이었다. 어떠한 분야를 막론하고 한 가지 분야에 뛰어나기만 하면 그 사람의 신분이 아무리 천하다 해도 조조는 크게 인정해줬다. 또한 아내를 고를 때도 적용되었는데, 최하급 신분인 기생 출신의 변씨도 능력을 인정받아 아내가 되었다.

단점[편집]

하지만 가끔가다 의심이 지나치기도 했다는 것을 결함으로 들 수가 있겠다. 주불의가 위협이 될 것이라면서 또 조충이 죽은 이래로 그를 부릴 자가 없다라는 일반인들이 감당하기 힘든 이유를 들어 말하면서 주불의를 자기 사람으로 쓰게 해달라는 조비의 간청도 거부하고 주불의를 제거하였다. 조조군 내의 가장 핵심적인 두뇌인 사마의도 의심한다.

이미지[편집]

주 문왕을 본받아 자신이 제위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후대 조비에 이르러 자신이 지켜온 주공과 같은 이미지를 조비가 이해하지 못하고 한실의 제위를 찬탈했다는 오명이 계속 쫓아다녔고 명분론과 정통론이 득세하던 시기에는 자식의 일로 인해 명성이 더럽혀지기도 하였다. 나관중의 연의에 이르러서는 간교한 악인의 상으로 그려지기도 하였고, 경극 도중 조조역의 배우가 죽는 경우도 있었다.

복권(復權)[편집]

현대에 와서는 중국의 모택동(毛澤東)과 곽말약(郭沫若) 등이 조조의 단점을 배제하고 영웅으로서의 진취성을 평가하면서 조조의 복권에 대한 움직임도 상당히 압도하는 형국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디지털시대를 맞아 삼국지가 수많은 소프트웨어로 판매되는 과정에서 조조 자신의 문무겸전적 인물상은 조비의 일로 인하여 퇴색되지 않고 오롯이 인식되고 있다. 또 조조의 중원 평정을 모티프로 삼는 커리큘럼은 항상 빠지는 일이 없어 `중원 구출`의 분위기는 여전하다.

영화 적벽대전[편집]

영화 적벽대전 2에서 조조는 리더십이 뛰어난 지도자로 설명된다. 전염병으로 지친 군인들을 위로하여 전쟁에서의 승리의지를 갖게 한다. 또한 문학에 뛰어나서 조조의 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였다.

삼국지 조조전[편집]

당대의 평가[편집]

동시대 사람 중 유명한 두 사람은 조조를 서로 상반되게 평가했는데, 양국(梁國) 사람인 교현은 그를 두고 치세의 무협도이자 난세의 대영웅으로 좋게 평가했지만, 여남(汝南) 사람인 허소는 그를 두고 치세의 능신이자 난세의 간웅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오나라의 마지막 승상인 장제는 참칭 국가의 신하인 신분으로 "위나라 백성들이 조조를 따르는 것은 그 위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조조가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은 아니다"라고 말해 다소 신뢰성이 떨어진다.

진수의 평가[편집]

진수가 《삼국지》 〈위서〉 무제기에서 평하기를,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합리적으로 일에 대처했으며, 구악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는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이성적인 판단으로 대처해 사람을 등용했다는 의미로 간주되고 춘추시대 패자의 덕목이라는 견해를 정가운데로 찔러 일치하는 것이다.

후대의 평가[편집]

후조(後趙)를 세운 석륵(石勒)은 동탁 암살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반동탁 토벌대의 선봉을 맡았던 위무제와 대승상 조조에게 죽을 것을 두려워하며 임관하고 대신들과 사사로이 교제하였던 사마의를 한데 묶어 평가하길, 저 중화인(=중국인)인 조조나 사마중달 부자처럼 남의 고아나 과부를 속이며 잔꾀를 부리고 온갖 아첨을 일삼으며 천하를 빼앗는 일은 자신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였다.[4]

시인이자 정치가였였던 두목(杜牧)은 “조공(조조)은 손무의 병법 13편에 주석을 달아 후세에 전했다.”고 하면서 조조의 군사적 재능을 칭찬했다.

중국의 마오쩌둥은 "조조(曹操)를 간신이라고 하는 것은 봉건정통관념이 만들어낸 것으로 반동사족들이 봉건정통을 유지보호하는 것이었다.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 라고 하면서 조조의 복권을 말한 바 있다. 그는 조조의 제도 개혁과 둔전제 등의 정치적 공적과 탁월한 군사재능 그리고 조조의 문학 재능을 칭찬하면서 조조를 공식 석상에서만 32번 언급하여 마오쩌둥이 가장 많이 언급한 역사인물이 조조(曹操)라고 한다.

연의의 평가[편집]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악인(惡人)의 상으로 그려지고 있다.[5][6] 나관중은 조조를 당대의 민중이 가지고 있던 조조에 대한 반감이 들어 있는 전승과 민간 설화 등을 이용하고, 변방 익주(촉)의 인사들을 대부분 우국지사와 충의지사로 묘사함으로써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조조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삼국지연의》 내에서 자아내고 있다. 또한 조조를 악인으로 나타내기 위해 우스꽝스럽고 경망스러운, 때로는 인신모독에 가까운 묘사도 쓰고 있다.[7] 하지만 이문열이 평역한 《삼국지》(민음사)에 나오는 조조는 자신을 위해 죽은 군인들을 위해서 그 가족들에게 을 줌으로써 생계에 지장이 없도록 배려하는 훌륭한 지도자로 묘사되며[8],법을 잘 지킨 지도자였다. 조조는 농민들에게 해를 주지 않도록 말을 타고 보리밭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는데, 그만 자신의 말이 보리를 밟았다. 법을 어김을 부끄럽게 여긴 조조는 자신의 목을 자르려고 하려다가, 참모들의 조언에 따라서 자신의 목을 머리카락으로 대신하니, 군인들은 다시는 법을 어기지를 아니하고 또한 군법을 두려워하였다.

조조의 무덤 진위여부 논란[편집]

문물국이 허난성 안양 현 안펑 향 시가오쉐촌에 있는 동한시대 무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조조의 무덤이 발굴되었다. 중국 학계의 따르면 무덤의 크기는 지하 15m에 위치한 이 무덤은 갑자(甲字)형태의 구조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경사진 내부 묘도(墓道)를 따라 내려가면 앞뒤에 규모가 큰 쌍실(雙室)과 4개의 측실(側室)을 갖추고 있었으며 길이 39.5m, 넓이 9.8m에 전체 면적이 740㎡로, 그 규모는 비교적 작았다고 한다. 그동안 수차례 도굴됐음에도 이 무덤에서는 금을 비롯한 각종 보석 200여 점이 출토됐으며 조조가 사용하던 창과 조조가 사용하던 돌베개등의 명문(銘文)이 발견되었다고 하며 한 남성과 여성 2명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됐는데 이 남성의 유골은 사망 당시 60세 전후였던 것으로 감정됐다. 이는 조조가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점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이 유골이 조조의 것으로 보고있다.[9]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성급한 결론과 "위무왕"이라고 새겨진 두 비석은 현장에서 발굴된 것이 아니라 공안국이 도굴꾼들을 체포해 압수한 과정에서 가짜가 만들어질 가능성 있는 등 의문을 제기하였다.[10]

조조의 무덤 공식인정[편집]

2010년 1월 29일 중국 국가문물국은 "조조의 고분을 발굴하고 학술적인 검증을 거쳐 연구성과를 발표한 절차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고고학계의 규칙에도 부합한다"라고 말하며 조조의 무덤인 것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11]

조조의 친족 관계[편집]

아들과 손자, 증손자[편집]

  • 조앙(풍민왕) 유부인 소생으로 정실 정부인의 양자
  • 조삭(상상왕) 유부인 소생으로 정실 정부인의 양자
  • 조비(세조 문황제) 변황후 소생
  • 조창(임성위왕) 변황후 소생
  • 조식(진사왕) 변황후 소생
  • 조웅(소회왕) 변황후 소생
  • 조표(초왕) 손희 소생
  • 조충(등애왕) 환부인 소생
  • 조우(연왕) 환부인 소생
  • 조림(패목왕) 두부인 소생
  • 조곤(중산공왕) 두부인 소생
  • 조거(팽성왕) 환부인 소생
  • 조구(범양민왕) 윤부인 소생
  • 조상(임성위공자) 손희 소생
  • 조근(강상공자) 손희 소생
  • 조현(제양회왕) 진부인 소생
  • 조준(진류공왕) 진부인 소생
  • 조간(조왕) 왕소의 소생
  • 조승(의성상공자) 이부인 소생
  • 조정(미대공자) 이부인 소생
  • 조경(영상공자) 이부인 소생
  • 조균(번안왕) 주부인 소생
  • 조휘(동평영왕) 송부인 소생
  • 조무(낙릉왕) 조희 소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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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친족[편집]

기타[편집]

조조를 섬긴 사람들[편집]

주석[편집]

  1. 이공범, 《위진남북조사》, 지식산업사(2003년 09월 15일), 1.1.1. 조조의 등장
  2. 그럼에도 건석이 조조를 쉽게 건드릴 수 없었던 이유는 조조의 의붓할아버지인 조등(曹騰) 때문이다.)
  3. 삼국지연의에서는 누규가 와서 얼음성을 쌓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4. 진서 권105 석륵 재기
  5. 삼국지 제1권 도원결의편
  6. 이덕일, 삼국지와 삼국지연의
  7. 김운회, 김운회 교수의 삼국지 바로 읽기 1, 삼인(서울 : 2004년 12월 10일).
  8. 《삼국지》/이문열 평역/민음사
  9. 박종국 특파원 中 "허난서 삼국시대 조조 무덤 발굴" 연합뉴스 2009-12-27 작성
  10. 김경태 특파원. "조조 무덤은 가짜?‥진위 여부 논란", 《MBC 뉴스》, 2009년 12월 31일 작성.
  11. 홍제성 특파원. "中 문물국 '조조무덤' 공식 인정", 《연합뉴스》, 2010년 1월 29일 작성.
전 임
-
제1대 후한의 위공
213년 음력 5월 병신일 ~ 216년 음력 4월 갑오일
후 임
-
(왕으로 승격)
전 임
-
(공에서 승격)
제1대 후한의 위왕
216년 음력 4월 갑오일 ~ 220년 음력 1월 경자일
후 임
아들 조비